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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조선의 아이들
1970년대 세운상가
동대문 상설시장
18세기 전반에 이미 큰 규모의 시장으로 번성했던 옛 동대문 상설시장. 1905년 7월 정식으로 개설된 후 시대에 따라 배우개장, 광장시장 등으로도 불렸다.
전통 재래시장이었던 동대문시장은 현재 대형 패션 유통 시설들이 인근에 들어서 패션밸리로 재탄생했다.
일제에 헐리기 전 서소문
일제에 헐리기 전 서소문 뒤편의 모습. 소의문으로도 불린 서소문은 옛날 서울 도성의 서남쪽, 즉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자리했던 사소문 중의 하나였다. 조선조 태조5년(1396) 도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지어져 처음엔 소덕문이라 불렸다.
한동안 문루가 없어졌다 영조때 다시 모습을 되찾았지만, 1914년 일제가 도시계획 명분으로 헐어내 지금은 아픈 역사만 남아 있다.
우마차가 다니는 1895년에 찍은 국보 1호 숭례문.
지금의 공원화된 모습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다. 길 양편에 서 있는 시장은 1608년(선조 41년) 대동미(大同米)·포(布)·전(錢)의 출납을 담당하는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돼 지방 특산물 등을 매매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황소가 끄는 우마차가 100여년 전의 고단한 삶을 각인시켜주는 듯하다.
수표교 곰방대 사나이
대한제국 시기에 찍은 청계천 수표교 주변. 과일가게 옆에서 중년남성이 곰방대를 쥐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다. 수표교는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1420년(세종 2년)에 건설되었고 1760년(영조 36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원래 청계천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하였다. 2003년 6월 청계천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청계천 위에 원래의 수표교를 본떠 만든 새로운 수표교가 생겨났다.
미스·미스터산업 선발대회
미스·미스터산업 선발대회를 아시나요? 1962년 5·16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기간 (4월25일∼6월5일) 중 경복궁에서 열린 이 대회는 전국에서 도별 예선을 거친 남녀 대표 43명이 참가해 육체의 미가 아닌 근로의 미를 과시하는 색다른 행사로 치러졌다.
해방 당시 마포나루터
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였던 마포나루의 1946년 모습.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해상교통이 발달해 내륙항의 요충지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물이나 소금, 젓갈류를 비롯한 해산물이 성시를 이뤘다.
그 중에는 새우젓 가게들이 많아 마포라고 하면 ‘새우젓 동네’로 통했다고 한다.
청나라 유배시절의 흥선대원군
조선 말 비운의 개혁 정치가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배후조종 혐의로 1882년 청나라에 끌려가 4년간 허베이(河北)성 바오딩(保定)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절치부심 복권을 꿈꾸며 귀국할 날만 기다리던 그가 1883년 톈진(天津)에서 책을 들고 찍은 기념사진.
1885년 귀국한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머물며 재기를 노리다 1887년 청나라의 원세개와 공모,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을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승하 하루 전날의 고종황제
고종황제의 승하 하루 전날 모습. 평소 건강하던 고종은 1919년 1월22일 68세의 나이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불러일으켰으며, 3월3일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민족 자주'' 외쳤던 종로, 1898년 만민공동회
1898년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외세의 배격과 언론, 집회의 자유 등 민족주의·민주주의 운동을 제창하였다.
독립협회는 그후 황국협회의 견제로 해산되고 자유민권국가 설립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대안문 앞 고종황제 즉위 축하 인파
1897년 10월 열린 고종황제 즉위 축하 인파가 대안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다. ‘대안문’은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궁의 정문으로, 1906년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재건되면서 명칭도 지금의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왼쪽 2층 건물은 프랑스이 운영하던 팔레스 호텔.
남대문의 프랑스 선교사들
남대문 선교에 나선 프랑스 신부들(1900년 촬영).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인 이들은 1830년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선교에 나선 이래 순교와 박해의 고난을 겪으면서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다졌다.
장사진 이룬 떡방앗간-1970년 추석 하루전 방앗간
민족 최대명절인 한가위, 떡쌀을 빻으려 동네 방앗간에 장사진을 이루던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마당에 솥뚜껑을 걸어 전을 부치고 송편을 찌고 온 집안엔 웃음이 넘쳤다.
그 환한 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추석이 다시 올 수는 없는 걸까. 사진은 1970년 추석 하루 전 서울 주택가 방앗간.
볼모로 끌려간 영친왕
11세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영친왕(사진 앞줄 가운데)이 일본 왕세자와 이토 히로부미와 찍은 사진(시기 미상).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은 이후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는 등 일본에서 굴곡의 삶을 살았다.
8·15 광복 후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 1963년 11월 56년 만에 환국하였으나 7년여 병상 생활을 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서울시청앞 서커스 공연
지금은 추억속에 아련한 서커스. 시골 장바닥에 무대를 꾸미고 외줄자전거와 공중곡예로 삶에 지친 국민들에게 최고의 위안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 9월4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서독 주그스피츠 서커스단 내한공연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추억의 도리깨질
요즘은 기계식 영농으로 벼를 베고 탈곡까지 하지만 예전에는 벼나 보리를 베고 말려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이젠 시골 어디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예전엔 마당에 곡식을 널어놓은 뒤 도리깨질로 알곡을 떨어냈다. 풍요의 계절, 빛바랜 사진 속 우리 풍속이 그립기만하다.
정부수립 10주년 기념식장 인간 국기게양대
1958년 8월15일 정부 수립 10주년 기념식장인 중앙청 옥상에서 유엔기와 한국전 참전 16개국의 국기를 붙들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안쓰럽다. 흑백사진 이 한 컷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단면이 투영돼 있는 듯하다.
무시험 입학 ''뺑뺑이의 추억''
‘뺑뺑이’를 아시나요. 중학입시 개혁안에 따라 서울에선 1969년, 지방10개 도시에선 1970년 무시험 입학이 시행됐다. 수동식 추첨기에서 나온 번호 적힌 은행알에 따라 학교가 배정되는 방식이었다.
어린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했다는 긍정적인 여론도 많았지만, 3류 학교에 배정된 학생들의 학부모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리운 어머니”… 논산훈련소 면회 모습
1960년 논산훈련소의 면회 모습. 바리바리 싸온 음식을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먹는 모습이 정겹다. 비록 세월은 변했어도 고생하는 아들을 위해 맛난 음식을 장만하는 어머니들의 모정은 변하지 않았다.
1950∼70년대 달군 댄스홀 열풍
댄스홀 열풍은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국을 달군 문화코드였다. 지금이야 나이트클럽 등의 무도장이 넘쳐나지만 예전의 댄스홀은 자유로이 이성을 만나 즐기는 중년들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 불륜으로 인한 가정 파탄과 주택가까지 비밀교습소가 차려져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성벽 헐리기 전 숭례문
국보 제1호인 숭례문(남대문)이 잃어버린 성벽을 약 100년 만에 되찾는다. 서울시는 숭례문 양옆에 연결돼 있던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성곽을 2008년까지 복원키로 했다. 이는 1907년 일제가 헐었던 성곽을 1세기 만에 복원하는 것이다. 사진은 성벽이 헐리기 전 1880년 찍은 모습이다.
조선말 관아 재판광경
네 죄를 네가 알렸다 ! 조선말 관아에서 벌어진 재판 광경.지방에서의 재판은 군에서는 군수, 현에선 현감이 맡아 했다고 한다.
빙속대회 준비 요원들
쓱싹쓱싹…. 1955년 한강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대회를 앞두고 준비 요원들이 천조각으로 빙판을 정리하고 있다. 최신 실내링크가 곳곳에 들어선 지금과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광화문 120년전 모습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이 다시 태어난다.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알리는 문이 되라는 뜻으로 지은 광화문은 근대사의 영욕을 함께해 왔다.
2009년 말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는 광화문은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전기가 될 것이다. 사진은 일제에 의해 이전하기 전 1903년 찍은 모습
120년전 서울의 전차
1903년 찍은 서울의 전차.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워크의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1898년 12월 궤도가 완공되었고 이듬해 5월부터 본격 운행을 시작했다. 전차가 운행되자 이를 타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정원 40명, 중앙에 양반용 특실이 있었다.
스키대회 한복 여성 경기보조원
스키시즌이 본격 개막됐다. 1954년 열린 대관령스키대회의 여성 경기보조원이 어울리지 않게 한복차림이다. 형형색색의 스키복을 차려입은 요즘의 스키장과는 딴 세상이다.
치마끈 질끈 맨 여궁사들
한국 여자 양궁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갔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신분상 귀천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이 활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한국 양궁이 강한 건 한민족의 핏속에 활 잘 쏘는 DNA가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진은 1910년 서울에서 열린 여자궁술대회
사금 채취하는 조선인들
쇄국정치를 펴던 조선이 1876년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열강의 세력이 침투해 조선엔 금광 개발 붐이 일었다. 특히 미국이 차지한 운산금광은 ‘노다지 금광’으로 알려져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사진은 1896년 평북 운산금광에서 사금을 채취하던 조선인 일꾼들.
캐럴 부르는 애육원 천사들
어렵고 못살았지만 꿈을 키우며 지내던 시절을 반추해보면서 우리의 불우이웃과 꿈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의미있는 성탄이 되었으면 한다. 1954년 서울 남북애육원 성탄절 행사에서 캐럴을 부르던 천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초헌을 아시나요 ?
초헌은 조선시대 종2품 이상의 관리들이 타고 다니던 개량형 가마로, 사람이 앉는 승교와 외바퀴로 구성되어 있다. 평지에선 바퀴를 이용해 굴리고 장애물이 있는 곳에선 가마처럼 메고 다녔다고 한다.
이것이 ''주리틀기''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주리틀기. 주리는 주뢰(周牢)에서 변한 말로 죄인의 두 발목을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서 엇비슷이 트는 형벌로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야 할 만큼 끔찍한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본디 중국에서 들여왔는데 1732년 영조의 명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근절되지 않았다.
신식군대 별기군
조선후기 1881년 창설된 신식 군대 별기군. 80명의 지원자를 뽑아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훈련을 시켰다.
이들 별기군에게 급료나 피복 등 특별 대우를 해줘 일반 병졸들의 불만을 샀고, 임오군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최초 방미 외교사절단, 보빙사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년 뒤인 1883년 조선은 미국에 최초의 외교사절인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전관대신 민영익(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을 대표로 한 13명의 사절단은 워싱턴과 보스턴, 뉴욕 등의 선진 서구문물을 접하고 돌아왔다. 사진은 귀국 후 찍은 기념사진.
정감어린 설탕 선물세트
1960∼70년대 대표적인 명절선물은 설탕세트였다. 지금은 천만원이 넘는 고가의 선물이 등장했지만 소중한 정성을 모아 보내던 예전의 선물만큼 정감이 있을까? 코앞에 닥친 설 명절, 이웃끼리 친지끼리 서로의 마음과 정을 나누던 추억이 그립다
이준 열사가 활약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고종의 밀사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파견되었던 이준 열사는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와 한국의 존재에 냉담한 열강의 태도에 비분강개하여 할복 자결로 항거하였다. 사진은 당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회의장.
너무 앳된 기생 교습생들
노래와 웃음은 팔지언정 평생 지조를 팔지 않는다는 조선시대의 기생.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린 그들은 고관대작이나 양반들을 상대하기 위해 춤과 노래뿐 아니라 거문고 등의 악기를 잘 다뤘고 서화와 시짓기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1910년 찍은 이 사진엔 기생교습생들의 얼굴이 너무나 앳돼 보인다.
하와이 교민 1세들
한인들의 미주이민사가 한 세기를 넘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의 교육열은 중국, 일본 등 아시아계 이주민 가운데 가장 높아 6년제 정규학교를 가장 먼저 세웠다고 한다.
이런 교육열은 미국에서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은 1907년께 찍은 하와이 마우이섬의 한인학교 학생들과 교사.
日 토목공사장의 한인들
한국인의 일본 이주가 본격화된 것은 일제 침탈이 있은 1905년 이후다. 이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로 악착 같은 삶을 살아왔다. 사진은 초기 이주자들이 토목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들
한 세기 전 미주에 이주한 한인 이민 1세대는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민족 특유의 억척스런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들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은 조국 독립의 희망이 되었고 민족 자주의 기틀이 되었다.
강제 징집된 조선 청년들
일제에 끌려가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조선 청년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래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병력 보충이 필요하자 조선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했다.
이후 1944년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이들은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몰리게 되었다.
신촌 잡화상 거리 행인들
1890년 신촌잡화상거리에 모여든 행인들. 난생 처음 보는 사진기가 너무나 신기해 넋이 나간 듯 바라보는 모습이 재미있기만 하다.
신미양요, 美 함대 강화도 상륙작전회의
1871년 4월 신미양요 때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제독이 강화도 상륙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사진이다. 13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가진 FTA 협상으로 국운 부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당시의 개방은 외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졌지만 이번 협상은 대외 문호를 활짝 열어 세계화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이다.
벙거지꾼을 아시나요?
우리나라에서 우편배달업무를 시작한 것은 1884년 우정국이 생겨나면서부터다. 당시 우편배달부를 벙거지꾼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메일, 휴대전화로 눈 깜짝 할 새 안부와 메시지를 전하는 지금과 비교하면 한가롭기만한 옛날이야기이다. 속도에 빠져 사는 세상, 우리가 얻은 것은 빠름이지만 잃고 사는 건 정감이 아닐까.
감옥에 갇힌 동학군
봉건제도의 개혁과 국권 수호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동학농민군의 애국애족 정신은 우리 근대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큰칼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는 동학군의 모습에 기개가 넘쳐흐른다
한국 최초의 기관차
1899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미국 브룩스회사의 모갈형 기관차는 당시 시속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굼벵이 열차였다.
스피드 혁명에 사는 세상, 과연 빠르게 사는 것일까 쫓기며 사는 것일까. 느림을 잃고 사는 세태, 속도에 쓸려 여유를 잃어가는 건 아닐까.
소원 비는 사람들
무슨 소원을 빌까? 불거져 나온 눈, 뭉툭 솟은 코, 익살스런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는 장승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치성을 드리고 있다.
장승은 가난해도 순수함을 간직했던 선조들의 심성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민족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풍요를 누리지만 여유와 해학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되찾아야 할 삶의 의미가 아닐까.
경복궁 산업박람회 인파
1929년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 몰린 인파. 당시 일제는 박람회를 핑계로 경복궁을 훼손하고 당시 궁정 정문으로 나라의 상징인 광화문을 일반인의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원형 되찾기에 나선 경복궁과 광화문엔 민족의 수난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구한말 왕궁 소방대
구한말 왕궁소방대에서 6∼9인이 인력으로 가동하던 완용(펌프)소방장비. 고종황제 이후 정치 경제의 기강이 무너지고 외세의 침략이 격화되면서 궁궐 화재 등이 많아 왕궁전속 소방대를 설치, 화재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첨단장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일제강점기시절 용산역
1923년의 용산역. 고색창연한 사진 속엔 일제의 침략이 남긴 근대사의 아픔이 잔영으로 배어 있다. 징용과 수탈의 아픈 과거를 딛고 용산역 일대는 이제 웅비의 시대를 맞고 있다.
철도정비창 부지와 한강수변을 연계 개발해 세계적인 명품 도시를 꿈꾸는 이곳이 민족 번영의 새로운 동력으로 새역사를 쓸 날이 머지않았다.
짚신장수 부자
지게가 내려앉을 듯, 목이 휘어질 듯, 짚신을 지고 있는 부자의 모습이 안쓰럽다. 지금이야 공예품 가게에서나 간혹 볼 수 있는 짚신을 생계 삼아 힘든 삶을 살았을 이들 부자의 한 컷 사진이 선조들의 고난한 삶을 투영해주고 있다. 1910년 촬영.
130여년 전 광화문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 민족 자긍심 회복을 위한 광화문 제 모습 찾기 공사가 한창이다. 이미 경복궁 앞 지상 건축물이 모두 철거돼 본격적인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새 광화문은 조선 고종 때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의 원위치를 찾아 지금의 광화문보다 14.5m 앞쪽(남쪽)에 설치되며,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경복궁 중심에서 5.6도 틀어진 중심축도 제 방향을 되찾는다.
새 광화문은 2009년 말쯤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사진은 1890년에 찍은 광화문의 측면모습.
''犬公 가미카제''
“견공 가미카제를 아시나요?”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군견을 이용해 동굴이나 중요시설물을 파괴했다. 견공 자살특공대로 불렸던 이들 군견은 작은 수레에 폭탄을 싣고 목표물을 공격했다고 한다.
침략전쟁을 부인하며 군국부활을 꿈꾸는 일본의 야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동북아의 아픈 과거사는 앙금으로 남고 선린과 화해의 길도 멀기만 하다.
1969년 흰 블라우스와 검정스커트 차림으로 등교하는 이화여대생들
숭례문의 전차
서울에 추억의 전찻길이 복원된다고 한다. 1899년 첫 운행된 전차는 우리 근대사의 영욕의 궤도를 함께 달려왔다. 숭례문을 지나는 전차는 일제의 한민족 말살 야욕이 고스란히 깔린 고난의 민족사를 보여준다.
사진처럼 대문을 지나던 전차는 일본이 숭례문 밑으로 다닐 수 없다며 전차궤도를 옮기면서 성벽을 훼손, 민족정기에 흠집을 냈다.
첫댓글 현재를 있게 한 과거
우리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