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에 우리 모두 엉망이었다. 추위는 여전했지만 그것(이)을 위해서는 충분히 따듯했다. 난 몸에 기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해충에 대한 커다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보이는 족족 이를 두들겨 패 잡는 순수한 야만에 대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다른 해충인 모기는 더 큰 고통을 안기지만 최소한 몸에 거주하지는 않는다. 사람 몸에 거주하는 이는 마치 작은 게와 같았다. 그 놈은 주로 바지 안에서 산다. 당신의 옷 전부를 태우지 않고는 이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바지의 솔기를 따라 반짝이는 흰색 알을 낳는데, 마치 하얀 쌀알 같다. 그게 부화하여 엄청난 속도로 가족을 불려나간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평화주의자는 확대한 이 사진으로 소책자에 삽화를 넣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전쟁의 영광, 사실이로다! 전쟁에서 최소한 (이가 살아가기에) 충분히 따듯할 때 모든 군인은 끔찍했다. 베르둔, 워털루, 플로든, 센락, 테모필레에서 싸운 병사 모두는 이에게 고환을 물어 뜯겼다. 우리는 알을 태워 없애고 할 수 있는 한 자주 목욕을 하여 그 짐승을 어느 정도 감소시켰다. 이를 없애겠다는 일념이 아니고서는 나를 얼음처럼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부족해졌다. 군화, 군복, 담배, 비누, 양초, 성량, 올리브유 등등. 군복은 넝마로 변했고dropping to pieces, 병사 중 다수가 군화가 없어 끈으로 맨 샌들을 신었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다 헤진 군화 더미에 당신은 익숙해질 것이다. 한번은 대피소에서 이틀 내내 불을 피웠는데 (땔감이) 주로 군화였다. 군화는 매우 좋은 연료였다. 이 즈음 부인이 바로셀로나에 있었다. 가끔 나에게 차, 초콜릿을 보내주었고, 입수할 수 있을 때에는 담배도 보내주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도 물자들은 부족해져 갔고, 특히 담배가 더 심했다. 차는 뜻밖의 선물godsend이었다. 비록 우리에게 우유가 없었고 설탕도 매우 드물었지만 말이다. 소포꾸러미는 꾸준하게 영국에서 대륙에 있는 병사에게 보내졌지만, 결코 도착하지 않았다. 음식과 옷과 담배-모든 물품은 우체국에서 거부되거나 프랑스에서 빼앗았다. 이상하게도 차 꾸러미-심지어 기념할만한 한 번의 기회였지만, 주석 통에 든 비스킷도-를 부인에게 보내는 데 성공한 유일한 회사는 육해군 구매 조합 매점Army and Navy Stores이었다. 변변치 못한 육해군 구매조합매점이라니! 그들은 고상하게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했지만 아마도 그들은 대치 장벽의 프랑코 쪽으로 물건이 갔다면 행복함을 더 느꼈을 것이다. 담배 부족이 가장 나쁜 일이었다. 개전 초기에 우리는 하루에 한 갑을 보급받았는데, 하루에 8개비로 줄더니, 다섯 개비로 줄었다. 마침내 담배가 전혀 보급되지 않는 날이 거의 열흘이나 되었다.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런던에서 보던 일들을 보았는데 그게 바로 담배꽁초를 줍는 사람들이다.
내 팔을 삼각건으로 매달고 있는 동안, 들판을 배회하면서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냈다. 몬플로리테는 보통 돌과 진흙으로 만든 집이 모여 있었고, 화물자동차가 휘저어 놓아 달의 분화구처럼 보이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집 사이로 나 있었다. 교회는 심하게 두들겨 맞았는데 군대의 매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웃이라야 아무런 크기의 농장의 집 두 채가 있을 뿐이었다. 로렌조 타워와 파비안 타워 그리고 한 때 들판 너머의 땅을 지배했을 지주의 집이 분명한 오직 두 채의 정말 큰 건물은 비참한 농민의 오두막에 비추어 그들의 부유함을 알 수 있다. 강 바로 뒤, 전선 가까이에 커다란 밀 방앗간이 있었고, 방앗간에 붙어 시골 저택이 있었다. 쓸모없이 녹슬어 있는 거대하고 값비싼 기계와 불로 훼손된 나무로 만든 밀가루 채를 보니 부끄럽게 느껴졌다. 후에 더 후방에 있는 군대의 땔감을 얻기 위해 그 장소를 조직적으로 파괴 하려고 한 무리의 사병을 화물차에 실어 보냈다. 그들은 방에 있는 마루 판자를 부수기 위해 수류탄을 터뜨렸다. 라 그렌자는 우리의 매점이자 조리실로 쓰였는데 한 때 수녀원이었다. 1에이커(1224평) 이상 되는 커다란 안뜰과 별채가 있었고, 3~40마리의 말이 들어가는 마구간이 딸려 있었다. 스페인의 그 지역 시골 저택은 건축학적으로는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농장 건물은 석회를 바른 돌로 지었고, 둥근 아치와 웅장한 천장 들보가 있고 아마도 몇 세기 동안 변형이 되지 않은 설계 그대로의(built on a plan), 품격이 있는 공간이다. 이따금 의용군이 노획한 건물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파시스트인 (건물의) 전 소유주에게 슬그머니 연민을 느끼게 된다. 라 그란자의 사용하지 않는 방 모두는 임시 변소로 바뀌었다. 그곳은 부서진 가구와 배설물의 경악할만한 아수라장이었다. 인접한 작은 교회는 벽이 포탄 구멍이 송송 나 있었고, 마루는 몇 인치 깊이로 똥이 쌓여있었다. 요리사가 배급 식량을 국자로 푸던 커다란 안뜰에는 녹슨 주석 깡통, 진흙, 노새 똥, 그리고 썩어가는 음식 쓰레기가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상태가 옛 군가를 강조 한다.
그곳에는 쥐가 쥐가 있었지.
고양이만큼이나 큰 쥐가
병참 장교의 매점 안에는!
라 그라자에 있는 쥐는 정말로 고양이 만큼 거대하거나 거의 비슷했다. 오물더미 the bed of muck 위를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는 크게 부풀어 오른 짐승은 너무 뻔뻔스러워 총을 쏘지 않는 한 쫓아버릴 수 없다.
이곳에도 마침내 봄이 정말로 왔다. 하늘의 푸른색은 더 부드러워졌고, 공기는 갑자기 향기로워졌다. grew 개구리는 도랑에서 짝짓기를 하였다. 마을 노새들이 사용하는 마시는 물웅덩이 주위에서 나는 동전 크기의 매우 아름다운 개구리를 발견했다. 너무나 멋져서 어린 풀조차 그 주위에서는 탁하게 dull 보였다. 촌놈들은 달팽이를 잡으러 양동이를 들고 나갔다. 달팽이는 주석 판 위에서 산채로 볶는다. 날씨가 좋아지자 농부들은 들판을 갈기 위해 (ploughing쟁기질을 하러) 나타났다. 내가 확실하게 발견하지 못한 사실은 스페인 농업혁명이 이곳 땅을 집단화하였는지 아니면 농민들이 토지를 단순히 나눠 가졌는지였는데 스페인 농업혁명이 이를 덮어서 감추고 있는 완전한 모호함의 전형이었다. 이곳이 POUM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영역이었기에 나는 이론적으로 집단화하였을 것을 상상했다. 어쨌든 지주는 사라졌고, 들은 경작해야 하였고, 인민들은 만족한 듯 보였다. 우리에 대한 농민들의 친밀감은 끊임없이 나를 놀래켰다. 나이든 농부 중 일부에게 있어서 전쟁은 의미가 없는 듯했으며, 모두에게 암울하고 따분한 생활과 모든 것의 결핍을 생산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가장 좋은 시기에도 농민들은 부대가 그들 지역에서 숙영하는 것을 혐오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변함없이 친절하였다.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는 견딜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농민들과 한 때 그들의 지주들 사이에 위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여 가정했다. 내전은 괴상한 일이었다. 우에스카는 이곳에서 5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곳은 이곳 사람들의 장이 서는 마을이었다. 이곳 사람들 모두 그곳에 친척이 있었으며, 평생 가축과 채소를 팔기 위해 그곳에 갔었다. 그리고 지금 8개월 동안 통과할 수 없는 가시 철망과 기관총의 장벽이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이따금 기억을 놓친다. 한 번은 스페인 사람들이 올리브유로 불을 밝히는 주석철로 만든 등을 옮기는 늙은 여인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등은 어디서 살 수 있죠?” 물으니 “우에스카”라고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웃었다. 마을 소녀들은 석탄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활기차고 곧장 나아가는 걸음걸이와 솔직한 몸가짐을 지닌 멋지고 생동감 있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태도는 혁명의 부산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