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UN 그리고 한국
대한민국은 태생부터 국제연합과 불가분의인연을 맺게 된다.
이미 공산화의 길에 들어선 북한이 소련의 사주에 따라 남북한
동시 선거 실시를 거부,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남쪽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감시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에
따라 1948년 8월 15일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게된다.
UN은 1948년 12월 12일 파리(Paris)에서 개최된 제3차 총회에서
총회 결의 제195 호(lll) 를 찬성 48, 반대 6(소련 등 공산권 국가),
기권1의 압도적 다수로 가결, 신생 대한민국을 “국민의 정당한 의사
표시에 의한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한반도 내 유일 합법 정부” 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공화국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 하에 무방비 상태의 한국을 무력으로 침공했다.
신생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몰리게 된다.
이때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6.25 당일 긴급 회의를 소집,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평화의파괴(breach of peace), 즉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군이 즉각 38도 선으로 철군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
(안보리 결의 제 82호)를 채택한다.
이같은 안보리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침략행위를 계속하자 해리 트루만
(Harry Truman) 미국 대통령은 6월 27일 한국군 지원을 위해 미 해.공군의 출동을 명령하고,
유엔 주재 미국 대표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한국이 북한의 무력 침공을 격퇴하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안보리에 제출한다.
이 결의안은 같은 날 안보리에서 찬성 7, 반대 1(유고슬라비아), 투표 불참 2(인도,이집트),
결석 1(소련)로 채택된다(안보리 결의 제 83호).
이어 안보리는 7월 7일 회원국들이 제공하는 병력 및 기타 지원을 미국이 주도하는 통합사령관
하에 두도록 권고하면서, 미국에 대하여 통합사령관을 임명할 것을 요청하고 통합사령부가 참전
각국의 국기와 함께 유엔기(旗)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한다(결의 제84호).
트루만 대통령은 이 결의에 의거,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원수를 통합사령관에
임명하고 지상군 병력을 파견한 16개국(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네델란드,
벨기에, 그리스, 룩셈부르크, 태국, 필리핀, 터키, 콜롬비아 남아연방,에티오피아)의 군대와
대한민국 군대가 통합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UN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사 회생하게 된다.
대한민국을 존망의 위기에서 구한 것은 미국이었다.UN군 참전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협조자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전쟁을 부추기고 지원한 소련(USSR)이었다.
1950.1.13. 자유중국을 유엔에서 축출하고 중공(PRC)이 UN에서 중국을 대표하게 하려는
소련의 제안이 안보리에서 부결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소련(Jacov Malik 대사)은 안보리 회의
참석을 boycott 하게 되는데이러한 상황은 6개월 이상 계속된다.6.25 발발 당시 안보리에서 미국의
주도로 UN군 참전 관련 모든 안보리 결의안이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회의
불참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소련이 안보리 회의에 참석했다면 거부권 행사로 한국전쟁 관련 안보리 결의 채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UN 을 통한 미국의 신속한 조치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6.25 73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본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