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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묵상글 (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 영적인 식별. 등 )
* 이수철 신부님: 아직 / 09:55 추가
* 강만연 님: 10:0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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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6 04:11
- 영적인 식별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발상(發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선한 발상이라는 말도 있고,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도 있듯
어떤 생각이 생겨나온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엇이 있다면 생겨나온 것입니다.
발생(發生)이나 발출(發出)과 같은 뜻입니다.
관건은 자가발생이냐 아니냐입니다.
자체 발광처럼 자체적으로 생겨난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고 외부에서 오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요한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사람인지 세속적인 사람인지 물으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우리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돼야겠지요.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온 것인지,
일상적으로는 지금 떠오른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데 이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어디서 온 것인지,
심지어 지금 나의 사랑은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하고,
하느님에게서 온 건지 내게서 온 건지 묻는 사람이 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물은 다음에는 그것들이 영적인지 세속적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겠지요.
앞에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의 사랑도 어디서 온 사랑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일 중요시하고 제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소유하려는 사랑은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지요.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굴리에모 아빠스는
성령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신 사랑의 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최고선이시고 궁극선이신 당신이 지니신 사랑은
선 자체이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만물이 창조될 때부터 물위에서
즉 인간 자녀들의 출렁이는 마음 위에서 휘돌고 계시면서,
모든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모든 것을 당신께로 이끄시며,
그들에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시며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시고
유익한 것을 대주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하느님을 우리와 일치시키십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을 할 때도
심지어 사랑할 때도 늘 영적인 식별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서 왔는지.
그것이 하느님 사랑을 지향하는지,
공동선을 지향하고 이웃 사랑을 지향하는지 식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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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자 가격은 얼마일까요? 보통 2~3만 원 정도니까, 아무리 비싸도 10만 원은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인 피자가 있습니다. 2010년 5월 22일에 프로그래머 라스줄로 핸예츠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비트코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상거래였습니다. 2024년 12월 현재, 1비트코인은 1억 4천5백만 원입니다. 그렇다면 프로그래머 핸예츠가 샀던 피자의 가격은 1조 원이 넘습니다. 피자 한 판에 7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비싼 피자가 아닐까요?
비트코인의 가치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조금만 미래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렸을 때는 그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주님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먼저일까요?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기에게 어떤 가치가 가장 필요한 가치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권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철부지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권한, 자격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한과 자격만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권한, 자격이 아닌, 이 세상 안에서의 권한과 자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라는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군중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따지게 되면, 당연히 주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가치가 자기에게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묵상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가치를 알고 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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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마음속에 스스로가 정해놓은 것뿐이다(나폴레온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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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가려진 제 위선의 무게임을 재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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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42,20).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현주)입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 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 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우거지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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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는 2025년을 ‘희망의 희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2025년 사목 지침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번 희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희망의 순례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희년의 목적과 의미는 그저 ‘전대사를 얻는 좋은 기회’에 그치지 않고, ‘구원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뜨겁게 하는 해로 우리를 초대함에 있습니다. 이 뜻깊은 희년에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번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대로, 순례는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하는 여정’임을 묵상케 합니다. 도보 순례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통해 우리네 삶에서 땀 흘리는 수고로움의 고귀한 의미도 되새기게 되고, 순례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향해 시노드 여정을 함께하는 길동무임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도 됩니다. 나아가, 도보 순례는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묵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를 읽고 있습니다. 2025년의 ‘화두’는 ‘지킴과 바꿈’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지킴’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 경쟁력을 잘 보여준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은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이 시골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식당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본은 200년,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 일본은 그런 장인 정신으로 제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번 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직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기업도 그런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그런 일본을 부러워했습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경제는 일본을 모방하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바꿈’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지킴으로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한국은 과감하게 ‘혁신과 개혁’을 선택했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내 말고는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디지털의 생태계에서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블루오션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팩스와 도장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반면 한국은 전자결재와 인터넷으로 기업을 운영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음반 판매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는데 한국은 음원과 유튜브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BTS, 유진스와 같은 가수들이 세계 음악시장에서 성공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선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 관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유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개혁과 혁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들에게 권위의 근거는 전통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과 율법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율법과 전통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형제와 자매의 ‘틀’도 과감하게 바꾸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 같은 인생을,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잎 같은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벌의 도구였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의 표징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소명을 뜻합니다.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찰하고 새로워지는 공동체로 남아야 함을 상기시키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이는 교회의 살아 있는 신앙과 시대적 책임,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의 지속적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 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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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라고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바로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붙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단순한 대답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왜 할 수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에 의해 그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삶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배려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들추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 안에 배려라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와 어둠을 숨기고자 했습니다. 아픔과 상처가 아닌 어둠을 숨기고 그것을 지속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라고 불리는 요한이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소리쳤음에도 그들은 그들의 어둠을 감추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들었음에도 스스로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기만을 주님 앞에서 또다시 하려 합니다.
믿음은 소리를 듣게 합니다. 우리는 이미 수석 사제들이 듣지 못했던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우리 안의 어둠을 몰아내고 빛이신 주님을 우리 안에 머무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려면….
그대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허물을 바꾸려 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허물을 눈감아주려 노력하세요.
이것이 소중한 사람이 내 안에 머물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한다면
그를 그냥 놓아주세요.
왜냐하면 그는 또 같은 잘못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사람이 늘 그대 곁에 남아
소중한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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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권한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분별의 지혜”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교황님 홈페이지 뉴스에 감동했습니다. 영원한 청춘의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47차 해외 사목 방문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프랑스와 이태리 사이에 있는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의 섬인 인국 35만의 “코르시카”섬입니다. 교황님의 생년월일은 1936년12월17일이니 내일이면 만88세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 12월17일은 교황님의 생신입니다.
고령의 연세에 여전히 지혜의 절정을 누리시는 교황님을 통해 새삼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교황님의 존재자체가 노령의 신자들에게 용기를 붇돋아 줍니다. 코르시카에서 한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라, 언제나 용서하라.”
(Forgive everything, forgive always)
괄호안에 영어를 삽입하니 더욱 분명히 마음에 각인됩니다. 코르시카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하신 강론의 요지입니다. 역시 현자의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교황님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의 지혜도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삶을 돌아보면 기뻐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굶지는 않으니 애써 다시 근심하지 마라.”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는 아울러 그가 먹을 양식도 함께 주신다. 그런데 어찌 근심 때문에 방황하며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입니다. 제가 볼 때 지혜와 무지의 대결같습니다. 정말 눈밝은 현자라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인데 편견의 무지에 눈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신학적 지식이 반드시 지혜와 함께 가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 직후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소?”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무엇으로 답변해도 무지한 이들은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교황님의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는 충고도 생각납니다. 이에 대해 질문으로 역공하는 예수님의 지혜와 용기가 빛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를 들면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근거를 묻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예수님의 적대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물음입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왜 믿지 않느냐는 물음에 직면할 것이고, 인간에게서 왔다하면 하늘에서 왔음을 믿는 군중이 두려워 도저히 답변할 수 없으니 궁지에 몰린 적대자들의 답변에 더 이상의 질문을 봉쇄해 버립니다.
“모르겠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정말 볼 줄 하는 지혜를 지닌 자라면 교황님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오듯,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권한도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선사되는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심을 이기는 위정자들은 없습니다. 민심이 바다라면 위정자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배같습니다. 엊그제 국회의 탄핵 결정에 200백만 시민이 감격의 환호로 응답한 사실은 이 결정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 말고도 가짜뉴스와 정보와 지식이 범람하는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분별의 지혜가, 지혜로운 삶이 참으로 절박한 시대입니다.
무엇보다 지혜의 눈이 열리는 개안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현실입니다. 바로 개안의 모범이 예수님은 물론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입니다. 두 환시가 그대로 대림과 성탄에 있을 이상향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무지의 눈이, 무지의 귀가 활짝 열린 참 멋진 발라암은 두 환시가 대림을 지내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아름답기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현실을, 주님과 함께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꽃자리 환경을 묘사하는 듯 합니다. 신비롭고 황홀한 발라암이 전하는 선물같은 비전이자 환시입니다. 발라암의 두 환시는 그대로 인간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닫습니다. 두 번째 멋진 환시도 그대로 메시아 탄생을 예시하는 환시입니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야곱에게서 솟는 별 하나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는 왕홀이 상징하는 바 탄생하실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무지의 눈을 열어주시어 하느님의 지혜인 주님과 하나되어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5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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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사람이고 싶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마태 21,24)
약한 사람
앞에서
약해지는 사람
강한 사람
앞에서
강해지는 사람
작은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
큰 사람
앞에서
커지는 사람
낮은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사람
높은 사람
앞에서
높아지는 사람
없는 사람
앞에서
비워지는 사람
가진 사람
앞에서
채워지는 사람
무른 사람
앞에서
물러지는 사람
센 사람
앞에서
꼿꼿해지는 사람
좋아요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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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마태 21,24)
어두워진 마음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먼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영적 눈멂은 사악한 마음에서 비롯하며, 사악한 사람들은 장님이 빛의 광휘를 바라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기에 적당한 곳을 발견하면 그가 잡고자 하는 사냥감이 함정에 빠지거나 그물에 걸려 어디로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함정을 판 주위에다가 그물도 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당신의 단순한 질문으로 수석 사재들과 원로들이 걸려들 몇을 놓으셨습니다. 그들이 요한 세례자는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그렇다면 당신들은 왜 그를 믿지 않았소?’ 하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한이 세상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사냥꾼의 덫으로 뛰어든 것처럼,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신비의 진리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당신을 유혹하는 자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허당에 빠뜨리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방의 교묘한 비난을 논파하신 것은 적절했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나는 다르게 말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되셨다”라고 말입니다. 영성의 대가들은 사람의 본성에 관한한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고귀하다고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모든 성인과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성을 따라서 받은 복은 모두 나의 본성 속에서 나의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성을 따라서 주신 모든 것이 나의 본성 속에 들어 있다면, 굳이 그리스도를 받들고, 그분을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하느님으로 받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되어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자신의 가장 영적인 터에서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아들과 동일한 사람의 본성도 이 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본성은 하나이며 단일합니다. 물론 무언가가 그 본성을 엿보다가 거기에 들러붙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 하나 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29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묵시 10,1-11
천사와 작은 두루마리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구름에 휩싸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 같았습니다.
그는 손에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서,
사자가 포효하듯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가 외치자 일곱 천둥도 저마다 소리를 내며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일곱 천둥이 말하자 나는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울려오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기록하지 말고 봉인해 두어라.”
그러자 내가 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던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서는,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분을 두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가 다시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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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감기가 주는 신앙 교훈
강만연 [fisherpeter] 241216. 09:27 ㅣNo.178519
지금 감기 기운이 좀 심합니다. 토요일 복음도 감기가 걸린 상태에서 묵상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좋은 컨디션이 아니라 묵상이 엉망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제가 감기에 걸릴 때마다 묵상한 게 있습니다. 오늘은 그걸 잠시 공유하고자 합니다. 매년 감기를 한 차례는 꼭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감기에 노출이 돼 걸리게 되면 제 몸에서 어떤 반응을 하고 또 어떤 식으로 감기에 걸리는지 그 과정을 대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번에도 이미 며칠 전에 감기 바이러스가 침범했다는 걸 감지했고 약을 먹었는데 마치 사후약방문처럼 대처에 늦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간 매년 걸리기 때문에 이미 감기에 걸리고 나서는 어느 시점에 걸렸다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징후가 나옵니다. 그 징후를 알게 된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런 징후가 감기의 징후였다는 걸 인식하는 시점은 확실히 감기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 그 징후가 감기의 시초였다는 걸 그때 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신앙에 접목해 묵상해봤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를 보면 항상 걸리는 시점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리고 나서 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합니다. 그때 조금 더 미연에 감기가 걸리지 않도록 좀 더 조심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입니다.
물론 감기라는 건 걸린 기간은 고생을 조금은 하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 거라서 괜찮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치 이처럼 후회를 하는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후회는 감기에 걸리고 나서 하는 그런 후회와는 다릅니다. 이것도 물론 나아지고 개선되는 경우도 있지만 회복할 수 없고 또 돌이킬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감기 같은 질병이야 걸리면 약 먹고 하면서 회복하면 되지만 신앙에 있어서 마치 감기와 같은 고질병이라고는 말하기 좀 그렇지만 이와 같은 건 어느 정도 선에서는 그간 경험이 있다면 그 시점에서 다시는 그와 같은 게 발생하지 않도록 대처를 하는 지혜를 발휘해 때늦은 후회를 하는 오점을 남기지 않는 것도 현명한 신앙생활의 지혜인 것 같다는 묵상을 해봅니다. 맑은 정신이 아니라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좀 이상해도 의미는 무엇인지는 아실 거라고 판단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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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가끔 오해 받을 수도 있는 하느님 일 /
박윤식 [big-llight] 241215. 18:54 ㅣNo.17850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침을 주고 계셨다. 그분께서 그곳에서 가르치신다는 것은 어쩌면 성전의 주인이심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게다. 그분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들은 군중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내려 보내신 예언자이심을 굳게 믿게 되었으리라. 그처럼 그분의 가르침은 그 어느 스승이나 율법학자의 그것보다는 뛰어나서,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었으니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는 거요? 누가 당신에게 이 권한을 주었소?” 우리도 이따금 하느님께 이런 의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기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침묵하실 뿐, 아무 대답을 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다.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는지 나를 부정하는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예수님께서도 사제와 원로들에게도 그러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어디서 공부를 한 적도, 자격을 가지지도 않으셨다. 그러니 그 못된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따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묻는 것이다. 이제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정당성을 주장하셔야 할 차례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따지길 일삼는 그들에게 당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시면 오히려 그들의 덫에 걸리시는 꼴일 게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 아니면 사람이냐?” 라며 묻는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의 일을 방해하시면서 당신 일을 하신 적이 없다. 그분께서 하신 일은 언제나 백성을 살리시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도자로 자처하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 일에 방해 거리가 된다고 생각했으리라.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 하느님 일에 참견하는 꼴이다. 더구나 그들은 그분께서 누구이시며,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시건만 그래도 알 만한 성전 봉사자들이 하나같이 죄다 예수님을 공격한다. 백성을 위한 일이건만, 적어도 배웠다는 율법의 사람들이 이렇게 핍박을 가한다. 물론 세례자 요한에게도 그랬고, 예수님께도 지금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좋은 일을 했지만, 제대로 대접 못 받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곳곳서 허다하다. 그만큼 세상은 불공평하다. 세상에서 공평을 원하면 늘 가슴앓이를 해야 할 게다. 공평함은 하늘나라에서만 늘 가능한 일이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오?” 라고 묻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하늘에서 오는 신비에 대해 겸손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비난만을 일삼는 당대의 지도자인 양 설치는 그들을 딱 부인하시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지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맨날 트집만을 일삼는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라며 노골적으로 대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요한의 세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라고 조용히 반문하신다. 생각할 기회를 주시려는 배려이리라.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곧잘 오해를 받으셨다. 믿는 이들이 오해받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게다. 옳은 일 한다고 ‘늘’ 정당하게 평가받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때로는 억울하지만, 세상에 대해 화내지 말고 살아야 하리라. 특히 이 대림의 이 시기에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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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의논합니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마태 21,25-26).
이들의 마음 안에는 ‘다른 이들에게 받게 되는 평가’와 ‘체면’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르겠소”(21,27).
하느님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면 하느님 앞에서 진실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죄를 고백하면 신부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를 청해야 할 때 “모르겠소.”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할 순간에도, 그분의 말씀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도, 한사코 “모르겠소.”라고 대답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1,27).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모르겠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만일 신앙생활이 메말라 가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처럼 다른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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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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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권한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에 돌아올 반응이 두려워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질문에
모르겠다는 답으로 회피하고 맙니다.
그들의 질문은 호기심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가르칠 권한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생각은 숨긴 채
단순한 질문인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 마음을 알아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여기에서 또한번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서 감춥니다.
문제는 감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이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의 모르겠다는 대답은
상황을 모면하는 대답이 아니라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관계 안에서
자신의 의도를 전부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드러낼 자신이 없기도 합니다.
의도를 숨기는 것을
상대방이 알게 되거나 모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숨기려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할수록
자신의 선택이 성공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둘 숨기는 것이 늘어날수록
본인 스스로 자유로움을 잃어갑니다.
처음부터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
숨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위기라고 생각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기응변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그 상황은 벗어날 수 있을지라도
그런 것들이 계속 반복될 때
전에 본인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스스로 행동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것인데
여기에서의 특징은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자신의 말과 행동이 모순된다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말은 신뢰심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에 좋아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가벼운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물론 자신이 한 말을 다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자유를 잃어가거나
가벼운 사람이 되는 쪽으로 선택하는 모습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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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마태 21, 25)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가
기다리는
분을
더 잘
알게 되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세례를 분명
사랑하십니다.
세례를 통해
세례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근원을
묻는다는 것은
사랑을 묻는
체험입니다.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례로
더 분명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결국
세례와 믿음은
하나라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깨닫습니다.
세례를
묻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물음을
던지는 일입니다.
세례와 함께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의 근원을
지금
그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가장 좋은
맑은 선물인
세례로
성탄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사랑하고
따르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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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
존경하는 선배께서 오래전 겪은 참담한 체험입니다.
한 모임에 참석하셨는데,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실행하는 모임이었답니다.
거기에는 나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모임 시작 때 쭉 돌아가면서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일 관심을 끄는 질문은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이었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말로만 듣던 엄청난 대학,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오랜 세월 공부한 박사님들이었습니다.
우리 신부님 차례가 되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신학 공부 외에 다른 학력은 없습니다.”
그랬더니, 회의 중간에 담당자께서 조용히 신부님에게 다가오시더니, 귓속말로 그러더랍니다.
“다음 모임에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학력, 경력, 자격증, 스펙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가방끈 긴 사람들 중 으뜸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이었습니다.
유다교를 대표하는 중요인사들이자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백성의 원로들은 정통 율법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유다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은 정식 율법학교 졸업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문하생도 아니었습니다.
교수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자격자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허락이나 승인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따져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있어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권한이었습니다.
합당한 절차와 자격, 제도와 법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사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야매’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며 예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이십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분이십니다.
스승 중의 스승, 참스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 모든 피조물 전체, 인류 전체에 대한 권한을 당신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한없이 부족하고 철딱서니 없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자격유무에 대해서 따져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한 분야를 완전히 터득한 대석학, 박사학위 심사를 심사하는 석좌교수에게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할 텐데 그들의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려면 질문 자체가 진실된 질문이어여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질문,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하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삐뚤어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성령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자격과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세상 모든 인간의 권한 위에 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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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 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이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 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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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거룩함을 못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기적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하시는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않으려 한 것으로 자기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이 처음엔 윤석열 정권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전에는 없었을까요?
일반 국민도 그가 말하고 토론하는 것 안에서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못 알아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상의 삶은 마지막 큰 사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결국 다른 거짓말로 자신을 다시 끌어올릴 것입니다.
아랫글은 이에 관하여 한 유튜브 구독자가 어떤 동영상에 올린 댓글입니다.
“그냥 일반인이 봐도 참모한테 반말에 욕, 일반시민한테도 반말, 손에 왕자 적고 토론, 기차 좌석에 구두 신은 채로 발 올린 거 등등.
그냥 봐도 딱 토론 수준만 봐도 ‘저놈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하겠네’ 생각하고 당선되었을 때 친구들한테 ‘야 우리나라 경제 정치는 망했다.’라고 했는데 언론인이나 정치인처럼 눈치 빠른 놈들이 모른다고?
천만에 다 알고 있었지.
그냥 저놈 대통령 만들고 지들 빼먹을 거 생각한 게 맞지.”(@jjaryno77)
그래서 일상에서 풍기는 것으로 그 사람을 못 알아본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잘못된 의도로
눈이 먼 것일 뿐입니다.
기적을 요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거짓말 시키는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말 바꾸기를 할 뿐 언제든 자기 생존을 위해 또 거짓말로 현실을 왜곡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적보다 우리 작은 일상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기적만 청한다면
이는 그저 믿기를 원치 않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알제리의 작은 마을 티브히린, 이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지역 무슬림 공동체와 함께 조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했고, 낮에는 밭을 일구고, 의사를 겸한 뤽 수사가 주민들을 치료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뤽 수사는 환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환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삶은 기적 없이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를 휩쓸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의 폭력은 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마을에 찾아와 수도자들에게 협박을 가한 날, 크리스티앙 수도원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극단주의자들을 설득하여 마을을 떠나게 했지만, 그 위협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위험 속에서도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떠날지, 남아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갈등했습니다.
한 수도자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일까요?”
크리스티앙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떠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공동체 회의를 통해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수도자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회상하며 침묵 속에서 와인과 빵을 나누었습니다.
뤽 수사는 눈물을 머금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순간이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찬 순간임을 믿습니다.”
1996년 3월, 수도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두 달 후, 그들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잘린 머리만이
남겨졌습니다.
영화는 수도자들이 눈 덮인 산속으로 호위되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들의 침묵은 말보다 강렬하게 그들의 믿음과 평화를 증거합니다.
수도자들이 떠난 후, 그들과 함께했던 마을 주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주민들은 이들을 “우리의 형제들이자 하느님의 사람들”로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자신들의 삶에 새겼습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삶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강력한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의 기적 없는 단순한 삶,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선택은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들의 피로 물든 땅은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수도자들을 순교자로 공식 인정했으며, 다른 알제리 순교자들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서 시복되었습니다.
이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모범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일상의 삶으로 그 일을 시킨 누군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뱀이 있고 사탄의 노예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은 그 일을 시킨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기적이 아닌 일상의 작은 표양으로 표현되어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 주인을 버리기 싫어서 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증거가 없었다고 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이 증거가 없어도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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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하느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1) 여기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라는 말은,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왜 당신 마음대로 이런 일을 하는가?” 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좁은 뜻으로는 ‘성전 정화’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전체를 가리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말하는 ‘권한’은 유대교에서 주는 권한을, 즉 제도권 안에서의 권한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권한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의 눈에는, 제도권 밖에 있는 예수라는 ‘야인’이 어느 날 갑자기 예언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이 대부분 제도권의 ‘밖에’ 있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시면서 ‘반문’하신 것은, 대답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에게는 권한을 어디에서 받았느냐고 묻지 않았으면서, 왜 나에게는 그것을 묻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이미 나에 대해서 증언했다.
너희가 요한의 증언을 믿는다면 내가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음을 믿을 것이고, 나를 믿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었고, 그 믿음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제도권 안에 있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앞의 3장을 보면,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세례를 받으려고 세례자 요한에게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마태 3,7).>
그러나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인정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요한의 회개 선포를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3)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라는 말은, 사제들과 원로들이, 요한을 보내신 하느님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재물만 섬기고 하느님은 섬기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4) 여기서 “모르겠소.” 라는 사제들과 원로들의 말은, 정말로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 “관심 없다. 말하기 싫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정말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 선포에 대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 갖는 것은,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같은 일을 하심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험하게 하신 것만 신경 썼습니다.>
5)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면, 너희는 나의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에서 아예 배제하신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사제들, 원로들 같은 위선자들과 기득권층 사람들도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잃은 양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인간 쪽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와 구원을 ‘저절로(자동적으로)’ 얻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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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1,23-27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 상인들을 내쫓고 장사하던 좌판을 뒤집어 엎는 등 말 그대로 난리를 치고 갔다는 얘기를 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화가 잔뜩 나서 씩씩대며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분께 이렇게 따져 묻지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성전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권한은, 더 나아가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권한은 종교 지도자들인 자신들에게 있는데, 당신이 대체 누구길래 자기들의 권한을 침해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일이었기에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권한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를 유지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힘이 자기들이 아닌 다른 이에게, 특히 출신 성분도 별 볼 일 없고 하느님 말씀과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는 촌뜨기에게 넘어가는 걸 절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당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삶이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고 변화를 위해 스스로 움직이도록 자극했던 것이지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르고 있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권한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대답하면 그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의 말을 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권한이 그저 사람에게서 왔을 뿐이라고 대답하면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권한도 아무것도 아닌 게,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실인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겠다’며 입을 다물어버리는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실행하는 당신의 권한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말씀해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어도 그 참뜻을 이해할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권한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니신 권한은 남들앞에서 자신을 내세우고 군림함으로써가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랑에서, 다른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비롯된 참된 권위는 그분의 소명으로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단호한 침묵이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저도 알게 모르게 사제라는 권한을 무기 삼아 타인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 삶을 이끌어 가실 권한을 주님께 내어드리지 않고 제 뜻과 계획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는 심판의 저울 위에 다른 이를 올려놓으려 들지 말고 저 자신이 올라서야겠습니다. 늘 깨어 있는 자세로 내가 주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실천하고 있는지 잘 챙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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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놀라우시기도 하고 때로는 엉뚱할 정도로 재미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이제까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렇게 호의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껄끄러운 그래서 적에 가까운 모암의 예언자 발라암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의 한 왕에
대한 예언을 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꼽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두 딸 사이에 낳은 자식이 모압과
암몬입니다.(창세 19,36-37)
맏딸의 자손이 모압족의 조상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후대에 율법에 금지되었던
이 사실이 거북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 관계의 나라의 예언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예언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민수 24, 17)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중요한 것은 메시아에 대한 확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바로 예수님임을 증언했고 예수님 자신도 세례자 요한의
예언자로서의 권위를 최고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지도자로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도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고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코헨 가돌(כהן גדול) 또는 코엔 하가돌(הן הגדול)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제정일치의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는 가장 높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사제만이 유일하게 일 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권한을 가졌습니다.
모든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대제사장은 원칙적으로 레위지파의 아론의 혈통을 가졌고
세습되었습니다.
대사제를 중심으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는 산헤드린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중추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사회와 종교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중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 신원에 대해서 놀라운 인물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메시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파견한 사람들은 다만 군중이 존경하고 따르는
군중에게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매장을 시키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원래 주님께서 하셔야 할 정답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정답을 부정하는 것이고 어떤 대압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슬기로우신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계획해서 주님을 올가미에 씌우려 했지만 전혀 예상 밖의
질문입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대표적인 물로 세례를 주는 행위에 대한 그들의 판단인 것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는 군중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터에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겠다’고 주님께 어정쩡하게 대답하고
주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라고
대답하심으로 그들의 속셈을 무산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의를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슬기로 무산시키시지만
그들에게 사실을 설명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고의 억울한 처지가 될 때도 있고 또 억울해서 속상해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재주는 말에서 말로 전혀 관계없는 일들을 허위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러면 우리는 열심히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거나 또 그런 기회를 만들려고 애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속이 끓더라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주님의 모습입니다.
작정을 한 사람들에게는 또 그릇이 그것밖에 안되는 이들에게는 애써 설명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생겨먹은게 그래서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거나 사실과는 점점 멀어지는 일을
벌이고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것에 대해 설명도 변명도 말고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주님의 침묵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해야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배우는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그것이 매일 주님을 만나는 복음묵상, 기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인 발라암까지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당신을 함정으로 빠뜨리려고 하는 이들을
무력하게 만드시는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오늘도 그분의 길을 가도록 합시다.
세상에 눈을 팔지 말고 부모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아이처럼 오늘도 주님을 붙들고 따라가며
복된 하루를 맞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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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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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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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6. 대림 제 3주간 월요일.
온전한 마음과 정성을 담은 예배자의 삶
<2024.12.16> 아침을 여는 묵상 (말 1:1~14절)
❝온전한 마음과 정성을 담은 예배자의 삶❞
❚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 어떻게 예배하는 삶이어야 합니까?
➲ 하나님의 부정할 수 없으신 사랑을 예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5절).
말라기 당시의 사회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무시했으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까지도 극도로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그들의 일상생활도 엉망진창인 사회적 환경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2~3절).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은 사랑하셨지만, 에돔 족속의 조상인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에돔 족속은 폐허가 된 성읍들을 재건하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실 것이며, 설령 다시 건축한다 해도 어떤 것이든 무너뜨리실 것입니다(4절). 이스라엘은 죄악 가득한 에돔이 심판당하는 것을 보며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 강력함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5절).
하나님은 야곱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분의 사랑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자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기에 우리는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엡 3:18).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매일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엡 5:8).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정할 수 없는 이 사랑을 확신하여 온전한 마음과 정성을 담은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온전히 예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6~10절).
‘만군의 여호와’라는 의미는 ‘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며 주인인 그분께 대한 공경함과 두려움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물음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느냐고 되묻습니다(6절). 하나님께 눈먼 것, 저는 것과 병든 것을 드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총독도 받지 않을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식탁을 경멸했습니다(7~8절).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9절).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 중 누군가가 나서서 성전 문을 닫아 버렸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말씀까지 하십니다(10절).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그분의 제단에 정결치 못한 제물들을 불사름으로 헛된 불을 피우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존경심과 경외감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높여 드리는 행위입니다. 존경심과 경외감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늦지 않고, 큰 소리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설교를 집중하여 들었다고 해서 참된 예배를 드렸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예배를 받아 주시는 것 또한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일상에서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활하고,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장소에서나 환경과 상황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화려하거나 세련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희생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온전히 드리는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위대한 그 영광을 영원히 예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1~14절).
하나님은 악한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에게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들과 결탁해서 더러운 제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해도 그분의 이름은 결코 멸시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계속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예배자를 바꾸시겠다는 것입니다(11절).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즉 이스라엘을 제하신 빈자리는 이방 민족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하나님의 식탁이 이미 더러워졌으니 그 위에 드리는 음식을 경시해도 괜찮고 생각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12절). 그들은 하나님께 흠 없고 깨끗한 제물 바치는 것이 ‘귀찮다’라고 말하면서 훔친 것,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이라며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달갑게 바아 주실 릴가 없습니다(13절). “...큰 임금이요... 만군의 여호와...”를 멸시한 그들은 결국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며, 그 저주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14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과 임재를 경험하며, 그 풍성한 은혜에 감격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예배의 자리를 잃어버린 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헛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하나님은 버리시고, 새로운 예배자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온 열방으로부터 찬양받기에 합당하고 위대하신 분으로 선포하며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어떤 경우에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며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보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존귀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와같은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우리는 감격하여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영광을 영원히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십자가로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격 속에서 한평생, 아니 영원히 주님의 영광스럽고 위대하심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말 1: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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