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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백두산의 지하 삼림(地下森林)에서
백두산 밑은 초봄이지만 백두산 처마 밑은 한겨울이다. 산과 산 사이 하얀 설원이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 차디찬 물을 쏟아내고 있다. 당연 장백폭포라지만 속 시원한 하얀 물줄기가 보일 리 없다. 우리는 예부터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이를 비룡 폭포(飞龙瀑布)라고 불러왔다. 천지 북쪽의 천문봉과 용문봉 사이에서 흘러내린 물이 68m 높이의 장대한 폭포를 이루어 수직 암벽을 때리면서 힘차게 떨어진다고 했다. 나는 바로 그 북쪽 백두산 바로 밑에 와 있는 것이다. 이 물이 바로 쑹화 강(松花江)의 원류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염없이 쏟아내는 물줄기, 적적한 가운데 소리로만 성성함을 느꼈다. 북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겨울에도 완전히 얼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이 폭포는 천지와 함께 북파의 하이라이트라 했다.
사실 이곳에 들러 제일 먼저 반긴 것은 폭포가 아니라 온천 달걀(温泉鸡蛋, 원취안 지단)이었다. 온천은 삶은 달걀과 옥수수를 정찰제로 판매하고 있었다. 조약돌 같은 예쁜 옥돌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저 돌이 백두산 태생이 맞나 싶어 사려는 것을 관두었다. 곳에서 폭포까지는 1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수십 군데에서 온천수가 솟아나는 취룡 온천군(聚龙温泉群)이 펼쳐져 있어 땅 밑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도가 가장 높은 온천은 83℃이라는 온천수 팻말이 있는 작은 우물에 사람이 몰려 있었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로 이 온천군이 끝을 지나 가파른 산책로를 좀 더 오르면 눈앞에 폭포가 장엄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나 싶었다. 다들 거기서 바로 내려들 온다. 듣기로 지프차로 등정을 한다고 들었었다. 남매는 사진 찍기에 바빠 나와 거리를 둔 상태,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라 도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예전에는 비룡 폭포(飞龙瀑布) 옆에 있는 등반로를 통해서 걸어 올라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등산로가 완전히 폐쇄되어 지프차를 이용해야만 한다고 했다. U자형 커브길을 18번 돌고 돌아 지프차에서 내리면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와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고도 했다. 북파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문봉(天文峰, 2,679m)이다. 중국령에 속하는 백두산 등정은 3 코스가 있다. 북파 · 서파 · 남파 코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북파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관광 인프라를 가장 잘 갖췄다는 장점과 성수기에 관광객이 가장 많다는 단점을 같이 겸비하고 있는 셈이다.북파 여행의 베이스캠프 도시는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로, 오는 도중 본 동네가 바로 그곳이다. 북파 입구까지 30km 떨어져 있다.
일행을 쫓아 내려오다 한국 관광객 한 팀을 만났다. 급한 김에 ‘천지는 어디로 가는 가요.’ 하고 대뜸 물었다. 그들이 말했다. “ 다음에 오라네요, 어제 밤 눈이 많이 내려 못 오른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은 잠시 허망했지만 그리 섭섭하지도 않았다. 익히 들은 바가 있어서다. 지척도 허용치 않는 완강한 안개의 제국, 천지. 영산으로서 쉽사리 알현을 허락할리 없다. 직장동료는 3번 방문에 겨우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만약 단 한 번의 기회로 알현하였다면 이는 천운일 테고 로또와 다름이 없을 테다. 하지만 백두산은 역시 영험한 산이다. 어서 오세요 하며 순순히 호락 할리 만무다. 거기에 산을 찾는 자세부터 나는 준비가 덜 됐다. 전날 밤부터서 하늘 쳐다보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해도 영접을 못했다는 데 나는 얼떨결에 예고도 없이 백두산으로 여정을 바꿔 들이닥친 게 아니던가. 어디 그뿐이랴, 핀치히터 인양 고구려 집안 대신 성급히 찾은 백두산여정이다. 내가 백두산이라 해도 저놈은 썩 물러서라 할 테다. 괘씸한 지고란 말이 안 나온 게 그나마 천만 다행이다. 조선 사람이라 이는 봐 준 게 분명하다.
나는 순순히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공을 들이고 순순히 오로지 백두산만을 생각하고 오르리라 했다. 그리하여 큰 숨결의 천지만이 아니라 백두산 지천에 널린 들꽃, 가히 고산화원으로 불리는 야생화들, 큰 원추리, 금매화, 노란 만병초, 하늘 매 발톱, 바이칼 꿩의 다리, 산 용담, 개불알꽃 등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다양한 야생화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히 입성하리라 했다. 나는 그 중 만병초가 가장 보고 싶다. 6개월 이상 눈속에 파묻힌 채 혹독한 겨울을 견딘 노랑 만병초가 삶의 끈질김으로 겨우 꽃을 피워 천지를 놀래 키면 가히 천지는 더 바랄 것 없는 영지가 돼고 말 터이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살아 왔다. 백두산이 왜 영지인지를 말하는 듯 그 무렵에는 천지 사방 아래 구릉은 온통 들꽃으로 뒤덮인다고 했다. 백두산의 눈부신 경관은 천지 봉우리에서 뻗은 완만한 초원(수목한계선 위편)의 꽃 대궐 구릉을 걸어 천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청석봉 능선이라는데 그 장엄함에 휩싸인 백두산은 그 무렵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의 제왕으로 군림한다고 했다. 들꽃은 민중을 낳고 민중은 뜻을 모아 한 민족으로 대대손손 백두산을 영구히 추앙했다. 그쯤 조선 사람들은 거룩함을 마음에 담고 두 손 모은 경건함으로 조상을 기리며 한반도를 조망하며 온 사방을 휘둘러 맘껏 목청 높여 만세산창을 부른다고 했다. 그때가 바로 조선의 광복인 것이다. 이미 그날은 가까이 오고 있다.
이번에는 연길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려 여기까지 다다랐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얼다오바이허(이도백하) 기차역까지 당도하면 성수기에는 그곳에서 북파 입구까지 가는 버스나 봉고차를 알선해준다고 했다. 그곳에서 백두산 서파는 1시간 30분 남짓이고 송강하에서는 서파가 바로 코밑이다. 나는 아래쪽으로 향하며 차례대로 놓인 소천지와 녹연담을 둘러보았다.
소천지(小天池)는 둘레가 260 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아담한 호수다. ‘천지를 축소해 놓은 것 같다.’라고 해서 소천지라고 부른다는데 그럴 듯 해 보였다. 천지와 다른 점은 호수 둘레에 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천지는 둘레가 검은 현무암으로 뒤덮여 있다는데, 소천지는 땅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나무가 호수를 촘촘히 에워싸고 있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소천지는 큰 산등성 아래 소담하게 자리해 한 결 아늑하고 바람도 잦고 물도 풍성하니 많은 동식물의 안식처로 충분할 조건일 게다.
녹연담(绿渊潭)은 주자이거우(九寨沟)의 물빛을 닮은 호수로 여름에 가장 예쁘다고 했다. 나는 구채구도 다녀왔는데 물 색깔이 거의 흡사하다 싶었다. 이는 물밑에 자리한 돌의 반사효과가 그대로 투영되어 아름답게 비추어지는 것으로 그렇다면 앞서 본 조약돌 같은 예쁜 돌이 바로 이곳 태생임에 틀림이 없다.이를 미리 보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 에메랄드빛의 돌을 샀을 것이다. 호수 위로 수십 미터의 낙차를 자랑하는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만해도 봄인데 수백미터 위가 한 겨울이라니 참 대단한 자연의 위용이다, 물속에서 유영하는 냉수어가 춥지도 않은지 오며가며 한다. 너라도 반기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내가 맨 나중 찾은 곳은 지하삼림이라는 곳이다. 나는 이날의 백미로 이를 꼽고 싶다. 안 들렸으면 어쩔까 싶었다. 요즘 여행에는 힐링이란 말도 자연 따라 붙는다. 하지만 부산한 움직임으로 시작해 부산하게 끝나고 마는 게 한국인의 특성이기도 하다. 조금은 침잠하여 조금은 말을 삼가고 조금은 머리를 식히며 그냥 방임을 하여 없을 無가 되도록 평정심을 갖는 것도 또 다른 충만감이다. 비우는데 충만해지니 아니 좋은가. 바로 내 경우 그 힐링은 바로 이곳이었다. 지하 삼림(地下森林).나무판자로 약 3킬로 가량 옆으로 걸어갔다 돌아오는 코스로 마치 백두산 어느 위치를 싹뚝 잘라 단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백두산에 분포하는 다양한 식물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화산 분출로 지반이 깊게 파인 자리에 원시림이 우거져 있는데 규모뿐 아니라 아기자기함이 가히 자연적 예술이다.
원시림 사이에 펼쳐진 산책로를 걸어서 되돌아 나오는데 1시간 넘게 걸렸다. 가문비나무, 백두산자작나무, 종비나무 등 곧고 높게 자란 나무들은 그 의연한 자태로 괜스레 내가 반듯해진 듯 숙연해지기도 하며 시간을 잊게 만든다. 무엇보다 공기가 맑고, 청정하여 좋았다. 가는 내내 듣는 계곡물소리, 거기에 옆으로 쓰러져 죽은 나무들이 그대로 유형을 유지하여 진정한 원시림이 무엇인지 원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싶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자연스런 나란 존재에대한 상념, 내 원형은 어디서 찾을까. 그 누구도 뿌리는 어쩔 수 없다. 스러진 나무 옆에는 다른 종자가 얼씬도 못한다. 같은 수종들이 빽삑히 그 선조를 고이 모시고 지키는 양,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작점에 1시 반쯤 내려왔다. 천지를 들르지 않은 관계로 시간이 많이 남았다. 배는 고픈데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았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곳에 음식점이 없는 것은 이도백하라는 배후 동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때가 관광 철이 아니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전날 먹을 것을 준비해갈까 망설였던 게 후회가 된다. 남매와 산 초입에서 재회를 했는데 그들은 아예 점심을 굶는다고 했다. 인터넷에 6월 쯤 백두산 광고가 올라오는 게 허튼 게 아니었는데 나는 한마디로 백두산을 우습게 안 것이다. 이 산이 우리 땅에 우뚝 서 자리한다는 게 얼마나 광복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 동북아에서 이런 산은 없다고 중국 사람들은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세상 천지에 천지를 끼고 한반도를 에둘러 바라보는 백두산은 가히 한국의 산중 산이다.
기실 우리처럼 산과 친밀한 민족이 있을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은 말해도 산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산악국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은 유달리 산을 좋아한다. 설악산, 지리산처럼 큰 산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북한산, 관악산을 오르면서 삶의 긴장을 풀고. 여의치 않으면 동네 뒷산이라도 넘는다. 한국갤럽이 2010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 달에 한번 이상 산에 간다는 등산인구가 1800만 명이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다. 흙이 좋고 물이 풍부해 수많은 동식물과 사람을 살게 만드는 우리의 산, 켜켜이 쌓여온 정신문화 역시 산 이름에 깃들어 있음이다.
일예로 문수산, 길상산, 오대산, 청량산, 사자산은 명칭이나 공간으로 보면 서로 다르지만, 모두 불교의 문수보살과 관련되어 이름을 얻은 산들이다. 문수의 본디 말인 문수사리에서 사리란 길상을 뜻하고, 문수가 사는 곳이 청량산(오대산)이며 문수가 사자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대승보살인 문수는 어느 사찰에서나 대웅전 석가모니불 왼편에 있다. 산 이름이나 산에 얽힌 전설, 설화를 알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종교와 사상, 풍습과 정서를 자연 알 수 있다. 인간사와 인간관계가 산에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백두산이 왜 우린 산인지 말을 안 해도 당연한 거다. 그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장뇌삼이나 도라지를 뜯은 게 아니다.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고 깊숙이 국내성과 환도성을 지은 것은 천연요새인 산을 너무 잘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금강산을 다녀왔다. 기암괴석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으뜸으로 치지만 솔직히 중국의 장가계보다 더 멋지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금강산은 산 하나로 4개의 산을 품고 살지 않는가. 바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지녔다. 알다시피 누구나 가본 장가계는 금강산처럼 고운 빛깔의 단풍을 볼 수 없다. 아열대성으로 단지 기암들이 그 자태를 뽐낼 뿐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위도 상 같은 중국의 여타 도시보다 우리가 덜 더운 것은 바로 산 때문이다. 북경이 더 덥고 아이러니하게 요동 땅이 여름에는 겁나게 더 덥다. 그늘이 없고 넓게 펼쳐진 평원인지라 받은 열을 그대로 복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금수강산이라 한 것이다. 요동을 쳐들어온 당나라 군사가 그 너머 천산 안쪽에 갑자기 산속으로 기어들어간 고구려 군사를 쫓을 방도는 없었다.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산에 대해서 우리만큼 해박한 사람들도 없다.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약초를 파는 산촌 할머니들. 우리에게 산은 일상이다. 우리에게 산은 저 멀리 하늘에 닿을 듯 솟아있는 신성불가침의 영역만도, 진귀한 동식물이 있어 자연생태 그대로 보존해야 할 구역만도 아니었다. 산과 살을 섞고 정 붙이며 더불어 살아왔던 생활문화의 터전이었다. 사람은 산을 닮고 산은 사람을 닮은, 어머니와 자식과의 관계 같은 상존의 관계이다. 동네마다 자리하는 진산의 존재가 일상과 더불어 살붙이로 살아왔듯 한 민족을 말하는 국보 같은 산이 있다. 우리는 바로 백두산이다.
후지산은 누가 뭐래도 일본의 상징 1호다. 소학교에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지금까지 부르는 노래로 ‘후지산’(ふじの山)이 있는데, “후지와 닛뽄 이찌노 야마(富士は日本一の山·후지는 일본의 으뜸산)~” 하면서 목청을 높인다. 일본 사람들에게 후지산은 신성한 영산으로 예부터 영감과 예술의 원천이었다. 작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켜 국가적인 자존심도 세웠다. 후지산 사랑도 각별나다. 새해 첫날 밤에 후지산 꿈을 꾸면 최고의 길몽으로 친다. 후지산은 교토, 이세 신궁과 함께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야 할 3곳 중의 하나다. 신칸센을 타고 지나갈 때도 후지산이 보이면 “기레이!”를 연발하면서 사진 찍기 바쁘다.
그럼 중국의 나라산은 무슨 산일까? 한국의 백두산, 일본의 후지산과는 조금 다른 역사적 텍스트가 있다. 전통적으로는 태산이 있었다. 태산은 1930년대 이후 한동안 국산으로 불렸다. 시대 상황에서 발로된 민족의식의 반영이다. 태산은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유산 제1호이기도 하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해서 엄청 높은 산 같지만 사실 1545m로 태백산보다 낮다. 그렇지만 태산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존심은 대단하다. 모든 황제들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정통성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공자도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은 것을 알았다”고 했다. 태산에 가보면 물밀듯이 올라오는 중국인들의 인산인해를 실감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곤륜산도 중국의 대표 산이다.
전통적으로 여기에서 천하의 산줄기가 뻗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중국은 여러 민족이 번갈아 왕조가 된 나라답게 주장하는 바가 헷갈린다. 청나라 만주족의 국산은 장백산이었다. 백두산(장백산)은 한때 조선과 청에서 같은 국산이 되었다. 청과 조선의 국산 정치학에 이런 일이 있었다. 1709년 11월24일, 청나라 강희황제와 신하들이 행궁인 창춘원에서 국정을 의논하고 있었다. 강희황제는 신하들에게 태산 산줄기의 맥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물었다. 신하들은 “산시성과 허난성에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상식대로 답했다.
그러자 강희황제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그렇지 않다. 태산의 맥은 장백산에서 온다.”면서 그 사실을 온 나라에 선포했다. 강희황제가 선언한 ‘태산 맥의 장백산 조종설(祖宗說)’은 일종의 상징물 전쟁으로 문화 정치적 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역사적으로 태산은 한족의 정신적 중심이자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민족인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장악하면서 태산이 가진 한족의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성은 마땅히 만주족의 정통성에 연결되어 계승, 수용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청의 장백산은 만주족에게 민족의 발상지로서 신성한 지위를 지녔다. <만주실록>을 보면 “만주족은 원래 장백산의 동북쪽 포고리산 아래에서 기원했다”고 적혀 있다.
청나라가 중국 전역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쟁취해 중원을 무대로 정치력을 확장하면서 장백산에 대한 숭배와 제의의 격은 더욱 높아졌다. 그렇지만 중원으로 정치력을 확장한 청나라 왕조에게 태산의 존재와 상징성은 그들의 장백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 관계는 자칫하면 장백산과 태산의 상징물 경합이라는 문화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장백산 신앙과 태산 신앙은 문화적 이질성과 역사적 단절성이라는 이념 문제도 갖고 있었다. 이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는 정치적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강희제가 선포한 “태산의 맥이 장백산에서 온다”는 절묘한 담론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조선 후기의 한반도에도 태산의 장백산 조종설과 비교될 수 있는 국토 산줄기의 ‘백두산 조종설’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대두되었다. 산줄기를 기존의 중국 중심인 곤륜산이 아니라 한반도 중심의 백두산으로 설정한 것이 골자이다. 조선 중기까지 중화적인 지리 인식과 풍수설의 영향으로 한반도 산줄기의 근원을 멀리 중국 곤륜산에서 찾았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사이에서 비로소 백두산 조종설이 대두된 것이다. 정약용은 “팔도의 모든 산이 다 백두산에서 일어났으니 이 산은 우리 산악의 조종”이라면서 그 줄기를 ‘백산대간(白山大幹)’이라고 했다. 당시에 왜 이런 사회적 담론이 생기게 되었을까. 백두산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15세기 이후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비로소 국토의 머리라는 상징성이 부각된 산이다. 정치적인 영역성이 국산의 위상으로 반영된 것이다.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백두산이 표현되지 않았다가 16세기 중엽의 지도에 백두산을 국토의 조종산으로 표시하고 백두대간이 뚜렷해진다.
특히 1712년 청나라가 백두산 남쪽에 정계비를 세움으로써 백두산의 정치적, 영토적 의의가 더욱 중시되었다. 때를 같이해 지식인들의 국토 산하에 대한 자긍심이 커졌고 자주적 국토 인식으로 말미암아 영토의 종주로서 백두산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신경준은 백두산을 나라 12명산의 하나로 지정했고, 정약용은 한발 더 나아가 “백두산은 동북아시아 여러 산들의 조종”이라고까지 언급하며 의미와 가치를 적극 부여했던 것이다. 두 나라에 접경해 영토 문제를 야기했던 백두산(장백산)은 결국 1962년 조중변계조약 체결에 따라 북쪽 45.5%는 중국 영토의 장백산이 되었고 남쪽 54.5%는 북한 영토의 백두산이 되었다.
아무튼 일본인들에게 후지산은 근대적인 산 정치학의 산물로서 신앙, 상징, 미학적으로 의미가 한정되어 있으며 중국의 국산은 여러 산으로 나뉘어 있다. 태산은 황제의 산, 곤륜산은 산줄기의 발원지, 장백산은 청조의 조상 산이다. 사실 현재 중국인에게는 국산으로서의 의미가 퇴색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조선은 형제국이라 하였다는 청나라 누루하치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들은 집안이나 백두산 언저리를 자신의 조상이라여 기고 수 천년을 내리 산 건주 여진족들이라 이는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자연히 또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의 백두산은 조선시대부터 줄기차게 국산의 정체성이 문화 전통으로 이어왔고 상징, 지형, 민족, 의식이 뭉뚱그려져 복합적인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국가는 각 나라의 지향성을 드러내는 상징 이미지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의 국가에는 모두 백두산이 등장한다. 우리는 “동해물과 백두산이…삼천리 화려 강산”이라고 부르고, 북한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은….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하며 1, 2절을 모두 산으로 시작한다. 남북한 둘 다 강산(산천) 지향성이다. 그런데 일본과 중국은 다르다. 일본 국가는 천왕시대가 만세로 이어지라는 내용이다. 천왕 지향성이다.
같은 천왕제인 영국 국가도 비슷하다. “신이시여 우리의 자애로우신 여왕을 지켜 주소서!”(God save our gracious Queen)로 시작한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구미 어느 나라에도 한반도처럼 산이 국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를 비교하더라도 한국은 산 지향성 및 국산 정체성이 가장 강한 나라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우리의 백두산을 남의 땅 중국의 장백산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 내 땅에 내 발로 설 수 없다는 분단의 먹먹한 현실이 가슴을 치게 한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게 있다. 고구려는 바로 백두산 밑에 자리를 잡았다. 최인호의 ‘왕도의 길’이란 글에서 보면 고구려 무덤은 북두칠성과 연관이 깊으며 한 결 같이 같은 방향 백두산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만주족들도 백두산을 영산으로 모시고 백두산 주변지역을 신성시하며 봉금까지 했을 정도이니 그들 또한 고구려 후손들이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앞머리는 삭발하고 목에는 108염주를 걸었다. 108염주 동서남북에는 불상을 모신다.
염주알은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채취한 진주로 만든다고 했다. 만주족의 고향인 백두산의 후예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황제의 모자에는 관세음보살이 이마 위에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듯이 금불을 모시고 있다. 모자 상륜에는 가장 큰 압록강 진주로 오층탑을 모셨다. 잘 알다시피 태조인 누르하치가 세 여진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웠고. 명나라를 정벌하고 중원에 진출하면서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민족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만주란, 문수보살의 뜻으로 인도 말 만주수리를 줄인 말이다. 여진족들은 문수보살처럼 지혜롭고 용맹하다는 뜻이다. 청나라 만주족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를 많이 닮아 있다. 나는 그들이 고구려인으로 우리와 같은 민족성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자부심은 있지만 정작 산으로 등재된 세계유산은 아직 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도, 세계자연유산으로서 ‘제주도의 화산섬과 용암동굴’도 산이 지닌 역사적·자연적 가치에 중점을 둔 유산들이다.
중국만 하더라도 현재 10개의 세계유산이 산 이름으로 등재됐다. 산 자체의 가치도 포함된 것이다. 태산을 비롯하여 황산, 무당산, 여산, 아미산, 무이산, 청성산, 삼청산, 오대산, 천산 등이 그렇다. 일본만 해도 3개의 산지 유산이 있다. ‘시라카미산치(白山山地)’, ‘기이산지의 영지와 참배길’과 함께 작년에는 ‘후지산, 성스러운 장소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산 혹은 산맥 이름으로 등재된 세계유산은 전 세계적으로도 30개가 넘는다. ‘캐나디언 로키 산맥 공원(1984)’같이 주로 자연생태적 가치로 평가된 자연유산이 많고, 에스파냐의 ‘트라문타나산맥의 문화경관(2011)’처럼 자연과 문화가 복합된 문화경관 유산도 있다. 그리스의 ‘아토스 산(1988)’처럼 종교적·정신적 장소성이 평가된 성산(聖山) 혹은 영산(靈山) 유산도 몇몇 있다. 백두산이 역사의 산, 문화의 산으로서 세계적 브랜드를 얻고 널리 알려지면 우리의 조종으로서도 그렇지만 산악관광과 등산문화의 형태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문화역사관광이나 인문적 유산(遊山)이라는 지평을 대외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정체성이 뚜렷한 산악문화를 외국 사람들은 보고 싶을 것이다. 서구에 없는 산신만 해도 그렇다. 사람이 사는 곳엔 언제나 산이 있었다. 한국의 산에는 역사문화 콘텐츠가 널려 있다. 우리의 영산으로서 백두산은 더 말해 뭣할까. 동해 물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는 길이길이 보존해야 할 막중한 책무를 갖고도 있는 셈이다. 백두산에 오른 한국사람들이 만세 삼창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습관처럼 외치자 이에 놀란 중국당국은 백두산 관리를 당초 연길 자치주에서 뺏어서 중앙당국으로 바꿨다고들 한다.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한글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도 못 찍게 하고 구호도 못 지르게 하고 방해가 심하지만 그들이 뭐라 하던지 우리는 백두산을 줄기차게 찾는다.
이는 마음속에 두고 간직한 숭엄한 우리의 산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루아침에 가진 습속이 아니다. 저 멀리 고조선 고구려 때부터 이어온 우리의 고유의 DNA가 발동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 땅 덩어리에 놓여 있다하지만 어쩌면 이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책상머리에 앉아 다녀온 백두산을 그리고 생각한다면 실체는 책상머리지만 내 의식과 정신은 백두산이듯 늘 마음에 품고 간직한다면 이는 늘 영원한 우리의 영산 백두산이 아니겠는가 싶어지는 것이다. 문득 얼마 전 북한 김정은을 만난 문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북한으로 해서 백두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 나도 그렇다. 어쩌면 이번 나의 백두산 북파가 비룡폭포에서 멈춘 것은 그 때를 기다리는 암시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때를 차라리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