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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루카 2,16-21
+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해가 바뀌면 나이가 의식이 되세요?
이제 그럴 나이들은 지나간 것 같고 나는 10년 전부터 새해가 되면 한 살을 빼요.
점점 나이가 줄어들죠.
그러니 마음이 편하고 나이로부터 좀 자유로워질 수가 있죠.
나이가 점점 많이 든다고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세대 간의 벽을 쌓게 돼요.
그런데 나이를 점점 줄이기 시작하면서 그게 무너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한 살씩 빼면 됩니다.
그러니까 새해에 먹는 떡국은 한 살을 더 먹으려 먹는 떡국이 아니라 빼기 위해 먹는 떡국이에요.
그래서 두 그릇을 먹으면 두 살이 빠지는 거고, 나는 아침에 떡국 먹고 점심도 또 먹을 겁니다.
오늘 새해 첫날이면서 또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면서, 또 1968년도에 바오로 6세께서 선포하신 세계 무슨 날?
평화의 날이에요. 평화의 날.
평화가 여러분들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 내려가길 빕니다.
우리나라에도 평화가 가득 내려오기를 빕니다.
지구촌에도 우리들이 비는 평화가 가득 차기를 또한 빕니다.
또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촌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도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짐승이건 인간이건 모든 피조물, 하다못해 나무라 하더라도 평화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피조물이 과연 있을까요?
요즘 길 건너 어느 종중산인데 일주일 전부터 간벌하고 있어요.
나무 자르는 사람들이 아름드리나무를 잘라내요.
전 그것이 무너질 때마다 쟤네들이 사람이라면 얼마나 아플까, 허리를 끊어버리고, 다리를 잘라버리는 것일 텐데.
식물에게는 생혼이, 짐승들에게는 각혼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이게 천주교 교리에요.
식물들이 가지고 있는 그 혼은 우리 영혼과는 달라도 쟤네들도 뭔가 있어요.
하다못해 난초를 기를 때도 사랑을 많이 주면 잘 자라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죽어.
내가 예전에 한번 시험을 했다고 그랬잖아.
두 개를 다른 방에 두고 한 방에 있는 난을 볼 때마다 웃으면서 ‘이쁘다, 어쩜 그렇게 이쁘게 크니?’ 하니 잘 자랐는데,
다른 방에 난은 볼 때마다 도끼눈을 떠가면서 욕을 했더니 놀랍게도 그 난을 3일 만에 죽어요.
그걸 보면서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른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가 있고 깊은 상처를 낼 수 있구나.
하찮은 식물도 우리 교리대로 생혼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지구가 다 인간들 때문에 망가지고 있죠.
그래서 올 한 해 모든 생명체에게도 평화가 내리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집에 기르는 화초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리려 애쓰는 것이 우리 인간의 도리라고 저는 생각이 돼요.
교우들이 가져다준 난을 제가 잘 못 키워요. 하지만 바로 버리지 않아요.
열심히 물주고 햇빛을 줘야죠. 가끔 성수도 뿌려줘.
내년에 여기서 싹이 나올지도 모르죠.
죽은 줄 알았는데 싹이 나오는 걸 보면 얼마나 행복해요? 살아있었구나.
우리 영혼도 똑같아요.
삶에 찌들어 죽어 있는 영혼들이 많잖아.
그러다가 하느님의 도움 아니면 지인들의 따뜻한 마음으로 일어서죠.
그게 바로 부활이죠.
평화를 갈망하지 않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평화가 안 부서지는 평화면 좋은데 어떤 때는 한순간에 유리처럼 깨져버리기가 쉽다는 거예요.
동의하시죠?
‘여러분들 작년 한 해 동안 평화롭게 사셨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각자 대답이 다를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2024년이 청룡의 해, 올 한 해 동안 평화롭게 살 자신 있으십니까?’ 하고 여러분이 나에게 질문해도
난 대답 못 할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 무너져 버리거든요.
이 평화를 깨는 인간의 3대 문제가 있어요.
첫 번째가 인간의 문제예요.
두 번째가 질병의 문제예요.
세 번째가 믿음의 문제예요.
인간과 질병의 문제는 죽음과 연결이 돼 있고, 믿음의 문제는 영혼과 연결이 돼 있어요.
내 주변에는 다 좋은 사람들만 있고 사람들이 나 보고 인간성 좋다 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런 것이 깨져요.
또, 남 얘기로만 들리던 그 병이 나한테 오잖아요.
여러분들 작년 한 해 병원에 갈 때마다 얼마나 조마조마하셨어요?
누가 뭐에 걸렸다 얘기 들으면 혹시 나는 아닐까? 내가 좀 이상해졌어.
또, 우린 항상 또 작년 한 해 동안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던가 아니죠.
양은 냄비 달궜다 식듯 할 때 되게 많았죠.
몇 년 동안은 코로나라고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그걸 잘 써먹었어, 성당 안 나가도 되고.
인간과 질병과 믿음의 문제가 우리 평화를 깰 때가 많아요.
그래서 그 누구라도 이 세 가지 문제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되게 폭이 넓죠.
내 주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예요.
지금 전쟁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미사일이 날아다니지 않습니까?
중동은 중동대로, 러시아 쪽은 러시아대로 1년 넘게 아이들이 있는 대로 막 쏴요.
이제는 막 보복이죠, 인간이 더 이상 악해지려야 악해질 수 없을 정도로.
이북에 있는 사람이 미사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쑥대밭 되는 거 아시잖아요?
서로가 미사일을 도시마다 겨냥하고 있죠.
전쟁 문제.
그리고 자연 파괴 누가 해요? 나무가 나무를 파괴해요? 인간이에요.
전부 다 오염시키잖아. 바다고 뭐고 이거 인간 문제예요.
가정 파괴 문제
제가 이제 가끔 강론 때 근처 ‘궤짝’이라는 곳을 소개하죠.
거기 가면 사람들이 다 행복해서 오는 이유가 그 집 돈가스가 맛있어서가 아녜요.
들어가는 진입로가 3M밖에 안 돼서, 오다가 차 마주치면 후진해야 하는 불편함도 무릅쓰고도 찾아가는 이유가
그 집 식구들의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에요.
그 네 식구들 보여주는 웃음은 가식의 웃음이 아니거든, 평화를 주는 웃음이에요.
작년 한 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정을 보고 얼마나 평화를 느꼈을까?
가정을 파괴하는 것도 집에서 기르는 반려견이 아니잖아요.
맞죠? 고양이가 아니에요.
그 안에 살아가는, 그것도 많기나 해?
3명 4명밖에 안 되는 식구들이 결국에는 가정을 파괴해요.
그냥 여관이야. 다 딴 방 쓰고 대화는 해본 적도 없고, 저녁에 모여서 촛불 켜고 기도해 본 적도 없고.
또 살인, 배신, 자살, 인간 문제에 관련된 것들은 참 광범위하고 우리의 평화를 파괴해요.
질병 문제.
우리 지난 3년 동안 어떤 놈이랑 싸웠어요? 코로나.
3년 동안 코로나라고 하는 놈한테 휘둘림을 당하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집안 식구들 가운데도 코로나 걸렸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예상하지 못했던 놈인데 지금도 끝난 것은 아니죠?
이 코로나가 알려준 것은 어떻게 보면 레드카드, 분명히 경고 같아요.
코로나로 정말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고, 코로나 후유증 때문에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 되게 많아요.
그리고 또 다른 이름으로 어떤 질병이 올지도 몰라요.
우리들은 더 어마어마한 질병을 마주해서 ‘코로나 그건 병도 아니었네.’ 할 정도로 인간을 멸망시킬 수 있는,
우리 역사에 보면 그런 병들 많았잖아요.
흑사병이라든지, 뭐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어떤 정신 나간 인류학자 어떤 놈은 그렇게 해서 인구 조절을 하는 거래요.
하느님이 병을 주어.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무튼 우린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이 평화를 끌어안고 살아야 해요.
이 불안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우리는 평화를 찾아야 하죠.
백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해요.
그걸 찾는 것이 바로 승리하는 길이고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평화를 깨는 세 가지 문제 뭐라고 그랬죠?
인간, 질병, 믿음의 문제.
그런데 참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세 가지 문제에 부딪히면 우리는 성찰하게 돼요.
성찰은 성숙해지고 난 다음에 되는 것이 아니라 성찰하기 때문에 인간은 성숙해져요.
아주 인격이 성숙한 사람은 성찰도 잘하겠지? 아닙니다.
이 세 가지의 문제에 부딪히면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고독해져요.
그 고독 가운데서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돼요.
첫 번째로 내가 어떤 인간이었느냐?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았는가.
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돼요.
내 인성에 대해서 뒤돌아보게 돼요.
내 인성이 세상에 평화를 주는 인성이었느냐?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장례식장에 왔던 사람들이 ‘그래 그분은 참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줬던 사람이야.’
하는 소리를 들어야겠죠.
또 질병에 대한 것.
병이 들면은 죽음을 생각하게 돼요.
죽음을 당당하게 눈을 부릅뜨고 봐야죠.
우리 믿는 자들은 죽음을 보고 피하면 안 돼요.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피해서 도망가서 우회전하고, 이렇게 꼬불꼬불한 길로 돌아가 가는 평화가 아녜요.
극복하는 평화예요.
딱 맞짱 떠서 넘어서는 평화지, 피해 도망가는 평화나 눈 가리고 도망가는 평화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 세 가지 문제에 부딪히면 우리 자신을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것을 다시 한번 묵상하게 되면서
그때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나는 절대 기죽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게 됩니다.
누구나 한 번은 다 가야 하는, 한 번은 마주쳐야 하는 그것이 죽음 아닙니까?
또 믿음의 문제도 성찰하게 되겠죠.
내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 종잇장보다도 가벼운가?
그래서 이 세 가지 문제는 우리를 성숙시킨다고 하는 것이 결론이에요.
여러분들 인류 역사를 어떻게 나눕니까?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죠.
예수님 탄생 전과 예수님 탄생 후.
그만큼 예수님의 탄생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간에 큰 사건이었어요.
그리스도 탄생의 주인공인 마구간에 태어난 그 가난한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은 기원전 사람 또는 기원후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다른 말로 율법의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느냐로 나뉘죠.
십자가에 매달려 사투를 벌였던 그 하느님의 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또 역시 기원전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지 기원후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지 하는 것으로 나눠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라는 것은 다른 말로 진정한 신약 시대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옷만 걸친 사람들이 엮어가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엮어가는 시대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성령 시대입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그리스도 이후에 탄생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이후에 탄생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딱 박혀 있어야 할 두 가지 단어가 있다면?
저는 이 강론 준비하면서 두 가지가 떠올라.
첫 번째는 가난한 구유예요. 화려한 구유가 아니라 가난한 구유.
또 하나는 십자가예요.
그리스도 탄생 이후에 산다고 하면서도 가난한 구유와 십자가를 멀리한다면,
가난한 이와 고통받는 이를 마음에 품지 못한다면 여전히 구약의 인간, 기원전 사람이다 이 얘기입니다.
가진 것을 자기 것으로만 여기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못한다면 역시 이 사람도 구약의 인간, 율법의 인간인 거죠.
그래서 우리들은 올 한 해 동안 내 삶이 구유와 십자가를 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묵상해야 할 겁니다.
‘가난한 이와 상처받은 이에게 향하고 있는가?’
예수님 오신 지 2천 년이 지났습니다.
수십억의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어도 인류는 여전히 그리스도로부터 먼 삶을 살고 있지.
러시아는 국교가 러시아 정교회예요. 맞죠?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정교회예요.
팔레스타인은 이슬람이죠.
‘이슬람’이라는 것은 이스마엘에서 나온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서 나온 이스마엘에서 이슬람이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결국에는 아버지는 같아. 배다른 자식끼리 수천 년 동안 싸우는 거야.
자기네를 사막으로 쫓아냈다 이거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맨날 사람 죽이면서도 알라 찾아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죠.
군인들도 옷에 성구를 적어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성경 읽으면서, 총 쏘고 죽이고, 또 성경 읽고 죽이고 그래요,
예수님이 오신 지 2천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인류는 그리스도로부터 먼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교 역사를 뒤돌아볼 때 그리스도를 가장 오해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안다고 자처했던 크리스천들이었어요.
무슨 얘기인지 이해되십니까?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예수님을 오해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리스도의 옷을 걸치고는 다니지만, 행위는 그리스도적이지 못했고,
복음을 외치지만 복음을 외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이 인류의 역사예요.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짓 하느님, 거짓 그리스도, 거짓 천국을 선전하면서
세상을 현혹하고 살았던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몸뚱이만 예수님 이후의 사람이지 신앙의 성찰이 없고, 그러다 보니 천주교 율법 학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천주교 바리새인들이 득실득실하는 세상이 지금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코로나 질병은 다른 질병의 이름으로 인류 역사에 있어 왔습니다.
이 병이 극복된다고 해도 인류는 또 다른 질병에 내던져질 것입니다.
인류는 살기 위해 유행병과 싸웁니다. 계속 싸울 겁니다.
또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은 이런 병과 싸워 이길 힘도 분명히 있습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세 가지의 문제에 부딪히면 사람은 놀랍게도 성찰하기 시작한다고 그랬죠?
모든 것이 다 잘될 때는 성찰을 안 해요. 뒤를 안 돌아봐요.
다 자기가 잘난 것이고, 자기가 잘해 몸이 건강한 것으로 생각하죠.
그렇지만 인간의 문제, 질병의 문제, 그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 즉, 어둠이 올 때, 어둠 곁에는 반드시 빛이 있기 때문에
그 빛을 향하여 되돌아보게 됩니다.
코로나 시대 이후에 사람들은 성당을 못 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뒤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생겼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생각 안 듣던 유튜브를 들으면서 매일 미사 가던 그 허전함을 달래기 시작했어.
그래서 코로나도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성찰시킨 나쁘고도 좋은 놈이에요.
2020년 3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산타 마리아 집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이런 얘기를 하셨죠.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코로나 전염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인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지나갈 것인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지를 가리며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남을 위해 삶을 살기 위한 헌신의 때입니다.’
그때 교황님이 얘기하신 대로 코로나가 우리에게 성탄의 인간, 부활의 인간으로 되기를
깊이 일깨워 주는 자극제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코로나 질병은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아픔이라고 교황님께서는 표현하셨어요.
비단 코로나만 얘기하는 건 아니죠.
예상치 못하게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내 고통과 질병, 우리 가족의 고통.
이것도 그로 인하여 나를 더 성숙시키기 위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아픔이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5장 3절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환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며 수양한다.’
초창기 교회는 자기 존재 이유를 가난한 이와 나누는 데서 찾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특별히 사도행전에 보면 공동 소유 이야기가 나오죠.
‘네 것 내 것도 없이 똑같이 나누었었다.’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어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 산업혁명을 거치며 가진 자 안 가진 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죠.
공산주의가 생긴 가장 큰 원인은 그리스인들이 제대로 못 살았기 때문이에요.
크리스천들이 나누고 살았으면 ‘공산주의’라는 것이 생길 리가 없죠.
공산주의는 뭡니까? ‘뺏어서 똑같이 나누겠다.’ 이겁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이론 자체는 굉장히 복음적인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투쟁 혁명 유물사관이 들어가다 보니 ‘죽여서라도 똑같이 분배하겠다.’
이것은 복음적인 게 아니죠.
‘공동 분배’는 이미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우리 크리스천 공동체의 모습이었던 거죠.
나눔과 자산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던 겁니다.
올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은 인간의 문제, 질병의 문제, 또 믿음의 문제, 이 세 가지로부터 늘 도전받게 될 겁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보니까 그래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너부터 잘해라’가 아니라 ‘나부터 잘하자’ 하면 돼요.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해요.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잘해야지.’ 그것이 출발이어야 해.
그리고 두 번째 인간의 문제 해결하는 것은 ‘가슴팍 속에다가 인간을 담고 살지 마라.’
예수님이 꽉 차 있어야 해요.
그러면 인간 때문에 평화가 깨지는 확률은 낮아져요.
그리고 또 질병 질병의 문제.
멀쩡하던 사람이 어떤 선고 받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난 의사의 도움 안 받아도 돼.’
이건 좀 무식한 거야.
하느님이 의사의 손을 통해서도 치유시키는 거예요. 그러면서 동시에 또 신앙으로도.
2천 년 전에 그 수많은 사람을 살렸던 예수님의 대리자들인 사제들의 손.
여러분 본당 신부님에게 미사 후 ‘신부님 안수해 주세요.’ 하면 안 해주실 분 없어요.
해달라는 말을 안 하기에 안 해주는 거지.
질병이 오고 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오더라도 우리는 당당하게 ‘까짓거, 인생 한 번인데.’
그런 마음을 가지면 주님이 치유시켜 줘.
그런데 질병에 걸렸을 때 마귀도 같이 유혹하잖아요.
‘아이고 넌 인생 종 쳤다. 끝이야. 하느님 믿었다고 하는 놈이. 얘, 세상에 하느님이 어딨어,
하느님 있다면 너한테 이렇게 하겠어?’
그것은 마귀의 목소리죠.
그쪽으로 자꾸만 귀를 기울이다 보면 헤어나질 못하죠. 우울증도 오고요.
담대하게 질병과 맞서야 해요.
그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십자가를 쳐다보아야 해요.
그리고 내 것을 나누기 싫을 때마다 가난한 마구간에 태어나신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올 한 해를 이 세 가지의 문제가 올 때마다 우리들이 슬기롭게 대처한다면 평화가 깨질 확률은 분명히 줄어듭니다.
어느 때 평화가 깨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사람과 무방비 상태에서 있다가 깨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거예요.
새해 1월 1일, 내가 힘주어 강조하는 이 세 가지 때문에 작년에도 우리들의 평화가 깨진 적이 있을 거예요.
맞죠? 올해도 분명히 있어요.
그렇기에 뭔가 대처하는 방법을 우리들은 교회의 존재 이유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죠.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아마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는 것도 그걸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사람한테 휩싸이지 말거라. 그리고 사람 몸뚱어리가 약한데 어떻게 병이 안 생기겠냐?
손가락 하나 베여도 그렇게 아픈데, 그렇지만 모든 것을 나한테 맡겨라. 치유시켜 줄 거다.
그리고 믿음이 흔들리더라도 항상 담대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며칠 전에 어느 수녀님에게 한 30년 만에 전화를 받았어요.
자기 본당에 피정을 좀 시켜달라고 하시더군요.
그 수녀님은 수녀원 들어가기 전부터 알던 집안인데, 내가 ‘수녀님 살아있었구나.’ 했죠.
수녀님이 ‘아유, 제가 전화도 못 드렸어도 여전히 신부님 존경하고 신부님 유튜브도 들어요.’
내가 듣기는 뭘 들어? 하니, 아침마다 일어나면 ‘오직 예수님께 대한 충성, 예수님에 대한 순명, 예수님에 대한 믿음’.
이 구호를 외치면서 수녀복을 입는대요.
무엇보다 이 세 가지는 짧아서 좋대요.
‘오직’이라고 하는 것은 순도를 나타낸다고 그랬죠?
순도 1백 프로짜리 하느님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순명, 하느님에 대한 충성.
군인들이 아침에 일어나 연병장에서 구호 외치듯 아침에 눈 뜨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 구호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하라 했거든요.
그런데 그 수녀님은 30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그 구호를 외치면서 시작했대요.
그 세 가지 구호를 하며 자기는 신앙을 지키고 살았대요.
흔들릴 때마다 이 구호를 외치고 나면 힘이 번쩍 난대요.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문제(인간, 질병, 믿음의 문제)로부터 지켜주는 담 울타리가 있죠.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어떻게 보면 느티나무 울타리도 그중에 한 울타리죠. 그쵸?
이렇게 와서 미사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하는 것도 큰 축복이죠.
여기 온 여러분들은 그 느티나무의 굵은 가지 역할을 하며 줄기를 돕고 있고요.
오늘 이 강론을 들으시는 분들, 새해 1월 1일 피정이라고 생각하세요.
올 한 해 여러분들에게 주는 덕담이요, 또 우리 삶의 지침이라 생각하시면서
그 세 가지의 문제가 오더라도 올 한 해 전혀 흔들리지 말고
깨지기 쉬운 유리가 아니라 불로 달궈도 녹지 않는 다이아몬드 같은 원석으로 올 한 해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4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1/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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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