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언어로 지은 집
-존 버거,『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열화당
by꿈꾸는 곰돌이Jan 17. 2025
존 버거,『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열화당, 2004, 김우룡역
새해 공개하지 않은 몇 가지 목표가 있었다. 여전히 다수는 비공개이나, 한 가지는 존 버거의 전작 읽기다. 존 버거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은 모두 읽었으나, 은사님처럼 출간된 그의 모든 저작을 섭렵하고자 한다. 이 책은 한 편의 산문시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한 카테고리 안에 포함하기에는 너무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문도 있고, 시도 수록되어 있으며, 어떤 글은 철학적 에세에, 어떤 글은 문화비평과 예술비평에 가깝다. 그러니 이 책을 존 버거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다. “산문의 언어들이 신뢰를 잃었으므로 이 세상사를 묘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래다.”라던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존 버거의 사계> 속 그의 말처럼.
책의 서문에는 “1부는 시간, 2부는 공간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존 버거의 다른 글들처럼, 이 책 충분히 불친절하다. 근데 그 불친절함이라는 것이 유익하고 건강한 불편이다. 산문이면서 시의 호흡을 갖고 있고, 문학의 향기가 나느 에세이지만 학술적 논문에 버금가는 고독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그의 다른 저작들처럼 치열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존 버거 특유의 아포리즘, 혹은 시적인 문장들과 적절한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읽기 어렵겠다. 두 가지 조건이 조금 어려웠지만, 그를 애정하는 마음으로 산문의 향기를 음미하며 읽었다.
1부는 시간에 대한 단상이다. 철학적 사유부터 일상의 경험을 다룬 운문과 산문이 교차하며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 핵심은 인간의 시간이 근대의 과학적이고 기계적인 시간관에 의해, 인간의 삶과 괴리되어 흐른다는 것이다. 인간과 시간의 상호소외를 지적하며, 그곳에서 죽음을 포착한다. 여기에 존 버거를 상징하는 문형인 ‘사랑’을 수식하는 단아한 문장과 사유가 흐른다.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시간에 대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에서 크로노스는 연속적이고 계량 가능한 물지적 시간이고, 이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개인의 주관적인 시간으로 특별한 순간, 개인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통해 측정되지 않는, 삶에서의 전환점 혹은 응축된 시간을 말한다. 존 버거가 말하는 근대의 시간관은 크로노스에 가깝게 보인다. 덧없이 흘러가는 것. 그러니 우리는 카이로스를 상실해 덧없음을 느끼는 것 아닐까. 존 버거가 말하는 카이로스의 핵심 단어는 사랑이다. 특히 낭만적인 사랑이야말로, 찰나의 덧없음을 영원으로 이끄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에 실린 글에서 자신이 사랑한 연인과의 사후를 그린다. 함께 섞여 풍화해가는 뼈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과 연대를 영원의 것으로 가져간다.
2부는 공간에 대한 단상이다. 시간에 대한 문제를 인간과 시간의 상호소외로 이야기했다면, 공간에 대한 문제는 이주 및 집에 대한 귀환 불가를 말한다. 문명은 정착을 통해 시작되었다면, 150년전 근대에 들어서며 문명에 버금가는 주요한 변화로 이주를 말한다. 마르크스 등 근대 사상가들이 이주를 자기 시대의 현상으로 확인했다며, 과거를 그리워해서가 아닌 사라진 것을 기려 말을 걸기 위해 본인도 이주에 대해 말하겠다고 한다. “희망이 태어나는 곳은 상실의 자리이기 때문이다.(p.72)”라던 수려한 산문과 함께.
이주를 다룬 8개의 시를 통해 한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새로운 도시 대중들의 집없음에 대해서 말이다. 보들레르의 말을 빌려, “...끝없이 한탄하는, 길을 잘못 든, 집 없는 영혼처럼” 그렇지만 상실로부터 희망을 감지한다. 상실의 지점에서 자라나는 두 가지 것을 포착한다. 하나는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다. “근대적 의미의 낭만적 사랑은 떨어진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또는 그런 결합을 바라는 사랑을 말한다.”(P.84p) 우정, 연대, 상호 이익 역시 사람들을 결합시킬 수는 있지만, 낭만적 사랑은 태초와 시원에 뿌리를 두며, 이러한 근원성이 경험에 앞선다고 말한다. 이러한 근원성이 바로 노발리스부터 프랭크 시나트라에 이르기까지 낭만적 사랑의 마력이다.
성적 본능은 두 개의 극 사이에서 서로 끌리는 에너지다.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이 존재하자마자, 그런 끌림을 붙잡고 유지하려는 소망이 스스로를 사랑이라고 선언하기 시작했다. 사랑은 완성에의 희망을 품게 되었고, 그 에너지야말로 실재의 중심부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완성하고자 하는 희망은 집을 세우고자 하는 희망과 동시적으로 발전해 나가지만 똑같지는 않다. 집이 박탈된 현대의 우리들은 이전의 어느 시대 사람들보다 더욱 완성에의 소망에 크게 공명하고 있다. (p.85)
존 버거가 기대는 또 다른 것은 역사적인 것, 즉 연대이다. “전세계적 연대만이 현대의 ‘집 없음‘을 초극할 수 있다.“(p.85)는 말처럼, 존 버거는 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될 수 있다는 형제애보다 연대를 말한다. 이 시대는 결국 유형의 세기이며, 마르크스의 위대한 예언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낙관을 이야기한다. 그때에는 집이라는 근원적 주거처의 대체물이 개개인의 이름들이 아닌 역사 속에서 집단적 의식 존재가 될 것이고, 우리들은 실재의 중심에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현실에도 존 버거가 품는 일말의 희망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기의 희망을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p.85)라는 따듯하게 타오르는 말과 함께 낭만적 사랑과 연대로 인류 모두가 집으로 귀환하길 꿈꾼다.
이 책은 낭만적 사랑과 연대의 작가인 존 버거의 ’노래‘이자, 근대 이후 방황하는 인류가 써낸 서사시이다. 책을 덮고서야 서두에 실린 시 <신분증>에 등장한 마지막 구절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할 지라도 시간앞에서 희미해지는 얼굴처럼, 인간의 삶도 유한하고 덧없다. 그럼에도 ’내 가슴‘ 속 사랑을 통해 이러한 현실을 영원의 것으로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낭만적 사랑과 연대로 찰나의 것을 사후 이후의 영원으로 가져가는 것 아닐까? 보들레르가 그렇게 목마르게 외쳤던 ’근대성‘ 영원과 찰나의 변증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1984년에 나와 한국에는 2004년이 돼서야 나온 이 책이다. 더욱 근대의 병폐가 재난으로 드러나는 지금, 이 책이 주는 울림은 더 훌륭하게 다가온다.
출처
https://brunch.co.kr/@minq17/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