심 행 개 설 ( 心 行 槪 說 )
독자는 이것을 읽고 어떻게 느꼈는가.
필경 현대어에 의한 경문(經文) 또는 기존의 경문과 같이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제일 먼저 《심행(心行)》이란 어떤 것인가
하고 먼저 표제 자체에 의문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심행(心行)》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제1, 2장에서 서술했다.
즉 제1, 2장은 심행의 해설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본문과 해설을 나눈 이유는,
《심행(心行)》은 정법이라고 하는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하셨으면 좋겠지만,
생소한 일반 독자에게 이것을 갑자기 보여드렸다가는 당황스러울 뿐이라고 생각하여,
최후의 장에 가져다 놓은 이유이다.
《심행(心行)》이란 마음과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심행을 읽고 어렴풋이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대우주는 항상 서로 관계하고 움직이고 있다.
태양계만 해도,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혹성이 서로 연관되어,
태양계라고 하는 몸을 형성하고 있다.
지구나 화성이 하나 빠져도, 태양계는 존립할 수 없다.
지상의 생활만 해도 동, 식, 광물의 상호관계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 상호관계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대자연의 의식이다.
질서정연한 의식의 활동이 있어야만,
대우주도, 지상의 생활환경도, 조화되어 있다.
생명의 신비를 볼 때,
우리는 그곳에서, 위대한 대자연의 예지를 발견한다.
신(神)의 마음이다.
만약 자연의 그러한 상호 관계가,
그저 우연의 연속으로 생겨났다면 지구는 오래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지구 탄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지구라는 구체가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3억 년이나 전이다.
그 당시의 지구는 말하자면 불덩어리였고, 태양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억년이나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의 지상은, 화산의 폭발이랑 빙하기를 반복했다.
대우주의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보면,
6억 년이라고 하는 세월은 한순간의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기 시작해서,
이미 수십억 년, 그 궤도는 옛날도 지금도 변함없다.
우연치고는 너무 잘한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게다가 극대의 대우주와 극미의 소립자에는,
핵과 전자의 상호관계가 보인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그곳에 대자연의 의사, 의식,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감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모두에게 설명하는 경우에는 주관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처럼 설명이 되어 가는 것이다.
대우주에는 마음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 마음은 우리의 마음에도 같이 통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이것을 설명하면,
태양의 열, 빛이 강하게 되거나 약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상의 생명은 살아갈 수 없다.
공기가 증가하거나 줄거나 해도 똑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생활태도도, 너무 먹으면 배탈이 나고,
잠을 너무 자면 체력에 저항력을 잃는다.
그러나 좀 더 몸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마음이다.
걱정하는 것이 있으면 식욕이 감퇴하고, 수면이 방해된다.
소리를 지르거나 짜증을 내면 혈행이 나빠진다.
노여움의 숨결이 대단한 독성을 갖고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대자연은 조화라고 하는 중도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몸도 무리해서는 안되고 게으름도 안된다.
마음에 대해서도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하면 몸에 정신에 영향을 준다.
육체도, 마음도, 중도에 맞는 생활행위,
즉 올바른 상념과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중도란 족함을 안 생활이다.
욕망에 번롱되지 않는 자기자신을 확립하는 것이다.
생노병사의 괴로움은,
이러한 중도의 마음을 잃은 자아와 집착하는 상념,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대자연계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대자연으로부터 떠나서 생활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대자연의 마음과 서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행(心行)》이란,
족함을 안 마음으로 생활하고, 보은이라는 행위를 나타내어 가는 것이다.
중도의 정신으로 매일을 생활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행(心行)》은 대우주의 상호관계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모든 것이 순환되어,
그 순환이 대우주의 마음, 중도를 축으로 하여 회전하고,
인간의 혼도 또 이러한 올바른 순환의 과정 속에서 길러져서,
조화라고 하는 목표를 향해,
전생윤회(轉生輪廻)를 거듭해 가는 영원한 생명체인 것을
극히 평이하게 단적으로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 일에는 모두 기둥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심행의 기둥이 되는 것은,
《 대자연이라고 하는 신의 마음. 》
《 영원의 생명체를 유지하는 순환의 법 》
《 자비와 사랑 》
의 세 개다.
이 세 개가 심행을 형성하고, 우리를 계속 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심행(心行)》은 그런고로 마음의 가르침이며, 생활의 규범이다.
따라서 이것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대우주의 중도의 마음으로 조화되어 참된 평안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파동이다.
경문의 독송도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경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독송할 때는,
그 말의 파동은 저 세상의 천상계까지 통하고,
사람들을 감동시켜 주는 것이다.
말은 본래, 언혼(言魂)이라고 해서,
원래 빛의 입자로 되어 있어,
말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여하에,
말 하나하나가, 빛의 구슬로 되어, 공간으로 흘러 나간다.
빛의 구슬은 보통 육안으로는 알 수 없다.
영시(靈視)가 가능한 사람,
혹은 4차원의 세계에서 보면, 이 점은 확실하게 보인다.
남의 말에 감동한다. 또는 웃음이나 노여움이 나올 경우는,
말하는 측의 마음과 이것을 받는 사람의 정신상태에 의해 달라진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는 경우는,
이것을 듣는 측에 사심(邪心)이 있어도,
대개는 그 사심(邪心)은 사라져 버린다.
말은 줄거리가 통해 알 수 있지만,
후련함이 그것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듣는 이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마음은 빛이며,
응어리가 쌓이면 빛이 검은 덩어리가 되어
상대방에게 전해지므로 반작용을 불러 일으킨다.
작은 절에 가면 조종이 있다.
조종의 음색도 이것을 치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 울림이 달리온다.
쿵~ 하는 종의 소리는 누가 쳐도 같다고 생각하는데,
치는 사람이 평소 마음의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그 종의 파동은 저 세상의 천상계에까지 도달하고,
그 사람에게 돌아갈 뿐만 아니라,
그 종의 파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전하여져 정화해 주는 것이다.
경문의 독송, 낭독이라는 것도, 완전히 이것과 똑같다.
바른 마음과 행위를 하고 있는 자가 하면,
그 소리의 파동은 금강계까지 통하고,
다시 그 사람에게 그 파동이 되돌아와서,
마음의 통일, 평안을 한층 조장(助長)해 주는 것이다.
《심행(心行)》의 낭독은,
그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며,
하지 않는 것 보다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쓰여 있는 의미도 모르고, 빌면 효험이 있다는 것은 안된다.
반야심경은 어디에서도 읽히고 있다.
고마운 경이며, 따라서 사경도 좋고,
독송도 또 효험이 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모르고 행위도 없이, 아침저녁으로 올려도 빛은 닿지 않는다.
오늘날의 불교는 경문을 올리거나,
사경 자체에 무게를 두어,
평소의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데에 문제가 있다.
《심행(心行)》은 그러한 의미에서 진의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현실 생활 위에 표현하고,
그리고 그 마음으로 낭독하게 되면,
하나의 언혼(言魂)은 둘이 되고 셋이 되어,
마음의 평안을 더해 갈 것이다.
《심행(心行)》의 해설은 제1, 제2장에서 말해왔다.
그래서 《심행》 전문과 참조하면서 심행의 의미를 이해하고,
잠드는 시간에, 침상 위에서 조용히 낭독하고,
그날 하루의 상념 행위를 반성하고,
과실을 바로잡아,
중도의 마음으로 하루 빨리 수정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마음의 원점 - 끝 -
다카하시 신지
저서 소개
마음의 발견 (신리편)
마음의 발견 (과학편)
마음의 발견 (현증편)
인간 석가 (상) (하)
마음의 원점
마음의 대화
마음의 지침
심안을 열다
원설 반야심경
심행의 해설 (중도)
반성 참선의 방법과 마음의 자세
악령
사랑은 미움을 넘어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