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회고록 38] 최순실 일탈 왜 보고 안됐나…어렴풋이 짐작 가는 게 있다
내가 탄핵당할 무렵 언론에서는 국정농단을 벌인 최서원 원장이 공직자 인사를 좌지우지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최 원장에게 추천을 받아 임명했던 장차관은 김종 문체부 2차관이 유일하다.
물론 김종 차관도 별도의 검증 과정을 거친 것은 물론이다.
지금 생각하면 김 차관 한 명 임명도 큰 실수였다고 후회하지만,
최 원장이 마치 모든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왜곡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문화·예술 등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펼치고 싶었던 정책도 많았다.
이를 위해 문화부에 국정철학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인사를 기용하려 했으나 인선이 생각만큼 잘 안되었다.
그러던 차에 이전부터 문화 방면에 관심을 드러냈던 최 원장이 자신과의 사적인 인연은 밝히지 않았지만,
소신껏 일을 잘할 만한 인사가 있다면서 추천한 사람이 김종 2차관이었다.
검증해 보니 경력도 하자가 없고, 나름 전문성을 갖춘 인사였다.
최순실이 추천한 김종·차은택…전문성 있어 임명했지만
2016년 12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
참석한 김종 전 문체부 차관(왼쪽)과 차은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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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문화부 차관으로 임명한 것인데 그의 딸이 최 원장의 딸 정유라씨의 친구라는 것은
나중에 최 원장 문제가 터진 뒤에야 알았다.
그걸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지만, 만약 당시에 그런 밀착 관계를 알았다면 절대로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 2차관은 최 원장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도움을 준 것으로 나중에 알게 됐다.
최 원장의 조카 장시호씨가 삼성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세운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문체부 예산 6억7000만원을
배정하는가 하면, 김재열 제일기획 스포츠사업 총괄사장을 찾아가 청와대의 관심사라면서 장시호씨를 돕게 했다.
그리고 내가 최 원장의 추천으로 임명한 사람이 차은택 감독이다.
2015년 4월 문화창조융합본부를 설립하면서 이를 끌고 갈 인사를 찾고 있을 때 소개받았다.
그는 예전부터 가수 싸이, 왁스, 조수미 등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유명한 인물이었고,
이전에도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으로서 여러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큰 의심 없이 임명했다.
실제로 그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영상감독과 밀라노 엑스포 전시관 영상감독으로도 활약했는데,
특히 밀라노 엑스포에서는 장독대를 활용해 한식을 선보이는 영상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고 보고받기도 했다.
차 감독의 실력을 너무 믿었던 나머지 나는 그의 추천을 받아 김종덕 전 홍익대 교수를 문체부 장관으로,
김상률 전 숙명여대 교수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임명했다.
김종덕 장관이 차 감독의 대학원 은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문화계가 워낙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힘을 쥔 곳이다 보니 임명할 수 있는 인력 풀이 제한적이었던 측면도 있다.
언론에선 차 감독을 비롯해 최서원 원장이 개입된 각종 의혹에 대해 2016년 9월 집중 보도했다.
공교롭게 당시 나는 경주 지진 사태 때문에 현장을 방문하고 뒷수습을 챙기느라 최 원장 관련 보도를 잘 챙겨 보지 못했다.
이것도 최 원장 문제에 대한 대처가 늦어진 요인 중 하나가 됐는데 지금 생각해도 후회스러운 대목이다.
최순실 일탈, 보고 못 받고 못 살핀 것 모두 내 잘못
차은택 감독은 2016년 11월 8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해 검찰로 압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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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왜 이런 일들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나 국가정보원 등에 체크가 돼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 중간에서 이 같은 보고를 가로챈 것일까.
아니면 최 원장의 일탈을 알고 있었음에도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인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어렴풋이 짐작 가는 부분은 있다.
그 당사자들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탄핵으로 대통령직을 내려왔으니 이런 부분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갈 수 없지만 언젠가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임기 동안에는 한류가 한창 국제무대로 뻗어 나가는 시기였다.
나는 해외순방에서 외국 청년들이 한류에 얼마나 매료됐는지, 한류가 얼마만큼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지를 직접 목도했다.
그래서 민간이 주도해 문화·체육재단을 설립하고, 이것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우리 문화가 세계로 진출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되면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기업도 번성하고 나라도 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내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을 보니 참담할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내가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기 전에 최 원장의 그런 일탈이 나에게 보고조차 되지 않았고,
살피지 못했다는 점은 나의 부덕이고 내 잘못이다.
또한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인해 맡겨진 국정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이로 인해 결국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점은
무슨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국민께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내 옷값, 최순실이 한 번, 특활비로 또 한 번 결제?
국정원의 특활비 상납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체포된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이
2017년 10월 3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으로 압송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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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애초에 나를 수사했던 것은 최서원 원장이 개입된 국정농단 혐의였다.
그러나 검찰은 2018년이 되자 국정원 특수활동비 문제(국고 손실 등의 혐의)와
2016년 총선 개입 논란(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수사 대상에 추가했다.
국정원 특활비 상납 논란은 내가 3명의 국정원장(남재준·이병기·이병호)으로부터
2013년부터 2016년까지 3년에 걸쳐 36억5000만원의 국정원 특활비를 상납받았다는 내용이다.
사실 나는 그 이전 대통령들도 모두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법적인 문제가 불거질 줄은 전혀 짐작조차 못 했다.
청와대의 관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검찰이 이 부분까지 문제 삼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를 지원받았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돈은 대통령 개인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고, 청와대 운영비를 지원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액수를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대통령에게는 매달 지원되는 특활비가 있다.
검찰은 국정원 특활비로 내가 최서원 원장의 의상실 관리비, 측근 격려금, 삼성동 사저 관리비, 기치료·주사 같은
비선 진료비 등으로 지불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만 국정원 특활비와 관련해 아쉬운 점은 있다.
처음에 부속실 관계자가 ‘국정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돈이 있다.
역대 정부도 이를 지원받아 운영비로 사용했다’는 취지로 보고했을 때,
이 내용을 민정수석실에 전달해 관례라고 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검토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관례상 지원이 되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를 지원받아 필요한 곳에 사용하라고 한 것인데 내가 깊게 생각하지 못해
여러 사람이 고초를 겪은 점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한다.
옷값 얘기가 나온 김에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더 보태자면 특검은 처음에 최서원 원장이 내 옷값을 댔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국정원 특활비로도 옷값을 결제하고, 최 원장도 결제했다면 내 옷값은 두 번씩 결제됐단 말인가.
내가 받는 특활비는 대개 군부대나 각 기관 격려금, 또는 금일봉 등으로 나가기도 하고,
대통령이 지원하는 단체 등에 보내기도 한다.
지출이 만만치 않지만 그렇다고 국정원으로부터 지원받을 정도로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이원종 비서실장이 비서실 업무를 하는 데 경비가 좀 부족하다고 해서 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이병호 국정원장에게 추가로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내가 특활비 재판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전임 대통령 때부터 내려왔던 관례적인 일을 마치 내 개인 비리처럼 다룬 것이다.
처음에는 변호인을 선임해 법정에서 시비를 가려보려고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법원이 알아서 판단할 것으로 생각하고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안은 국선변호인이 맡는 궐석재판으로 진행됐다.
다만 2018년 3월 28일 국정원 특활비 4차 공판 준비기일에 나는 국선변호인에게 종이 1장 분량의 자필 답변서를 보냈다.
“2013년 3, 4월경 ‘국정원에서 청와대에 지원하는 예산이 있다.
지난 정부에서도 이를 지원받아서 사용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래서 부속실 비서관에게 ‘국정원에서 청와대에 지원하는 예산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해 보고 지원받을 수 있으면
받아서 업무에 활용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다.
비서관들이 지원받은 예산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필요한 업무에 사용할 것으로 생각해
그 사용처나 사용 내용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거나 확인한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검찰이 제기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자꾸 국정원장들이 나에게 뇌물을 준 것처럼 몰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검찰은 2016년 추석을 앞두고 국정원에서 지원한 2억원도 문제 삼았다.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저녁 정 비서관이 관저로 2억원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어떤 돈이냐고 물었더니 “국정원장이 추석에 대통령님께서 격려금으로 필요할 때 사용하시라고 하면서 보냈다”고 보고했다.
돌려주라고 말을 하려다가 국정원장도 여러 생각 끝에 보낸 것으로 생각해 이를 당시 청와대 직원들의 격려금으로 사용하라고 했다.
나중에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은 당시 안봉근 비서관이 이헌수 기조실장을 통해 이병호 국정원장에게 이야기해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이 실장이 안 비서관에게 먼저 이야기를 한 것인지, 안 비서관이 이 실장에게 이야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 쓸데없는 일을 벌였다고 생각한다.
특활비 사건은 나중에 파기환송심까지 거쳐 징역 5년에 추징금 27억원이 선고됐다.
뇌물 혐의는 무죄로 판결했지만, 국고손실죄가 적용된 것이다.
그 판결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나마 직무에 대한 대가성이 없었던 만큼 뇌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게 조그만 소득이었다.
대통령의 총선 관심은 당연하지만…친박 당선 위한 여론조사 지시 안 해
2016년 2월 26일 새누리당 공직후보자추천관리위원회는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대구, 경북 지역 공천 신청자 면접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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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내가 총선에 개입했다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한 것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검찰은 2018년 2월 1일
“2015년 11월부터 2016년 3월까지 제20대 총선에서 친박 정치인을 대거 당선시킬 목적에서 선거운동 기획,
여론조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회에 각종 자료 전달, 친박 후보자들의 출마 지역구 선정 및 경선 유세 관여 등을 했다”며
나를 기소했다.
물론 대통령도 정치인이니 당연히 총선에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다.
역대 대통령 중에 정무수석으로부터 총선 관련 보고를 받지 않은 대통령이 한 명이라도 있었겠나.
또한 청와대는 전반적인 국정 현안에 대한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거 관심 지역에 대해 여론조사를 하라는 지시를 내릴 수는 없다.
2016년 총선에서 일부 친박 의원이 대구, 경북에서 ‘진박감별사’를 자처하며 다녔던 것은 나와 교감 없이 벌어졌던 일이다.
그래서 당시에도 현기환 정무수석을 통해 친박 그룹에 주의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이한구 의원이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은 것도 당에서 결정한 뒤 나에게 연락이 왔을 뿐이었다.
이 재판에도 나는 검찰에 항의하는 뜻에서 일절 출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기록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보안 유지를 위해 여론조사를 모 업체에 맡겼다든지,
여론조사 미납 비용을 국정원에서 내주고 5억원이라는 돈이 오갔다는 등의 얘기는 내가 알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