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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묵상글 ( 2024년 12월 17일. - 길. 등 )
* 김찬선 신부님: 아직 / 04:51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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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7)
스스로에게
갇힌
이에게
있음에도
감추는
길
기꺼이
여는
이에게
숨지 않고
내미는
길
그저
바라보는
이에게
아득히
멀고 먼
길
오롯이
걷는
이에게
나누임 없는
곁 내준
길
제 자리
멈춘
이에게
결코
끝나지 않는
길
한결같이
걷는
이에게
늘
끝닿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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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7 04:43
- 대단하지 않지만 필요한
오늘은 주님 성탄 한 주일 전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래서 교회 전례는 오늘부터 성탄 대축일까지
주님의 탄생을 가까이서 준비한 사람들 얘기를 들려주는데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 얘기입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예수님 오시려면 필요한 인물,
더 강조하면 꼭 필요한 인물들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 족보에는 차독이라는 조상이 있는데
우리는 차독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개똥이나 마찬가지인 이 차독이 없으면 대가 끊겨 안 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족보가 무슨 필요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들은 족보가 예수님께 어울리기나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족보는 필요하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우리 전례는 이 족보 얘기를 들려줍니다.
왜 필요하냐고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기 위해선 족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와 요셉의 족보뿐 아니라
인간의 족보가 필요하기에 주님은 꼭 이 족보가 아니라도
족보를 통해 오셔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 족보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저의 인간적인 족보는 제게서 끊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단한 인간이 아닙니다.
대단한 인간은 아니지만 필요한 인간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영적 족보를 위해 필요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족보가 끊긴 것만도 서러운데
영적인 족보마저 끊긴다면 더 서럽잖습니까?
가능하다면 저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낳고,
주님을 낳을 수 없다면 영적인 자녀라도 낳는 데 필요한 인물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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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일반적인 침팬지 공동체는 20~30마리로 구성되고, 드물게는 150~200마리까지 늘어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고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고대 사피엔스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약 7,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와 협력하는 전례 없는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무역이 이루어졌고, 예술이 등장했으며, 무엇보다 먼 지역으로 이동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인류학자들은 스토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야기 능력이 생기면서 뇌구조와 언어 능력에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로써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로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를 지구상 가장 힘 있는 종족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능력은 누구에게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하는 혼잣말로 이루어질까요? 아닙니다. 함께했을 때 그 이야기 능력은 배가 되며 그 안에서 커다란 힘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이 세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없애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또 군중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우리가 혼자 살 수 없음을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뽑은 제자들이지만, 주님을 팔아넘긴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 후에는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다시는 상종 안 하셨을까요? 그들에게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거부했고 아픔을 주었어도 함께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 뜻에 반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갔던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 역사를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불안한 사람들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의 역사 안에서 갈라치기를 하면서 함께할 사람을 줄여나간다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과도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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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다(퀴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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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이 임박해 옵니다. 대림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분명 오시겠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는 기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해두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의 간절함으로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라고 마음을 모아 노래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본기도>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혼자 드리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의 강생을 예고하고, <복음>에서는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보여주듯이 시간보다 앞서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지만, 동시에 육에 따라 본다면 이 족보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혀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음을 밝혀줌과 동시에 <본기도>에서 밝히듯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하여,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봅니다. 곧 그들 모두가 자비의 사슬로 엮어졌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하느님의 감실을 봅니다. 곧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담겨 있는 성합들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당신 자비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 족보를 들을 때면, ‘성모님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0).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약속하신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4-5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이어지고 영원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계시고 또한 제 안에 자비로 살아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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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의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나 봅니다. 그리고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족보는 뿌리를 찾아 주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다말,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의 자식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구세주 그리스도는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려 인간 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회개한 죄인으로 기록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어디인가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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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12월 17일입니다. 주님의 성탄까지 7일 남았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의 대림 시기는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의 대림 시기 감사송은 구원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지니는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무엇일까요? 대림 제1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그날과 그때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그렇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세우는 것이 구약에 마련된 임무였습니다. 대림 제2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이라고 합니다. 대림 제3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가난한 이, 외로운 이, 굶주린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1주일은 구원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탄생보다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 집중합니다. 나자렛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래서 감사송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알려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여정을 함께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신 곳은 화려한 궁궐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금수저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거처할 방이 없어서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목동들이 양을 돌보는 베들레헴의 들판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대사제가 아닌,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배경에는 권력, 명예, 성공, 능력, 업적이라는 병풍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했던 처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던 목수 요셉이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고단한 여행을 마쳤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흙수저들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곁에 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죄를 지어서 돌에 맞을 뻔했던 여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입니다. 루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대나무는 마디가 있습니다. 마디가 없는 대나무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상처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삶의 마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성탄은 그저,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성탄은 이제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용기 있는 사람들을 자주 찾아온다고 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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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주님의 족보에 관한 복음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따분한 내용일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살던 지역 탁구대회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예선전을 치르고 본선 첫 경기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누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저도 민씨입니다. 당신도 민씨군요. 반갑습니다. 여흥민씨 무슨 파인가요? 너무 반가워서 이렇게 붙잡았네요.’
저는 당혹스럽고 멋쩍어서 이렇게 대답하고 지나쳐왔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제게 혈족은 그리 중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족보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족보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메시아를 준비하신 계획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저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알리는 기록으로 보일 것입니다. 잘 보세요.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부모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기도 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기도 하십니다. 배우자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족보는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담았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한 페이지에 우리 이름도 올라와 있음을 기억하세요.
⭐살아있음은….
살아있음은 거부한다는 뜻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부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사람은 변기의 구멍처럼 생명이 없는 것이다.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하고
‘네’ 할 것은 ‘네’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아픔과 상처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적어도 변기의 구멍처럼
세면대의 수채구멍처럼 모든걸 받아들이면서 살지는 말자.
그건 생명이 없는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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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우리 믿는 이들의 족보이자 뿌리>
“배웁시다, 하느님의 항구한 인내와 겸손의 사랑을!”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다스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주소서.”
매해 대림시기 둘째부분 첫날 12월17일 반복되는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은 늘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매일 미사중 복음 환호송에서도 반복되는, 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신일이기도 합니다.
1936년12월17일생이니 만88세가 되는 날입니다. 코르시카 하루 방문후 귀국중 기내에서는 동행했던 언론인들에게 “Happy Birthday” 축하노래도 선물 받았고, 교황은 웃으며 “Thank you!” 감사인사와 더불어 강복으로 응답했습니다. 귀국후 또 여러 방문객들을 접견하시니 교황님보다 사람들 많이 만나고 바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개인 시간은 전혀 없는 모두가 공개된 공인으로서의 삶입니다. 만88세 고령의 연세에 피곤한 기색없이 늘 미소띈 모습으로 한결같이 대하는 모습은 진정 예수님의 후예답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그대로 잇고 있는 교회의 최고 어른입니다.
“투기나 전쟁이 아닌 희망에 투자하라!”
교황청을 방문한 은행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노후대책뿐 아니라 사후대책을 위해 희망에 투자하라 했다는 어느 주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희망의 순례자로 사는 것보다 더 좋은 미래에 대한 투자는 없을 것입니다.
“화해는 마음의 일이다. 주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닿을 때, 그분은 우리를 변형시킨다.”
역시 교황청을 방문한 개신교 감리교회 목사들에게 요지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대림시기 둘째 부분인 오늘 12월17일은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족보이며 뿌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족보에 뿌리를 둔 교황님의 한결같은 맹활약은 늘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가톨릭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된 예수님의 족보는 면면히 흐르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장강(長江)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족보에서 후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사가 “낳았다”입니다. 계속되는 출산이 그대로 하느님의 희망이 반영된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며 작금의 출산율 저하가 심히 우려됩니다.
이미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야곱의 유다에 대한 각별한 축복을 통해 유다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에 중요한 몫에 참여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연은 없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모두가 필연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모두가 ‘신의 한수’ 같은 하느님 구원 섭리의 도구요 유다는 더욱 그러합니다.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누가 감히 너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 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흡사 이스라엘 야곱의 각별한 신뢰를 받았던 그의 아들 유다를 통해 먼훗날 활약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을 감지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잘난이들 못난이들, 큰 이들 작은 이들, 의인들 죄인들, 유명인들 무명인들 모두를 당신 구원섭리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하느님께는 쓸모없다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각자의 몫에 최선을 다하게 하십니다.
흡사 묵주끈에 달린 묵주알처럼 하나하나가 족보의 줄에 매어져 있음이 존재이유가 되고 있음을 봅니다. 묵주알이 하나의 묵주끈에 매여져 있기에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지 사람도 공동체 족보의 끈에서 떨어져 나가면 무의미한 무명의 존재로 전락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에 망라되어 있는지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되기까지 그 아득한 희망의 미래를 내다보며 끝없이 기다렸을 하느님 사랑의 인내와 겸손이 참으로 놀랍고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특히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은 마리아 성모님에 앞선 참 기구했던 네 여인들, 다말, 나합, 룻, 바세바가 이 족보에서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도구로서 우선적 조건은 신분이나 혈통이 아닌, 도덕군자가 아닌, 주님께 대한 충실하고 한결같은 믿음뿐임을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탄생에 결정적 협조자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는 다음 구절로써 끝납니다. 하느님 사랑의 인내와 겸손의 결정체같은 구절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어제 수도원 배밭에는 2200부대의 비료부대가 반입되었고 다섯분의 인부들에 의해 배나무 전지가 시작되었습니다. 한해 배농사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반복임을 깨닫습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나긴 족보는 끝납니다만,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교회의 족보가 뒤를 잇고 세상 끝날까지 새롭게 계속될 것이며,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에 속해 있는 하느님의 한가족, 한식구임을 깨닫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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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 1,1)
예수님의 가계를 누가 밝혀 줄 것인가?
성경은 은총의 곳간과 같습니다. 부자의 곳간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것을 발견하듯이, 이 책에서도 모든 영혼이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이사야 예언지는 그분에 대해 “누가 그의 가계를 밝혀 줄 것인가?”(이사 53,8 철십인역)라고 하는데, 왜 마태오는 “다윗의 지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라고 할까요? 마태오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힌 것이고, 이사야는 그분 신성의 계보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나는 조금 더 까다로운 문제를 말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이 본성 안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사적인 것을 모두 벗어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먼바다에서 건너온 사람, 곧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먼바다에서 건너온 사람을 대할 때 마치 곁에 있는 신뢰할 만한 벗을 대하듯이 행동할 것입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보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을 더 잘 대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하느님의 본성의 단일한 터를 엿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진리를 추상적인 이미지나 비유로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바랄 만한 최선의 것이 아닙니다.(297)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당신을 흠숭하며 작년 이 무렵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으나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당신은 그들을 당신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길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여러 가지 재난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 갑작스럽게 준비도 못하고 죽은 모든 이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예수님,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극심한 고통 중에 죽어간 이들, 특히 마약 · 알코올 · 에이즈로 인해 희생된 젊은이 들을 봉헌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282).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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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구원 역사는 예수님 족보에서 /
박윤식 [big-llight] 241216. 19:58 ㅣNo.178529
대림 시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기에 구분하여 지낸다. 첫 단계는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는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속죄와 회개의 시기다. 그리고 둘째는 12월 17일부터 12월 24일 성탄 전야까지는 대축일 준비하는 기간이다. 첫 단계가 묵상하며 깨어 ‘기다림’이라면, 둘째는 예수님 탄생의 ‘기다림’이다. 오늘이 대림 시기 둘째의 그 첫날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주님 성탄 대축일까지는 탄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한다. 그 시작이 첫 복음으로, 그것도 예수님 족보이다. 유다인의 풍습에 따라 남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족보에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 외에도 다른 네 여인,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등장한다. 이들은 히브리 여인이 아닌, ‘이방인이거나 원만한 부부관계’라 볼 수없는 여인들이다.
이렇게 예수님 족보에 의외의 인물들, 곧 명예스럽지 못한 여인들의 등장은 복음이 모든 장벽을 헐어 버린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게다. 유다인과 이방인의 담이 무너지고 남녀 차별이 없어지며, 선인과 죄인의 구별이 없어져야하기에 그렇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선인이건 악인이건,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 오실 분이셨기에 그럴 수도.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온갖 종류의 차별과 편견을 없애도록 노력해야겠다.
또한 이 예수님 족보는 14대씩 세 단계로 구분 소개한다. 첫째는 영광의 시기로서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을 대국으로 만든 다윗 왕까지이고 다음은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시기인 비극과 수치의 시기이다. 마지막은 바빌론 포로시기이후 예수님까지이다. 이렇게 족보의 끝이자 복음의 시작은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예수님의 족보는 부끄러운 선조의 이름까지도 고스란히 다 담겨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기에 그렇단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잘못과 허물로 물든 인간을 도구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창조 때부터 지금껏 펼쳐 오셨다. 이 그분의 구원 역사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의 영웅적 힘으로 이끌어 온 인간의 역사가 아닌, 약하고 죄스러운 인간을 통하여 일하신 하느님의 역사이기에 그러할 게다.
그래서 이 족보는 이스라엘 역사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 점점이 찍힌 죄스럽고 못난 모습을 말하기도 할게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 어두운 면도 드러나니까. 그러나 이것들이 죄다 예수님 앞에서는 은총으로 바뀐다. 못나고 죄스럽게 살아 온 것들이 바로 주님 구원의 역사에 스며든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실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모든 백성을 다시 하느님나라로 불러 모으실 게다.
아무튼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첫 구절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사의 업적과 미래의 구원 약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는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을 넘어서는 원대한 하느님의 섭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한 한편으로는 비천하기가 그지없고 초라한 예수님 족보를 통해, 우리 신앙인은 이 대림 시기를 지내는 동안 성탄 때에 맛보는 큰 은총을 미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늘 깨어 있는 정신과 설레는 마음을 가진 그리운 자만이, 구원의 약속을 믿고 그분 섭리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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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몇몇 인물들을 살펴봅시다.
야곱은 형인 에사우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고, 유다는 며느리인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예리코의 창녀였고, 룻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은 밧 세바를 차지하려고 우리야를 전쟁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임금이었지만, 노년에 자신의 외국인 아내들 때문에 우상 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인물들도 대부분 하느님께 성실한 믿음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향하는 역사는 죄인들의 역사였고, 나라는 망하고 유배를 가게 된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모님께서 계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성모님의 믿음 때문에,
죄로 가득 찬 역사가, 모든 것이 실패한 듯 보이는 역사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 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도 예수님 족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죄로 가득 찼던 순간도,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삶도 족보의 증언처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성모님의 믿음을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죄로 가득 찬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는 새로운 족보’가 될 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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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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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이어져내려오는 역사를 말하면서
구약을 요약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 족보 안에 예수님께서도 포함되신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음을
뜻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점점 볼 수 없는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함께 계셨지만
구약은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하면서
인간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관계를 맺고는 있지만
하느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그 분리는 그리스도의 육화로 없어집니다.
하느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있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는 저 위만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있는 이곳도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이 좋은 것처럼
인간의 인성도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심은
인간의 모습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사랑해 주심을 뜻합니다.
걸려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을 탓하시기보다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일어날 수 있게
손 내밀어 주심을 말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기쁨에 벌써부터 들떠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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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 1)
선과 악의
양면성을
보게 되는
우리의 아픈
현실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모든 탄생을
지켜내는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우리의
낡은 틀을
깨뜨리며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역사의
밑거름이 됩니다.
성탄은
기어이
오고야 말
하느님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합니다.
모든 새로움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탄생의 족보는
살아있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를 살아
숨쉬게 하는
놀랍고도
감사한
근원입니다.
창조의
역사 안에
뜨거운
구원의
탄생이 되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탄의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흐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만나는
새로운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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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하느님!
몇 년에 한 번씩 꼭 전화를 걸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뿌리 찾기 협회’인지 뭔지 하는 단체인데, 얼마나 집요한지 모릅니다.
이번에 다시 잘 정리된 족보가 새롭게 출간되었으니,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꼭 한 권 사달라며 골백번도 더 전화를 거십니다.
요즘은 족보, 하면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과거에 어르신들께서는 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선친께서 두툼한 족보 책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집에 불이라도 나면 뛰쳐나오면서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족보였습니다.
그 다음이 집문서요 땅문서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를 때도 제일 먼저 족보를 챙겼습니다.
이렇게 가문의 역사와 전통, 선조들의 이름이 기록된 족보는 어르신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족보라는 것, 마치 뿌리, 생명,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사 다닐 때 마다, 유배 갈 때,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조차도 족보를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족보, 조상, 민족, 뿌리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부분인 마태오 복음서, 그 첫 장에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서두에 별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는 것, 대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왜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의미 없어 보이는 낯선 이름들이 복음서 서두를 장식하고 있을까요?
왜 복음서 첫 출발이 이토록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사람 이름으로 시작될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그 한가운데 현존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한 정도의 천상 용모를 지니신 분, 우리 인간이 도저히 닿지 못하는 아득한 먼 곳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 두 발로 굳건히 딛고 서 계시는 분, 다사다난한 우리 인간사, 폭풍 속 같은 우리 인생살이 한가운데서 들어와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 가운데는 인간의 위대함도 보이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의 어두운 그림자도
뚜렷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간통 행위, 솔로몬의 배교 행위,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추문록, 왕실의 혈통 안에 버젓이 끼어들어 있는 이방 여인들의 이름도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상처투성이뿐인 인간의 역사, 인간의 고통, 인간의 아픔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의 재림은 비록 이스라엘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측, 다시 말해서 인간 측의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도래합니다.
거듭되는 인간 측의 불충실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유대관계는 지속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측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실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깊은 상처, 그 사이를 비집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스며들어 오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깊은 좌절을 딛고 하느님께서 일어서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멸망과 죽음을 기반으로 하느님께서 살아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결핍투성이인 우리 인간사 안에서 당신 사랑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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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 성경책을 처음 펼쳤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구약성경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창세기 이야기들이 전개되는데, 그 양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어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읽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럼 짧은 신약 성경을 먼저 읽어야지, 하면서 마태오 복음서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이번에는 발음하기도 힘들고, 생소한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는데.., 아무튼 어린 제게 성경은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족보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셨음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통상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소개하는 전기 작가들은 그의 탁월한 업적이나 고귀한 인품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의 약점이나 흑역사는 가리기 마련입니다.
자녀나 후학들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사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을 소개하면서, 수치스러운 인물들, 가문에 누를 끼친 인물들은 적당적당히 감추거나 빼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보십시오. 위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불의하게 결합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문과 전통,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유다 역사 안에 그녀들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율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사가는 적절치 못함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사건의 당사자들을 족보에 넣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에서 지우고 싶은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놓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한 인간 본성을 정화하기 위하여 그 본성과 혈연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병든 인간 본성을 치유하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간 본성을 위로 들어 높이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타마르, 밧세바 외에도 족보에 등장하는 특별한 여인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서 보하즈를 낳고” 바로 라합입니다.
예리코의 임금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낸 정탐꾼과 사절을 죽이려고 했을 때, 라합은 그들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주었습니다.
한때 라합은 유흥업에 종사하던 이방인 여인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 돌아섰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스라엘의 딸이 되었습니다.
자기 겨레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했고, 충실한 이스라엘의 아들이었던 살몬과 혼인합니다.
한때 우상숭배와 타락한 생활로 바닥살이를 전전했으나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 지체가 높아지고, 아리따운 시온의 딸로 변화된 라합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표상입니다. 거룩한 창녀!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구중궁궐 까마득히 높은 옥좌에 좌정해계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처투성이인 꼬질꼬질한 우리네 인생사 안에 깊이 들어오셔서 자리 잡고 계십니다.
비록 오늘 부끄럽게 살아가지만 거룩한 갈망을 지닌 채, 어떻게 해서든 거듭나보려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하느님께서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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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도록 한 것이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탄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둘 다 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서 훌륭한 선조였다. 주님께서는 할례로 유대 민족의 선조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6절)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다윗은 손이 뛰어난 또는 사랑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이셨다. 다윗은 행동으로, 자비로, 온화함으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14대라는 말을 3번 하는데 여기에도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씩 나눈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족보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역사를 면밀히 이끌어 가시며, 그 역사의 절정, 즉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 가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 족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대림시기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 족보에 나타나는 의미에서와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삶으로 많은 은총 속에 사는 때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겪는 때도 있다. 이 때문에 항상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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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왜 우리는 무엇이 행복인 줄 알면서도 어떤 날은 다른 행복을 추구할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계획된 성취된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의 분명함 속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 예언된 태어남과 가르침,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예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가 없으셨기 때문일까요?
그 예언이 행복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매일의 행복을 약속하는 예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예언을 따라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 예언에서 벗어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행복의 길을 알면서도 매일 헤맬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뱀은 자꾸 다른 행복의 길이 있다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는 가끔 그 목소리를 듣고
불행을 선택합니다.
이와 관련된 좋은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주인공 필 코너스는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 단조로움을 혐오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악용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 다른 사람들을 돕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자신을 개선하면서 -
만족을 느끼고 결국 끝없는 반복에서 벗어납니다.
법칙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법칙을 믿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젠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멈추고, 대신, “이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하는 좋은 실험이 있습니다.
쥐와 인간이 제비뽑기를 계속해서 하면 100% 인간이 쥐에게 지고 만다는 결과의 실험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A와 B, 두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 안에 1,000원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200번을 선택하여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당첨 확률은 A가 75%, B가 25%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보통 100번 정도 하면 이런 확률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음 100번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쥐에게는 돈 대신 먹을 것을 줍니다.
이때 쥐는 보통 사람보다 1만 2,500원이나 더 땁니다.
인간은 A에서 나오지 않는 25%까지 B에서 찾으려고 하다가 A만 누르면 받을 수 있는 돈보다 작게 받습니다.
그러나 쥐는 100번을 넘어가면 이 패턴, 곧 법칙을 알고 믿기 때문에 그냥 쭉 A만 누르는 것입니다.
3살 아이에게 시켜도 항상 어른을 이깁니다.
아기들은 자기 생각이 별로 없기에 법칙에 순응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자유는 우리 스스로 주어진 법칙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법칙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돈, 내일은 쾌락, 모레는 명예나 권력을 행복으로 여기고 추구해봅니다.
매번 우리가 해 왔던 많은 경험들을 무시하면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예언처럼 반복하면 매일 행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을 성취하며 사셨던 이유는 그렇게 순수하게 행복의 법칙에 순종할 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행복의 예언인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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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족보는 충실한 신앙인들의 족보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마태 1,1-7).”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5-17).”
1)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족보를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메시아’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야곱은 유다 지파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베들레헴은 다윗의 본적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다시 확인했습니다(루카 1,32-33).
그리고 미카서의 예언은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마태 2,5-6).
복음서 저자는 그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음을 증명하려고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2) 예수님의 족보에는 인간 세상의 ‘빛과 그림자’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족보에서 그림자만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인간들의 죄의 역사’로만 보이겠지만, 빛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역사가 곧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 라는 것이 보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0ㄴ-21).”
우리 교회는 그 은총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인간 세상의 역사는 하느님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어떤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작용을 전혀 모르다가,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게 모두 하느님의 섭리였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3) 예수님의 족보는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때’가 있음을, 즉 ‘하느님의 시간표’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때’ 태어나신 것은, 그때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어떻든 복음서를 보면,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와 출생, 그의 활동과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탄생,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 모두 ‘하느님의 시간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표는 종말, 재림, 심판 때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 각 개인의 인생도 그 시간표 안에서 진행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시간표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것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4)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이름에서 끝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족보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족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 뒤에
계속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6-17ㄷ).”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족보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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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17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오늘 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족보’는 우리 식으로 번역된 말이고 이 말의 그리스어 원문인 ‘게네시스’는 ‘계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시게 된 ‘근원’과 그것이 인간 역사 안에서 이어져 내려온 ‘내력’을 기록한 것이지요. 그 내력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두 ‘기둥’은 아브라함과 다윗 임금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이스라엘의 조상이자 하느님께 충실한 믿음을 지녔던 신앙의 조상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근원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분이자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굳은 믿음과 신뢰를 지닌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한편 다윗 임금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며 그분 뜻을 따른 덕분에 하느님으로부터 번영과 평화를 약속 받은 인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그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의 구원과 평화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점을 드러내지요.
한편,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지니는 세가지 특징이 추가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쉽고 편한 “꽃길”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가시밭길”이지만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에 온갖 시련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항구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남자의 이름 뿐만 아니라 여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는데, 심지어 평범한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과 죄를 지은 여인의 이름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타마르, 이방인 창녀로써 적군인 이스라엘과 내통한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 우리야를 죽인 다윗과 부정을 저질러 자식을 낳은 바쎄바까지… 이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부정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유다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의인들 만이 아니라 죄인들까지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분임을 드러내지요. 즉 하느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기필코 우리를 구원하고 싶으신 겁니다. 셋째, 계보를 정확히 십 사 대씩 나눈 것은 그 안에 하느님의 섭리와 뜻이 스며들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당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섭리하고 계셨다는 뜻이지요. 그 과정은 완전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고 중간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해피 엔딩’으로 끝납니다. 하느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 뜻을 이루시고야 마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써내려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계보에는 언젠가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의인으로 기록되진 못하더라도, 하느님 뜻을 거스른 죄인으로는 기록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계보에 이름이 적힌다는 사실 자체에 안주하기보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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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창세기 저자는 성조들의 이야기를 마감하며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것을 마감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유다에게 어린사자에 비유하며 그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 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창세 49, 9-10)
동물 중에 왕이 사자이듯 열두 지파 중에 유다 가문에서 왕이 나오리라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왕이 다윗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족보를 소개하면서 이미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의 인물들을 나열하는데
대부분 구약에서 이미 소개된 인물들입니다.
무언가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떳떳하지 못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타마르는 시아버지 유다의 아이를 가지는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가 구원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룻은 모압의 여인이었지만 남편을 잃고 희망마저 사라졌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틀레헴까지 따라왔고
그곳에서 다윗 혈통을 잇는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라합은 예리코에서 창녀의 신분이었지만 보아즈를 낳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불륜을 저지르지만 다윗과 부부인연을 맺고 솔로몬을 낳습니다.
불행의 치드키야 뒤를 이어 바빌론에서 여호야킨이 감옥에 있다가
풀려나 죄수복으로 임금 앞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마태오 저자는 이와 같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들을 예수님의 계복에 올렸을까요?
물론 구약에서 요시아처럼 이스라엘의 종교개혁에 힘쓰던 유능한 있습니다.
복음은 성경과 다르게 적고 있습니다. 한 예로 요시아 다음으로 여호아즈,
그 다음으로 야호야킴을 그 다음이 여호야킨을 꼽아야 하는데,
복음사가는 요시아 다음으로 여호챠킨을 꼽습니다.
유대인으로 그 누구보다도 구약의 역사를 잘 알고 있던 그였는데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마태 1,11-12)
왜 그랬을까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특히
이스라엘 유배 역사 중에 구약성경도 전해 주지 못하는 인물까지 세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편성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사가는 족보의 결론은 이렇게 적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16-17절)
그에게는 일곱이 배가 되는 십사라는 것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본심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완전의 숫자인 일곱을 배로 반복시키는 것에 흥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못나고 잘난 이들의 되는 대로의 역사일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소중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시대의 순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 과거 구약의
구원 역사를 재조명하며 복음이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과 연결되는 기쁜 소식임을
유대인들에게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스라엘 지파의 기원으로 꼽는 야곱에 의해 예견된 유다 지파의 후손인
예수님이야 말로 다윗 왕의 정통 후손이며 사실은 세상의 왕들 중에 왕이심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세상이 말하는 소위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고 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이가 소중하게 엮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똑똑한 이, 악하고 착한 이로 구분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다 공평하고 다 소중한 것입니다.
주님의 족보 앞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실이 그냥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내가 이루어 가는 순간과 역사가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도 깨달아야합니다.
오늘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이 시간을 쓰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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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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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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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7. 2024년 12월 17일.
<2024.12.17> 아침을 여는 묵상 (말 2:1~16절)
❝거룩한 제사장답게 사명을 감당하는 삶❞
❚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은 자답게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것입니다(1~9절).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절). 그들은 전인격적으로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에 대해 순종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이 그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직분을 잃고 부정한 절기 희생의 배설물처럼 버림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3절). 하나님은 레위와 맺은 언약을 이어 가기를 끊임없이 원하셨습니다(4절). 그들과 세운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며 그들과 이렇게 언약을 맺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5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거짓이나 불의를 말하지 않고 항상 사람들에게 진리의 법을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많은 사람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방향을 돌이켜 떠나게 했습니다(6절). 또한 지식을 지켜야 하고, 율법을 구해야 하는 것이 여호와의 사자인 제사장의 역할인 것입니다(7절). 결국 그들은 말과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써 많은 사람을 바른길로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을 범하게 했습니다(8~9절). 율법을 가르쳐야 할 레위인들이 또한 하나님의 메신저의 역할을 해야 할 레위인들이 오히려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인들과 언약을 맺으신 목적은 동행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벨과 에녹과 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셔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 주신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고,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받은 말씀, 곧 복음을 그대로 지키고, 선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현시대에 맞도록 복음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복음을 가감하지 않고 보존하고 순종하여 전하는 것이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핵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지키며 살지 않을 때 촛대가 옮겨짐을 깨달아, 정말 복음을 온전히 붙들고 있는지 신중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광이며, 자랑거리로 삼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세속적 욕망과 정욕을 버리는 것입니다(10~12절).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방 신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심을 보여야 하고, 서로를 대함에 있어서 성실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고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였습니다(10절). 유다 백성은 거짓을 행했고,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성전을 욕되게 하여 우상을 섬기는 여인들과 결혼(11절)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지라도 야곱의 장막, 곧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12절).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의 의미를 잘 깨닫고,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따라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세속적 욕망과 정욕이 얼마나 더럽고 흉악한지를 깨달아 낱낱이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오래된 죄악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모든 정욕을 벗어 버리기까지 우리는 끝까지 힘써 싸워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을 경홀히 여기지 않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서로를 돌보며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13~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 신의 딸과 혼인한 죄악과 관련된 또 다른 죄악을 선포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서 맞은 아내를 내버리며 학대한 사례를 지적하며 이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눈물과 울음과 탄식...”(13절)은 남편에게 내어 쫓김을 당한 여인들의 비통하고, 억울한 눈물과 탄식이 온통 여호와의 제단을 덮을 정도로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젊은 날에 아내로 맞이한 동반자를 내쫓은 자기들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로 무슨 까닭으로 여호와께서 자기들의 제물과 기도를 받지 않으시는지를 항변조로 묻기까지 했습니다(14절). 그러나 하나님은 젊어서 결혼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해서도 안되고 그 아내를 버리거나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15절). 그리고 그들의 심령을 삼가 지켜서, 젊었을 때 사랑으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고 아내를 배신하지 말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16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마음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방 여인이 가까이 있을지라도, 아내 학대하는 것을 꾸짖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이 명령을 지켜야 했습니다. 다른 지체를 돌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을 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불러 주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정체성인 거룩함과 하나 됨을 지켜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넘어뜨리려는 악한 영에 대하여 경계해야 합니다. 세속적 욕망이 우리의 삶에 틈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하나 됨을 깨뜨리려 하는 모든 유혹들을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모든 정욕과 미혹으로부터 지켜내고, 서로를 돌보아 주므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주셔서 제사장으로 세워 주신 은혜와 특권을 기억하여 말씀을 지키고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거룩한 제사장답게 세속적 욕망과 정욕의 마음을 낱낱이 벗어 버리고 정체성을 지켜 나아가는 삶을 살아 갈 수 있기를(말 2: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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