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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호2:14-15절)
호세아 2장은 밤과 낮, 어둠과 빛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부분은 진동하는 시내 산을 연상하게 하나 14절부터 시온산의 은혜와 영광에 접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아닙니다. 고멜 이라는 쓸모없는 인생이 마음을 바꾸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고멜은 그대로 불결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황은 천지가 바뀌듯 바뀌었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몹쓸 죄인 고멜을 율법의 정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 아래로 옮겨 놓은 근거는 무엇입니까.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참으로 인간의 이성이나 심성으로는 알 수 없는 기이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상하리만치 기이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망각의 사랑”이라는 책에 “진실된 사랑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물에 빠진 아들을 건지려고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자기를 잊어버리고 물에 뛰어드는 그런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토마스 아켐파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은 망각하는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비참한 짝사랑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토록 짝사랑하시며, 찾아다니시며, 구걸하듯이 사랑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지 않고는 못 견디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 가치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을 받음에 대해 진정한 감격과 감사가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지, 왜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왜 그토록 저자세에서 나를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고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파산자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시85:9-12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고멜의 삶에서 축적된 것이 있다면 버림받아 마땅한 것뿐입니다.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삶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멜에게 줄 것을 주며,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일찍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남편을 떠나간 신부에 비유했습니다. 약속을 깨고 가버린 이스라엘, 떨치고 나가서 더러울 대로 더러워진 신부, 그래서 다시는 집으로, 가슴속으로 데려오지 못할 사연이나 이유는 백 가지도 넘습니다.
*겔16:14-16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함으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네가 네 의복을 가지고 너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그런데도 데려오지 못할 백 가지의 이유를 넘어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으니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이유를 보았습니다.
*시25: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다윗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무한정의 긍휼을 본 것입니다. 긍휼은 무엇을 봅니까. 긍휼은 우리의 죄과보다는 우리의 필요를 봅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합니다. “내 죄악이 크오니”다윗은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목자 없는 양 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리고 흩어지는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미7:14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예수님도 들에 모인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막6:34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그런데 그 주님께서 듣기조차 원하지 아니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아니하고.’ 라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반가워하신 소리가 있었습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기도는 세리의 기도로서 주님의 마음에 심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눅5:31-3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수인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려고 나플레옹 황제에게 탄원한 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딸아, 나는 너의 아버지를 세 번이나 용서했다. 그러니 이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딸이 하는 말이 ’황제 폐하, 한 번만 더 용서를 비옵나이다.‘ 그러자 황제는 ’이제는 내가 용서해야 될 정당한 이유가 없다.‘ 딸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폐하, 아무 정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 당신의 자비에 호소합니다. 용서를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죄인이기에 이제 황제 폐하의 자비를 보여주실 기회가 아닙니까. 그때 황제는 말하기를 “그 말이 훌륭하다. 내가 너의 아버지를 살려 주마” 라고 하면서 그 죄수를 석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면 우리는 벌써 끝났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나의 발가벗은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새 옷을 입혀 주십니다. 주께서는 나의 공로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나의 누더기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분이 그것을 씻어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그의 메시지를 결론지었습니다.
*미7:18-20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바울 사도도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2. 부드럽게 타이르는 사랑입니다.
*호2:14 그러므로 내가 그를 타일러...
개역 성경에는 ‘개유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개유한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히브리어 ‘파타’ 라는 말인데 ‘속이다. 유혹하다.’ 라는 뜻입니다.
*잠1: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삿14:15 일곱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니..
두 번째의 뜻은 ‘권유하다. 설득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렘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게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개유한다.’는 말은 ‘타이른다. 달랜다.’는 말입니다. 매력과 애교로 달랜다는 뜻입니다. 이제 걷기 시작하는 어린아이를 어머니는 단것이나 장난감으로 꾀어 어머니 품에까지 걸어오게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개유 대신에 다른 방법을 쓰시기도 했습니다.
*호2: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호2: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그러나 그 가시를 뛰어넘어갔습니다. 담을 쌓아 막아보기도 했지만 그 담장을 부수고 갔습니다. 도저히 못 나가도록 최선의 방법을 다했습니다.
*호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였도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곡식도, 새 포도주도, 기름도, 은도, 금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 줄도 몰랐습니다. 수치를 당하게도 합니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준 것을 도로 다 빼앗아 보았습니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에 저항하는 의지는 꺾이지 아니했습니다. 이제는 방법을 달리하십니다. 달래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 인생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보지 못하는 소경의 눈을 그리스도께서 만져주셨을 때 소경이 처음으로 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처음에는 산과 들과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다시 눈을 감기고 만져주셨을 때 그 소경이 본 것은 인자하신 모습의 그리스도였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치른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암살당하여 죽었을 때 그 시체를 태운 열차가 어느 시골 역을 떠날 때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머리 위로 들면서 흑인 여인이 한 말이 있습니다. “잘 봐, 똑똑히 봐, 흑인 노예에게 자유를 주신 분이다.” 짐승보다 더한 취급을 받던 그 노예들에게 인권과 자유를 주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이기고 죽은 링컨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흑인 어머니는 링컨의 유해가 실린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또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눈을 만져주셨기에, 내 머리에 손을 얹어주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아버지 우편에서 앉아 계신 그리스도이기에 나는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몹시 신경질적이며 불안과 좌절에 빠져있었고 지나치게 이기적이었습니다. 모두 다 그를 변덕쟁이에다 신경질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괴롭혔다는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격을 고치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제일 친한 친구마저 그에게 충고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충고하면 상대가 변할 줄 알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점점 자신이 무기력해졌고 덫에 걸린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바꾸지 말게나, 나는 지금의 자네를 좋아 하네.” 그 말이 음악처럼 그의 귓전을 울렸습니다.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의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부드러운 사랑의 말에 그는 안심했고 다시 생기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지요. 그 후로 그는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소리쳐 외쳐보았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저를 사랑하시지요” 하나님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은 나를 거절하지 않고 박대하지 않고 환영해 주십니다. 개유의 사랑으로 부드럽게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3. 밀월의 사랑입니다.
*호2:14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거친 들이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머무른 광야 혹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귀환할 때 지나는 아라비아 광야를 뜻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거친 들로 인도하시는가.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처음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로움 속에서 그들을 애굽에서 400년 동안이나 연단 시킨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게 될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거친 들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거친 들은 고난과 연단과 시련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때로 인생의 고독일 수 있습니다. 광야는 때로는 명예의 실추일 수도 있습니다. 광야는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당시 40년의 광야가 있었습니다. 또 그 후에 바벨론 70년이라는 광야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거친 들을 만나고 인생의 광야를 만날 때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비로소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설득해서 데리고 가는 곳이 겨우 여기냐고, 광야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을 인생의 파티 장소나 연회 석상에 데리고 간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가 천국입니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낙원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음성을 더 좋아했습니다. 사람은 인파 속에 묻혀서 자신의 이익을 누릴 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사업이 잘되면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권력이 상승하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무 보잘 것 없는 우상이었음을 보고 느끼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28:10-1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을 한 돌을 취하여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야곱은 편안한 가정에서 쫓겨나서 벧엘의 황량하고 거친 들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엄청난 축복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거친 들’ 이것은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속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단 둘이 밀월의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은 애굽에서 당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나무통에 밥을 채우기 위해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나무 밥통이 쓸데없습니다. 광야에서는 고된 노동이 없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광야에는 먹을 만나가 있었습니다. 집이 없어도 광야에서는 불기둥, 구름 기둥의 보호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뱀에게 물렸을 때는 병원 대신에 치료의 놋 뱀이 있었습니다. 바산의 왕이 공격해 올 때는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막아주셨습니다. 광야에는 닦아진 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옷 가게도 신발 가게도 없었지만 그들의 옷이 헤어지거나 발이 부릍트지 아니했습니다. 여호와가 함께 계시니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4. 가슴에 말하는 사랑입니다.
*호2:14 말로 위로하고..
히브리어 ‘알리바 아베르티’ 직역하면 “저의 마음에 말하고”...라는 뜻입니다. 이제 거친 들에서 어려운 삶을 살았던 그의 백성에게 정다운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슴에 말하리라.” 들에서의 밀월. 단둘이서만 나누는 사랑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이란 인간의 전인격의 최소입니다.
*욥34:14-15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마음에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인격에 큰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 즉 전인격을 우상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그들의 마음에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무서운 불길에 타 없어져야 할 육신이며, 심판의 고통으로 절규해야 할 그들의 심령인데 하나님은 그 육신 그 심령에 정다운 말씀으로 위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사40:1-2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사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펑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우리는 사람의 귀에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영광된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는 별수 없이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전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귀까지가 전부요, 마음에까지 들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면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말씀입니까. 오늘 고멜에게, 이 죄 많은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도 사랑하는 남편인 예수님께서 밀월의 사랑을 나누시면서 귀속에, 가슴에 전해주시는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이를 전해줍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네 죄를 안개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신 그 사랑. 달래고 달래기까지, 그리고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이미 용서한 사랑을 가슴에 말해주는 사랑,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실로 기이한 사랑입니다. 1096년에 유대인 랍비 마이어(mayer)가 이런 시를 섰습니다. ‘하늘은 양피지로 펼쳐 있고, 세상의 모든 갈대와 나뭇가지 칼을 펜으로, 대양과 강을 잉크로 채우고, 모든 사람들이 능숙한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영광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으리라. 지극히 높으신 그분은 옛적에 홀로 땅과 하늘을 만드셨도다.’ 이 시에 기초하여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찬송가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 이 사랑에 감격하여 오늘도 기쁘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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