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복(末伏)후 일주일-노괴(老愧)와 탄생(誕生)
◇ 노괴(老愧: 나이 들어 그렇다면 부끄러운 일)
올여름 삼복(三伏=복중伏中)은 짧았다. 삼복은 보통 초복에서 중복이 10일간이고 다음 말복까지가 20일간이니 한 달간인데, 올해 중복~말복 사이는 10일 만이라 삼복은 20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더위도 열흘은 짧아지지 않았나? 허니 더위 먹을 가능성도 1/3은 줄어들었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올 복중에 복더위를 단단히 먹었다. 그것도 복더위가 끝나는 말복(末伏)날‘몸을 보하는 음식을 먹고 더위를 이기는’복달임을 하고난 즉시 오히려 대단한 복더위를 먹고 말았으니 웃기는 일이다.
올해의 말복은 지난 8월7일이고 이날은 입추(立秋)이기도 했다. 이날 물론복달임이 있었고, 고교동창 자전거동호회 바이콜릭스의 연례 복달임 라이딩 일환으로 이뤄졌다. 고단백 꼼장어를 즐기고 뒤풀이 호프파티까지 이어지니 언제나처럼 흥겨웠다. 멋진 복달임이었는데 이후가 문제였다.
친구들과 헤어져 자전거로 모임장소 성수역골목을 출발해 영동대교를 건너 한강 잠실지구 둔치와 성내천을 거쳐 무사히 귀가하니 보니, 아뿔싸! 허리 색(sack)에 넣어두었다고 알고 있던 지갑이 사라져버렸네!
자전거를 타면 늘 배낭을 메고 지갑과 핸드폰, 카메라 등은 그 안에 넣어 다녔는데, 이날은 서울 일원이라, 허리에 착 달라붙는 쫄쫄이 색에 지갑, 핸드폰, 돋보기, 휴지 만 넣고 나왔던 것이 문제였다. 흔히 지하철에서 파는 5천 원짜리 이 쫄쫄이 색은 신축성이 무척 좋아 참이슬 4병을 넣고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허리에 착 달라붙는다. 참 간편하다.
그런데 너무 강한 신축성 때문에 낭패를 보기가 일수다. 색에서 물건을 꺼내 쓰면 다시 색 안에 확실히 집어넣어야 하는데, 허리와 색의 바깥 사이에 끼워놓고는 색 안에 들어간 걸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큰 충격만 주지 않으면 제법 무게 나가는 핸드폰도 색과 허리사이에 잘도 끼워져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충격을 받아 툭 떨어지면, 이크! 큰 일 날 뻔 했구먼! 할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사단(事端)이 나면서 툭 떨어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디서 떨어뜨렸을까? 열심히 귀가 길을 되짚어 보아도 애매하다. 장어 집인가? 회비를 내느라 지갑을 꺼냈었으니 식당에서는 있었다. 그러면 그때 색 바깥쪽에 그냥 끼워두었던 모양인가? 지퍼를 닫지 않고 자전거를 타면서 복부 쪽의 걸리적거리는 색을 허리 뒤로 돌려놓아, 바퀴의 진동으로 인해 색에서 삐져나온 지갑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였을까? 생각의 갈래가 어지럽다.
혹시 집에 와서 흘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안타까운 헛 희망에 자전거와 방을 오가며 부산을 피우니, 당장 와이프의 촉각에 걸려들었다. “아니 또 무얼 잃어버렸어요? 에구 하여튼~~!”이제껏 내 일상이 그랬다. 30대 초반부터 건망증이 심해 출근길에 단 한 번만으로 현관문을 통과해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직원신분증을 두고 나오거나, 지갑을 두고 나오는 등 시시때때 곳곳에서 소지품을 흘리거나 챙기지 못하고 다닌 일이 그야말로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매일 그렇다.
오늘도 거듭되는 와이프의 질책을 등 뒤로 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오던 길을 되짚어 꼼장어 식당까지 가보았다. 전조등을 45도 하향시키고 길바닥을 탐색하며 가지만 소득이 없었다. 한강 둔치의 조명이 그런 대로 밝지만 자정(子正)이 가까워오는 어둠 때문에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도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는 이들이 참 많다. 그런 길바닥에 흘렸다면 누가 주었어도 벌써 주었을 것이고, 그 속의 현금과 신용카드를 횡재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났다. 길바닥에도, 꼼장어 식당에도, 호프집에도 지갑은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예상대로 길바닥에 흘렸고, 누군가 한 건 건진 모양이다.
오던 길을 되짚어가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갑안의 신용카드 분실신고부터 하라고! 다행히 핸드폰은 흘리지 않아, 한강변에서 즉각 신고를 해, 카드사용 정지 조치를 마쳤다. 다시 찾았을 경우 해제 신고하는 접수번호도 받았다.
그런데 이놈의 분실신고를 ARS로 하는 건 도대체 돼먹지 않았다. 키 판의 번호를 누르라는데, 키 판도 잘 뜨지 않고, 숫자를 눌러도 모니터에 먹히지 않는다. 결국 인내심을 가지고 상담원과 통화를 통해 해결하고 말았다.
이런 사건은 결국 내 잘못이다. 젊어서 부터의 건망증 때문이라면 뭐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주의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결과라면 기분이 좋지 않다. 아직 치매인가? 할 정도는 아니다. 그건 친구끼리 농담 삼아서나 할 이야기이지, 정말 그렇다면 심각한 일이다. 더욱이 노인이 돼 가면서 주의와 집중을 게을리 한 결과라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옥편(玉篇)을 뒤져가며 노괴(老愧)라는 생뚱한 단어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튿날 8월8일은 바빴다. 지갑과 함께 잃은 각종 신분증(주민등록증, 경로우대전철승차권, 운전면허증) 분실신고와 재발급조치를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경과를 옮겨본다. 또래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오전09시 업무가 시작될 동사무소(요즘은 주민센터)를 찾아가, ➀주민등록증 재발급신청서를 작성하고 사진1매를 제출하면 3주후 발급되는데, 문자로 보낼 테니 방문해 찾아가란다, 그리고 그 기간 대용할 발급신청서를 내주는데 수수료가 5천원이다. ②어르신‘경로우대’교통카드는 즉석에서 재발급해주는데, 사용은 익일 9일부터라고 한다. 수수료는 3천원이다.
➂운전면허증을 재발급 받으려 강남경찰서 옆 운전면허시험장으로 가려 했더니, 동주민센터 여직원이 경찰서로 가도 된다는 편리한 정보를 준다. 참 고마웠다. 지척의 송파결찰서 민원실로 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사진은 새로 돈 들여 찍을 필요 없이 기존의 것을 사용해도 된단다. 제복 입은 경찰관의 살가운 친절이 생소하면서도, 노인들의 주머니 사정을 살펴주는 배려에 약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수료 7천500원도 현금이 아닌 카드로 해달란다. 현금수수(授受)로 생길지 모를 민원창구의 비리를 사전 예방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운전면허시험장에서는 즉석에서 재발급받지만. 경찰서의 경우는 2주 정도 기다린다. 멀리 가는 번거로움을 없애 편하니 그게 더 상책이다. 대기 기간의 운전면허는 역시 발급해주는 분실신고서로 대용되니 만사 ok.
이렇게 공무원 사회에도 ‘one stop service’체제로 가며 많은 발전적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아직도 곳곳에서는 문제가 불거지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주민증을 분실하고 다시 발급 신청을 하는 마음이 묘하다. 아직 이런 행정절차를 혼자서 신속 정확하게 융통성 있게 해결해 나가는 걸 보면 무슨 치매 같은 소리와 생각은 접어두어도 될 듯싶어서인 것일까?
◇ 탄생(誕生)
한편 이번 지갑분실로 주민증을 새로 발급 받으니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다. 신용카드, 경로전철카드, 운전면허도 모두 갱신하게 되니 내 생애에서 어떤 한 계기가 이루어지라는 계시(啓示)인 듯해서 말이다.
흔히 듣는 말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최근에 친지들이 보내온 스마트 폰의 카톡 내용이 떠오르며, 그렇게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율곡(栗谷)선생의 가르침 9용(容)을 실천해 참 어르신이 되 볼까나? 그것이 계시일까? 어르신의 마음가짐 몸가짐은 모름지기 “頭容直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手容恭 足容重 氣容肅 色容壯 立容德 하라!”고 했지!
천성이 그렇지 못해도 노력할 일이다. 내 선천적으로 비장(脾臟)이 부실해 성급한 편이라, 말도 빠르고 목소리도 크고, 손도 부산하며, 발걸음도 재니, 어르신다울 수가 없었던 같다. 주민등록증을 새로 받아 행정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이참에 이젠 좀 유유(悠悠)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내 일상에서 탄생(誕生)이란 경사가 실제로 병행되면서 더욱 더 실천해야 할 소이연(所以然)이 되고 만 모양이다.
지갑을 분실하던 7일의 이틀 전 5일은 원래 출가한 딸아이가 딸을 낳기로 예정됐던 날이지만, 늦어지고 있었다. 8일 정도를 더 기다린 13일 이 세상에 외손녀가 태어났다. 자식들이 결혼도 늦고 아이도 늦게 생겨, 노산(老産)이 돼 쉽지 않게 나온 것이다. 친구들에 비해 늦깎이로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요즘 세상 친 손주 외 손주가 무슨 구별이 있나? 딸 들이 더 효성의 파워를 발휘하는 시대가 아닌가? 딸 낳은 것이 섭섭해 ‘살림밑천’이란 위로를 받던 시절도 아니다. 그래서 차별 없는 축하인사도 받는가 보다.
할배로선 선배인 친구들이 “외 손주 열심히 돌봐줬더니 고 녀석들이 식언이 들면서는 친할배할매 한테로 싹 돌아서 찰싹 붙어가더라”며 서운해 하는 걸 보았지만, 내겐 그것도 후일의 일이다. 지금은 그저 고맙기만 하다.
이렇게 할배가 되려고, 어르신다운 어르신으로 거듭 나게 하려고, 지갑과 제 증명(證明)들이 없어진 모양이다. 손주의 탄생이 더욱 더 그런 계기로 내게 다가오기 바란다. 노년으로 갈수록 모든 걸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교훈 때문에 이렇게 추론(?)하는 것만도 아니다.
산실을 나와 체온조절을 위해 신생아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녀석이 눈을 또록또록 뜬 채로 고개를 모로 하고 이리 저리 살핀다. 까만 눈이 유리창 밖의 내 눈에 선명히 비친다. 나와 눈을 맞추는 모양이다. 강보에 쌓인 발이 꼼지락거린다. 활발한 모습에 아 녀석이 참 건강하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를 한다. 산모 입원실에 올라가 가족들에게 아기와 눈을 맞췄다고 하니. “에이 상상도 심하다!”라고 놀린다. 상상이어도 상관없다. 그렇게 느끼면서 더 행복해졌으면 족하지 않은가?
어린 손주가 어렸던 딸과 아들에게선 느끼던 것과는 몇 배로 사랑스럽다는 선배 할배 친구들의 말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아기를 들여다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 새 생명이 내가 살아왔던 것처럼 이 세상의 풍파를 헤치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 이후 세대로서 주인공이 되어 갈 것이다. 요즘 인류의 평균수명으로 보면 이후로 최소 100년은 살아갈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또 어떤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질 것인가? 부디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태생이 그렇고 성장과 직업의 특성상으로도 그렇고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정(情)을 남에게 잘 줄줄 모르는 내가, 그래서 우리 딸 아들에겐 칭찬한 번 제대로 못했고 다정다감하자 못했던 내가, 다른 친구들처럼 손주 사랑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지금은 남들 하는 대로, 딸 내외가 요청하는 대로, 아내가 하는 대로 부지런히 따라 다닐 뿐이다. 산후조리원에 가기 전까지 입원실에서 같이 자면서 딸을 돌보는 아내를 차에 태워 다니고, 그래서 병원에서 가까운 딸네 집에서 사위와 함께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런 날들이 그저 흐뭇할 뿐이다.
손주의 탄생(誕生)이 나와 내 가족들에게는 이렇게 새삼 경이로운 것인데, 소중한 것인데, 난 이 축복받을 한 인간의 탄생과 이후의 인생을 소중하게 값지게 살아온 것일까? 새삼 회한(悔恨)하게 된다. 갓 난 손녀 아이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비치는 순진무구한 눈빛을 오래 간직해 보자. 주민증을 새로 바꾸며 후손의 탄생을 보면서, 나 또한 재생의 길로 나서보자. 올 말복 이후 1주일이 이렇게 노괴와 탄생 속에 흘러갔음에 감사드린다. <140824일고>
[
첫댓글 이제 드디어 할아버지 반열에 오르셨네.
손녀와 헐아버지의 사랑의 일기가 시작되는군. 추카 추카 추카
먼곳 말레이시아에서의 축하여서, 그리고 늦깤이 할배입문이어서, 학처니의 덕담이 아주 고마우이!!♥♥
나도 ㅊ ㅋ, ㅊ ㅋ ! 새로운 할배, 손주의 탄생 다시 ㅊ ㅋ! 그 동안도 괜찮았는데 더 자상해지겠다! 한문 설명은 없나? 눈 코 귀를 막으라는뜻?
이이 율곡의 구용(九容: 아홉 가지 몸가짐)은 의역을 하자면 “머리는 비스듬히 기울이지 않고 곧게 세우고, 눈매는 단정하여 흘기지 않으며, 입매는 함부로 놀리지 않게 다물고, 말소리는 기침하거나 침을 튀기지 않게 조심하며, 호흡은 숨을 죽이듯 정연하게 하고, 얼굴빛은 자신을 장중하게 다스리며 씩씩하게 하며, 손가짐은 공손하되 게으르거나 느슨하지 않도록 하고, 발걸음은 가볍게 옮기지 않아 무게 있게 하며, 선 자세(입장)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의젓한 덕성스럽게 하라”는 뜻이라는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