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주년
동래 3·1독립만세운동 재현 현수막을 걸고 있다
부산 동래구는 독립운동과 역사적 유래가
깊다. 1919년 3월 13일 동래장터에서 상인, 학생, 부녀자 등 남녀노소할 것 없이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것이 부산, 경남의 독립운동에
시발점이 되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절로 힐링되는 법륜사와 학소대
옛날 동래의 하늘에는 학들이 아름답게 무리를 지어 날아왔다. 그들은 학소대에서 둥지를 틀며, 자연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을 선사했다. ‘동래군지’는 도화동이라는 장소가 동래 관아의 동남쪽 아래 위치해 있다고 전한다. 이곳은 단순한 지리적 존재를 넘어, 학소대와 깊은 연관이 있는 신비한 풍경을 품고 있었다.
복천동 고분군은 마치 학의 몸통을 형상화한 듯하고, 동래읍성의 서장대와 동장대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 날개로서 함께 그 신비로운 그림을 이루었다. 이 모든 요소들은 합쳐져 하나의 거대한 학이 하늘을 수놓는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그러나 현재의 학소대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과거의 상징이었던 700여 년 된 소나무가 땔감으로 베어지고, 남겨진 것은 암자 하나뿐이다. 그 푸르고 우아했던 소나무가 사라지면서, 학들은 더 이상 이곳을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법륜사 전경
법륜사는 1898년 범어사의 포교당으로 창건되어 야학운동을 통한 문맹퇴치와 3.1운동의 본거지로 유명한 사찰아다.
1921년부터 경영한 ‘싯달야학교’를 통해 배출된 스님들과 빈한한 농민의 자제들이 당시 민족 운동의 일원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법회와 부산지역 최초의 불교 유치원인 ‘법륜 유치원’이 있으며
당대의 고승을 모시는 법회가 자주 열려 포교 1번지로 불린다.
경내에 들어서면 종각, 대웅전, 종무실이
소나무, 대나무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분위를
연출하여 절로 힐링이 되는 사찰이다.
동래장날 주변공터에서의 민속공연
지신밟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마을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인남자놀이. 마을굿.
지신밟기는 옛날부터 전국 각지에서 주로
정초에 행하던 것으로서 그 규모와 내용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민간 신앙적 마을굿이다.
동래지역에서는 ‘걸립’ 또는 ‘지신밟기한다’, ‘덕뵈기친다’ 등으로 부르고 있음을 보면, 이른바 제의적 성격의 농악이라 할 수 있다. 마을과 가정의 벽사초복(辟邪招福)을 목적으로 하는 안택축원적 제의의 하나이다.
음력 섣달 중에 악기 · 의상 · 도구 등을 준비하여, 이듬해 정월 초 2, 3일경부터 시작하여
대보름 전에 마친다. 등장인물은 기수 · 사대부 · 팔대부 · 김생원 내외 · 촌로 · 촌녀 · 포수 ·
하동 · 각시(탈을 씀.) · 큰어미 · 꼴머슴 등이고, 악기는 꽹과리 · 징 · 장고 · 북 · 소고호적 등이다.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주산 지신풀이 : 주산신께 지신밟기함을 고하여 신력을 얻는 굿이다.
② 당산 지신밟기 : 주산에 이어 풍물잡이들이 잦은몰이장단을 울리면 잡색들은 허튼춤을 추며 당산풀이를 한다.
③ 우물 지신풀이 : 마을의 공동우물에 가서 지신을 푼다.
④ 가정집 지신풀이 : 우물 지신풀이를 마치고 “×선생댁으로 갑시다.” 하며 그곳으로 향한다. 맨 먼저 마당풀이로 시작하여, 대청놀이, 큰방 · 성주풀이, 각방 치장풀이, 조왕 · 샘 · 장독 · 도장(곳간) · 마구간 · 뒷간 · 삽짝 지신풀이를 하고 주신(酒神)풀이로 마친다.
동래지신밟기의 특징은 그 복식에 있어서,
일반적 농악대가 착용하는 채복(彩服)이 아니라, 주로 바지와 저고리에 쾌자 또는 두루마기를 입으며, 채복 띠를 두르지 않고 머리에는 농악대의 전립 대신 고깔을 쓴다.
그것들은 한량들의 풍채를 본뜬 것이다. 더구나, 풍물놀이나 버꾸놀이(법고놀이) 보다는
춤을 위주로 하고 있다. 1970년 12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전승하고 있다.
동래구청 조형물
위대한 생명의 탄생을 뜻하는 둥근 형상의
조형물은 학의 알을 의미하고,여기에 동래
구민의 한결같은 의지 꿋꿋한 기상을 뜻하는
소나무와 역사와 전통을 가꾸어 온 티 없이 맑은 선비의 모습,구민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학의이미지를 담아,동래구청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건승을 기원한다
동래부 객사터
조선시대 전폐를 모셔두고 배례를 올렸으며 중앙관원들의 유숙과 외객을 영접하여 회의실로 사용하던 곳으로 일명 봉래관이라고 불리웠던 곳
동래부동헌 충신당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1910년 10월 일제는 오랜 행정중심으로서의 위상과 정통성을 말살하고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동래부를 없애고 동래군으로 격하시켰다.
동헌의 중심 건물인 충신당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래부 동헌에는 문루였던 망미루, 동래부 동헌 외대문 등이 부속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졌다. 2014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전해왔다
부윤 윤공필 청덕선정비
비의 앞면에는 ‘부윤 윤공필은 청덕선정비(府尹尹公弼殷淸德善政碑)’라는 비제(碑題)와 함께 “우리 마을 영화로운 은혜 입어/ 큰비와 같은 보답을 생각하였네/ 마음은 얼음과 황벽(黃蘗)처럼 청렴하시고/ 정사는 느슨하고 편하게 하셨네/ 아녀자와 아이들 송덕하고/
노인들은 공적을 기록하네/ 이웃 마을 다투어 축하드리니/ 그 모습 그려 영원히 전하리라[桑梓荷榮 擬酬鴻霈 心淸氷櫱 政簡裘帶 誦恩婦孺 紀績耆艾 鄰邦競賀 永傳圖繪]”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광무 4년[1900] 8월 일 읍내 면 각 동민 등이 세움[光武 四年 八月 日 邑內面 各洞民人等 立]”이라고 되어 있다.
동래부 동헌 외대문
솟을삼문 중앙에는 "동래 독진대아문"
이라 쓴 현판이 중앙에 걸려 있는데 이것은
18세기 동래부에서 활약한 무관이자 화가인 변박이 썼다
뜻은 1655년 (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의 지휘 아래 있던 경주 진관 소속에서 독립하여 동래 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 아래 좌우의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영"과 "교린연향선위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뜻은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영이고, 대일외교 때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이다. 이 문은 우리 고장에 남아 있는 전형적인 관아 대문이다.
규모는 작으나, 3문형식의 흔하지 않은 건물이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1칸이다.
지붕은 솟을대문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본래 동래부 동헌의 대문으로 망미루 뒤쪽에 있었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졌다가 2014년 8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