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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제천 간의(馮濟川 諫議): 연지대사 <왕생집> 2권
송(宋) 풍집(馮檝)은 호를 제천(濟川)이라 하고, 수영(遂寧) 사람으로 태학을 거쳐 과거에 올랐다.
처음에는 선림(禪林)을 찾아 다녔으나,
만년에는 정업만을 숭상하여 <서방문(西方文)>과 <미타참의(彌陀懺儀)>를 지었다.
나중에 급사중(給事中)으로 노주(潞州)에 출정했다가 승속을 모아 염불회를 만들었다.
공주(邛州)를 다스릴 때, 뒷 마루에 높은 자리를 만들고 대궐을 향해 절하고는,
승복을 입고 자리에 올라 주장자를 무릎위에 비껴 얹고 죽었다.
찬(贊)
전등록(傳燈錄)에 공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는데,
처음에는 용문원(龍門遠)을 참예하였고,
다음에는 묘희(妙喜)를 참예하여 각각 깨달음이 있었다.
임종에 미리 기한을 정하고 자리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무릎위에 얹고는 죽었다.
그 자재하고 분명한 모습은 완연히 선문의 여러 종사들의 풍격, 그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그의 염불왕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술하는 자의 뜻을 세우는 입장이 같지 않고,
각각 소중히 여기는 바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저[전등록]는 직지인심(直指人心)만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으레 심지를 밝힌 부분만을 취하고 정토는 생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회옥(懷玉)은 금대가 두 번이나 이르렀고,
원조(圓照)는 연꽃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사실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으나,
여기[왕생집] 서는 이 점을 상세히 기록한 것은 정토로 돌아가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평소에 염불하여 왕생에 대해 대답한 것을 살펴보면,
심성을 밝히는 것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덕을 소중히 여긴다면
안자(顔子)를 덕행의 조목에 나열하고 정사에 대한 부분에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요,
재주를 소중히 여긴다면 안자는 임금을 보필할 만한 그릇을 갖추었다 하고
덕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각기 그 입장이 같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정업을 닦는 자는 돈독히 믿고 의심치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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