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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해랑길 39코스(답동마을-법성포)
여 행 일 : ‘23. 10. 28(토)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백수읍 및 법성면 일원
여행코스 : 답동 버스정류장→가자봉→노을전시관→영광대교→백제불교 최초도래지→법성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16.3km, 실제는 노을카페부터 16.28km를 4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39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여섯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코스 대부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백수해안도로’를 따른다. 덕분에 동해를 닮았다는 서해바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해거름이 아니어서 백수해안도로의 하이라이트인 ‘노을’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 들머리는 답동마을 버스정류장(영광군 백수읍 홍곡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805번 지방도로 옮겨 백수읍까지 온다. 대전리교차로에서 우회전 7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면 잠시 후 답동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38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져 있다.
▼ 이번 구간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아홉 번째라는 ‘백수해안도로’를 주축으로 한다. 그저 초반 4.5km를 해안도로 대신 구수산의 능선으로 바꾸고, 후반부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를 구경시키는 정도라고나 할까? 길이는 16.3km, 4.5km가 산길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4개(5개 가운데)나 되는 이유일 것이다.
▼ 오늘 걷게 될 ‘백수해안도로’가 ‘제1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자연경관 최우수상을 받았단다. 이름조차 낯선 상인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4개 유형(시가지․역사문화․농산어촌·자연)의 뛰어난(건축물·공공공간·주변환경 등이 종합적으로 잘 어우러진) 경관을 발굴·홍보하기 위해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기획한 행사라고 했다.
▼ ‘동해 같은 서해의 최고 해안길’이란다. 동해의 파도, 청청한 남해, 서해의 끝없는 갯벌로 대변되는 우리네 바다는 어디가 더 좋다고 평할 수 없을 만큼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서해바다는 쓸쓸한 갯벌이 질펀하고, 사연을 간직한 섬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야 하며, 안내판에서 저런 표현은 사라져야만 한다.
▼ 11 : 50. 트레킹은 ‘백암 해안전망대’에서 시작했다. 영광에서 노을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39코스 시점에서 77번 국도(홍농 방향)를 따라 2km쯤 가다 ‘Cafe 노을’로 내려가면 된다. 참고로 이곳 ‘백수(白岫)’는 아흔아홉 개의 산봉우리를 이르는 지명이다. 그런 특징을 직접 느껴보라는 듯 39코스의 초반은 구수산 줄기인 가자봉과 뱀골봉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난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이미 답사를 마친 길을 또 다시 걷기보다는 ‘백수해안도로’의 명소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 확·포장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건너자 ‘Cafe 노을’이 나온다. 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커피가 일품으로 알려진 곳이다. 서해바다를 마당삼은 덕분에 최고의 ‘오션 뷰’를 보여준단다.
▼ 맞다. 카페에서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영화 ‘마파도’의 촬영지인 ‘동백마을’. 바다를 내려다보며 밭일을 하던 장면 등이 저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절벽 같은 길을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은, 어느 집에서나 문을 열면 비경의 바다와 바로 마주할 수 있단다. 영화촬영지가 된 이유일 것이다.
▼ 반대편에는 ‘가자골’이 있다. ‘백수해안공원’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 ‘해안전망대’라는 이름을 낳게 한 정자는 바다와 맞닿은 벼랑 가장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다가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자를 에워싼 잡목들이 서해바다에 대한 조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망은 카페 주변에서 실컷 즐기도록 하자.
▼ 12 :00. 전망대를 빠져나온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가재골(백암리1구)’에 이른다. 영화 ‘황해’에서 하정우가 살인청부 받은 인물의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만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던 시골 버스승강장이 이곳일 것이다.
▼ 12 : 00-12 : 10. 가재골(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부부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백수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왜구에게 붙잡힌 어부를 기다리다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모자바위’도 있다.
▼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을 지나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난간에 서면 칠산도와 안마도, 송이도 등 칠산 앞바다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 이곳은 전설이 빚어놓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어부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촛대를 들고 나가 바닷가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돌이 됐다. 바다에서 익사한 남편은 거북이가 됐고, 촛불을 보고 바닷가로 돌아와 돌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보라! 거북이 한 마리가 촛대처럼 생긴 바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지 않는가.
▼ 벼랑에 걸치듯 내놓은 계단도 놓치지 말자.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고두섬’ 같은 또 다른 볼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안공원의 얼굴마담격인 ‘모자바위(母子岩)’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를 업은 엄마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무학대사는 부처와 돼지의 눈을 빌어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했다. 공자는 ‘나이 70이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종심(從心)이라 했다. 하지만 칠십에 이른 나에게 도란 아직도 남의 얘기일 따름인가 보다.
▼ 12 : 18.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걸어 ‘대리골(백암리1구)’에 이른다.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대나무를 ‘다리’로 착각해서 ‘교동(橋洞)’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 이곳은 영화 ‘황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하정우가 하룻밤을 묵어갔던 민박집인데 지금은 동명(황해)의 펜션으로 변해있다. 그저 영화 초반 스치듯 지나가던 ‘고두섬’만이 옛 모습 그대로라고나 할까? 퀭한 얼굴로 아침밥을 먹던 하정우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사진은 사라져버린 울주횟집(현 황해펜션) 대신 고두섬을 배경삼은 ‘프로방스 펜션&글램핑’을 게재했다.
▼ 바다 건너 송이도에 ‘고두섬 끝’이라는 지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송이도에 삼천갑자 동방삭을 능가하는 ‘고두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곳 백수해안에서 뜀박질 한 번으로 송이도에 이를 정도로 도력이 엄청났다나? 저 ‘고두섬’을 당시 그가 발판으로 삼았었을 지도 모르겠다.
▼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입소문을 탄 ‘백수해안도로’는 연간 방문객이 76만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러니 주차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 안내판은 ‘칠산갯길 300리’ 중 2코스인 ‘노을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법성포터미널에서 출발 영산성지·모래미해수욕장·열부순절지 등을 거쳐 동백마을에 이르는 23.39km의 둘레길이다.
▼ 12 : 24. 이번에는 ‘순아골’이란다. 백암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다.
▼ 12 : 32. ‘Farm Voree(‘rural convergence industry’로 포장했지만 카페가 옳다)’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 백수해안도로는 정말 아름다웠다. 바다를 끼고 언덕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도 그렇거니와 앞바다도 거칠 것 하나 없이 탁 트여 파란 수평선만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게 약간은 흠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 커피 향 가득한 작은 도서관 ‘뭉클’이란다. 1층은 카페와 도서관, 2층은 테라스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커피 향을 즐기며 독서를 즐겨보라는 듯. 하지만 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이 이제나저제나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쩌겠는가.
▼ 12 : 40. 덕산마을 앞 삼거리에 이른다. ‘홍농읍’으로 연결되는 77번 국도는 직진, 백수해안도로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간다.
▼ 이곳은 구수산의 산줄기를 넘어온 ‘서해랑길’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로로 내려서는 지점에 구수산등산로 안내판과 함께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11.8km/ 시점 4.5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산길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 걸은 내 트랙에는 3.68km가 찍혀 있었다.
▼ 서해랑길은 덕산마을(대신리)을 거쳐 ‘정유재란열부순절지(旌酉再亂烈婦殉節地)’로 간다. 그렇다고 트랙을 꼭 따를 필요는 없겠다. 곧장 순절지로 내려가는 데크계단이 놓여있는데 구태여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붉은 양귀비가 매혹적이라던 주변이 온통 황량한 풍경으로 변해있는 게 아닌가. 꽃이 시들자 내년을 기약하며 밭을 갈아엎었나 보다.
▼ 사적비를 기웃거리다 ‘도해문(蹈海門)’으로 들어가니 모열사(慕烈祠)가 반긴다. 칠산바다에 투신한 아홉 열녀를 기리는 사당이다.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에 살던 동래정씨(東萊鄭氏)·진주정씨(晋州鄭氏) 문중의 부인들이 전쟁을 피해 지금의 묵방포(墨防浦)까지 왔으나 결국 왜적들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 1681년(숙종 7) 나라에서는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비각(碑閣)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 옥개석을 올렸다. 바다를 배경으로 오른쪽에 8열부의 비각, 왼쪽에 정등(鄭燈)의 처 밀양박씨의 비각이 같은 규모로 배치되어 있다.
▼ 열부순절지(이정표 : 종점까지 11.5km)에서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런 다음 ‘데크 로드’를 따라 스카워크로 간다. 줄을 지어 늘어서있는 검붉은 갯바위에 걸치듯 길을 내놓았다.
▼ 험상궂지 않다고 해식애가 아니겠는가. 천년 세월 모진 풍파를 견디다보니 영험함까지 띠게 되었나 보다. 기(氣)라도 받으려는 듯 푸짐하게 상까지 차려놓은 무당이 뭔가를 열심히 빌고 있었다.
▼ 12 : 48. 다시 올라선 도로(해안로). 도로변 공터에서 주말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지역 특산물로 여겨지는 농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힘이라도 실어주려는 듯 ‘천빛예술봉사단’이 공연으로 흥을 돋운다.
▼ 12 : 50. 스카이워크 형식으로 지어진 ‘노을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 스카이워크의 끝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이라는 멋진 조형물이 장식하고 있었다. ‘칠산바다’의 상징인 괭이갈매기(천연기념물 제389호)의 날개를 형상화한 최고의 ‘포토 스팟’이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백년해로의 기원을 담았다니 조형물을 배경으로 인생샷 하나 건져보면 어떨까.
▼ 난간에 서자 일망무제의 풍경이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선지 시선이 수평선과 일직선이다. 문득 아까 혀를 차게 만들던 동해바다답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주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안마군도의 섬들이 아스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야를 가리는 섬 또한 서해바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 가야할 방향의 언덕은 카페와 펜션으로 한 가득이다. 이곳 백수해안도로가 그만큼 유명세를 탔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언덕을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영광의 아름다운 노을 풍경을 전시하고 있는 ‘노을전시관’이 놓여있다.
▼ 노을전시관 부근 바닷가, 갯바위에 걸터앉은 ‘대신등대’는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낭만적인 노을을 볼 수 있는 해넘이 명소다. 곁에 노을전시관을 두었을 만큼 낙조가 아름다워 관광객뿐만 아니라, 등대를 배경으로 노을 사진을 찍으려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 13 : 05-13 : 10. 노을전시관은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전시관이다. 노을의 원리부터, 노을 사진, 노을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등을 모두 보여주는 오로지 노을을 위한, 노을에 의한 공간이다.
▼ 노을이 생기는 원리는 물론이고, 노을을 테마(사진·음악·문학)별로 나누어 전시했는가 하면, 빛의 색·성질·산란 등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빛의 과학적 이해를 도와주는 학습장이라고나 할까?
▼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2층)도 만들어놓았다. 탁 트인 칠산바다에 가라앉는 붉은 해를 비롯해 주변 경관을 구경하기 딱 좋겠다.
▼ 전시관 앞.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로 널리 알려진 가수 조미미의 노래비가 있었다. 뒷면은 대표 앨범 3장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았다. 조미미는 1947년 영광에서 태어났고, 1965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남진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가수였으며, 후덕한 외모와 맑은 목소리로 '바다가 육지라면' '단골손님' '서산 갯마을' '해지는 섬포구' 등 섬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 근처 광장에서 후배 가수들이 ‘버스킹’을 열고 있었다. 저 젊은이들은 조미미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을까?
▼ 13 : 15. 노을전시관부터는 ‘데크로드’를 걷는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노을 종’을 만났다. 노을이 되어 어머니 곁을 지키는 효심을 담은 종이다. 구전에 따르면 먼 옛날 ‘도음소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비바람이 심한데도 아들은 소금가마를 지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에 소금이 녹아버렸고, 아들은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을 더 바깥에서 머물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급기야 아들을 찾아 나섰고,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대로 돌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약을 지어 돌아오던 이들이 돌이 돼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구슬프게 울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아들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믿는단다.
▼ 한 번 치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면 행복할 일이 생긴다는 스토리를 입혔다. 다만 칠 때마다 ‘맥놀이’를 들어야 한단다. 여기서 맥놀이는 몸으로 종의 진동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 ‘사랑의 자물쇠’도 눈에 띈다. 노을종을 친 다음 소원을 담아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놓으면, 웃음·사랑·행복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나?
▼ 오랜만에 보는 멋진 안내도이다. ‘백수해안 노을 길’ 지도를 바탕삼아, 꼭 찾아봐야 할 주요 포인트는 사진까지 게시했다. 다음 행선지의 거리를 하단에 적음으로써 이정표의 기능까지 더했다.
▼ ‘앗! 벌통이다’ 이를 본 동갑네기 도반은 벌통을 따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서라’다. 오래전 일이지만 산청의 석대산에서 말벌에 쏘였었고, 고통과 염증에 시달리던 난 식사까지 거른 채 산청의료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 탐방로는 너무 높지 않은 해안절벽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 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차라리 생경스럽다. 저 멀리 서너 개의 작은 섬이 수평선을 갉아먹고 있을 뿐 갯벌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동해바다와 서해바다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 13 : 28- 13 : 46. 모처럼 만난 전망대. 하지만 누군가의 돗자리가 다가가는 걸 부담스럽게 했다. 하긴 우리 역시 간식을 먹느라 벤치 하나를 독차지해버렸지만...
▼ 칠산정(백수해안도로 최고의 전망대라는데 가보지는 않았다) 아래 설치된 목책산책로인 ‘건강365계단’은 1년 365일 건강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오르는 계단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강해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 바닷가 벼랑을 따라 잔도처럼 길을 냈다. 바위절벽은 아니어도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찔하다. 이 구간의 자랑거리는 길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이다. 하지만 바닷가에 널린 기암괴석들도 그에 못지않은 매력을 준다. 일상에 지친 가슴을 뻥 뚫어지게 만든다고나 할까?
▼ 산책로는 생태탐방로를 겸한다. 길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숲속에서 자라는 여러 식물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저 ‘털머위 꽃’도 그중 하나이다.
▼ 이 길은 ‘백수해안 노을길’로 불린다. 곳곳에서 석양이 만들어내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두어 곳에 바다로 내려가는 길과 함께 해안 절벽 끝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 14 : 03. ‘도음소도(주민들은 ‘돔배섬’이라고 한다)‘를 마주보는 모퉁이를 돈다. 이어서 법성포로 연결되는 내만(內灣)으로 들어서자 바다 건너 금정산 자락이 해안풍경과 함께 조망된다. 참고로 도음소도는 ‘도 닦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올 때 불상을 처음 내려놓았던 곳으로 알려진다.
▼ 내만이어선지 파도가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서해’답지 않게 놀라울 만큼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에 떠 있는 돔배섬(왼쪽에서 살짝 머리만 내미는 곳)과 괭이섬(가운데), 쥐섬(작은 바위섬)까지, 곱디고운 풍광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다.
▼ 14 : 09. 천천히 바다 풍광을 즐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삼미랑 어촌체험관’에 닿는다. 카페와 펜션을 함께 운영하는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길에서 만난 둘레길 나그네의 말에 의하면 ‘서해랑 카페’를 겸하기 때문에 ‘두루누비’ 회원이 들르면 5천원 상당의 커피를 제공한다고 했다.
▼ 14 : 10-14 : 15. 70m쯤 더 걸어 도착한 ‘제8주차장’. 바다를 향해 전망데크를 만들어놓았다. ‘포토 죤’도 세 개나 배치했다. 눈앞에 펼쳐질 풍경을 믿고, 바라보고, 사진 찍어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 전망대 아래는 방파제 등대(칠산타워를 형상화했단다)가 있는 ‘대신항’이다. 대신마을 어민들은 저 포구에서 배를 타고 칠산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늦봄부터 여름까지는 민어와 백합, 가을에는 꽃게와 새우가 잡힌다고 했다. 일부 어민들은 낚싯배를 운영해 짭짤한 소득을 올리기도 한단다.
▼ 난간에서면 두고두고 꺼내볼만한 빼어난 풍경이 펼쳐진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온 작은 물굽이(灣)가 자신의 속살을 아낌없이 내보여준다. 대신항 너머로 나타나는 영광대교는 차라리 덤이다.
▼ 대신항으로 내려서면, 탐방로는 또 다시 데크 로드로 연결된다. 호리병처럼 내륙으로 파고든 칠산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 14 : 26. 데크로드와 이별을 고한다. 이후부터는 도로(해안로)를 따른다.
▼ 14 : 30. 잠시 후 도착한 대초마을 앞 삼거리. ‘옥당박물관’이 잠깐 들렀다가란다. 아주 오래된 토기와 석기가 전시돼 있으며, (동국·해동)통보에서부터 1원·5원짜리 지폐까지 화폐의 역사도 함께 엿볼 수 있단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영광의 얼굴을 빛낸 사람(수은 강항, 소태산 박중비, 공옥진)에 대한 기록도 만날 수 있다나?
▼ 편액 없는 제각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으면. 이후부터는 영광대교를 마주보며 걷게 된다.
▼ ‘영광대교’는 영광군 백수읍과 홍농읍을 잇는다. 저 다리가 놓임으로써 두 읍간의 이동시간이 20분 이상이나 단축되었다고 한다.
▼ 영광대교 부근은 도로 확·포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참! 다리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모래미해수욕장’이 있었다. 해안선이 짧은데다 폭까지 좁지만, 백사장의 모래가 곱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철이 아니기에 들러보지는 않았다.
▼ 다리 남단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광대교 표지돌과 기념조형물(영광의 속뜻인 ‘신령스러운 빛’을 형상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박경숙 시인의 ‘영광대교’를 적은 시비를 세워놓았다.
▼ 14 : 51. 2016년에 준공했다는 ‘영광대교’를 건넌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인 주경간격이 320m에 달하는 현수교이다.
▼ 15 : 00. 북단(이정표 : 종점까지 4.5km)에서 빠져나와 국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숲속을 헤집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 15 : 08. 목맥마을(木麥, 홍농읍 칠곡리) 앞 ‘목넹기 방조제’로 내려선다. 1925년 전남농장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해서 ‘전남방조제’로도 불리는데 둑 위로 도로(칠곡로)가 나있다. 탐방로는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까지 4.1km) 앞에서 도로를 횡단해 습지로 내려선다.
▼ 탐방로는 목맥마을과 자갈금마을(법성면 진내리)을 잇는 ‘목넹기 방조제’를 따른다. 아니 둑 아래, 그러니까 제방과 유수지 사이에 보행로를 따로 내놓았다.
▼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모래등 들’에는 갈대가 한가득인 유수지가 들어섰다. 고창 땅에서 흘러온 ‘구암천’이 방조제에 막히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범위도 무척 넓었다. 그런 장점을 지자체가 놓칠 리가 없다. 데크 탐방로가 갈대밭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 유수지에는 꽤 많은 철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담수호와 넓은 농경지가 풍부한 먹이를 제공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15 : 17. 제방 끝(이정표 : 종점까지 3.5km)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자갈금 어민들이 사용하는 선착장일 것이다. 참고로 오래 전, 고깃배 선단이 들어오면 법성포 물길의 입구이던 ‘목넹기’에 파시가 선다고 했다. 그 목넹기가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 탐방로는 이제 데크 로드를 따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로 간다.
▼ 15 : 27. 잠시 후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에 이른다. 법성포(法聖浦)는 ‘불법(佛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다.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중국)에서 해로를 통해 이곳 법성포에 발을 디디며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테마파크를 조성해놓았다.
▼ 도래지에는 고대 인도의 ‘탁트히바히 사원’ 주탑원을 본떴다는 탑원((塔園)을 비롯해 간다라유물관(2~5세기 불상·불전도·부조 등을 전시), 간다라 양식의 사면대불상, 부용루(참배 및 조망용 누각) 등이 들어서 있다. 찬란한 간다라 불교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 탐방로는 ‘탑원’의 뒤 언덕(이정표 : 종점까지 2.6km)을 넘는다. 그리고는 ‘숲쟁이 꽃동산’을 헤집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꽃과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 법성포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 할 수 있는 구간이다.
▼ 15 : 43. 울창한 숲과 꽃, 거기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포구를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주차장(이정표 : 종점까지 2.2km)이다. 아니 온갖 이름 모를 꽃들로 단장된 것이 꽃동산의 연장이라 함이 더 옳겠다.
▼ 15 : 47. 주차장을 지나 잠깐이지만 숲속으로 난 데크로드를 따른다. 이어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정표 : 종점까지 2.1km)으로 들어선다. 물론 주차장 사잇길이나 메인도로(백제문화로)를 따라도 된다.
▼ 몇 걸음 더 걸어서 만난 ‘법성사’의 담벼락은 다양한 바닷속 풍경을 담았다. 절간답게 부처님도 빼놓지 않았다. 하나 더, 이곳(법성진성 조형물이 세워진 지점)에서 법성진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들머리에 ‘법성진성’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함께 세워놓은 조형물이 조금 이상하다. 성(城)이 아니라 포구를 드나들었음직한 돛단배를 형상화했다.
▼ ‘길이 왜 이따위야?’ 오솔길의 형편은 고창에서 왔다는 둘레길 나그네의 한마디로 대변된다. 이정표 등의 특별한 표식이 없는 들머리는 찾기조차 힘들었고(‘두루누비’의 트랙을 따라가는 사람이야 문제없겠지만), 정비되지 않은 산길은 웃자란 잡초 때문에 걷는 게 영 사나웠다.
▼ 15 : 53. 오솔길을 빠져나오니 전망대를 겸한 이층의 누각이 반긴다. 그 앞에 이정표(종점까지 1.9km)와 ‘법성진성’ 안내판을 세웠다. 진성(鎭城)은 지방의 각 진영을 성벽으로 둘러싼 방어용 시설이다. 법성진성은 전라도 일대의 세곡을 모으던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인 1514년에 축조했다. 내부에는 동헌, 객사 등 관아시설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관련된 창고시설도 있었다고 한다.
▼ 법성진성(전라남도 기념물)의 성곽을 따라간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성벽에는 축성에 동원된 전라도 관내 군·현의 이름과 쌓은 길이, 그리고 축성책임자·재정담당자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했다. 하나 더, 300m도 채 되지 않는 성벽을 걷는데 12분이나 걸렸다. 주위가 온통 달래 밭이었기 때문이다. 서방님께 달래장을 만들어 올리겠다는데 어쩌겠는가.
▼ 16 : 08.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쟁이(이정표 : 종점까지 1.5km)’로 내려선다. ‘숲쟁이’란 숲정이의 사투리이다. 남도에서 ‘쟁이’는 ‘재’, 다시 말해 성(城)을 뜻하는 어휘로도 쓰였다. 그러니 ‘숲으로 된 성’으로 보면 되겠다. 맞다. 숲쟁이는 1514년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법성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숲으로, 법성진성의 북벽과 연결되어 동쪽으로 이어진다. 남도의 대표 숲으로 인정받아 1988년 전라남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명승 제22호’로 승격되었다.
▼ ‘숲쟁이’는 방풍림의 역할을 수행한다. 포구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은 덤이다. 2006년에는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에 지정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단오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3호, 2009년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등 각종 민속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 이후부터는 진내리의 고샅길을 걷는다. ‘서해랑길’의 특징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조작 실수로 두루누비(코리아둘레길) 앱을 활용할 수 없었던 나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서해랑길’ 리본을 확인하며 걷다가 삼거리와 마주쳤는데, 갈려나가는 골목의 초입에 있어야 할 리본이 직진방향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100m남짓 걷다가 되돌아오기는 했지만(리본이 보이지 않아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 더덩실 더덩실, 벽화 속 주민들은 풍물놀이 삼매경이다. 조선 중기에 시작되었다는 법성포 단오제, 그 행사의 한 장면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 16 : 18. 골목을 누비다가 ‘비석군(碑石群)’을 만났다. 이곳 법성진성을 다스리던 관리(수군절제사나 첨사였을 것이다)들을 칭송하는 빗돌인데, 앞에 주인공의 약력과 공적을 적어놓은 게 특이했다. 부근에는 독립운동가인 고경진선생의 생가 터도 있었고, 법성진성이 축성된 지 500년이나 되었음을 알리는 빗돌도 눈에 띄었다.
▼ 굴비의 본고장답게 셀 수 없이 많은 굴비판매장과 굴비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법성1교’를 건넌다. 갯고랑 건너는 갯벌을 메워 만든 ‘인공 섬’이다. 현재 뉴타운이 들어서 있다.
▼ 이곳 법성포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조창(漕倉)이 개설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 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 갔다고 한다. 조창과 조운(漕運)의 기능은 이 마을을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까지 번성시켰다. 하지만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저런 작은 어선들만이 정박해있을 따름이다.
▼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이번에는 바다와 맞닿은 도로를 따른다. 뉴타운답게 굵직굵직한 건물들이 도로변에 들어서 있다.
▼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법성포 앞바다는 호수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대서호(大西湖)’로 불린다고 했다. 또한 중국의 동정호에 버금가는 풍광을 보여준다고 해서 ‘소동정(小洞庭)’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 지금은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매어있는 배들이 하나같이 작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억새꽃이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린다. 맞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10일 밖에 남지 않았다.
▼ ‘법성포’ 조형물은 굴비 두름을 담았다. 황금빛 조기들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굴비로 새롭게 변신하는 고장. 문헌에 나오는 법성포의 내력들도 함께 적어 넣었다. 하나 더. 굴비라는 이름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인종 때 법성포로 귀양 온 이자겸이 그 맛에 반해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된 도리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녀 ‘굴비(屈非)’라고 불렀다고 한다.
▼ 16 : 35. 법성 버스정류장에 이르면서 39코스 걷기가 종료된다. 서해랑길(영광 40코스) 안내판은 터미널 왼쪽 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6.28km를 찍고 있으니 조금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 누군가 그랬다. 영광 법성포에서 거시기 해지면 굴비에 잎새주 한 잔을 하라고. 술을 마시지 않는 여자들도 멜랑꼴리해진 마음이 중화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종점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안함을 글로서나마 집사람에게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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