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복식에 나타나는 문양
기록을 통해서 보면, 신라시대의 견 중에서는 금(錦:비단)이 으뜸이었으며, 진평왕대에 금사(錦絲), 성덕왕대에 서문금(瑞文錦), 그리고 경문왕대에는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소화어아금(小花魚牙錦)·조하금(朝霞錦) 등 짜서 당으로 보냈다고 하므로 그 품질이 매우 우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시대의 마(麻) 제품으로 현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마총 155호 고분 출토품 중 평직으로 된 삼베는 시대적으로 후기에 속하지만 색상이나 직조의 구성이 정확히 보존되고 있어 삼국시대 직물기법 및 색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재료가 된다. 자수의 문양이나 기법에 있어 현재 잔존하고 있는 유물은 없고 문헌이나 고분벽화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3에는 "자수가 놓인 옷차림과 장신구는 상류계급에만 국한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자수 활동이 성행했으며 자수로 옷의 문양을 만들거나 장식품에도 수예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현존하는 국보급 자수「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은 백제 자수장(刺繡匠)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그 밑그림 또한 고구려의 가서일(加西溢)과 가기리(加己利)에 의하여 그려졌다. 이 장(帳)은 일본 쇼토쿠(聖德)태자의 죽음을 달래는 뜻으로 그가 생존시 흠모했던 천수국을 그려 자수로 놓은 것이다.이 수장은 7세기 초에 제작된 후 여러 번 자수 보존처리를 하여 원래의 완전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똘똘하게 꼬여져 있는 실의 꼬임이 우리 자수와 흡사하다. 고려 말기에는 중국 원의 영향을 받아 자수로 된 흉배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당·송대에도 의복의 색과 천에 쓰여진 문양으로 계급을 표시한 적이 있다. 당 고조(高祖)시기에는 당상관의 공복을 둥근 문양이 있는 자색의 사(絲)와 다마스크천으로 정하였는데 그 문양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문종(文宗)황제 때에는 불로초를 물고 있는 매를 원권(圓圈)문양 안에 넣어 짠 다마스크나 사로 당상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고 한다.당하관은 공작, 기러기 등을 당상관의 것보다 작은,원권 문양에 넣어 짠 비단과 사를 포(袍)의 천으로 제정했다고 한다. 명대에 이르서는 회화적인 자수미술이 번성해서 중국의 흉배는 직수(織繡)와 자수로 제조되었다.그러나 조선시대에 자수는 오히려 사치 품목으로 규정되었다. 15세기 중반은 실크 자수가 국제적으로 인기를 모으고 중요시되고 있던 시기였으나, 특히 세종대왕의 통치 기간에는 엄격한 유교사상으로 인해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였고 이것은 자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제왕과 왕비의 의복 제왕의 의복에 쓰여진 십이장(十二章)무늬와 구장(九章)무늬 십이장무늬는 고대에 천자(天子)나 임금의 의복에 붙였던 일(日), 월(月), 성신(星辰),산(山),용(龍), 종이(宗彝), 화충(華蟲), 조(藻), 화(火),보(黼), 불(黻), 분미(粉米)등 열두 가지 무늬를 일컫는다.중국의 순(舜)임금 때부터 관복에 쓰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황제만이 제례복에 십이장을 전부 수놓을 수 있었다. 십이장문양은 주나라 전에는 면복(冕服)에 시문되었으며, 주대에 이르러서는 해, 달, 별(성신)등 세가지 문양이 기에 이미 쓰였기 때문에 옷의 장식으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머지 아홉 개의 문양을 일러 구장이라 하게 되었다. 구장문은 조선시대의 궁중복식에도 보이고 있다. 구장문양을 구성하고 있는 각 문양의 으미와 상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면복> 구장복의 곤의(袞衣)는 검은색 옷에 용·산·화·화충·종이등의 오장(五章)무늬를 수놓았다. 해·달·성신 해와 달 속에는 각각 세발까마귀와 옥토끼가 들어 있는데,해 속에 들어 있는 까마귀는 '삼족오(三足烏)'라 하여 일정(日精)을 뜻하고, 달 속에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장생약을 빻고 있는 옥토끼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월정(月精)을 뜻한다.또 성신, 즉 별은 삼태성을 나타내고 있다.해와 달, 그리고 별은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갖추어야할 마땅한 지식을 가르쳐준다. 산 중국에서 가장 높다는 전설상의 산인 곤륜산을 뜻하는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절개를 가르쳐준다고 하였다. 구름과 비를 능히 일으키는 산의 조화로움과 신중한 성격을 취하여 왕이 사방을 진중안정케 함을 뜻한다. 용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나타낸다.자유자재로 신통력을 부릴 수 있는 용처럼 임금도 거짓말을 보면 그것을 착하게 변화하도록 선도한다. 화충 꿩, 아름답고 다양한 빛깔은 곧은 절개와 다양한 덕을 실천하여야 함을 상기시킨다.꿩의 아름다운 문채를 취하여 지조가 굳이 변치 않고 덕이 큼을 상징한다. 이상 여섯 가지는 상의(上衣)에 수 놓아지며, 하의(下衣)에 수놓아지는 무늬는 다음과 같다. 십이장무늬의 종류 종이(宗·彝) 제기의 하나로서 동물을 그려넣은 술잔이다.종묘의 울창한 술잔을 말한다.이 잔에 호랑이와 원숭이를 그린 것은 용맹과 원숭이의 효행을 취하고자 함이다. 조(藻) 가래나무의 잎과 가지이다.일설에 물풀의 깨끗함을 취했다고도 하는데 푸른 얼음이나 옥같이 맑음을 상징한다. 화(火·) 불꽃이며 오행의 하나이고 덕에 대한 열의와 사랑의 상징이다. 분미(粉·米) 낟알이며 풍요의 상징이다.쌀은 사람들을 능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혹은 쌀 모양을 취하여 재왕의 덕을 상징한다. 보(黼) 쇠도끼 모양으로 묘사된다.과단성 있게 선악을 구별하여 능히 베고 자른다는 것을 상징한다. 불(黻)'궁(弓)'자가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모양으로 묘사된다.임금과 신하가 서로 다스리면서 악한 것을 보면 선하게 고친다는 뜻과 신하와 백성이 악을 등지고 선을 향한다는 뜻이다. 구장복(九章服)은 임금이 종묘제례(宗廟祭禮)·즉위(卽位)·정초(正初)의 하례식·비(妃)를 맞을 때 등의 의식에 입던 예복의 한 가지로 거죽은 검은빛 얇은 비단이고,안은 남색 비단으로 만드는데 소매가 넓다. 양 어깨 부분에 선,소매, 끝에 화·화충·종이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폐슬(蔽膝,옷 위에 늘어지는 수놓은 장식)에는 조·분미·보·불 등의 수를 놓았다. 고려 말엽부터 조선조에 걸쳐 왕이 착용하였으며, 의(衣,상의)·상(裳,하의)·중단(中單)·대대(大帶)·혁대(革帶)·폐슬·패옥(佩玉)·수(수)·방심곡령(方心曲領)·규(圭)·말(襪,버선)·석(舃,신발)등으로 구성된다. 의는 심청색(深靑色)이나 현색(玄色)의 사(紗)또는 견으로 만든다. 깃·도련·소매 끝에 의색(衣色)과 같은 색의 선을 두르며 오장문(五章紋)이 그려지는데, 양 어깨에는 용, 등에는 산, 양 소매에는 불꽃·화충과 종이의 문양이 놓인다. 상은 붉은색의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며, 조·분미·보·불의 사장문이 수놓아진다. 중단은 백색의 사(紗)로 만들며 깃·도련·소매끝에는 청색선이 둘러지고 옷깃에 11개의 불문이 금박된다. 대대는 홍백(紅白)의 무늬 없는 비단(繒)으로 만든다.폐슬은 상(裳)의 색과 같이 하고 상과 같은 장문이 수놓아지며 다섯 채로 된 실띠와 두 개의 옥구(玉鉤)가 달려 있다. 수는 흰색 바탕에 백·표(縹, 푸르스름한 색)·녹의 삼색으로 짠다. 규는 청옥으로 하며 적색의 버선과 신을 신는다. 구장복에는 면류관(冕旒冠)을 병용한다.고려 의종 20년(1166)금나라에서 구장복을 보내온 때부터 착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때의 제도가 계승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왕비의 성장, 적의(翟衣) 적의는 왕비의 법복(法服)으로서 푸른 바탕에 꿩무늬(翟紋)를 9등으로 수놓은 것이다. 적의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왕의 면복(冕服)과 원유관복(遠遊冠服)을 내려주었고 효자왕후(孝慈皇后)가 왕비에게 관복을 사여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사여받은 왕비의 관복은 관(冠)·적의·중단(中單)·폐슬(蔽膝)·상(裳)·대대(大帶)·패옥(佩玉)·수(綬)·청석(靑舃)·청말(靑襪)이었다. <폐슬의 용·꿩무늬> <대대의 금박 쌍봉무늬> 관은 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이었는데 화채(花釵)가 9수이고 소화(小花)는 대화의 수와 같고 양쪽 박빈(博鬢)은 9전(鈿)으로 꾸몄다. 조선조에 와서 적의가 하사된 것은 태조 3년(1394)이었는데 쥐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하피(霞)·금추(金墜) 등이었다. 영조 때에는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가 편찬되어 왕비의 관복을 정비하였는데 이때 정비된 적의 제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적의는 대홍단(大紅緞)으로 하여 앞면의 좌우가 서로 마주 대하여 곧게 내려가 여미어지지않고, 길이는 치마 끝과 가지런하고, 뒤의 길이는 치마 끝에 1척 남짓 길도록 한다. 적의 앞뒤에는 금사로 수놓은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를 붙이고 앞면의 보 아래에서 옷단에 이르기까지 수놓은 원적(圓翟)을 왼쪽에 일곱, 오른쪽에 일곱을 붙이고 좌우에 각각 한 굽을 접어서 서로 이어진 것처럼 붙인다. 또 뒷면의 보 밑에도 수놓은 원적을 왼쪽에 아홉, 오른쪽에 아홉을 각각 붙여서 옷단에 이르게 하고 또 단 한 가운데 꿩을 서로 이어진 것처럼 붙인다.좌우 소매의 너비가 옷 앞길이와 같고 소매 끝의 겉면에도 수놓은 원적을 왼쪽에 아홉,오른쪽에 아홉을 붙여서 그 수가 모두 51개이다. <적의(뒷면)-적의는 푸른 바탕에 꿩무늬를 수놓은 것인데, 12등 적의에는 꿩 154쌍을 수놓았다.> 고종 34년(1897)에 왕이 황제로 승격하고 왕비가 황후로 불리게 된 때부터 적의의 구성이 본격화되었는데 적의는 중단·폐슬·규(圭)·혁대·대대·수·옥패(玉佩)·하피·보(補)·석과 병용한다. 의복 장식에 베풀어진 무늬 후수(後綬)의 무늬 후수는 예복인 조복(朝服)·제복(祭服)을 입을 때 늘어뜨리는 띠를 말한다. 후수는 품계에 따라 문양과 환(環)을 달리하였는데 1·2 품은 황·녹·적·자의 4색실로 운학문(雲鶴紋)을 나타냈고 두 개의 금환(金環)을 달았다.3품은 같은 4색실로 반조문(盤鵰紋)을 나타냈고 두 개의 은환(銀環)을 달았다. 4품은 황·녹·적의 3색실로 연작문(練鵲紋)을 나타냈고 두 개의 은환을 달았다.5·6품은 4품과 같은 3색실의 연작문이면서 두 개의 동환(銅環)을 달았으며, 7·8·9품은 황·녹의 2색실로 계칙문(鸂鶒紋)을 나타냈고 두 개의 동환을 달았다. 그리고 각 춤의 후수 모두 하단에 청사망(靑絲網)을 맺었다. <후수> 용보(龍補)의 무늬 조선시대 말기 황제가 착용했던 일상복 또는 시무복(視務服)을 황룡포(黃龍袍)라 한다. 여름에는 운문사(雲紋紗), 겨울에는 운문단(雲紋緞)에 홍색 안을 넣어 만든 황색의 포(袍)이다.양쪽 무의 여분을 뒤쪽으로 접어 윗부분을 길에 꿰어서 고정시키고 아래는 튼 대로 둔다.둥근깃(圓領)은 오른쪽 어깨에서 끼우고 긴고름은 안감의 고름과 같이 두 장으로 고를 내어 맨다.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보를 앞가슴과 등 그리고 양 어깨에 달아 황제의 표지를 했다. 황룡포를 착용할 때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옥대(玉帶)를 띠며, 검정색 녹비화(鹿皮靴)를 신는다. 익선관은 세종 때부터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황색은 예부터 생출(生出)의 덕을 의미하고 방위 계절의 중앙이 된다고 하여 가장 귀히 여긴 색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갖추어 왕이 황룡포를 입지 못하고 홍룡포(紅龍袍)를 입었는데, 광무(光武) 원년(1897)에 고종이 칭호를 황제로 바꾸면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근거로 새롭게 제정한 복제개혁(服制改革)을 통해 처음으로 황룡포(黃龍袍)를 입게 되었다. 왕은 대홍색(大紅色)에 남색 안을 넣은 곤룡포(袞龍袍)에 금실로 수놓은 사조룡보(四爪龍補)4개를 가슴과 등,양 어깨에 각각 달고, 황제는 황색 곤룡포에 붉은색 안을 넣고 오조룡보(五爪龍補)을 같은 위치에 단다.갓은 둥근 곡령(曲領)으로 하여 오른쪽 어깨에서 단추를 끼워 고정시킨다.양쪽 무의 여분을 뒤쪽으로 반 정도 접어서, 무늬 윗부분을 꿰매어 고정시킨다. 세조 2년(1456) 3월에 『대명집례(大明集例)』를 상고(詳考)하여 중국 황제 곤의의 왼쪽 어깨에는 해가 있고,오른쪽 어깨에는 달이 있으며 황태자·친왕(親王)·군왕은 곤룡포에 발톱 수가 다섯인 오조룡을 썻으나 우리나라의 세자는 곤룡포에 사조룡을 써서 겸양의 뜻을 두게 하자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흔히 용포(龍袍)·어곤(御袞)·곤복(袞服) 등으로 불리어졌다. <왕복의 보(補)착용 모습> <왕의 홍룡포 보와 왕비의 적의 보> 흉배의 무늬 중국과 한국의 관복제도(官服制度)에서 관리들의 품계(品階)를 상징하는 일종의 휘장으로 관복의 흉배를 들 수 있다.우리나라에서 이 흉배 장식이 제도적으로 법문화한 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에서 였다. 이전의 흉배 양식은 중국 명나라의 양식을 산발적으로 답습했으므로 양식상 중국 것과 혼돈하기 쉬웠다.세종 28년(1446)에 흉배 제정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사치를 억제하고 검소하고 소박함을 위하여 보류하자는 영의정 황희(黃喜)의 의견이 있어서 실현되지 못했다. 그후 단종(端宗) 2년(1454)에 비로소 당상관 이상 문무관의 흉배 격식이 제정되었다.이것은 명나라 홍무체제(洪武體制)를 따른 것이며 다만 왕국이등체강원칙(王國二等遞降原則)에 따라서 명나라 제도의 3품 흉배가 1품으로 정해졌다.이에 따라서 조선시대 문관1품은 공작(孔雀),2품은 운안(雲雁),3품은 백한(白鷳)이었으며,무관1품과 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비(熊羆)로, 왕실의 대군은 기린(麒麟), 왕자군은 백택(百澤), 대사헌(大司憲)은 해치 등으로 정해졌다. <대군의 기린흉배, 문관1품 공작흉배, 문관2품 운안흉배, 문관의 단학흉배, 문관의 쌍학흉배, 무관의 단호흉배, 무관의 쌍호흉배>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에 이르러 나라에서는 비로소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관료 전체의 흉배제도를 제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무늬도안 등이 비로소 명나라 제도에서 벗어나서 국풍화(國風化)하기 시작하니 매우 주목할만한 일이다. 왕, 왕세자의 상복인 곤룡포에는 용무늬의 둥근 흉배를 가슴, 등, 양 어깨에 장식하였고 백관의 상복인 포에는 가슴과 등에 방형으로 장식하였다.흉배는 옷감과 같은 비단에 품계에 따른 문양을 수놓아 관복을 화려하게 하고 상하의 신분을 표시하게 하였다. 무늬의 변천을 살펴보면 주제가 되는 무늬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초기에는 모란과 구름무늬,16세기 후바에는 구름무늬 등이 곁들여진 예가 많다.특히 조선조 흉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 무늬의 주류를 이루어온 구름무늬는 시대적 변천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15세기 세종조 무렵의 흉배에 나타난 구름무늬는 고려 상감청자에 나타나는 서운문(瑞雲文)과 유사한 작은 구름이었으며,16세기 말 선조 때부터는 큰 화문 형식으로 길게 가로지른 뭉게구름이었다.그러나 15,16세기의 흉배 문양은 무늬 개개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며 또 배경과 주 무늬가 거의 대칭을 이루는 비중으로 흉배면의 좌우를 나뉘어서 다루어지고, 모두 회화적으로 사실 표현을 하였다. 그밖에 문양에 따른 흉배의 종류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 백한흉배(白鷳胸背) 꿩과에 속하는 새로 꼬리가 길다.문관3품이 착용. ◯ 웅비흉배(熊羆胸背) 맹수인 곰은 명산에 살며 겨울에는 칩거한다.사납고 힘이 세어 수목을 뽑을 수 있다고 한다.무관3품이 착용. ◯ 연작흉배(練鵲胸背) 연작은 문채가 있고 꼬리가 길며 부리는 짧고 적색인데, 속칭 산까치로서 미래의 일을 아는 새라고 한다.4품관의 조복 및 제복의 후수에 시문. ◯ 계칙흉배(鸂鶒胸背) 자주색을 띤 원앙새인데 보통의 원앙보다 크다. ◯ 운안흉배(雲雁胸背) 꿩구름은 산천의 기운이며 기러기는 양기를 따르는 새로서 거취의 의리를 알고 질서를 어기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다. 문관2품이 착용. ◯ 스란치마의 무늬 스란단을 부착한 치마이다. 여름에는 사(紗),겨울에는 단(緞)으로 만드는데 빛깔은 다홍색이나 남색으로 한다.보통 치마보다 한 폭을 더하여 넓게 하고 땅에 닿을 정도의 길이로 한다. 치마 아랫단에 금박을 찍거나 큼직한 스란단을 덧붙인다. 스란단의 문양은 왕비는 용문(龍紋),세자빈은 봉황문(鳳凰紋), 공주·옹주는 꽃과 글자문이다. 연산군 10년(1540)에 상의원(尙衣院)에 명하기를"자색 스란과 남색 스란을 대내(大內)에 들이도록 하라"고 한 기록이 있다. 스란단을 한 층 댄 스란치마는 소례복(小禮服)에, 두 층을 댄 대란치마는 대례복(大禮服)에 착용한다. ◯ 색동저고리와 금박무늬 오색천을 이어 소매를 만든 저고리로, 돌이나 명절에 어린아이에게 입힌다. 색동저고리는 오방색(五方色)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남쪽은 적색(火), 북쪽은 흑색(水), 동쪽은 청색(木), 서쪽은 백색(金), 중앙은 황색(土)으로 이를 기준으로 하여 흑색을 뺀 적·청·황·녹의 오색(五色)이 쓰였다.아이의 돌에 남녀 구별 없이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여 입히며 여자아이는 자색, 남자아이는 남색의 돌띠로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궁중에서는 사월 초파일에 아기 왕자에게 색동관사로 된 두루마기를 입히기도 하였는데,현재 궁중유물전시관에 한 점이 소장되어 있어서 그 형태를 알 수 있다. <남금박(藍金箔)대란치마 스란단에 부귀다남문자와 천도·불로초·연꽃 등의 금박 무늬> 참고) 문(文) - 글자(書契,사물을 표시하는 부호), 꾸밈(飾), 아름다움(美), 빛남(華), 아롱짐, 문채 등을 뜻한다. 문화적인 것으로 인간의 내적 정신활동의 소산이라 말할 수 있다. 문(紋) - 무늬(織文) 또는 문체를 뜻하는 것. 외적 물질적 소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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