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절제’
연담 스님은 조선후기 대학승
술 마시는 승려 경책하는 내용
승려의 음주는 풍류 될 수 없어
불경에도 술 가까이 말 것 명시
큰 공을 멀리하고 지나치게 술을 말라.
석 잔도 오히려 사양커늘 하물며 많이 하랴.
불경 중에 기록되길 손으로 갚을 일 없다지만
승려로서 경계하지 않으면 말년에 어찌하리.
破除功業酒無過(파제공업주무과)
三爵猶辭矧敢多(삼작유사신감다)
記得經中無手語(기득경중무수어)
僧而不誡末如何(승이불계말여하)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술’[주(酒)] 철이다. 코로나19로 3년 동안 묶였던 술들이 임인년 밤거리를 흔든다.
몇 해 전 이정일이라는 작가는 ‘흔들릴 때마다 한 잔’이라는 에세이집으로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의 원주인은 감태준 시인. 감 시인은 1991년 미래사에서 펴낸 ‘마음의 집 한 채’라는 시집에서 ‘흔들릴 때마다 한 잔’이라는 시를 처음 선보였다.
“포장 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 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꼭, 필자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꾼은 틀림없이 노름‘꾼’이다. 술‘꾼’이기도 하고. 술과 노름의 공통점은 중독성. 필자도 한때는 그런 ‘꾼’이었던 적이 있었다.
특히 알코올중독 ‘꾼’. 필자가 그 중독을 떨치고 일어선 것은 1993년 6월17일부터다. 그때 처음 ‘A.A.’(Alcoholics Anonymous,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를 만났다. ‘꾼’에서 탈출하기는 ‘꾼’으로 사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 시절, 그리고 그 시절 이후 승려가 된 지금까지 필자의 삶의 구호는 네 가지. ‘하루하루에 살자’ ‘단순하게 하자’ ‘여유 있게 하자’ ‘먼저 할 일을 먼저 하자’.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한 잔’ 대신 ‘흔들릴 때마다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를 했다.
“위대하신 힘이여,/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 네 가지 구호와 이 기도로 필자는 살아남았고, 그 구호와 기도는 지금도 중노릇을 하는 필자의 바탕이 되고 있다.(단, 기도문의 첫 구절은 ‘부처님’으로 바뀌었다.)
(지나친) 술은 예나 지금이나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죽음 아니면 몰락이다.(노름꾼도 마찬가지다.)
연담유일 선사 때도 승려 가운데 술 마시는 분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이 시의 원제가 ‘술 즐기는 승려를 경계하다[誡嗜酒禪者(계기주선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승려라도 약(藥)으로 한두 잔은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승려 중에 술 마시는 것을 풍류로 아는 분들도 꽤 있다. 기인(奇人)처럼, 속(俗)과 승(僧)을 자유자재하는 고승처럼 자랑으로 여기는 분도 몇 봤다. 하지만, 불경에 이르고 있다. ‘술을 가까이 하는 승려는 오백생을 거듭해도 받을 보답이 없다’고. 내면의 황폐는 주검보다 못하다.
연담유일 선사는 먼 훗날까지 그것을 꿰뚫어 보고 이 선시를 썼으리라. 분별과 절제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없다. ‘흔들릴 때마다 부처님’, 이 얼마나 즐거운 삶인가. 충만한 인생인가.
‘흔들릴 때마다 한 잔’은 좋다. 그러나 너무 자주 흔들리진 말자. 연담유일 선사는 조선 후기 화엄학의 대강백이다.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