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하면 먼저 어렸을 때 가슴아픈 사연이 떠오른다.
나는 어렸을 때 큰 사건을 겪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며칠에 한 번씩 밤마다 울타리 밑으로 무엇인가를 밀어넣고 들어오셔서 어머니에게 대신 가져오게 하셨다. 그리고는 이웃마을에 다녀온 것처럼 태연하게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행동하셨다. 어머니가 갖다 놓으신 그 보따리 속에서는 책과 염주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불교를 믿던 우리 집에는 스님들이 자주 기거했다. 그 스님들 목에 걸린 염주를 보았기에 나는 아버지가 새 염주를 사 오신 줄 알고 어느날 할아버지 할머니 방으로 갖고 가서 자랑을 했다. 그로 인해 집안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당시 우리 동네와 이웃동네에서는 천주쟁이를 믿는 사람들때문에 어른들이 철저히 집안 단속을 했다. 우리 집은 행세께나 한다는 집안이었기에 더 엄했던 것 같다. 그 무렵 아버지는 몰래 예비신자 교리를 받으러 다니시다가 이웃집 아주머니한테 발각 됐었다. 부모님께 이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해 협조하라'는 아주머니 말에 아버지는 단체 가입 대신 보리쌀 서 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아버지의 비밀을 할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꼴이 돼버렸다. 결국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근신 명령을 받고 문 밖 출입을 못하셨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고, 아버지는 이웃 아주머니 때문에 기부자 명단에 올라 본의 아니게 보도연맹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오명을 쓰고 경찰서로 불려갔다. 그리고는 다음날 바로 총살을 당해 할아버지, 할머니, 특히 어머니 가슴에 한을 남겼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일곱살이었다. 그 후로 내 머릿 속에서 묵주가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연좌제로, 그리고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몰려 사회정화교육장에도 끌려갔었다. 그 교육장에서 심한 구타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지게 됐는데, 나를 구타한 사람과 앰블런스에 동승하게 됐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당신은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닌 듯 해 이 속에서 당신을 빼낼려면 이런 방법 밖에 없었으니 용서하라'며 묵주반지를 끼워주었다. 병원에 입원한 뒤 묵주반지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라 손에서 묵주반지를 빼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 뒤 개신교 신자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내를 개종시켜 함께 세례를 받았다. 영세할 때 혼인성사를 받고 싶은 사람은 묵주반지를 준비해오라는 신부님 말씀에 예전에 병원에서 던져버렸던 묵주반지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 기억을 더듬어 어렵게 그 병원 옆 한옥집을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하며 조심스럽게 그 집 지붕 위에 올라가 살펴보니 기와 틈새에 무언가 반짝이는게 있었다. 기와장을 약간 들어 올리니 묵주반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 벅찬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연좌제에 걸려 숱한 고초를 겪으며 힘들게 살아오면서도, 또 술에 취하거나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날마다 묵주기도를 한단씩만이라도 꼭 바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특히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게 됐다.
어머니도 뒤늦게 며느리의 헌신적 기도 모습에 감탄하며 입교하시고는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던 묵주를 이제 내가 이렇게 귀중하게 다룰 줄 몰랐다"며 며느리에게 배운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시다가 주님 품으로 떠나셨다.
지금도 집에서 2시간 넘게 걸리는 사무실까지 출퇴근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며 오간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성찰할 때도 변함없이 묵주가 내 손에 들려있다. '성모님,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상욱(마르코, 사단법인 한총연·한국가요창작협회 회장)
첫댓글 이글을 읽으면서 14 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