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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造船) 신화를 만들어낸 지금은 보기 힘든 500원권 지폐
◈ 정주영과 거북선 지폐 ◈
1970년대 초 어느 날 밤, 정주영은 청와대 뒤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었어요.
무거운 침묵이 오래 동안 흘렀지요.
박 대통령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담배를 하나 피워 물더니 정주영에게도 한 대를 권했어요.
정주영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원래 과묵한 박 대통령이지만 이날은 더욱 말이 없이 시간만 흘렀어요.
정주영은 박 대통령이 불을 붙여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는데, 드디어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어요.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총수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 데, 그거 하나 못하겠다고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를 해요?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
'임자는 하면 된다'는 불굴의 투사 아니오? ”
실은 정주영도 조선소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요.
그러나 그건 제반 여건 상 지금은 아니고 나중 일이었어요.
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압박 아닌 압박을 하고 있었지요.
이유는 있었어요. 곧 포항 제철이 완성되는 때였지요.
포항 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 줄 산업이 필요했던 거지요.
당시 김학렬 경제 부총리는 먼저 삼성 이병철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어요.
정주영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결국 정주영은 그날 박 대통령에게 승낙을 하고 말았어요.
" 각하의 뜻에 따라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
그리고 그는 결심했어요.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
그까짓 철판으로 만든 큰 탱크를 바다에 띄우고 동력으로 달리는 게 배지!! 뭐. 배가 별거야. ”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치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주영의 특기가 발휘되었지요.
정주영은 조선 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 게 아니라 건설 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했어요.
배를 큰 탱크로 생각하고 정유 공장 세울 때처럼 도면대로 철판을 잘라서 용접을 하면 되고,
배의 내부 기계는 건물에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지을만한 돈이 없었어요.
대형 조선소를 지으려면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데 해외에서 차관 얻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지요.
그래서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도 갔어요.
그렇지만 아무도 정주영을 상대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미친놈 취급만 당했지요.
“ 너희 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 십만 톤의 조선소를 지을 수 있느냐? ”는 식이었어요.
정주영은 약이 올랐지요. 그때부터 하면 된다는 모험심이 발동했어요.
" 안된다고?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데... "
당장 필요한 건 돈이었어요.
해외에서 차관을 얻으려면 3번에 걸친 관문을 뛰어넘어야 했지요.
일본과 미국에서 외면당한 정주영은 영국 은행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어요.
그러나 영국 은행 버클레이즈와 협상을 벌였으나 신통한 반응을 얻을 수 없었어요.
돈을 빌리기 위해선 영국 식 사업 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정주영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 도어에 사업 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어요.
타당성 있는 사업 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얼마 후 사업 계획서는 만들어졌지만 추천서는 해줄 수 없다는 거였지요.
정주영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 회사 A&P 애플 도어 회장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어요.
그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 만의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 사진이 전부였지요.
런던에 도착하여 일주일 만에 A&P 애플 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어렵사리 만났어요.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비관적인 말만 되풀이 하라고 있었지요.
“ 아직 배를 사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또 현대 건설의 상환 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힘들 것 같다 ”는 말이었지요.
그럼 "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도 안됩니까? "
그러자 그는 " 한국 정부도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 고 말했어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지요.
이때 궁하면 통한다는 정주영 식 기지가 발동했어요.
정주영은 문득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500 원짜리 지폐가 생각났어요.
지폐 그림은 바로 거북선이었지요.
정주영은 주머니에서 거북선 그림의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펴놓으며,
" 이걸 잘 보시오!! 이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진 것은 거북선이라는 배인데 철로 만든 함선이지요.
당신 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라고 알고 있소.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 거북선을 만들어냈고,
이 거북선으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을 물리쳤지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바로 이 돈 안에 담겨있다는 말이지요 "
롱바톰 회장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지폐를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앞면에는 한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있고 뒷면에는 바다에 떠있는 배가 그려져 있었지요.
그 모습이 거북이와 많이 닮았어요.
" 정말 당신 네 선조들이 실제로 이 배를 만들어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말입니까? "
" 그렇고 말고요.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만든 배입니다.
한국은 그런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이지요.
불행히도 산업화가 늦어졌고 그로 인해 좋은 아이디어가 묻혀 있었지만 잠재력 만은 충분한 나라입니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된다면 훌륭한 조선소와 최고의 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회장님!! 버클레이 은행에 추천서를 보내주십시오 "
정주영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어요.
롱바톰 회장은 잠시 생각한 뒤 지폐를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지요.
" 당신은 당신 네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할 겁니다 "
롱바톰 회장의 얼굴에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졌어요.
" 거북선도 대단하지만 당신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당신이 정말 좋은 배를 만들기를 응원하겠어.'
그러면서 롱바톰 회장은 얼굴에 환한 미소와 함께 축하 악수를 청하고 있었지요.
수많은 프레젠테이션과 완벽하게 만든 보고서에도 'NO'를 외쳤던 롱바톰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500 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지만 정주영의 번뜩이는 기지의 산물이었지요.
그날 롱바톰 회장은 현대 건설이 고리 원자력 발전소를 시공하고 있고,
발전 계통이나 정유 공장 건설에 풍부한 경험도 있어 대형 조선소를 지어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주었어요.
정주영의 기지로 첫 번째 관문이 통과되는 순간이었지요
며칠 뒤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가 점심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점심 약속 하루 전 정주영은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만사 제쳐 놓고 관광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지요.
그는 현대 건설 수행원들과 셰익스피어 생가와 옥스퍼드대를 둘러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 궁을 보았어요.
이튿날 정주영은 우아한 영국 은행의 중역 식당으로 안내되었지요
자리에 앉자마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물었어요
“ 정 회장의 전공은 경영학입니까? 공학입니까? ”
소학교만을 졸업한 정주영은 짧은 순간 아찔했지요.
그러나 태연하게 되물었어요.
“ 아 ~ 제 전공이오? 그 이전에 우리가 당신네 은행에 제출한 사업 계획서는 보셨습니까?”
“ 아! 네 봤습니다!!”
정주영은 순간적으로 전날 관광하다가 옥스퍼드대 갔을 때 졸업식 광경을 본 생각이 났어요.
“ 어제 내가 그 사업 계획서를 가지고 옥스퍼드대에 갔더니 한 번 척 들쳐보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군요 ”
하면서 태연하게 농담을 했어요.
정주영은 구질구질하게 자신이 학력은 짧지만 사업 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말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그의 큰 배포를 보여주는 유머를 내던졌어요.
그러자 부총재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지요.
“ 옥스퍼드대 경영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 겁니다. 당신은 그들보다
더 훌륭하군요. 당신의 전공은 유머이시군요?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의 사업 계획서를 수출 보증국으로 보낼 테니 행운을 빌겠소!! ”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정주영의 유머 한 마디가 그 어려운 차관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부총재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한 건 자신들이 빌려줄 돈으로 조선소를 만들려는 CEO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였지요.
부총재는 그런 식의 만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CEO라면 대출을 해 주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최종적인 확인을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실 정주영이 은행 쪽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건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네요. 실제로 현대 건설은 치밀한 사업 계획서를 만들었고 그 치밀함을 인정한 은행이 대출을 해주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은행 쪽은 사전에 현대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을 치밀하게 조사했던 거지요.
그러나 최종적인 확신은 정주영의 배포가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두 번째 관문도 통과되었어요.
그러나 아직도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지요.
영국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수출신용보증국 총재는 배를 살 사람의 계약서를 갖고 와야 승인해 줄 수
있다고 했지요.
“ 만약 내가 배를 산다고 가정했을 때 작은 배도 아니고, 4~5천 달러 짜리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치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고 또 조선소도 없는 당신에게 배를 주문하지는 않을 거요.
설사 당신네가 배를 만들 수 있다 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원리금을 갚을 수 있겠소?
입장을 바꾸어 당신이 나라면 배를 주문할 사람이 없는데 보증을 해주겠소?
그러니까 배를 살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차관을 승인할 수 없소 ”
정말 난감했지만 정확한 지적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도 가난한 나라였지요.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배를 만든다고 해도 그 배를 믿고 사갈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정주영은 다시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바닷가의 사진을 꺼내 보았어요.
그러면서 자신처럼 정신 나간 사람을 찾아야 했지요.
그렇지만 "내가 누구냐? 천하의 정주영 아니냐?
여기서 무너질 내가 아니지!! "
그날부터 마음을 다잡아 먹고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던 거지요.
허허벌판 모래사장 사진 한 장을 내밀며
“당신이 내 배를 사주겠다고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소 ”
미친놈 취급 당하기 딱 좋은 말이었지요
그런데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고 세 번 만나니까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다름 아닌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였지요.
리바노스가 정주영의 배포를 믿고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계약을 했어요. 선박에는 세계적인
리바노스지만 정주영의 사람 됨됨이에 밀려 파격적으로 정주영과 계약을 맺었어요.
하지만 정주영 역시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지요.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겠다. 배 값을 싸게 해 주겠다.
만약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겠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다.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 상황을 보고 조금씩 배 값을 내라.
우리가 만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 해도 좋고 원금은 몽땅 되돌려주겠다 ”
정주영은 리바노스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있는 그의 별장에 가서 유조선 2 척을
주문받았지요. 이렇게 해서 마지막 관문을 넘어섰다 하네요.
정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신화적인 이야기지요.
그 뒤부터 정주영은 부하 직원이 어렵다고 하면 "임자, 해보기나 했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하네요.
정주영은 귀국하여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대문 앞까지 달려 나와 그를 맞았지요.
그때 지도를 놓고 볼펜으로 그리며 본인의 구상을 설명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비서들에게 정 회장이 볼펜으로 그리는 대로 공장을 짓게 해 주고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지시를 했다 하네요.
훗날 박대통령은 울산 현장에 자주 들러 막걸리를 같이 나누며 정주영을 격려했다 하지요.
하지만 그건 준비 작업에 불과했어요. 앞으로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짓고 그 조선소에서 다시 배를
만들어야 했지요.
그러나 정주영은 이때 그의 특기인 역발상 창의력을 발휘했어요.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이지요.
“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 건조는 선박 건조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
그러면서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진행시켰어요
제일 먼저 스웨덴에서 배 만드는 설계사를 데려왔지요.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배 만드는 공장도 없으면서 모래사장의 모래를 포클레인으로 퍼내고 웅덩이를 파 놓고
거기에 올라오는 물을 펌프로 퍼내 가면서 그 웅덩이 속에서 최초의 배를 만들었어요.
공장도 없이, 독도 없이, 모래를 퍼내 놓고 그 속에서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한 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바다를 준설하고 안 벽을 만들고, 독을 파고, 14만 평의 공장을 지었지요.
거의 모든 직원들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얼굴을 씻고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 구두끈도 못 푼 채 잠을 자며 배를 만들었어요.
정주영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어쩌다 서울에 오면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갔어요.
이른 새벽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면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길을 지나는 장사꾼들을 보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정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젖이 뜨거워졌어요.
저렇게 새벽부터 열심히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 갈 수 있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임에
너무 가슴이 아팠지요
“ 그래!! 모든 이들의 삶은 다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하루 벌이를
위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열심인데…….”
훗날 정주영은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유대감과 존경심을 많이 느꼈다고 하네요. 그때마다
"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 "
하는 생각으로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고 했어요.
최초의 배가 완성되던 날 막아 놓았던 바닷물을 딱 텄지요.
물이 웅덩이로 쏴 들어오면서 배가 붕 떴어요. 그리고 잠시 후 붕 뜬 배가 바다 쪽으로 쑥 밀려나갔지요.
세상이 온통 뒤집혔지요.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 앉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눈물바다가 되었어요.
단 한 척의 배도 만들지 못했던 우리가 세계적인 대형 선박을 만든 것이지요.
이것이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성장하게 된 바탕이라 하네요.
건조 능력 70만 톤, 부지 60만 평, 70만 톤급 드라이 독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준공을 본 것은
1974년 6월. 기공 식을 한 1972부터 2년 3개월 만이었지요.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 식에 참석하여
조선입국(造船立國)’이라는 휘호를 써 주었어요.
현대조선은 그렇게 세워졌어요. 그러나 한창 잘 나가는 듯하던 조선 사업에 위기가 닦쳐 왔지요.
이는 바로 1973년에 불어 닥친 오일 쇼크였어요.
오일 쇼크로 인해 유조선을 주문했던 사람들이 배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취소가 잇따랐지요.
현대조선이 만든 배 가운데 3 척이 울산 앞바다에 그냥 떠 있었어요.
그중 1 척은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가 주문한 유조선이었지요.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인 현대조선으로서는 휘청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역발상을 생각했어요.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를 갖고 새로운 사업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지요. 1976년 3월 인도하지 않은 초대형 유조선 3 척을 가지고 아시아
상선을 설립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이던 외국 선박 회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지요.
아시아 상선에 수송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1400만 달러를 요구했어요.
그렇지만 정주영은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 지지 내가 택시를 타다가 자가용을 구입했는데 택시 회사에 돈을 주어야 하나?
그동안은 우리한테 유조선이 없어서 자기네 배를 택시처럼 돈 주고 빌려 쓴 것인데, 우리가 배를 만들고
우리 배로 우리 기름을 운반하겠다는 데 돈을 달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요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였지요.
정주영은 뚝심으로 버텼지요. 8개월을 버텼더니 3백만 달러로 떨어졌어요.
그래도 옴짝달싹 안 하고 버텼지요. 결국에는 10원도 안 주고 우리 기름을 현대 아시아 상선에서 운송할
수 있었어요.
거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뚝심도 큰 힘이 되었다 하네요.
그렇게 출발했던 아시아 상선은 지금 현대상선이 되었지요.
오일 쇼크로 몹시 정주영을 힘들게 했던 현대조선은 요즘 세계적인 현대중공업이 되었고요.
이것저것 구실을 붙여 다 만들어진 유조선을 안 찾아가려고 떼를 썼던 리바노스.
그러나 정주영은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네요.
어쨌든 황량한 모래 벌판 사진 한 장을 보고 배를 주문해 주었던 지난날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7년 5월 25일,
현대중공업 독에서 우리 해군의 이지스함이 진수 됐어요.
정주영이 처음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우리 해군은 미군이 폐기 처리한 구축함을 가져다 페인트 칠을
해서 쓰고 있었지요.
천지개벽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봐요.
이날 진수식에서 정몽준 회장은 500원짜리 거북선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그리워했다 하네요.
지금 전 세계 바다에 새로 나오는 배 5척 중 1척이 현대중공업 제품이고, 10척 중 4척이 한국 산이라 하지요.
한국 조선소들은 중국에 싼 가격으로 수주를 맞긴 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지요.
그래도 주문이 너무 밀려 배를 만들 독이 없다 하네요.
길이 200m에 15층 높이의 배를 땅 위에서 조립해 바다로 끌고 가 띄우는데 이런 신 공법은 한국조선소에
서만 하고 있으며 선박 엔진 또한 세계 최고라 하지요.
엔진을 만드는 공장의 상무는 이 기술자들은 “나라의 보물”이라고 했어요.
이들이 세계 선박 엔진 시장의 45%를 싹쓸이하고 있다 하네요.
지금 세계의 선주(船主)들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어요.
모래 바람이 휘날리던 미포 만은 이제 배 조립 품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지요.
그곳에선 3 일마다 1억 달러짜리 거대한 배가 한 척씩 쏟아지고 있어요.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배를 찍어 낸다”라고 하지요.
세계 조선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하네요.
한 척의 배를 만든 이익 금으로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정주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라 했나 봐요.
그리고 또 1984년 " 정주영 유조선 공법"이라는 내용으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지요.
당시 충남 서산 간척 사업 A지구 매립 공사는 6.4㎞를 연결함으로써 완공되는 사업이었지요.
이 사업으로 생기는 육지는 여의도 면적의 43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땅이었어요.
바다를 막아 옥토를 만드는 국가사업에 마지막 물 막이 공사에 문제가 생겼어요.
이곳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드나드는 물의 양이 3억 4천만 톤, 밀물 시의 유속은 초 당 8미터에 달해
20톤에 달하는 돌망태를 넣어도 그대로 물에 휩쓸려갔지요.
흔히 최종 물 막이 공법은 케이블과 바지 선 등 해상 장비로 물 막이 구간의 바닥을 점차 높여가는
점고식(漸高式) , 또 덤프트럭 등 육상 장비를 이용해 점차 구간을 좁혀가며 축조하는 저축식(漸縮式)
그리고 이들 두 방법을 같이 쓰는 병행식 등이 있어요.
하지만 서산 간척지 공사는 빠른 유속으로 인하여 통상적인 공사 방법으로는 엄청난 비용과 작업 기간이
오래 동안 소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지요.
이때 정주영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아 놓고 물 막이 공사를 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어요.
이 획기적인 공법의 사용으로 계획 공기 45개월 가운데 36개월을 단축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방조제를
쌓는 성과를 올렸으며, 280억 원의 경비도 절약함으로써 전 세계를 놀라게 했지요.
정말 정주영 다운 배포요 정주영 다운 공법이었지요.
이 기술은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아 "유조선 공법"으로 명명되어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배우고 있다 하네요.
아무튼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별은 가고 없어요.
2001년 3월 21일 당신이 설립한 서울 아산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요.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 때 미국 CNN 방송이 한 시간 이상을 특집으로 방송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네요.
호는 아산(峨山)이며 1915년 11월 25일에 농부인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지요.
8세에 통천송전소학교(通川松田小學敎)에 입학하여 13세에 졸업하였으며,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 생은
27명 그의 정식 최종 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유일하지요.
2000년 5월에 현대명예회장직에서 물려 났고 1987년 제1회 한국 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 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사후에는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 되었지요.
이후 5년 뒤인 2006년 11월에 미국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 되었지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면 된다는 신화를 창조하신 거인 정주영!!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경제 대인이지요
∼출처 : 옮겨온 글∼
듣고 또 들으면 어떠리.
아는 이야기라도 좋으면 들어도 들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 걸.
정주영 회장님의 어록에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말이 있지요.
여기 나오는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정말 사실인데도 정말 사실이냐고 묻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사실인데도 사실이냐고 묻고 싶은 이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이 있으셨고 정주영 회장님이 계셨기에
헐벗고 굶주렸던 우리 민족을 이만큼 살게 해 놓으셨는데,
어쩌다 나라가 이 꼴이 되어 아프리카에 떠도는 하이에나 보다 더 악랄한 정치 모리배가
횃불이라는 하얀 이빨을 드리 대고 이 국민을 씹어 삼키려 하는지 모르겠구나.
아 슬픈지고!
언제 다시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나오고 정주영 같은 수행 자가 나와 이 나라를 다시 한번
구할 수가 없는 것일까?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쇠뭉치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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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코디언 음악 사랑 원문 보기▶ 글 쓴 이 : xjms

첫댓글 이제 다 살았지만
사는날동안 감명 감명을
다른일 다른말 할 새 없이 게속 을퍼도 모자랄 감명 해야할 유일 무이한 일이지요
山愛家님! 찾아주시고 동감의 말씀 남겨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어제인가 말씀 올려드린 바 있듯이 제 가장 친한 친구 '사니조아' 와 같은 닉네임을 쓰셔
친근감이 많이 갑니다.
이제 다 살았다 하시지 마세요. 우리는 이제부터 사는 거에요. 건안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