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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과 아직기에 대한 나의 생각
2013년 2월
곽경, 역사왜곡 바로잡기 포럼
cafe.daum.net/jp-history
윤영식씨는 그의 저서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 1987”에서
왕인 = 근구수왕 (백제 14대왕)
아직기 = 아신왕 (백제 17대왕)
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말해 보겠다.
첫 째, 왕인이 천자문 1권과 논어 10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문화의 시조가 되었다는 말의 진위에 대하여는, 필자 스스로도 오래전부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일이다. 엎어지면 코닿는 거리에 천자문 책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또 천자문을 다 떼고 나면 논어를 읽기 이전에 소학 등의 책을 읽는 것이 정상적인 진도인데, 당연히 천자문 100권, 소학 30권, 논어 10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왕인 = 책 몇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문화의 시조가 되었다
아직기= 말 두필을 끌고 일본에 가서 말을 기르다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라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는 일이다.
윤영식 씨의 <왕인 = 근구수왕> 이라는 가설은 역사학자가 아닌 필자가 검증하기에는 실력이 한참 딸린다. 다만 위와 같은 <왕인 ≠ 책 몇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라는 주장은 초보적 수준에서도 진위를 가려볼 수 있는 문제로 보이며, 윤영식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우고 아스카 문화와 나라 문화의 원조가 되는 일”은 절대권력을 가진 제왕만이 가능한 업적이지, 일국의 문화는 일개 학자가 창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경제와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여기에 대하여 필자가 얼마전 이러한 내용을 정리한 아래의 글이 있다.
왕인과 아직기, 그리고 신도(神道)의 재해석
왕인과 아직기에 대한 아래의 설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해 온 일본의 고대사에 대한 상식으로, 초등학교 학생들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왕 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웠으며, 일본가요를 창시하고 기술 공예를 전수하여 일본인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되어 일본사회의 정치·경제와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 히라카타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오사카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근초고왕 또는 아신왕 때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 역법· 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 화공· 와공(瓦工)과 경사(經師)· 율사(律士)· 의사들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삼국 중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두산백과>에서
그 러나 이러한 왕인 박사 등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넘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임을 알 수 있다. 왕인이 천자문 한권과 논어 10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사가 이상하고, 천문·역법·지리 등이 전해졌다는 내용과 그 밖에도 화공(畵工)·와공(瓦工)과 경사(經師)·율사(律士)·의사들을 보내어 백제문화가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기록이 상 식 이하이다. 이는 오늘날로 따지면 선진기술인 반도체제조법, 자동차제조법,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 등을 전수해주러 당시의 미개지역인 일본에 기술자를 대량으로 보냈다는 식의 기록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 내용은 문화를 몽땅 옮겨줬다는 얘기와 다름없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성립하기가 힘든 논리이다.
이 는 마치, 미국 신대륙에 유럽인들이 철자법사전 한권과 그리스 철학서적 열권을 전해 주고, 유럽에서 천문· 지리· 화공의 기술자와 법률가· 학자· 의사들을 보내었으므로, 미국은 유럽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기록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실 제로는 유럽인들이 미국에 문화를 전해준 것이 아니고, 유럽인들이 대거로 미국 땅에 건너와 인디언들을 싹 없애고 그대로 미국인이 되었는데, 여기에 유럽인이라는 흔적을 없애려고 문화전수와 도래인이라는 말을 붙이는 식으로 왜곡한 것이다.
유 럽인들이 타고간 메이플라워 등의 선편과 출발지· 도착시간· 승객명단 등의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도 유럽에서 건너온 사실은 지워버리고, 단순히 도래인들이 미국에 문화를 전하였고 미국은 유럽문화의 영향을 엄청 많이 받았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사실은 도래한 유럽인들이 바로 미국인 자신이므로, 자기가 자기자신과 문화적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다는 식의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윤영식 씨는 위의 의문의 기록에서 보이는 왕인과 아직기 두 사람을,
왕인 = 근구수왕 (백제 14대왕)
아직기 = 아신왕 (백제 17대왕)
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 리고 가락국왕 아리사등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그들의 이명(異名)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는데 책의 앞부분인데도 이명이 이렇게 많으며, 紀·記 상에 표기된 이명을 다 합친다면 변조된 이름이 몇 백개에 달하게 된다. 윤영식 씨의 연구의 대부분은 등장인물의 이명을 찾아내고, 정리하고 고증하는 작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사등: 大俣王, 築紫君, 宣化천황, 己能末多干岐 등 9개의 이름
예진별명: 本牟智和氣明, 백제달솔日羅, 品遲(호무지), 火焰王, 火中君 등의 7개,
예전별명: 신라국왕자 天日槍, 천지일모, 伊蘇志, 예전천황, 응신천황, 계체천황, 신무천황, 上植葉황자, 賀美惠波王, 築紫火君 등 20개의 이름
그 외에 紀·記 상에 나타나는 숱한 등장인물도 모두 이런 식으로 분식, 변조 등으로 처리되고 있슴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신도(神道)나 신사(神社)의 유래도 모두 해석되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상신을 수없이 쪼개어 이름을 달리하여 봉안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왕인에 대한 정통적 해석이란....
다 음은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는가?> 라는 글인데, 능력있는 해설사들에 따르면, 이글은 선행연구 및 확정되어 있는 사실들과 정합적인 관계에 있는지 확인한 연후에 비로소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은 논문의 내용이라고 한다.
글이 너무 장황하므로, 이해와 비교를 위하여 필자가 단 몇 줄로 최대한 요약해 보았다.
원문의 요지
404년에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갔다.
학계 정통적 해석의 요지
1. 천자문은 500년대 초에 세상에 나왔으며,
논어 관련 참고서가 500년대 초에 중국에서 왕창 만들어졌다.
또 이때 중국의 양 무제라는 박학다식한 군주가 있었다.
위 사실에서 다음의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A. 왕인의 천자문 가져간 것은 500년 이전일 수가 없고,
B. 위의 삼박자가 맞아 들어감으로 왕인은 500년대 초 활동한 사람이다.
2. 또 왕인의 후손들이 자기 가계가 유서 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왕인의 활동 시기를 100년 전의 사람으로 둔갑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만들 때, 보고 있던 중국인들이 왕인을 100년 전으로 둔갑시키면 거짓이 탄로난다고 지적했다고 추측된다.
위의 추측에서 나온 종합결론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C. 그래서 404년은 그냥 두고, 발각되지 않게 논어·천자문 등의 책제목은 감춘 것이 일본서기의 지금 기록이라는 것이다.
필자소개
곽 경, 건축사
http://cafe.daum.net/jp-history
http://cafe.naver.com/hangulforum
現 (주)아키덤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現 (사)한국어정보학회 감사
수사반장 승진시험에 나온 왕인
아래는 필자의 지인이 이메일로 보내온 것이다.
수사반장 승진시험에 나온 문제로 왕인이 케이스스타디로 등장하며 추리력 테스트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래 네이버의 본문을 읽고 다음 문제에서 맞는 것을 고르시오!
<문제1>
1. 먼저 삼박자가 맞으므로 왕인은 500년대 초 활동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2. 왕인은 700년대에 활동한 사람으로 천자문 외에 화랑세기도 가지고 갔으므로, 화랑세기 원본이 일본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문제2>
1. 일본에 가기 전 백제에 있을 때 왕인은 족집게 강사로 이름이 있었으므로, 교재를 살 돈이 없는 열명의 학생들에게 천자문 한권만으로 강의해도 금방 따라와서, 10명 학생 모두가 바로 논어 과정으로 들어갔다.
2. 왕인은 천자문 100권, 소학 50권, 논어 10권 기타 논어관련 참고서 등 이렇게 되어야 학습의 진도상 발란스가 맞는건데, 초기의 기록이 어째 이상하다.
<문제3>
1. 700년경 일본서기를 만들 때 100년을 앞당긴 것은 중국인만 알았던 족보 변조사건으로, 큰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었다.
2. 700년경 일본서기를 만들 때 100년을 앞당긴 것은 중국인만 알았던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이 다 아는 내용으로, 실제로 200년과 300년의 차이는 별 것이 없는 내용이므로 시기를 당겨(500년->404년) 변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수사반장 승진시험자만 대답하시오!
<문제4>
1. 공문서를 만들 때 옆에 있던 중국인들이 방조했으므로 이들에게도 공문서변조의 공모죄를 물어야 한다.
2. 일본서기에는 왕인 외에 수백가구가 모두가 엉터리 자료를 올렸으므로, 유독 왕인의 후손과 중국인에게 공문서변조의 죄를 묻는 것이 의미가 없다.
<문제5>
1. 현재까지의 수사 기록은 완전하며, 정밀한 법리해석의 절차만이 남았다.
2. 일본서기의 달랑 한 줄을 근거로 하여 삼박자 및 제목삭제를 했다는 초기의 수사 기록이 어째 이상하며, 부실수사의 의혹이 있으므로 수사를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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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왕인에 관한 글이다.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는가?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66&docId=892349&mobile&categoryId=1073
왕 인이 일본 열도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 일본 측의 사료에만 보인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왕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왕인에 대한 기록 역시도 다른, 확정되어 있는 사실들과 정합적인 관계에 있는지 확인한 연후라야 비로소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인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응 신(應神) 15년(404?) 가을 8월 임술삭 정묘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 그것을 카루(輕)의 사카노우에(坂上)에 있는 마구간에서 기르게 하고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관장케 하였다. 그 말을 기른 곳을 우마야사카(廐坂)라고 한다. 아직기는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菟道郞稚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은 아직기에게 "그대보다도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왕인(王仁)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뛰어납니다"고 대답했다. 이때 카미쯔노케누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칸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405년?) 봄 2월에 왕인이 도래하자 그를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의 스승으로 삼았다. 태자는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
저 명한 왕인에 관한 기사다. 그런데 이 기사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전승이 있다. 바로 『고사기(古事記)』의 기록이다. 『고사기』는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완성된 문헌이며 왜국 왕실의 계보와 설화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대사를 엮은 책이다.
다음은 『고사기』 중권 가운데 응신(應神)에 대한 기록이다.
또 한 백제국주 조고왕(照古王) —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 이 수말 한 마리와 암말 한 마리를 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붙여 공상(貢上)하였다. 또한 횡도(橫刀)와 큰 거울을 보냈다 — 이 아지길사라는 자는 아찌노후비토(阿直史) 등의 시조이다 —. 또한 백제국에 명령을 내려 만약 현인(賢人)이 있으면 공상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명을 받아 사람을 공상하였는데, 이름이 화이길사(和邇吉師)라고 하였다.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모두 11권을 이 사람을 통해 바쳤다 — 이 화이길사라는 사람은 후미노오비토(文首) 등의 시조이다 —.
이 두 사료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고사기』에서는 아지길사(阿知吉師)를 얻은 뒤에 백제에 더 나은 인물을 바치라고 하여 화이길사(和邇吉師)를 얻게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아직기에게 물어 왕인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차이는, 『고사기』에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도합 11권의 서적을 명시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왕인이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경전에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다고만 하여 책이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논어』와 『천자문』은 왕인 개인이 전한 것이 아니라, 백제 왕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고사기』에는 아지길사나 화이길사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는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새롭게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그 렇다면 두 사료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먼저 사료의 성립 연대를 보면 『고사기』는 712년이고 『일본서기』는 720년이다. 그리고 『고사기』는 당시 왜국 왕실의 하급 관리였던 히에다노아레(稗田阿禮)의 암송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문체도 일본어와 한문 혼용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본서기』는 그보다 다소 늦게 성립되었으며 순한문체로 중국계 인물이 최종적인 윤문 과정에서 깊이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된 바 있다.
흔 히 우리가 왕인에 대해, 그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동시에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종합한 데 불과한 것으로서 반드시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사료를 통해서 과거의 사실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사료가 담고 있는 내용 중에서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은 허구적인 내용인지를 따져야 한다.
『천자문』은 언제 만들어졌나?
왕 인이 일본에 전해주었다고 하는 『천자문』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천자문』이 존재해 왔다. 그중에서 현재까지 잘 알려진 대표적인 천자문으로는 주흥사1)의 『천자문』과 소자범(蕭子範)의 『천자문』을 들 수 있다. 만약 왕인이 전래한 것이 최초의 『천자문』이고 그것이 현전하는 것이라면 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의 무제 때 만들어진 주흥사의 『천자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흥사는 521년에 사망했으므로 『천자문』의 찬술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런데 『일본서기』에서 왕인이 천자문을 전래하였다는 시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므로 『천자문』이 만들어진 시기와 무려 10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즉, 왕인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천자문』을 일본에 전래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한 편, 왕인은 『논어』 10권도 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현재 전하는 『논어』의 권수보다 많으므로 본문만이 아니라 주석서도 포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주석서 중에서 저명한 것으로는 위(魏)나라 때의 하안(何晏)2)이 쓴 『논어집해』와 남조 시대 양나라의 황간(皇侃)3)이 쓴 『논어의소』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논어집해』가 먼저 나왔고, 『논어의소』는 하안의 주석서를 대상으로, 황간이 다시 소(疏)를 붙인 책이다. 그중 『논어의 소』는 남송(南宋) 무렵에는 중국에서는 없어져 버렸는데, 어느 시기인가 일본으로 전래된 책이 청(淸)나라 때에 중국으로 역유입(逆流入)되었다고 하며, 『논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송(宋)나라 때 형병(邢昺)이 왕명을 받고 지은 『논어정의(論語正義)』에 중요한 참고서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처럼 『논어』 텍스트와 그 주석에 있어서는 정현의 『논어』 텍스트, 이를 바탕으로 한 하안의 『논어집해』, 다시 『논어집해』를 바탕으로 한 황간의 『논어의소』 그리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한 『논어정의』로 큰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없어졌으나, 일본에 황간의 『논어의소』가 전해졌던 점을 중시한다면, 왕인이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논어』 주석서로는 『논어집해』와 『논어의소』가 유력하다.
그 런데 하안의 『논어집해』는 일본 측의 사료에 나타나는 왕인의 활동 시기로 따져도 이미 1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주석서다. 이에 비해서 황간의 『논어의소』는 편찬 직후부터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시기가 주흥사의 『천자문』이 편찬된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양나라의 무제가 즉위한 기간은 남북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이채를 발하는 시기로서 소명태자의 『문선』, 주흥사의 『천자문』, 황간의 『논어의소』 등 후대까지 널리 읽혀진 문헌들이 다수 편찬되었다. 무제 스스로가 각종 전적에 해박하였으며, 신하들의 학문적인 의문에 답할 정도로 학식을 갖춘 군주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두 문헌이 편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국의 새로운 문화적인 성과로서 왕인을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편이,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결국 황간의 『논어의소』와 주흥사의 『천자문』이 중국에서 편찬된 직후 곧 일본 열도에 전해졌다고 한다면, 왕인의 역할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두 문헌은 모두 6세기 전반에 완성된 것이다.
그 렇다면 왕인이 활동한 시기도 실제는 6세기 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사기』의 기록대로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준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후손들이 자기 가계가 유서 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왕인의 활동 시기를 100년 이상 앞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천자문』의 편찬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인들이 관여하면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왕인이 『천자문』을 전했다는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왕인의 활동 시기는 그대로 두는 대신, 오히려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와 『천자문』을 전래하였다는 내용은 없애 버리고, 그냥 경전에 능했다고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결 국 『일본서기』라는 사료도 그 자체로서 완전한 위서이거나 반대로 완전한 사료도 아니다. 다른 사서의 기록과 정밀하게 비교하는 가운데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 내야 할 일반적인 성격의 사료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일본 중심의 편향된 인식이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의 사서들 또한 그런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면이 있다.
그 밖에도 백제의 성왕이 불교를 전하였다거나 왕인이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전하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내용 그리고 백제가 단양이 등의 오경박사와 절을 짓는 기술자들을 파견한 이야기들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무비판적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수용하면서, 다른 내용들은 모두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중적인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서기』의 편향성에 주의하면서 한반도 관련 기사들을 검토한다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긴요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성왕의 죽음에 대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내용을 비교하였을 때, 어떤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가?
『삼 국사기』의 「신라본기」는 신라의 입장에서, 「백제본기」는 백제의 입장에서, 그리고 『일본서기』는 일본 측 입장에서 각각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백제와의 정면 대결을 통해서 성왕을 사로잡아 죽인 것으로 기록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에 대해서 백제는 성왕이 불과 50명의 병사를 이끌고 간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의 죽음과 아울러 왜의 병력이 관산성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사서들은 그 기록하는 주체의 시각과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사료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복원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이러한 사료의 한계성과 문제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시기가 실제로 주흥사의 『천자문』과 황간의 『논어의소』가 편찬된 시기보다 150년가량 앞당겨져 기록된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왕 인은 왜에서 문필을 관장하는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들도 자신의 가문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도 자신들의 가문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자랑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시조인 왕인이 오래 전부터 일본 열도에서 와서 활약한 것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가문의 시조에 대한 전승은 전설적인 내용이 되거나 과장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
3. 『천자문』과 『논어의소』가 편찬되고 오경박사들이 활동한 시기는 언제인가?
중 국 남조의 양 무제 때이다. 양 무제는 박학다식한 군주이자, 불교에도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하들의 학문적인 의문에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부여에는 정림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또한 양나라 수도에 있던 절 이름과 같다. 실제로 일본에 파견된 오경박사들은 백제인이 아니라 양나라에서 파견된 인물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교적인 지식과 불교를 발신하는 기지로서 양나라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가 보다 선명하게 이해된다.
각주
1) 주흥사(470~521)는 중국 남조 양 무제 때 관리를 지낸 인물이다. 양 무제의 명으로 서로 다른 글자 1,000자를 사용하여 4자 250구 형태의 문장을 지었는데, 이를 천자문이라고 한다. 주흥사의 천자문에 앞서 삼국 위나라 때 종요라는 사람이 천자문을 지었고, 주흥사가 이를 운에 맞추어 재배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2) 하안(?193~249)은 중국 삼국 시대의 위(魏)나라 사람이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공안국(孔安國)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ㆍ진군(陳群)ㆍ왕숙(王肅) 등 여러 학자의 『논어』 주석서 중에서 좋은 내용을 모으고 다시 독자적인 견해를 덧붙여 만든 책이 『논어집주』이다. 논어의 해석에 있어서 노장(老莊) 사상을 도입하였고, 방언이나 속어로 해석한 점이 특징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ㆍ위나라 시대의 주석을 충실하게 채록하였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3) 황간(488~545)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 사람이다. 하안이 지은 『논어집주』에 다시 주석을 단 책인 『논어의소』를 편찬하였다. 자구의 해석보다는 문장의 논리를 따진 점에 특징이 있으며,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논어의소』 또한 양 무제 때 편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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