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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돈황본 육조단경(頓煌本 六祖壇經)』 – 성철(性徹)
불교를 깨달음을 얻는 종교라고 하여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얻게 되는 것으로 불교를 알기는 쉽다고들 하지만, 불교 경전을 대할 때는 언제나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돈환본 육조단경』만 해도 그렇다. 20세기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추앙받았던 성철스님이 편역(編譯)한 것으로 쉽게 읽히겠거니 했으나 역시나이다. 그러나 육조 스님은 글자를 몰랐음에도 중국 불교의 조조(朝祖)가 된 분이니, 그를 따라가다 보면 불교가 이해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이 책을 읽는다. 책명 중의 단경(壇經)이란 금강계단(戒壇)이라고 할 때 그 계단을 가르키는 것이고, 경(經)은 경전과 같다는 권위를 부여해 붙인 이름이다. 육조는 중국 선불교의 제6대조인 혜능(惠能) 스님을 일컫는 것이다.
선불교의 핵심을 쉽게 설명한 책이 육조단경인데, 이것은 혜능스님의 법문집으로, 엄밀히 말해 경일 수는 없으며 ‘조사어록’쯤으로 보아야 하지만, 해박한 사상과 간결한 문체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경과 같이 존숭받는다. ‘돈황본’은 돈황(頓煌)고굴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붙인 것이며, 편역자 성철스님은 제자들에게 책 보지 말라고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교 사상을 정립해야 한다며 책을 직접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다.
흔히 《육조단경》으로도 불리는 이 책은 【제1편】단경지침(壇經指針), 【제2편】돈황본단경으로 되어 있는데, 제1편에는 1. 식심견성(識心見性,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 2. 내외명철(內外明徹, 안팎이 사무처 밝음) 3. 유전돈법(唯傳頓法, 오직 돈법 만을 전함) 4.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으로 宗을 삼음) 5. 정혜체일(定慧體一, 정과 혜는 한 몸) 6. 무생서방(無生西方, 남이 없는 서방극락) 7. 불오염수(不汚染修, 물듦이 없는 닦음) 8. 불보리인(佛菩提因, 부처님 깨달음의 씨앗) 이렇게 되어 있고, 이것은 ‘단경’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모두 살피기가 너무 길어 그중 제3장의 ‘유전돈법’을 보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법에는 돈(敦,단박)과 점(漸,점차)의 구별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차츰차츰 계합(契合,부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니, 깨치면 원래로 차별이 없느리라”고 하고, “오인돈수(悟人頓修,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음)는 분명하게 있으므로, 식심견성(識心見性)이 곧 돈수임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깨달은 뒤에는 영리함과 어리석음의 차별도 있을 수 없고,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볼 수 있으면 차별이 없다고 했다. 제2편 본론으로 들어가 본다.
남종돈교최상대승마하반야바라밀경(南宗頓敎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
육조혜능대사어소주대범사시법단경(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
겸수무상계 홍법제자법해집기(兼受無相戒 弘法弟子法海集記)
(남종 육조 혜능대사가 소주대범사 강당에서 베푸신 법단경과 겸하여 무상계를 받은 홍법제자 법해가 모아 기록함)
→ 헤능대사가 소주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 그때 법좌 아래에는 비구·비구니·도교인·속인 등 일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소주 자사 위거(韋據)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청하였고, 자사는 이윽고 문인 법해로 하여금 모아서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를 이어받아서 서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서 받들어 이어받게 하기 위하여, 『단경』을 설하였다.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서는 한자로 된 원문은 생략했다. 이후도 한자 원문은 생략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만큼 복잡하고 길기 때문이기도 한문이 짧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제2편 본문에는 심사(尋師, 스승을 찾아감), 명게(命偈, 게송을 지으라고 이르심), 정게(呈偈, 게송을 바침)등으로 단원이 나눠져 있으나, 이것은 성철스님이 불제자들의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 분류한 것이라 하고 또 그것의 의미는 크지 않으므로 단원을 나누지는 않겠다.
법좌에 오른 대사께서는 말씀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한참 묵묵하신 다음 이윽고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조용히 들어라. 나 혜능의 아버지 본관은 범양인데 좌천되어 영암의 신주 백성으로 옮겨 살았고,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늙은 어머니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서 가난에 시달리며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았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땔나무를 샀다. 그는 나를 데리고 관숙사(官宿寺)에 이르러 나무를 가져갔고, 값을 받고 나오는데 문득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한 번 들음에 마음이 맑아져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손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 동빙무산(東馮茂山)에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곳에는 문인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숙세의 업연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출가를 소개한 혜능이 오조 홍인화상을 찾아가 만났음을 말했다.
홍인화상을 찾아간 혜능에게 화상이 물었다.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께서 새삼스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하였다.
혜능이 대답했다.
“제자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홍인이 말했다.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이거늘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혜능이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 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이에, 오조홍인은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그전 관숙사에서 혜능이 들었다는 『금강경』에는 “이 한 권의 경이 중생의 자성 속에 본래 있으니,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이는 다만 문자만 독송할 것이요, 만약 본래 마음을 깨치면 이 경이 문자 속에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지니라”라고 했다.”(此一卷經이 衆生性中에 本有하니 不自見資는 但讀誦文字요 若悟本心하면 始知此經이 不在文字니라 – 金剛經序)
오조홍인이 하루는 문인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내 너희에게 말하노니 세상 사람의 나고 죽는 일이 크거늘 너희들은 종일토록 공양을 하며 다만, 복전만을 구할 뿐 나고 죽은 괴로운 바다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구나. 너희의 자성이 미혹하면 복의 문이 어찌 너희들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 스스로를 잘 살펴보라.
지혜가 있는 자는 본래의 성품인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써서 각자 게송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게송을 보고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咐囑-맡김)하여 6대 조사가 되게 하리니 빨리 서두르도록 하라.”
아마도 이때 홍인은 후계자를 정해 놓고 가겠다고 마음먹은 듯하다.
그러나 아무도 홍인의 말을 듣고 게송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홍인에게는 수제자이자, 교수사(敎授師)인 신수(神秀)상좌가 법을 얻을 것이니 굳이 게송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상좌인 신수도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는 것은 내가 교수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스님께서 나의 마음속 견해가 얕고 깊음을 어찌 아시겠는가? 내가 게송을 밝혀 법을 구함이 옳거니와 조사의 지위를 구함은 옳지 않다. 그러나 만약 마음의 게송을 바치지 않으면 마침내 법을 얻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그렇게 생각한 신수는 밤중에 몰래 촛불을 들고 남쪽 복도 중간 벽에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리.”라고 적었다.
이튿날 홍인이 이 게송을 보고는 문인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은 모두 이 게송을 외라. 외는 자는 바야흐로 자성을 볼 것이며,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타락하지 않으리.”라고 했다. 문인들은 모두 이를 외고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훌륭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홍인은 신수를 불러 “네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이냐? 만약 네가 지은 것이라면, 마땅히 나의 법을 얻으리라.”하셨다. 신수가 부끄러워하면 사양하는 말을 하자,
오조는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은 당도하였으나,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범부들이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타락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견해를 가지고 위 없는 보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 안으로 들어와야 자기의 본성을 보느니라. 너는 우선 돌아가 며칠 동안 더 생각하여 다시 게송을 지어서 나에게 와 보여라. 만약 문 안에 들어와서 자성을 보았다면 마땅히 가사와 법을 너에게 부촉하리라.”하셨다. 신수는 돌아가 며칠을 지냈으나 게송을 짓지는 못하였다.
그 무렵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게송을 외고 있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게송이 견성하지도 큰 뜻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이 동자에게 묻기를 “지금 외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동자가 대답했다. “너는 모르는가? 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니 가사와 법을 전하고자 한다하시고, 각자 게송을 지어 와 보여라고 하셨다.”이에 혜능이 “나는 여덟 달 동안 아직 조사당에 가보지 못하였으니, 바라 건데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여 그 게송을 보게 하고 예배하게 하여 주게.”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혜능은 게송에 예배하였다. 글자를 알지 못하므로 사람들에게 읽어 주기를 청했고, 그리고 그 옆에 자신의 게송을 써 줄 것도 청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절 안의 대중들이 혜능이 지은 게송을 보고 다들 괴이하게 여기므로, 혜능은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오조가 이 게송을 보고 곧 큰 뜻을 잘 알았으나, 여러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도 또한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삼경에 홍인은 혜능을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고는 단박에 깨치는 법과 가사를 전하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 신표를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 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고 하고는 또 말씀하시기를 “혜능아, 예로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낱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무르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
이에 혜능은 오조 스님을 하직하고 남쪽으로 떠났다. 박학다문한 신수 대선배를 물리치고 일자무식인 초동목수(樵童牧豎-땔나무나 하는 목동)에게 대법을 전하였으니, 불법은 문자에 있지 않고 견성에 있는 것임을 실천한 홍인화상이다. 단경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돈법뿐이고, 점법은 없으니 점수를 말함은 『단경』의 법이 아니라 한다.
다시 법회로 와서 혜능이 말하였다.
“선지자들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여라.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또 말씀하셨다.
“나의 법문은 정(定-바름)과 혜(慧-분별의 지혜)로 근본으로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둘이 아니니라.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기 다르다고는 말하지 마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리고 무념에 대해서도 설하셨다.
“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생각이 없다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묻고,
“없다 함은 두 모양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이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에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라. 무념위종(無念爲宗, 생각이 없음을 종으로 삼음)은 등각(等覺)이하 모든 중생은 모두 망념이 있으므로, 중생이라 하고, 모든 부처는 다 무념을 얻었으므로, 부처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어서 좌선(坐禪)과 세 몸을 세우는 삼신(三身)에 대해 설한 뒤 참석한 대중들과 네 가지 큰 서원(四願)을 말하고 그것을 따라 말하게 했다.
“이제 이미 스스로 삼신불에 귀의하였으니, 선지식들과 더불어 네 가지 넓고 큰 원을 발하리라. 선지식들아, 다 함께 나 혜능을 따라 말하라.
무량한 중생 다 제도하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번뇌 다 끊기를 서원합니다.
무량한 법문 다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세번]
바른 생각인 반야의 지혜를 깨쳐서 어리석음과 미망을 없애면 중생을 저마다 스스로 제도할 것이니다. 삿됨이 오면 바름으로 제도하고, 미혹함이 오면 깨침으로 제도하고,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악함이 오면 착함으로 제도하며, 번뇌가 오면 보리로 제도하나니. 이렇게 제도함을 진실한 제도라고 하느니라. 무량한 번뇌를 명세코 다 끊는다함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허망함을 제거하는 것이고, 법문을 맹세코 다 배운다함은 위없는 바른 법을 배우는 것이다. 위없는 불도를 이룬다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는 행동으로, 일체를 공경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가 생겨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다. 스스로 깨쳐 불도를 이루어 맹세코 바라는 힘(誓願力)을 행하는 것이니라.”고 서원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참회에 대해서도 설했는데 “무엇을 참회라고 하는가? 참(懺)이라 하는 것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悔)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항상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이 없느니라. 나의 이 법문 가운데는 영원히 끊어서 짓지 않음을 이름하여 참회라고 하느니라.”
마지막에 마하반야바라밀법, 즉 성공(性空, 성품을 비움)과 반야(般若)에 대해 설하고 법문을 마쳤다. “이제 이미 삼보에 귀의하여 모두들 지극한 마음들일 것이니, 선지식들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선지식들아,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은 하나 알지 못하므로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니 각각 잘 들으라. 마하반야바라밀은 서쪽 나라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 이 법은 모름지기 실행할 것이요, 입으로 외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고 실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마하’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 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 악한 법과 착한 법,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지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한다. 이것이 곧 큰 실행이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여기서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또 반야에 대해서도 설했는데,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도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써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이는 것과 같나니, 이는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이름하여 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과 혜가 함께하여 일체법에 물들이지 않음이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정·혜로 삼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나의 모양 없는 게송을 들으라. 너희 미혹한 사람들의 죄를 없앨 것이니, 이를 ‘죄 없애는 게송(滅罪頌)’이라고 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복을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을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속 삼업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오.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攀緣-속된 인연)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니라.
만약 대승의 참된 참회를 깨치면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행하여 죄 없어지리.
도를 배우는 사람이 능히 스스로 보면
곧 깨친 사람과 더불어 같도다.
오조께서 이 단박 깨치는 가르침을 전하심은
배우는 사람이 같은 한 몸 되기를 바라서이다.
만약 장차 본래의 몸을 찾고자 한다면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마음속에서 씻어 버려라.
힘써 도를 닦아 유유히 지내지 말라.
어느덧 헛되이 지나 한세상 끝나리니
만약 대승의 단박 깨치는 법을 만났거든
정성 들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구하라.”
이렇게 대사께서 설법을 마치니 위거(韋據, 使君)와 관료들과 스님들과 도교인, 속인들의 찬탄함이 끊이지 않았고 ‘예전에 듣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법을 마친 혜능을 위사군이 예배하고 말하였다.
“큰 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不思議)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그마한 의심이 있어서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데 큰 스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1조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그렇다.”
“제자가 듣자 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시니 무제가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큰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전(福田)에 있지 않으니라.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공덕이 곧 가볍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이니라.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달마대사께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니라.”
위사군이 예배하고 또 물었다.
“제자가 보니, 스님과 도교인과 속인들이 항상 아미타불을 생각하면서 서쪽 나라에 가서 나기를 바랍니다. 청컨대 큰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기에 가 날 수가 있습니까?”
“사군은 들으라, 혜능이 말하여 주리라. 세존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서방정토에로 인도하여 교화하여 말씀하셨으니라. 경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낮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멀다 하고,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가 높은 사람 때문이니라.
사람에는 두 가지가 있으나, 법은 그렇지 않다. 미혹함과 깨달음이 달라서 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곳에 나려고 하지만,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으니라,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가서 나기를 원하나 동방과 서방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다 한가지니라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라. 어찌 새삼스럽게 왕생하기를 바랄 것인가. 십악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어느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 만약 남(生)이 없는 돈법(頓法)을 깨치면 서방정토를 찰나에 볼 것이요, 만약 돈교의 큰 가르침을 깨치지 못하면, 염불을 하여도 왕생할 길이 멀거니, 어떻게 도달하겠는가?”
육조께서는 서쪽 나라를 찰나 사이에 보여주겠다고 하고는 말하였다.
“부처는 자기 성품이 지은 것이니,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 자비는 곧 관음이요, 희사는 세지라고 부르며 능히 깨끗함은 석가요, 평등하고 독음은 미륵이니라. 인아상(因我相)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 용이며, 진로(塵勞)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승이며, 십선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毒害)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자기 마음의 땅 위에서 깨달은 성품(覺性)이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의 모든 하늘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이 일시에 사라지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와 다르지 않다.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피안(彼岸)에 이르겠는가.”
위사군이 찬탄하여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널리 원하옵나니 법계의 중생들이 모두 이 법을 듣는 이는 일시에 깨칠지이다!”
이후 혜능은 조계산으로 가서 소주·광주 두 고을에 교화하기를 40여 년 동안 했다. 이것은 그 대상이 삼오천(三五千)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종지로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를 의지하고 믿음을 삼게 하였다. 만약에 『단경』을 얻지 못하면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 될 것이었다. 혜능도 말했다. “모름지기 간 곳과 년 월 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받지 못하였으면 남종(南宗)의 제자가 아니다.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을 말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다툼을 면치 못한 것이다.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의] 수행함으로 권하라.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니 도道와는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혜능이 설한 것들 중에서 돈수(敦修, 단박에 닦음), 전게(傳偈, 게송을 전함), 진불(眞佛, 참 부처), 멸도(滅度) 등까지를 저자는 편의에 따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본다.
“육조는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契合)하고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는다[悟人敦修]라고 말함과 같이 깨침은 모두 돈수라고 했다. 돈황본에서는 자성으로 단박에 닦는다[自性敦修]고 간명하게 말했으나, 각 본에서는 ‘자성이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아야지 점차는 없다.’라고 소상히 말함으로써 『단경』에는 오직 돈오돈수(頓悟敦修)뿐, 점수는 없음”을 분명히 했다.
혜능의 제자가 된 신회(神會)라는 스님이 조계산을 찾아와 육조혜능을 예배하고 물었다.
“큰 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느냐?”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큰 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을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서 혜능을 모셨다.
혜능 자신은 물론 문인들도 혜능이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상좌인 법해가 여쭈었다. “큰 스님이시여, 큰 스님께서 가신 뒤 가사와 법을 마땅히 누구에게 부촉하시겠습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은 전하여 마쳤으니, 너희는 모름지기 묻지 말라. 어떤 사람이 나와서 종지를 세우리니, 이것이 곧 바른 법이다. 그러므로 가사를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가 믿지 않을 때는, 내가 선대 다섯 분 조사께서 가사를 전하고 법을 부촉하신 게송들을 외어 주리라.”
제1조 달마화상은 “내 본시 당나라에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하노리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리로다.”
제2조 혜가스님은 “본래 땅이 있는 까닭에 땅으로부터 씨앗 꽃 피나니, 만약 본래로 땅이 없다면 꽃이 어느 곳으로부터 피어나리오.”
제3조 승찬스님은 “꽃씨가 비록 땅을 연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
제4조 도신스님은 “꽃씨에 나는 성품 있어 땅을 연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나지 않는도다.”
제5조 홍인스임은 “유정이 와서 씨 뿌리니 무정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 씨앗도 없나니, 마음 땅에 또한 남이 없도다.”
제6조 나 혜능은 “마음의 땅이 뜻의 씨앗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스스로 꽃 뜻의 씨앗을 깨달으니, 보리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는도다.”라고 했다.
혜능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지은 두 게송을 들으라.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성을 보리라.
첫째, 마음 땅에 삿된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무명의 업을 지어 업의 바람에 나부낌을 보는 도다.
둘째, 마음 땅에 바른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으니 장차 오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로다.”
육조스님은 게송을 말씀하시고 대중을 해산시켰다. 그리고는 법해 등 10명의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떠난 뒤에 세상의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 성인의 법이 아니며,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내가 떠난 뒤 오직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한가지일 것이나,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너희가 가르치는 법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
대사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밤 삼경에 이르러 문득 돌아가시니 대사의 춘추 일흔여섯이었다.
8월 3일 돌아가시고 동짓달에 이르러 큰스님의 영구를 모셔 조계산에 장사지내니, 용감(龍龕) 속에서 흰빛이 나타나 곧장 하늘 위로 솟구치다가 이틀 만에 흩어졌다고 한다. 소주자사 위거는 비(碑)를 세우고, 지금까지 공양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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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