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은 진중권, 박노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보수적인 종교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나는 그런 비판을 적극 지지한다. 지배자들에게 빌붙는 보수적 종교인에 비해 해방신학 또는 민중신학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종교인은 거의 항상 낫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교회는 물질축복은 성실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 (『B급 좌파』, 115쪽)
하지만 둘 모두 종교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종교는 조직된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항상 사고를 마비시켜왔다.
단지 ‘교회 문제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비판은 결국 교회 체제의 내부에 기생하게 마련이다. 해결은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던 예수의 선언처럼 좀더 근본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왜 불온한가』, 177쪽)
김규항은 예수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보지만 나는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본다.
이제 기독교가 진보적 종교인인 김규항의 사고를 어떻게 마비시켰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김규항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수 이전, 구약의 신은 유대인의 신이다. (‘시오니즘’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그런 신관을 기초로 한다.) 예수는 무슨 짓을 했든 저에게 극진하다면 축복을 내리는 그런 이기적인 신을 부인한다. 예수 이후의 신은 유대인의 신도 교회의 신도 아닌, 우주만물의 신이다.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딸이며 신 앞에서 인류는 형제자매다. 인종이 무엇이든, 종교가 무엇이든, 신분이 어떻든. (『나는 왜 불온한가』, 24쪽)
구약에 비해 신약이 여러 면에서 나은 것은 사실이다. 모세의 신은 자신이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과 타민족을 엄청나게 차별하며, 다른 신을 믿는 자를 죽여버리라고 하며, 동성애자를 죽이라고 하며, 타민족의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취하라고 하며, 여성을 차별하며, 노예제를 당연시한다. 나는 구약 성경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만큼이나 사악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신약의 주인공인 예수는 대체로 착하게 살라고 설교한다. 구약의 증오와 차별의 신이 신약의 사랑의 신으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신약의 예수에 대해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말이나 행적에서 보이는 예수의 사고방식은 그런 고대 사회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의 사상과 행적엔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동인권, 생태주의 같은 인류가 이룬 가장 최근의 정신적 진척들이 이미 가장 조화로운 형태로 들어 있다. 그를 직접 보았다 해도 그런 개념의 씨앗조차 없던 사람들이 그를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왜 불온한가』, 185쪽)
예수에 대한 이런 평가(“가장 조화로운 형태로”)가 왜 적절하지 않은지는 앞으로 천천히 살펴볼 것이다. 예수는 설교하는 사람이 으레 하듯이 “착하게 살라”고 설교했을 뿐이다. 여기서는 우선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신약은 예수의 족보로부터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1)
또한 예수 자신도 구약과 결별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17~20)
또한 신약에서도 구약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죄악시한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 비정상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 역시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서 1:26,27)
사악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6:9,10)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율법이 올바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 불경건한 자와 하느님을 떠난 죄인, 신성을 모독하는 자와 거룩한 것을 속되게 하는 자, 아비나 어미를 죽인 자와 사람을 죽인 자,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을 하는 자, 위증하는 자와 그 밖에 건전한 교설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9, 10)
김규항의 기적의 문제에 대해 얼버무린다.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2000년 전 예수라는 팔레스타인 남성의 죽은 몸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는가 아닌가는 본질이 아니다. 설사 그 ‘생물학적 기현상’을 증명해 낸다 해도 그 삶이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현장에 살아 있지 않다면, 그건 단지 ‘생물학적 기현상’일 뿐이다. (『나는 왜 불온한가』, 200쪽)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예수의 신령함이라 순정함을 주장하는 전근대적인 상상력이다. 그걸 생물학적으로 반박하는 건 의미가 없다. (『나는 왜 불온한가』, 229쪽)
그러면서도 그가 환자를 치료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수가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면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불가능했을텐데 말이다.
예수는 안식일에 버젓이 환자를 치료했다. 그 환자들은 당장 목숨이 위급한 환자들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앓아 온 만성질환자들이었다. (『나는 왜 불온한가』, 188쪽)
김규항은 예수의 실제 삶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작 예수의 삶에 대해선 아무 언급이 없다. 예수는 시종일관 머리 뒤편에 둥그런 빛을 달고 다니는 신인 것이다. (『나는 왜 불온한가』, 185쪽)
말 잘했다. 나도 예수의 실제 삶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기록으로 볼 때 예수가 당시에 인기를 얻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기적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예수가 인기를 얻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그 기적이다. 예수가 만약 종교인이 아니라 그냥 사랑을 중요시한 사상가였다면 그가 신약 성경에 나올 이유도 없고 지금처럼 추앙받을 이유도 없다. 김규항이 예수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예수가 기적을 행했기 때문이다. 김규항은 이 문제를 얼버무리면 안된다.
성경 속의 예수는 현대의 사이비종교 교주와 매우 흡사하다. 예수는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 또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종말과 천국에 대해 매우 열심히 이야기한다. 또한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9: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가복음 10:29~31)
그렇다면 예수를 또 한 명의 사이비종교 교주가 아니라고 볼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단 하나 기적이다.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를 사이비 종교 교주가 아닌 진짜 신의 아들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예수를 지금도 판치는 ‘믿음 치료사’ 즉 사기꾼이 아니라고 볼 근거는 무엇인가? 김규항은 이 문제에 대면해야 한다. 그러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여러 가지다. 성경을 믿지 않는지, 예수를 사기꾼으로 보든지, 기적을 믿는지. 김규항처럼 “기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는 태도는 결론이 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더 일관성이 있다. 그들은 적어도 이 문제를 회피하지는 않는다.
김규항은 신약을 구약과 완전히 분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수의 인기 또는 권위가 바로 구약의 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김규항이 예수의 기적을 믿는다면 그는 미신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 김규항이 예수의 기적을 부정한다면 예수의 권위가 사라진다. 기적도 행하지 않았고 신의 아들임을 내세우지도 않은 예수라면 종교 지도자인 예수가 아니라 그냥 진보적 사상가 또는 사기꾼일 뿐이다.
김규항은 예수의 페미니즘에 감동한다.
예수는 지난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예수의 정신이 너무나 현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엔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아동인권을 비롯한 인류가 현대에 들어서야 깨달은 여러 소중한 정신들이 이미 들어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일행엔 언제나 여성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어떤 현인이나 종교 창시자도 여자를 일행에 포함시킨 일이 없습니다. (『나는 왜 불온한가』, 221쪽)
하지만 12명의 제자 중엔 여자가 없었다. 예수에게 여자는 단지 보살펴야 하는 존재였지 주체가 아니었다.
김규항은 기독교의 남성중심주의를 얼버무리기 위해 궤변도 서슴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 ‘아빠’란 ‘남성’이 아니며 권위적인 존재도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아빠’란 ‘무한히 기댈 수 있는 품’이다. 예수에게 하느님은 그런 존재였다. (『나는 왜 불온한가』, 342쪽)
아이들은 울 때 ‘엄마~’하고 운다. 포유류에게 ‘무한히 기댈 수 있는 품’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다. 예수가 믿었던 야훼가 남성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페미니즘 운동이 이룬 성과 중에 하나가 바로 이혼의 권리다. 여자가 이혼을 요구할 권리는 더 이상 남자의 소유물이 되지 않을 권리이기도 하다. 예수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또한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면 그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 그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31~32)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19:4~6)
예수의 제자 역시 여자에 대한 당시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여자들은 정숙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합니다. 머리를 지나치게 꾸미거나 금이나 진주로 치장을 하거나 비싼 옷을 입지 말고 오직 착한 행실로써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여자에게 어울립니다.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9~15)
김규항은 예수가 유대인이라는 틀을 깼다고 높이 평가한다.
예수 이전, 구약의 신은 유대인의 신이다. (‘시오니즘’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그런 신관을 기초로 한다.) 예수는 무슨 짓을 했든 저에게 극진하다면 축복을 내리는 그런 이기적인 신을 부인한다. 예수 이후의 신은 유대인의 신도 교회의 신도 아닌, 우주만물의 신이다.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딸이며 신 앞에서 인류는 형제자매다. 인종이 무엇이든, 종교가 무엇이든, 신분이 어떻든. (『나는 왜 불온한가』, 24쪽)
기독교 정신의 가장 위대한 지점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심지어 기독교인이든 불교신자든 이슬람교도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사실을 몸소 보여 줌으로써 유대인의 신으로 여겨지던 하느님이 온 인류의 신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왜 불온한가』, 220쪽)
하지만 예수는 ‘“종교가 무엇이든” 인류는 하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야훼를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엄격히 구분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4:10)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49~50)
예수에게는 야훼를 섬기는 자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인 것이다.
또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말 속에는 이교도 또는 이방인을 어떤 식으로 보는지가 잘 녹아 있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마태복음 18:1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마태복음 6:7)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태복음, 5:47)
아시다시피 여러분이 이교도였을 때에는 헛된 우상에게 매여서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녔습니다. (고린도전서 12:2)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네 조상들처럼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51)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4:5)
아닙니다. 나는 이교도들이 바치는 제물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0:20)
물론 이교도 남자를 몽땅 죽이고 여자를 취하라는 구약보다는 다음 구절이 일보전진이기는 하다.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 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10)
김규항은 예수를 기존의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사회주의자라고 보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사회주의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에게서 그런 마음[다른 사람들에 대한 염려 – 이덕하]을 키워 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왜 불온한가』, 221쪽)
특히 우리는 80년대 중반을 넘어 우리가 급격하게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들 무렵 우리 스스로 ‘운동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 미심쩍어 했던 것들을 기억해 낼 필요가 있다. 그런 미심쩍은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마르크스주의에 살을 입히고 피를 통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 ‘미심쩍은 것들’ 가운데 하나가 70년대와 80년대 사이에 꽃을 피웠던 예수와 관련한 성찰들이다. (『나는 왜 불온한가』, 192쪽)
예수가 사회주의자라고? 물론 예수는 청빈을 강조한다. 하지만 유교도 청빈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유교가 사회주의 사상인 것은 아니다. 많은 유교 지도자들이 가난하게 살라고 설교했지만 남을 등쳐먹는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정확히 말하면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자 개개인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지배 체제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또한 유교 지도자들 자신이 그런 지배자 믿에서 잘 먹고 잘 산 경우도 많다. 가난의 미덕을 찬양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자들을 양산하는 체제를 공격하느냐 여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복음 5:44)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7:1)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은 결국 그들에 맞서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또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에서 ‘남’은 지배자일 수 있다.
청빈을 이야기하면서도 노비제도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았던 조선 시대의 유학자와 예수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예수 자신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실제로 청빈하게 살았던 선비들 많다.
예수와 관련된 다음 이야기를 보자.
예수께서는 이 모든 말씀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뒤에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마침 그 때 어떤 백인대장의 종이 중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이 대단히 아끼는 종이었다. 백인대장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유다인의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집에 오셔서 자기 종을 살려주십사 하고 간청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와서 간곡히 부탁 드리기를 "그 백인대장은 도와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셨다.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시켜 예수께 전갈을 보냈다. "주님, 수고롭게 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 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감탄하시며 따라오는 군중을 돌아다 보시고 "잘 들어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은 이미 깨끗이 나아 있었다. (누가복음 7:1~10)
예수는 착한 백인대장의 종을 살려주었다. 하지만 그 종을 해방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또한 다음 구절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주인-종 관계를 옹호한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마태복음 10:24)
예수는 종에 대한 비유를 많이 한다. 하지만 주인-종이라는 관계 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안한다. 예수에게는 종의 존재가 당연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더 노골적으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설교한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벌을 대신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벌이 무서워서뿐만 아니라 자기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도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 가지 세금을 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은 그와 같은 직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국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 (로마서 13:1~7)
여러분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복종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황제는 주권자이니 그에게 복종하고 총독은 황제의 임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악인을 처벌하고 선인을 표창하는 사람이니 그에게도 복종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황제를 존경하십시오. 하인으로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주인에게 진정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뿐만 아니라 고약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베드로전서 2:13~18)
첫댓글 한국기독교는 종교집단으로 보기엔 너무나 오랜시간동안 변질되고 권력이 사유화되서 이젠 신앙심을 기초로 신앙심을 이용하는 권력집단이죠...물론 권력집단이라해도 그 권력이 교인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신앙이란 이름으로 목사든 누구든 상위권력자들이 쥐고 흔드는것이고..그 상위권력자는 부패할대로 부패해서 모든 사회전반적으로 권력을 남용해서 자신의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삶을 살고...이게 무슨 종교집단인지..사이비집단이죠..
해방 후 그리고 군사정권과 새마을 운동 사이에서 목회를 한 많은 목사들이 실질적인 성경 말씀보다도 예수=복 이라는 기복주의적인 설교로 교인들을 끌어모으고 부유해진만큼 부패한 곳이 많기는 합니다... 다만 젊은 전도사 강도사 목사님들 사이에서 개혁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워낙 해방 후 세대의 나이든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들을 쉽게 놓으려고 하지는 않고 있죠... 교회 문제는 많습니다만 그것을 타파하고 개혁하려는 교회도 소수지만 분명 존재는 합니다....
그렇죠 개혁하는 세력도 있죠..단적으로 나꼼수김용민은 이제껏 대형교회행태를 비판하고 문제제기했었죠..그런데 지금 어떤지 아시죠..한국기독교에서 김용민에게 아주 상욕을 하고 김용민이 다니는 교회마다 압력을 가하고 있어서 교회도 못가고 있는 실정이죠..이게 한국기독교수준입니다..왜 한국 기독교가 이 수준일까요?? 한국기독교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걸 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알고 있는데..그냥 모르는채하는거죠..그냥 눈감아버리고 자신의 신앙심만 가지고 자기만족에만 신경쓰지 변화와 개혁은 모르는채하고 있죠..그것을 한국기독교는 잘알고 이용하는것이고요..그래서 자정능력을 포기한 한국기독교는 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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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문제인겁니다. 제대로 된 신앙 훈련이나 교육도 없이 무작정 교회는 성장만을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우리사회처럼요.
종교에서 벗어난다고 했는데, 이는 종교의 진화론적 관점을 싹다 무시하는 관점이군요. 종교과 진화에 순수히 걸림돌이었으면 진작에 도태되었죠.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통해서 생존해 갑니다. 초기 생존의 종교적 진화방식은 투쟁적이었다가 나중에 갈수록 이와 반대되는 순종과 금욕을 중시하죠. 그래서 성경에 모순적인 것이 있는 거죠. 기적을 행했다거나 하는 신화적인 이야기는 은유의 방식으로 메세지를 전달하는 거죠. 오이디푸스 신화가 금친을 금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 듯이 말이죠. 기적 이건 말이 안되잖아는 성경을 말그대로 봐서는 안된다면 본인들이 기적을 말그대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링크 된 카페는 진화심리학인데, 진화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모순을 보여주네요. 인간에게 물질적인 조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조건 또한 중요합니다. 정신적인 진화를 종교가 해온 겁니다. 신의 존재는 인간이 알 수 없고 결국 믿음의 영역이라 그 자체는 존중을 받아야 하지만, 이 믿음이 실천의 형태를 가질 때, 인간의 진화 측면에서 불합리할 때 문제가 되는 거죠. 종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국 기독교는 기형적이고 독점적인 권력형태로 전횡을 일삼기에 문제죠. 권력의 폭주는 진화에 역행하는 거죠. 과학이 폭주하면 인류생존에 위협이 되듯이 말이죠.
이 글의 어떤 극좌파의 글이라는데 맑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 일까요? 맑스는 생산방식의 변화에 따라 도식적인 역사 전개를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렇게 도식적으로 전개 되지 않죠. 맑스도 역시 서구중심의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거죠. 그가 동양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 건 그 이유 때문입니다. 소련은 자본주의 단계를 넘어 공산화 된거죠. 무엇이 존재하는 건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이유를 부정하는 건 오히려 독선이죠. 의미를 없애는게 지식이아니라 의미를 찾는게 진정한 지식입니다.
기적이 은유라면 신 자체도 은유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둘 다 신비의 영역이니 만큼) 역사에서 숱한 종교로 인해 점철된 악과 부작용를 생각한다면 종교를 정신적 진화가 아니라 퇴화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겠죠.
자연에는 '가장 진화한 존재'란 것이 없고 모든 생명체가 '가장 진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시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길 할 순 있지만, 다윈주의적 시각으론 '가장'이란 말을 붙일 수 없다고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고 봐요. 인간문화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리처드 도킨스가 창안한 밈meme에도 '가장 진화한 밈'이란게 없을까요? 밈들도 '모두 최적으로 적응된 것들로 모두 최상의 밈'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왕이라는 밈, 노예제라는 밈, 기독교라는 밈, 노장사상이라는 밈, 불교라는 밈도?
유전자의 적응엔 "그 유전자복합체의 적응이 최상이다."란 개념이 있을 수 없지요. 밈복합체는 그렇지 않다란 생각이 드네요. 이유는 아마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시야가 넓어지는 정도의 차이'라고 보여집니다만... 생명의 나무엔 우열이 없지만, 밈의 나무엔 더 밝게 보는 것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과학의 점철 된 악과 부작용은 퇴화 아닌가요? 과학의 발달로 자원은 고갈되고 생태계는 파괴 됩니다. 이는 진화에 역행하죠. 그럼 과학을 무조건 부정 할까요? 이런 무분별한 과학의 행태를 종교적 금욕과 만족으로 순화 시킬 수 있습니다. 과학도, 종교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는 거죠. 신이 은유라고요? 신의 존재 여부는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 불가능합니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이성에 한계를 명확히 정해 놓습니다. 맹목적인 신의 존재를 강요하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전적으로 오만입니다. 진중권도 신의 존재 여부 가지고 뭐라 하지 않죠. 인간의 이성이 판단 할 수 있는 것 만 논하면 됩니다.
지식과 과학은 그 생성과정은 분명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자세가 필수적이지만, 그 산물을 누림에 있어서는 이성이나 합리성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행동의 결정은 감정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고 아예 감정이 다 결정한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죠.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종교인들은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나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들의 책임을 인간의 지식(과학) 탓으로 돌립니다.(초극님처럼) 세계대전은 분명히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이성의 산물을 비이성적으로, 학살의 도구로 사용한 결과라는 것을 깨달으셨으면 하네요.
인간의 감정도 이성도 다 중요한거죠. 제가 언제 지식 탓만 했나요? 서로 중요한 거죠. 님처럼 무조건 종교는 나쁘다라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이 위험한 겁니다.
스스로를 방황하는 영혼이라 여기는 자들은 방황의 종착지로 선택한 종교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고 지식, 과학, 철학 같은 것들이나, 유흥, 사랑(종교에서 말하는 사랑 말고), 측은지심 따위가 자신의 방황과 공포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성토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부당한 항의인 이유가 인류의 문제들은 각각 그 해결의 책임이 따로 정해져 있고, 어떤 문제들은 현재로서는 아예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종교인들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식과 과학 같은 것들을 폄하하고 그 폄하의 이면에는 종교가 해결책이라는 의도를 살짝 끼어넣습니다. 이러한 책임 떠넘기기는 또한 인류의 지식이나 과학이 해결한 문제들을
비겁하게 갑자기 논점을 바꾸지 마시죠. 과학만 탓하고 종교만을 우선시하는 걸 옹호한적 없거든요. 과학도 종교도 다 같이 중요한 거라고 한 겁니다. 하지만 한가지만 맹목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면 안된다는 거죠. 종교의 맹목성은 저도 싫어합니다만 님처럼 종교는 필요 없다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거죠.
의도적으로 도외시 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나아가 그들은 지식이 가져다 준 행복을 종교가 이루어준 것인양 명예를 착복하기까지 하는 기만을 일삼습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 토인들 세계에 벌어진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나침반, 총포류, 지도, 항해술, 망원경 등등은 분명히 토인들에게는 신의 선물로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토테미즘 보다는 피부가 선홍색인 항해가들을 신의 사자쯤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권능)을 이해하기가 힘겨울 수밖에 없는 모계사회에서 성장한 토인들은 선교사들이 떠드는 되먹지 않은 사상들을 긴가민가 하면서도 선교사들이
보여준 신기술 때문에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즉, 나침반, 총포, 항해술이라는 산물을 낳은 지식과 과학이 누려야 할 명예를 종교가 부당하게 가로챈 것입니다.
과학이 가져다준 물질적 토대가 반드시 행복만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니죠. 종교로 자신의 안식을 얻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죠. 님이 무슨 자격으로 그 사람들의 안식을 부정 할 수 있죠? 그리고 종교의 단점을 부정한적은 없거든요. 근대에 식민지 선교 활동이 낳은 폭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님이 말하는 나침반, 총포, 항해술이 식민지를 물질적으로 침탈했거든요. 이건 뭔가요?
물질적 침탈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과학과 그 산물에는 생명력을 영구히 획득하지 못합니다.
그럼 종교는 생명이 있나요?
종교의 경전에서 인간의 행동지침을 지시합니다. 그 결과가 식민지 선교활동으로 나타난거구요.
종교 행동 지침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데요? 과학도 사람이 만들어서 사람이 사용하죠.
명확한 행동양식의 정신적 지침을 내리는 것과 세계의 자연현상을 사실로서만 보여주는 것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죠.(그 자연현상을 근거로 각종 발명품을 만들어서 우리의 편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종교 자체는 경전을 중심으로 모인 종교인들의 정신적 뭉치덩어리이며 그들은 하나의 조직으로서 지침 아래 세계에서 활동하며(전도를 위해)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그럼 인간이 종교 외에 행동양심 지침서를 내릴 수 없다는 말입니까? 과학의 폐해가 종교 잘못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도 유기적으로 인간의 삶에 곳곳에 침투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물질적 토대를 확장시키죠. 그럼 이건 생명력이 아니라 죽어 있는 건가요?
물론 종교 외에 다른 사상과 이념들도 있죠. 이 역시 인간의 정신활동에 근거하지만 종교만큼의 해악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저는 자본주의를 부정할 마음이 요만큼도 없습니다. 참, 돈에 생명이 있나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종교가 미래에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다만 종교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과학에 의해 틀린 사실로 밝혀지면서 형태를 바꾸어 가야 하는 숙명을 피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 전쟁 이런거 다 종교 아닌 다른 사상에의 해서 발생하였는데요? 열강의 식민지 쟁탈 이거 과학적인 사고 방식 사회진화론에 비롯 됩니다. 유태인 학살 같은 인종 차별도 이런 진화론을 바탕으로 했고요. 이래도 종교가 더 부정적입니까? 틀린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죠. 님은 틀리다 맞다라고 이분법적으로 얘기하지만 진화는 변화는 것이기에 고정 된 답이 있는게 아니죠. 과학의 패러다임도 늘 바뀌거든요.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는 이유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을 해야 진정한 이성적 방법이고요. 아까도 말한 거처럼 인간의 이성만으로 인간에게 안식을 줄 수 없어요.
왜 자꾸 피장파장의 논리를 펴시나...
우선 반말은 하지 마시고요. 그럼 님은 왜 자꾸 한쪽으로만 편향 된 논리를 펴시나요?
과학적 사실 그 자체가 윤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과학 그리고 유물론 등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원리를 바탕으로한 모든 사상이 윤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때로는 인간의 윤리의 방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냉혈한 현실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자연이 적자생존의 사실을 보여준다고 인간이 적자생존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적자생존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도 과학의 가능성이고 말이지요.
과학과 유물론은 팩트이지만, 그것을 바탕으로한 모든 사상이 항상 선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사실을 가지고 안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과학과 유물론은 선악에 대하여 중립적인
팩트만을 보여줄 뿐,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이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유대인에게 맞서 자신을 지킴으로써, 나는 주님의 사역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저서 중...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여부는 알 수 없고요. 그러니까 전적인 믿음의 영역이고요. 믿음은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하고요. 이는 옳다 그르다 논 할 수 없고 종교의 진화론적 측면을 말하는거죠. 근데 님은 종교 자체가 악이 쓸모 없는 것으로 하잖아요? 분명히 종교는 진화의 산물이고 시대에 따라 변화기도 합니다. 인간이 종교를 통해서 선을 수행하기도 해요. 이건 단순 교과서에 나오는 윤리지침 보다 훨씬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죠. 그렇기에 잘못 사용되면 엄청난 피해를 주기도 하죠. 이는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을 오용하면 악이 되는 거죠. 그 자체로 선과 악이 되는 건 아니죠. 자꾸 님은 왜 선과 악을 구분하나요?
알겠어요. 세례 잘 받으세요.
결국 이게 님의 이성적 대답인가요? 저를 뭘 보고 세례를 잘 받으라 하시나요? 저 종교 없거든요. 님 의견에 반대하면 종교인이다 이런 논리 결국엔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라는 거랑 똑같죠. 과학이 잘못 오용 되면 재앙을 낳듯이 종교도 마찬가지인거에요. 각자 다른 영역에서 인간의 진화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는데 한쪽만 우위라고 하면 안되죠. 이렇게 물질적 풍요를 이루고 있는데 왜 종교는 없어지지 않을까요? 단순 사람이 비이성적이라서일까요? 종교를 비판하려 거든 제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저란 인간이 어디 항시 이성적이겠나요? 도저히 말이 안통하는 이상한 상대주의 사고에 물든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근본주의 종교인들 보다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요. 교회의 부패한 목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누굴까요? 자신들 말 잘듣는 맹한 신도들? 아니죠, 나름 자신은 중립이랍시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관용적 사고를 견지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얼빠진 지식인들을 장기적으로는 더 선호합니다.(+ 앞뒤 안재고 무작정 덤비는 종교 안티) 그래야 자기네 장사가 유지되니까요. 불관용에 대한 관용은 결국 불관용의 흥성을 돋울 뿐이라는걸 이 답답한 사회는 언제 깨달을련지...
어설픈 상대주의적 관용적 사고요? 저는 분명 한국 개신교의 폐단을 지적했는데요? 님은 그런게 아니라 아예 종교 자체에 대해 비난과 부정을 한 거죠. 전 그거에 대한 반박이에요. 끝까지 논점 파악을 못하시면 안되죠. 말이 안통하는 분이 누군지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굳이 나는 통한다고 믿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죠. 그것도 믿음인거 아시죠?
초극님께 질문인데,(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에요ㅎㅎ;;) 초극님은 불가지론적 입장을 말하고 계신 건가요? 두분의 토론(혹은 논쟁?)을 한번 훑어봤는데, 그런 논지인것처럼 느껴져서요.
개인적인 생각은 우선 한국 기독교가 조금은 폐쇄적 배타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 사상은 둘째 치더라도 한국 밖으로만 나가면 기독교 안에서도 다향한 신앙, 믿음이 존재합니다. 보수적인 교파도 있고 진보적인 교파도 있습니다. 우선 이것을 다향하게 받아들일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적다보니 또한 한국교회에서는 불가능할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입니다. 조금을 넘어서 균형을 이루는 수준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개혁이 이루어져야 사회 개혁도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유럽의 기독교를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왔다고 봅니다. 그들은 매주 교회에 가진 않지만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울 때 종교인의 역량을 발후합니다. 성숙한 방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유럽의 경우는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기독교 문명과 문화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도킨스조차도 자기가 사는 문화권이 성공회 문화권임은 인정할 정도니까요. 한데 한국은 그렇지가 앉죠. 가장 빠른 시간에 부흥과 부패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니...현재로서는 성숙함을 보이기에는 쉽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교회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 관건이라고 봅니다.
종교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부산물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도 있고요. 종교에 드러난 현상들만 보고서 그렇게 평가하시는 건 독단과 오만입니다. 조중동이 아무리 병신 같다 하더라도 언론 자체가 없어져야 합니까?
글이 꽤 많이 아쉬워서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퍼오신 게 아마도 Vema님이 동의하시기 때문인 모양이네요. 제가 읽기에는 퍼오신 글은 자기 논지에 맞는 문구만 끼워다 맞춘 이도저도 아닌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기독교 비판은 도올이 제대로죠. 도올이 쓴 책도 한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