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2코린 4,13)
요즘처럼 과학적 실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을뿐더러
비웃음을 사기에 딱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죽고 없어질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에 희망을 두고 산다는 것이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신뢰가 깨지거나 뭔가 두려움에 휩싸일 때 핑계를 둘러대곤 합니다.
당당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없을 때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본성입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창세 3,4)
하느님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한 것이 들통 났습니다.
그래도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을 뿐, 그들을 해치거나 없애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 수 있습니다.
핑계를 늘어놓아도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관하여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8~29).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성령이 마귀들의 두목 아래에서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믿음 아닐까요?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그의 나라가 망하는 법.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억지에, 하느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탄을 몰아내고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실체를 알고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사탄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외치지 않으면 도리어 그에게 지배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강력한 신뢰를 가지고 그분의 이름으로 이렇게 외칩시다.
“그 입 다물고 썩 꺼져버려!” 냉정하고 단호하게 내칩시다.
그래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튼튼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날입니다.
글 : 張相元 Andrew 神父 – 전주 무지개 가족
할 일 없는 사목자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나옵니다.
복음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으셨을 텐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온갖 모략은 물론, 친척들의 몰이해까지 겹쳐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에 어떻게 모두 대처하실 수 있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기우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에게,
모든 것에서 소홀함 없이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저는 예전에 원목 사제로 지냈었습니다. 원목 사제에게 필요한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할 일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목자가 병실 방문을 다닐 때, 누구라도 “신부님!” 하고 부르면, 멈추어서
충분히 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바쁜 일이 좀 있어서….” 하고 청을
거절하는 그 순간이, 환자와 나눌 마지막 소중한 대화를 저버리는 것이 될 수 있고,
그분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외면하는 순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목자는 가장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원목자만이 아닌, 바빠 보이는 오늘날의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많은 교우들의 첫마디가 “신부님 바쁘실 텐데…”입니다.
그러면 저는 “저 안 바쁜데요.” 하고 말합니다.
사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쉴 새도, 음식을 드실 여유조차도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결코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하나도 안 하신 일이 없습니다. 가로막는 돌을 치우시고 벽을 허무셨습니다.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보셨고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도 안 바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큰일을 통해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시지만,
작은 일을 통해서도 그에 못지않은 섭리를 이끌어내십니다. 무수한 잘한 일들도
보시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사소한 하나도 그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십니다.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감실로 다가갈 때 그분께서는
20세기 동안이나 그대를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길》537)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까지 주님께서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3,35)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하는 주님의 착실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속되고 하찮은 일 앞에서 ‘할 일 없는’ 사람이 되는
용감한 선택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글 : 李啓哲 Raphael 神父 – 서울대교구 주교좌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