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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여행은 돈키호테 발상이 먼저다.
한때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 ‘솔로몬 지혜’냐 ‘돈키호테 발상’이냐 하며 항간에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위치한 유럽 최대의 운하교. 독일 중부 미텔란트 운하와 엘베 하벨 운하를 환상하며 민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 대선공약은 결국 현실이란 암벽에 처참히 쪼개져 4대강사업이란 불명예로 전락하더니 급기야 지금은 만인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처치곤란 애물단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한반도 대운하는 무모한 도전의 본보기로 돈키호테 발상으로 치부되고 만 셈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가당치 않는 엉뚱한 무모함을 나타낼 때 돈키호테를 꼭 동원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애꿎은 4대강사업으로 말미암아 돈키호테가 덤으로 그야말로 좌초하고 말았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어디 무모한 발상의 존재라고만 한정할 것이더냐. 현실에 옭매인 자들이 제일 부러운 게 알고 보면 돈키호테다. 꿈도 못 꾸는 주체로서 발상조차 거부당하는 요즘세상 그만한 존재가치도 없다. 무모함이든 자아실현이든 떠나봐야 제대로 현상을 파악할 것이 아닌가. 올 겨울 우연히 ‘안녕 돈키호테’ 란 글 집을 보았다. 광고계 멘토 박웅현이란 사람을 필두로 몇몇이 쓴 글인데 돈키호테가 비로소 제 빛을 찾는 후련함이 듬뿍 단긴 책이었다. 글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천재들에 관한 신화와 영화, 실제 그들은 잠재한 어느 천재성이라기보다는 발명왕 에디슨처럼 수천 번의 실패, 김연아 선수와 같은 어마어마한 연습량이 뒤따랐다. 즉, 창의성을 끌어내는 다른 무엇이 있다고 저자들은 간파한다. 그의 글 구절 한 대목 . “어느 날, 좋아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을 읽고 있었다.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스페인은 여러 국가들의 돈키호테다… 안전과 복지를 우습게 여기면서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영원히 좇는다.” 몇 쪽을 넘기자, 또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콜럼버스, 그는 바다의 돈키호테였다.”
질서정연하지 않다는 느낌의 스페인을 샅샅이 뒤졌던 나로선 그야말로 짜릿한 순간이었다. 무모한 도전이라지만 이 항해가 무엇을 낳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돈키호테력(力)은 어디서 나오는가? 1부 “새롭고 재밌는”에서는 ‘재밌는’ 일을 찾아 ‘재밌게’ 살다 보니 ,2부 “사소하고 위대한”에서는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위대함이. 3부 “지치지 않고”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과 늦었다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이를테면 생전에 단 한 편의 그림도 팔지 못했지만 지치지 않고 그렸던 고흐, 쉰네 살에 북극을 탐험한 로알 아문센, 아흔아홉 살에 낸 첫 시집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시바타 도요, 낮에는 막노동으로 밤에는 시인으로 살았던 찰스 부코스키, 낮에는 통행료 징수원으로 밤에는 화가로 살았던 앙리 루소, 그리고 열다섯 개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마흔다섯 살에 데뷔하여 감동의 무대를 펼치고 있는 소리꾼 장사익, 등등 이들의 돈키호테력은 가치 있는 일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구하는 힘이었다. 4부 “무모하게”는 남들이 감히 선뜻 하지 못했던 모험을 감행한 돈키호테들, 제주 올레길의 신선함을 어디에서 나왔으며, “병균으로 병균을 이기겠다는” 에드워드 제너의 역발상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었으며,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던 세종...
늘 염두에 둔 어리석은 발상의 소지자로서의 돈키호테 , 탁하고 한 대 되게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를 무릅쓸 용기, 고집, 무모함, 끈기를 말하는 그들은 한 결 같이 쉬지 않고 그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돈키호테는 발상이 아니라 실행력이고 이는 창의력의 원동력이며 또 다른 나의 잠재력이다. 나의 자산, 일상에서 아는 그대로일 뿐이다. 일상이 그러하듯 우리는 어차피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던져 버리고 싶은 과거를 통째로 부정할 수도 현실을 도외시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새로움을 직면할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일까.
사실 어느 면 우리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쌓아 온 ‘좋은 자산’조차 잘 모르고 사는 헛물인지도 모른다. 나를 잘 아는 것은 어느면 내 스스로가 아니고 아내와 직장동료들인 것도 같다. 남에게 비추어진 나로서 나를 아는 나는 너무도 남을 의식하고 개체적으로 살아간다 싶다. 참으로 애석하다고 여긴다. 그렇게 나는 형식과 위치선상에 너무 익숙해 있다. 얼마전에도 아내는 말했다. "이제는 시아버지인데 점잖게 더더욱 그런 말을 해서야..." 내가 어때서. 그런 나는 여행을 늘 꿈꾼다. 그러면서 말하곤 한다. 나를 재발견하고자 함이라고. 소중히 간직하는 하지만 발설은커녕 여태 보여주기도 꺼려하였던 나의 어느 것이 새로운 환경으로부터 불쑥 생각지도 못한 많은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곤 한다. 이는 현실의 구태의연함으로서 더욱 강렬해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결코 내 안에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어처구니없이 물감 풀리듯 스르르 온 마음을 적셔 푸르게 빛나고 때론 더욱 단단해져 그렇게 만든 단단하게 다져진 자산이야말로 인생에서 크나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바로 돈키호테는 발상이 아니라 내 잠재력의 설천에 그 승패가 달려 있다.
매번 연말이면 갖는 소외내지 반복적 자폐로부터 나는 뭔가 구원을 받았다 여겼다.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드디어 올해 초 내 뜻한 바 일을 치르기로 작정하고 과감히 아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 5월 달에 만주 또 나갈 거야.” 이는 아내로선 돈키호테 발상에 불과 한 허무맹랑함이다. 그러기에 아내는 말했다. “미쳤구만, 갔다 온지 2달도 안됐는데 돈 벌러 가는 것도 아니고,,요즘 정신이 어디에 있는거야.” 이어서 다그치는 말, 누구랑 가느냐는 말에 말문이 완전히 막혔다. 아마 그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쯤 풀 죽어 포기를 했을 테다. 이럴 때는 아무 것도 아니란 듯 스스럼 없이 말을 해야 한다. 나는 당당히 말했다. “고구려 책(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 다 팔렸는데 정작 글 쓴 사람이 고구려 원적지를 가보지 않는데서야 말이 되나. 만주는 독립군 고구려의 독립적의지가 담긴 거룩한 땅, 내땅. 나도 독립해서 혼자 간다.”
사실 돈키호테의 절대지존에는 무모한 용감함이 첫째가 아닌가. 사실 중국어도 모르고 별도 안내자도 없고 동행도 없이 만주 땅을 간다는 것은 무모함이다. 하지만 지난 번 다녀온 연변이 나를 자꾸 잡아끈다. 한마디로 올해 반쯤 만주 땅에 미쳐 있다는 것을 부인 못하겠다. 어디서 오라는 것도 아니고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돈키호테 발상이다. 나는 5월 8일 청주에서 연변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또 다시 올랐다. 숙소는 지난 번 묵었던 민박집으로 하고 어디부터 살펴 볼 텐가, 처음으로 생각해본 이번 여정이다. 두려움도 있지만 그보다는 홀가분하다는 생각이 더 앞선다.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산초야, 자유는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중의 하나란다. 땅속에 보물이 묻혀 있거나 바다 속에 숨겨진 보물도 이것에 비할 수 없단다. 명예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지만, 굴레란 인간에게 덮칠 수 있는 최대의 악이란다`>
42. 백두산 북파를 향하며
사실 명인들이야 ‘반대를 무릅쓸 용기, 고집, 무모함, 끈기.’ 란 단어가 합심하여 더 빛날 노릇이지만 과연 내가 그럴만한 존재인가. 그냥 돈키호테의 발상쯤으로 생각해두는 게 속 편하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혼자 여행을 할라치면 매사 치밀해야한다. 부단(不断) 함 이라는 말의 묘미, 바위가 패이는 것은 떨어지는 물이 부단히 바위로 떨어졌기 때문이지 않은가. 나로서는 태부족인 아마도 그들에게는 바로 그런 부단함이 있을 테다.
5월 8일 저녁 8시 연길의 천지민박에 바로 도착해서다. 나는 당연 덜 피로할 여행 초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게 맞다 싶었다. 그래서 연길을 오기 전 미리 민박집에 전화를 해 고구려의 본산인 집안을 향하는 루트를 알아보았었다. 당시 민박집에서는 매일 아침 9시 집안을 향하는 버스가 있으며 기차는 용정에서 오후 3시 40분에 출발을 해 통화를 거쳐 집안을 간다고 했다. 난 그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만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알아보니 집안을 향하는 시외버스는 수요일인 5월 9일에는 없다. 순간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기실 연길에서 집안을 향하는 것은 무리다. 그것도 대낮에 장장 9시간 이상을 탄다는 것은 효율적인 면에서도 안 맞다. 아니 연길에서 집안을 향한다는 것 자체가 극히 비효율적이다. 그러기에 인터넷상에서는 연길에서 집안을 향했다는 글 한 줄이 없다. 대개는 단동이나 대련 또는 장춘으로 와서 거기에서 통화로 그리고 집안을 보고 백두산 서파 등정을 마치고 백두산 북파로 나와서 용정을 구경하고들 연길에서 집으로 향한다. 이는 패키지 투어로 자가용 같은 전용버스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예정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렇지만 돈키호테 발상은 고집 무모함 끈기가 힘이 되지 않는가.
나는 순간적으로 백두산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백두산을 다녀오고 다음으로 집안을 향하자. 민박집 여주인은 급히 백두산 예약을 했다.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었다. 중국 돈 330위안으로 민박집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이름이 사뭇 거창하다 싶은 ‘동북아 시외버스 터미날, 새벽 4시 40분 향발’. 장백산로라는 민박동네 근처에서 18위안짜리 물만두를 먹으며 내일 준비물을 떠올렸다. 익히 알고들 있다, 그곳은 춥다는 것을. 내복을 입고 털모자에 장갑 그리고 외투를 배낭에 넣고 만약을 대비해 두꺼운 양말하나와 긴 소매 티셔츠도 하나 더. 간식 꺼리를 마저 챙길까 하다 그 네가 관광지인데 설마 먹을 게 없을까 싶어 더 이상 부피는 늘리지 않기로 했다.
이른 새벽녘 깜깜 할 줄 알았는데 먼동이 트는지 훤했다. 우리는 벚꽃이 다 지고 장미만 제 모습을 준비 중인데 이곳 연길은 이제 막 봄의 시작이다. 새벽은 초겨울이고 낮은 초여름 저녁은 가을이라면 딱 맞다. 아무튼 그 시각은 추웠다. 두꺼운 내의가 다행스럽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다 터미널에서 올라 탄 16인승 승합차, 당연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말도 전혀 안 통하는 상황이다 싶은데 불쑥 과자 봉지 부스럭거리듯 얼핏 들리는 한국 말, 분명 급할 때 불쑥 튀어나온 한국말이다. 그런 그들은 이후 한국말을 쓰지를 않아 판정하기 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역시 내 귀의 본능은 정확했다. 14명 중 두 명은 분명 한국 사람이다. 이 얼마나 행운인가.
이국에서 그것도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의 동포의 만남은 큰 느낌을 낳는다. 둘은 남매지간으로 오빠의 환갑을 축하하기위해 여동생이 같이 나선 길이었다. 오빠는 훈춘에 살고 여동생은 한국에서 온지 불과 5일도 안됐다고 했다. 우리나라 어디에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대뜸 ‘대소’라 했다. 대소라 하면 그 누구도 어딜까 할 장소로 아주 작은 동네인데 그녀는 분명 대한민국의 지리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어도 보였다. 이럴 때 대충 중국동포들은 서울 아니면 충청도 이런 정도로 가늠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녀는 음성도 청주도 아니고 정확한 장소를 끄집어내 대소라 했다.
순간 느껴지는 몇 몇이다. 내가 느낀 바로는 중국동포들은 대한민국 생활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에는 불법체류 문제도 한몫하고 생활의 비천함도 같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충 서울 아니면 경기도 등등으로 더 이상은 알려들지 말라는 경계감을 드러내곤 한다. 지난 번 들은 이야기가 마음의 송곳으로 여전히 작용한다. “친해지려 해도 얕잡아보고 깐본단 말이죠. 중국에서도 지지 않으려 억세게 살았는데 대한민국은 더 사람을 우습게 봅네다.” 불과 서너 번의 만주 방문이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참 애석하다 싶은 게 우리나라 동포라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경계심리가 강하다는 그런 묘한 의식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매달 2백 만 원 씩 송금한 덕분으로 그럭저럭 살면서도 전혀 고맙게 느끼는 것 같지 않는 그런 뉘앙스, 안타깝지만 이를 어찌 좋게 달리 설명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괄시 받고 서러운 양상을 비추어 볼 때 그녀는 참 순진했고 따스하다싶다. 그런 그녀가 밑도 끝도 없이 대소라 할 때 사실 나는 너무 기뻤다. 그곳은 아버지 산소가 있는 동네로 내가 너무 잘 아는 동네다. “거기가 음성에 삼성면 쪽 대소를 말하는가요.” 이 말에 그녀 또한 너무 놀라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거의 알아차린 것 같은 말투, 이는 내 실수다. 분명 그녀는 대한민국에서의 어느 위치 선상으로서 그러니까 여타 깐보는 현상의 동일선상 으로서 나 역시도 자리매김하고 작용할 것으로 예의 생각하고 간격이 벌어질 참이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하고 무던했다.“ 이렇게 스트레스 풀고 또 가서 돈 벌어야죠.” 똑 같은 삶인데 처함에 있어 그녀와 내가 다른 위치선상을 만든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음성 삼성시장에서 만나서도 내가 지금 같은 다소곳한 표정으로 그녀를 대할 것이던가. 나는 정녕 그렇다고 말을 못한다. 아무튼 나는 그들 덕분에 여정은 하루 내내 편했다.
아침도 굶은 처지, 차는 용정을 들러서는 시멘트 길을 터덜거리며 줄곧 달렸다. 굽이굽이 돌아 공간전체가 산으로 휘장을 친 곳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무던히 산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산 밑 다양한 나무들은 어느새 자작나무와 소나무로 가름을 하며 도열하고 미처 가시지 않은 안개가 허공을 잘랐다. 사람들은 누구나 똑 같다. 오줌이 마렵다 싶었는데 역시 그쯤 차는 멈춰 섰다. 배도 고팠다. 내가 들른 휴게소 겸 식당, "붕원반점(130-8933-8777,0433-570-7048)" .곳은 말하자면 二道白河 못 미쳐 연길방향 三道(백두산 북파 주차장에서 1시간정도)에 위치한 곳으로 여름 송이버섯과 자연산 산천어 그리고 토종닭 백숙이 일품이라고 그림광고에 새겨져있었다.
붕鵬이란 단어가 들어간 음식점, 상상 속의 붕새. 나로선 그곳이 그럴 새가 날아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안개 자욱한 언덕에 외로이 선 식당의 주인은 중국동포였다. 백두산의 길목을 지키는 양 수십 년 째 이 산속에 틀어박혀 산다는 그런 그들의 말씨는 또렷한 조선의 생명감으로만 느껴졌다. 화장실은 내 어린 시절 그대로인 채였는데 오히려 정겹게만 느껴졌다. 그녀 오빠는 대변을 보면서도 오줌 싸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대변을 보면 꼭 문을 잠그고 안간힘을 쓰는 소리를 안 내보내려 안간 힘을 다 쓰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덧붙여 자기는 파평 윤 씨라고 했다. 그게 자기 내력을 아는 전부라고도 했다. 어디서 어떻게 온지도 모른다는 그가 한국말을 잃지 않은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싶다. 왜 그들은 조선인임을 자처한 것일까.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같은 민족임을 말한다. 같은 민족은 식성도 거의 같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손짓으로 똑같은 것을 주문했다. 무슨 음식인지 알고 하는 게 아니었다. 기름 끼가 있어 어쩔까 싶었는데 놀라웠다. 바로 설농탕이었다. 백두산 초입에서 먹는 우리음식 설농탕, 감회가 달랐다. 중국 동북삼성은 분명 남방이나 북경과는 음식이 다르다. 그런데 백두산으로 접어들수록 고사리 도라지 등등 채종이 한 결 같이 지리산 기슭 산나물 무침과 다를 바 없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다. 먹는 것처럼 주어진 환경을 쫓는 자연스런 유전자는 이 세상에 없다. 나는 만주지역을 돌며 이 생각을 하곤 했다.
산등성을 돌자 거대한 평원지대가 나왔다. 대단한 위용이다. 포진한 아우라가 백두산의 아성을 말한다. 둘레 길로 치자면 장장 수천 킬로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서파로부터 북파, 기차로서도 9시간이상 거리이니 알만도 하다. 평원을 지나자 큰 도시도 보였다. 이도백하, 순이네 랭면이 크게 자리잡고 사슴 뿔에 산짐승을 주제로 한 식당도 눈에 띄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내걸린 산짐승을 보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보는 백두산은 설원이었다. 드디어 백두산 입구, 벌써 온도가 확연히 다르다. 겨울외투를 100위안 주고 하나 빌렸다. 당연하게들 그렇게 하니 나도 따라한 것이다. 그렇게 추운 것일까. 순회하는 차를 타고 드디어 백두산을 향한다. 아직 제 철이 아니라서인지 그렇게 많은 인파는 아니다. 이 높은 고산에 부대낌은 어울리지 않다. 다행이다 싶었다. 중국동포 둘 그리고 나는 한 조가 되어 산을 오른다. 온천수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샘터를 지나 또 오른다. 장백폭포가 바로 눈앞이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를 보는가. 괜스레 가슴까지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