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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漢字 속의 中國 神話와 歷史 이야기
책은 제목에서처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1부】중국, 하늘이 열리다. 【제2부】문명을 개척하다. 【제3부】신과 인간이 구분되다. 【제4부】성인의 시대가 도래하다. 【제5부】신화시대 끝자락에 선 우임금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국은 신화를 역사로 둔갑시키는데도 보통이 아니지만,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도 어지간하다는 것을 실감치 않을 수 없다. 개별적으로 보면 꾀제제하고 볼품도 없는데, 떼로 뭉치면 힘이 생기는가 싶기도 하고 참 희한한 나라고 사람들이다 싶다. 그래도 그들을 알아야 그들과 대항할 수도 겨룰 수도 있고, 그들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대략 북경원인, 자바인, 우랄 알타이인들은 약 50만 년 전에 중국, 인도지나, 북유럽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수십만 년 동안에 타제석기를 사용하고 수렵과 채집으로 살았으나, 구석기 말인 2만 년 전에는 동굴에서 살았는데(山頂洞人), 이들은 이미 현대인과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도구를 써 사냥하고 뿔을 갈아서 바늘을 만들고 매장을 하는 등 의식과 예술적 표현을 하기도 했다. 1만 년 전에서 5000년 전까지 신석기 시대에는 채색도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도기 가장자리에 숫자와 초보적인 글자를 새기기도 했다.
시안(西安)의 양소(仰紹) 문화, 산동의 대문구(大汶口) 문화에서 이어진 산동의 용산(龍山) 문화는 기원전 7,8천 년에 시작되어 2천여 년간 지속된 신석기 시기로 갑골문에 봉황새 형상을, 도기 등에 그려 넣는 등 놀라운 회화 실력을 보여 준다. 5천 년 전에서 4천 년 전 하(夏)나라까지 이어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중원과 산동, 남방, 내몽골까지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져 발달했으며, 이때는 이미 군권(軍權)이 확장되고, 신권(神權)이 강화되었고, 예제(禮祭)에서도 엄격한 규율이 형성되고,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진입하는가 하며 왕조가 건국되기 시작했다.
夏나라(BC 2070∼BC 1600)는 치수에 성공한 우(禹)가 건국한 나라로서, 하남성(河南省) 이리두(二里頭) 부근에 자리한 약 4천년 전에 개국한 중국 최초의 노예제 국가다. 하왕조가 건국됨으로 1만년 이상 지속되었던 씨족공동체는 무너졌고, 이때부터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도 신화시대 베일을 벗지 못했으나 이어진 商나라(BC 1600∼ BC 1046)때 17세 30왕이 554년간 이어져 오면서 삼촌과 조카 간의 반목으로 4차례에 걸친 천도를 감행하기도 했고 마지막 수도가 은(殷)이었으므로, 상나라를 은나라라고 하기도 한다.
거북등과 동물의 뼈에 새겨진(7:3의 비율) 갑골문은 1만 년 전에 문자로 태동해 6천 년 전에는 초보적인 형태를 보이다, 3300년 전인 상나라 때는 문자형식을 갖춘 언어를 기록하기도 한다. 더 이상은 형태의 그림이 아닌 문자로 일상의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자는 상형문자라 하여 사물의 형태를 나타낸 글자지만, 상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人)과 눈(目), 일(日), 월(月), 고기(魚)와 같은 형태, 一,二,上,下 등과 같은 생각을 그림으로 나타낸 지사(指事), 일월을 합쳐서 밝을 명(明)으로 나타낸 회의(會意)글자를 만들었고, 또 글자에다 언어를 추가하여 신(新), 하(河)등과 같은 형성(形聲) 문자까지 만들었다. 이로써 상형(象形), 지사, 회의, 형성, 전주(轉注), 가차(假借)까지 여섯 가지로 글자를 만들었는데, 앞의 4가지는 제작방법에 따른 분류이고, 뒤 두 가지는 활용방법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를 육서(六書)라 한다.
다른 데서 살펴본 적도 있지만, 갑골문자는 지금까지 16만 갑골조각이 발굴·발견되어고, 그중 4, 5천 자 글자가 새겨져 1천여 자는 이미 해독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보면 ‘점친 날자와 점친 사람의 이름, 점을 쳐 물었던 내용, 점의 결과에 따라 길흉을 판단한 것, 점이 맞았는지에 대한 영험도’등을 기록했으며, 이로써 상나라는 신들의 사회였다고 할 만큼 귀신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위에 오른 왕은 제사를 지냈는데, 36순(旬) 즉, 1년 내내 제사를 지냈다. ‘祭祀’에서 祀는 1년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상나라를 일컬어 ‘귀신을 먼저 섬기고 나서 예를 차린다(先鬼以後禮)’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는 신화와 전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신화는 고대인들이 마음속에 쌓인 이야기이자 사회현상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민족의 신화 속에는 그들이 자연과의 싸움에서 겪어온 성공과 실패의 경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져 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는 영혼을 가진 신의 영역으로 여겼고, 자연스럽게 신에 대한 숭배의식이 움텄다. 신화가 생긴 것은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고 현대인과 매우 흡사한 신인(新人)들에 의해서였다. 그것은 원시시대가 지나가고 고대사회를 통일한 황제 시대에 이른 약 5천년 년 전 시기로 볼 수 있다. 물론 그전에도 여러 이야기가 있었겠지만, 전하지 않을 뿐인지 모른다.
전해오는 이야기(說話)를 신화(神話)와 민담(民譚), 전설로 분류하는데, 전설은 민담과 달리 역사상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증거물이 남아 있다는 특징을 가지며, 신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역사의 전설화, 신화가 출현하게 되면서 둘은 혼합되기도 하고, 분화되기도 했다. 신화가 신의 이야기라면 전설은 신격화된 영웅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성경의 창세기처럼 중국에는 많은 신화적 인물이 이야기에 등장하는데, 三皇(伏羲(복희)·女媧(여와)·神農(신농))과 五帝(黃帝(황제)·顓頊(전욱)·帝嚳(제곡)·唐堯(당요)와 虞·舜(우순))가 그들이다. 오제의 마지막 우에 의해 하나라가 건국되고, 하·상·주 三代로 이어져 역사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황제는 약 5천 년 전의 최초 제왕으로 중국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조상이다. 1만년 전 신석기시대로부터 삼황오제 시기를 거쳐 하나라까지 약 6000년간은 선사시기로 신화·전설시대다. 하나라에 이은 상나라는 554년간 지속되다가 주나라 무왕에게 패망하고, 주나라는 서주와 동주로 나뉘었다 동주가 다시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후 825년간 존속했다.
전국시대 말 秦始皇帝가 왕위에 올라 26년간 재위하면서 최초의 중국 통일국가를 건설하였으나(기원전 221년)순회 중에 죽고 아들 胡亥가 뒤를 이었으나, 3년만인 기원전 207년 한 고조 유방에게 패망한 것은 역사적 사실로 이때부터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 책은 신화 이야기를 통한 역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제1부】 중국의 하늘이 열리다.
우리에게 단군과 단군신화가 있다면, 중국에는 하늘을 열고 땅을 개척한 반고(盤古)라는 개벽신이 있다. 반고는 어둠밖에 없던 칠흑 같은 어둠에서 1만 8천 년을 살다가 어느 날 기지개를 켜고 나왔다. 그는 꺼질 것 같은 하늘을 받치고, 땅을 굳게 딛고 또 1만 8천 년을 살았다. 그런데도 몸은 하루에 10척씩 커서 땅의 거리가 9만 리나 되고, 키도 하늘에 닿을 만큼 컸다. 하지만, 그 짓이 너무 힘들어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고 말았는데, 죽은 반고의 몸이 조각조각 터져더니 바람과 구름이 되고, 뇌성이 되고 왼쪽 눈은 해가 되고, 오른쪽 눈은 달이 되어 빛을 내보내면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역사기록이 없고 추정하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옛날에 우주는 그냥 알과 같은 형태로 묘사하고,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으로 생각해 그가 세상을 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살라 만물을 만들었다는 신과 인간, 자연과의 합일적 관념을 표출시킨 것이 아닐까. 후세인들은 그를 위대한 창조신으로 추앙하고, 반고가 태어난 것은 고신왕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하면서 이때 왕비가 아파서 3년을 앓았는데, 어느 날 왕비의 귀에서 누에처럼 생긴 벌레가 나오고는 그 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벌레가 용구(龍狗)로 변해 쟁반으로 덮어 두었는데, 쟁반에서 태어났다 하여 반호(盤瓠)로 불렀으며, 그가 다시 사람으로 변해 고신왕을 도와 공을 세웠고, 자손이 번창해 후손들이 반호를 조상으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반호가 반고로 이름이 바뀌었다. 盤자는 손에 기구를 들고 도구를 제작하는 일반 般에 그릇 皿자를 붙여서 뜻을 더욱 명확하게 했다. 古는 갑골문에서는 형상을 알 수 있는 것이 없으나, 한 대에 와서 十과 口가 합쳐 ‘한 가지 이야기가 열 사람의 입을 거침’으로 해석되고 ‘아주 오래전 옛날’로 풀이되어 지금에 이른다.
전설과 신화를 만든 북경인들은 울창한 산림과 대평원에서 열매를 따서 먹고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며 살았다.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들에서 열매를 땄다. 사냥할 때는 곤봉이나 돌 무기를 들고 물고기나 소라, 새를 비롯해 사슴, 노루 등을 잡았지만, 아직은 불이 없어 생고기를 먹는 등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경인들이 남긴 최고의 유적은 석기로써, 1930년대 발견된 44종 10만여 점 유물 중에는 돌망치, 돌칼, 돌송곳, 돌도끼 등으로 이들은 이미 불을 사용했고, 안정된 생활의 흔적을 보여 준다. 그때가 대략 2만 년 전후 구석기 시대다.
하늘과 땅, 천지를 창조한 신이 盤古라면 사람을 만든 여신은 여와(女媧)다. 황하강변 흙과 물로 자신과 닮은 진흙상을 만들고 뱀 같은 자신의 꼬리 대신에 두 발을 만들어 두 손과 어울리게 하였다. 진흙상에 입김을 불어 넣자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므로 그를 ‘사람’이라고 불렀다. 갑골문에서 女는 두 손을 무릎에 모으고 다소곳이 꿇어앉은 모양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는 女의 가슴에 두 점을 찍은 모양으로 母다.
지금도 중국에는 모계사회가 있다고 하지만, 7,8천 년 전에는 전부가 모계사회였다. 시안의 반파(半坡)와 강채(姜寨)유적은 모계 대가족이 5채의 큰 집 주위에 작은 집들을 짓고, 중앙에 광장이 있는 모양인데, 집들은 모두 광장을 향해 출구를 내고 있으며 이런 형태는 어머니가 일족을 이끌고 생계를 책임지는 모계사회의 전형으로 적으로부터 방어하기도 쉬운 태세를 보여 준다.
盤古와 女媧가 세상을 창조하고, 결혼해 후손을 낳게 했다면, 사람들의 생활을 한 단계 도약시킨 신화인물은 복희(伏羲)씨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형제자매와 가까운 친척 간에도 결혼하였지만, 머지않아 근친사이 결혼이 가져온 폐해를 알아차렸고 복희씨는 가까운 친척 간에는 결혼을 금하는 규약을 만들었다. 1972년에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마왕퇴(馬王堆) 유적에서 후한 시대에 그려진 女媧곁에는 어김없이 복희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미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동물은 龍과 봉황(鳳凰)이다. 용은 뱀에서 근원하는데 한자의 뿌리인 갑골문에는 사(蛇)는 없고, 뱀 머리에 발인 止를 붙인 타(它)가 있다. 它는 그것이라는 의미고 ‘재앙’을 뜻하였다. 고대 초원지대에서 뱀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으므로 그것에 대한 공포가 컸다. 그러나 뱀은 점차 숭배의 대상이 되고,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로 승화시켰다. 상나라에서는 용을 토템으로 삼은 용족이 있었고, 하남성 복양(濮陽)의 6천 년 전 묘지에서는 시신 옆에 조개 껍질을 배열해 만든 용의 도안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용 형상으로 악어와 흡사하나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조형물이다.
갑골문에서 용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데, 용은 발이 짧은 파충류지만 여러 동물의 특징을 합한 신묘한 동물로 표현된다. 고대 농업국에서 용은 비를 관장한다고 믿어 특별히 존중받았고 商代의 용에 대한 신성한 관념이 주나라 때는 더욱 발전하였고 漢代에는 용이 왕실을 상징하는 동물로 격상되었다. 『사기』에 한고조 유방의 어머니가 용꿈을 꾼 후에 유방을 낳았다고 출생 신화에까지 전해지는 등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용은 강한 남성을 상징하며 동양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으며 수천 년에 걸쳐서 존중받고 있는 동물이다.
구석시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바뀐 1만 년 전부터는 돌을 갈아 쓰는 방법을 생각하고, 나무나 돌에 구멍을 뚫는 기술도 개발하였다. 질그릇을 빚었고, 7천 년 전에는 1000도가 넘는 陶窯에서 도기를 구울 정도로 불을 자유로이 활용했다. 불에 대한 고마움은 수인씨(遂人氏)에게 돌리고 찬목취화(鑽木取火-나무를 뚫고 불을 얻다)라는 成語까지 만들어 전하고 있다. 불 火처럼 象形을 가장 잘 나타내는 글자는 없을 것인데, 光은 꿇어앉은 사람이 머리에 불을 이고 있는 모양이다. 불의 활용도가 높아지자 음식의 조리 방법인 삶고, 굽고, 찌고, 볶고, 튀기는 등 실로 다양한 방법이 발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陶는 질그릇을 말한다. 이 글자는 상나라 때 손으로 빚었던 질그릇을 물레를 이용해 발과 손을 이용한 도기 제작을 형상한 것이다. 상나라 때 이미 도기 만드는 형상을 그려 넣었으나 주나라를 거쳐 진나라 때 소전(小篆)에는 부(阝)에 도(匋)를 음으로 한 형성자로 陶가 만들어진 것이다. 질그릇을 굽은 陶窯는 언덕처럼 불룩 솟은 阜를 취하고, 陶는 ‘사람이 항아리를 안고 있는 모양’이어서 음으로 삼은 것이다.
농사와 의약의 신 신농씨(神農氏)와 태양의 신, 염제(炎帝)는 황제의 이복형제라는 설이 있고, 어머니 성을 따랐던 그 시대에 황제는 희(姬)씨, 염제는 강(姜)씨였다. 姜은 羌族의 여인을 지칭하는데, 황제가 치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염제도 자연히 화하족에 편입되었고, 딸 셋을 비롯한 많은 후손을 두었다. 이에 강족은 분명 자신들은 ‘황제자손(皇帝子孫)’이라고 하고 ‘염황자손(炎皇子孫)’이라고 하기도 한다. 강족은 상나라를 가장 괴롭혔던 북방의 종족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이어가다가 지금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 가서 살고 있는 종족이다.
【제2부】문명을 개척하다
중국 최초 역사서 『사기』에는 중국 역사는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하고 삼황 중 우두머리가 황제(黃帝)라고 한다. 그는 우리와 인연이 깊은 치우(蚩尤)와 싸워 이기고 문자를 정리하고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음악을 다듬고 농사에 필요한 曆法을 만들고, 수레와 농기구는 물론 병기도 제작했다고 하는데, 중국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조상이다. 이에 반해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구려족(九黎族)출신으로 70∼80명 형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씨족의 결속력을 말하는 것일 터다. 신통력까지 지닌 그가 황제를 이기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까.
황제는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자신의 딸인 발(魃)을 내보냈다. 발은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머리털이 없어 붉은 땅을 상징하기도 했고, 청색 망토를 걸치고 나타나면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멎었으며 뜨거운 태양이 매섭게 비쳐 치우를 도우던 風伯과 雨師도 魂飛魄散하여 진영을 빠져나가 버렸다. 이틈에 황제가 공격하여 치우는 겁을 먹고 타격을 입었다. 황제는 사방의 신령과 제후들을 제압하고 최고의 수령에 등극했다. 황제가 그토록 용맹한 치우를 무찌른 임금으로 그려진 것이다.
『사기』에 ‘치우는 東夷의 君長’이라고 소개하고 치우의 활동시대는 기원전 2706년 황제시대와 유사하다. 황제를 높이다 보니 치우는 자연히 폭도로 폄하했고 후예인 동이족은 산산이 흩어져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苗族으로 남고, 한민족은 발상지인 송화강과 요하를 중심으로 만주에 웅거하다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로 남하하고, 황하유역으로도 진출하여 황하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이는 단군보다 오랜 한민족의 상고사를 천명할 수 있는 선결 조건이 된다. 요하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홍산문화, 소화연문화, 하가점문화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까지 유적으로 동이족이 황하로 내려갔음은 옥기 문화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황하 유역에 살던 漢族은 농경민족으로 남하한 기마민족 동이족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가 살고 있는 客家族이다. 이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순수 한족이라고 자부한다.
【제3부】신과 인간이 구분되다
『史記』「殷本紀」에는 간적(簡狄)이 ‘제비가 낳은 알을 삼키고 잉태해 상족의 시조 설(契)을 낳았다’고 했고, 시가집 『시경』「商頌」에는 상나라 후손들이 제사 지내면서 부른 〈玄鳥〉라는 노래가 담겨 있다.
하늘은 제비에게 분부하여(天命玄鳥)
세상에 내려가 상의 원조 설을 낳게하사(降而生商)
망망하게 드넓은 은땅에 살게 하셨네(宅殷土茫茫)
商土를 殷土라고 한 것은 승자의 기록이다. 이렇듯 ‘殷契說話’에서 주인공인 제곡(帝嚳)은 간적의 남편이며, 갑골문은 상나라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실록으로서, 그 첫째 조상이 제곡이고, 그다음이 바로 상나라를 건국한 아들 설이라 했다. 상나라 조상은 황제와 염제로 대표되는 화하족(華夏族)과 쌍벽을 이루던 동이족이다. 시조 계의 14대손인 成湯은 하의 마지막 왕 결(桀)을 멸하고, 박(亳)을 도읍으로 은나라, 즉 상나라를 건국했다. 성탕부터 마지막 주왕(紂王)까지 17세 554년간 유지된 나라가 바로 상나라이자 은나라다.
龍이 하늘, 父權, 위엄, 지존을 나타낸다면, 鳳은 땅, 어머니, 행복·평화를 나타낸다. 결국 龍鳳은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 철학적으로는 음양을 대변하는 말이다. 역대 제왕들은 국가 안위와 존귀함과 백성들의 번영을 바라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이상으로 龍과 鳳에 의탁한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을 위정자로서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행동했다.
『산해경』에서도 있었던 서왕모는 누구인가?
생긴 모양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불사약을 가진 어머니였다. 주 무왕의 손자이자 제8대 穆王은 50세 무렵 등극하여 55년을 통치해 장수대왕으로 기이한 행적을 많이 남겼다. 그가 피리를 불면 비가 그쳤고, 옥을 진흙 자르듯 벨 수 있는 玉刀와 夜光杯도 소지한 전설적 제왕인데, 그는 재위한 지 18년 되던 해 마차를 타고 곤륜산을 지날 때 많은 옥기와 귀중품을 가지고 서왕모를 찾았다. 다음날 서왕모는 瑤池에서 연회를 베풀고 목왕과 시문을 읊고 노래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는 王母 瑤池金母나 王母娘娘으로 불린다.
서왕모는 절세미인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가 가꾼 반도 복숭아가 3천년 만에 익으면 여러 신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나 때로는 늙었으나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온화하고 자상한 여신으로 변한다. 아무튼 서왕모는 삼신할미 같은 존재로 옥황상제보다 일찍 출현하여 인간과 소통했다. 지금도 북경의 蟠桃宮에서는 음력 3월 3일 蟠桃會를 개최하여 왕모로서 그녀를 기린고, 장족자치구인 청해성에서는 지금도 서왕모가 강융호씨족 수장이었다고 하고, 서왕모가 부락연맹의 수령이었다고 하여 역사인물에서 신으로 추앙되고 있기도 한다.
【제4부】성인의 시대가 도래하다
지금부터 4100년 전, 황하 중류에는 수많은 씨족이 연합하여 거대 부락연맹을 결성했다. 이 연맹의 수령이 요임금이라 불리는 帝堯다. 堯임금과 舜임금 시대를 흔히 태평성대라고 하고, 이때 덕치가 만고에 칭송되는데 그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요임금은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매우 어려웠다. 거친 삼배 옷을 입고 추운 겨울에 겨우 동물 가죽을 걸치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임금이 된 후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인품은 많은 부락민들을 단결시켜 거대한 연맹을 결합시켰다. 사실 그는 모든 정사를 직접하지 않고 대신들에게 맡겼는데, 그의 인품이 알려지자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나랏일을 같이 한 인물로는 설, 후직, 수, 기, 도고, 곤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각 분야에 배치해 전담하게 했다. 설(契)은 군사를 지휘하고, 후직(后稷)은 농사를, 수(垂)는 건설을, 기(夔)는 음악을, 고도(皐陶)는 판결을 맡겼다. 황제족의 후예인 곤(鯤)은 치수를 담당하게 했으며, 통치 후기에는 순이 요임금을 보좌해 곤의 일을 대신했다. 堯라고 하는 이름은 그가 두 개의 언덕이 솟은 황토 고원지대에서 태어났으므로 붙인 것으로 두 개 언덕이 차츰 3개로 바뀌어 堯가 된 것이다. 고도가 한 판결은 해치라는 동물을 이용하여 판결했는데, 현재 시점에서 보면 터무니 없지만 지금도 법관들이 쓰는 모자를 ‘해치관(獬豸冠)’이라 부른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임금 시대를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이에 노심초사하던 요임금은 양성에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현명함이 이미 소문이 나 있었으므로 그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싶어 사자를 시켜 뜻을 전했다. 하지만 허유는 一言之下에 거절하고 기산(箕山)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살았다. 이에 요가 그러면 九州의 수장이라도 맡아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허유는 물가로 달려가 귀가 더럽혀졌다며 자신의 귀를 물로 씻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소부(巢父)라는 이가 물을 먹이려고 소를 끌고 가다가 허유가 하는 짓을 보고 의아해 연유를 물었다. 허유가 대답하자 소부가 말했다.
“노형, 그만두게나! 그대가 처신을 잘했다면 누가 괴롭히겠나. 숨어 산다고 소문을 내, 명예를 좇았으니 이 꼴로 귀를 씻는 게 아닌가, 귀 씻은 물을 내 소에게 먹일 수가 없네.”하고는 위로 올라 가 소에게 물을 먹였다. ‘허유와 소부’의 이 이야기는 많은 후세인들에게 회자 된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堯에게는 丹朱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언제나 비행을 저지르고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요는 단주를 추방시켰지만, 반성의 기미 없이 이웃 부락민을 선동해 아버지께 반기를 들었다. 결국 아들을 죽이고 보좌관이며 사위인 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는 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舜은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순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새장가를 들어 아들 象을 낳았다. 그러자 계모와 배다른 동생 象이 舜을 구박했다. 견디다 못한 순은 오두막을 짓고 따로 나가 살았다. 그럼에도 舜은 부모에 대한 孝를 다하고 동생을 사랑했다. 孝라는 글자는 ‘어린 아들이 노인을 부축하는 모양’이다.
그전에 堯가 나이 들어 기력이 약해지자, 소문이 자자했던 舜을 불러 인품을 알아보기 위해 蛾皇과 女英이라는 두 딸을 舜에게 시집보냈다. 순은 왕녀를 아내로 맞았지만, 부모는 즐거워하지 않고 동생 象은 질투심에 해칠 궁리만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舜의 부모와 象은 크게 뉘우치고 마음을 돌려 화목하게 지냈다. 순은 순전히 자신의 덕성으로 요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순이 다스리던 시대는 상나라의 시조가 된 契(설), 주나라 시조가 된 后稷(후직) 등이 보좌하였고, 象도 제후가 되었다. 순에게는 尙均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현명하지 못해 그도 요임금처럼 능력이 부족한 아들 대신, 치수에 이름을 떨쳤던 禹(大禹)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화가 용산문화로 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며 약 5천년 전에서 2천년 간에 걸쳐 꽃피웠다. 1930년 산동성 용산현에서 발견된 龍山文化는 유사한 유적이 중국 전국에 200여 곳에 펼쳐져 있었다. 이는 당시에 중국 전역에 문화가 비슷하게 발전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시대를 대표한 기물로는 鼎·鬲(정·격=솥), 罐(관=항아리), 盆(넓은 그릇), 杯(배=잔), 옥칼, 옥비녀, 활, 화살 등이고, 도기의 색깔은 검은색으로 이것을 ‘흑도문화(黑陶文化)’라고 하기도 한다. 순임금이 다스리던 시대가 용산문화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고, 용산문화 끝자락에 夏나라가 이어졌다.
요임금은 효성이 지극한 순에게, 순은 치수를 잘한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이 둘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타성의 현자에게 왕위를 전하는 선양(禪讓)을 본보기로 보였다. 이로써 공의로운 일을 했다는 뜻으로 대공무사(大公無私)라고 칭송되고 있으며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표적 사례로 전해진다.
【제5부】신화시대의 끝자락에 서다
禹는 아버지 鯤의 뜻을 이어받아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부락의 수령이 되기에 이르렀고 양위에 대한 연맹회의의 찬성도 얻어냈다. ‘帝舜薦禹于天 爲嗣(제순천우우천 위사-순이 우를 후계자로 삼음을 천하에 알렸다)’라고 한 기록은 『사기』에도 있다. 순이 우를 부락연맹의 수령으로 임명했지만, 禹는 여러 씨족을 정벌하고 통일하는데 20여 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塗山에서의 회합으로 제위에 오른 우는 하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순행에 나섰다. 이미 방백들이 공납과 충성을 맹세했지만, 반대세력이 생겼으므로 우는 이들을 제거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우가 세운 夏나라는 모계사회를 끝내고, 부계사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시대였는데, 470년간 영위하다가 기원전 1600년 마지막 桀왕 때 商지방의 成湯에 의해 패망했다. 夏의 옛터는 하남성 언사현 二里頭로, 유적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층은 용산문화 위층은 商대 문화 사이에 이두리 유적이 끼어있다. 夏라는 글자는 큰 얼굴에 두 팔과 발을 그린 사람 모양으로 기우제에서 제사장이 춤추는 형상이다. 제사 장면이며 크다는 뜻이었으나, 제사가 주로 여름에 행해져 ‘여름’이라는 뜻으로 가차되었다. 하나라에 대하여는 문자 기록이 없으나 나라의 존재와 존망을 증명하는 유적들은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興亡盛衰란 흔히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이듯이 하나라는 14대왕 孔甲이 두 동생에 이어 제위에 오르자 이것은 귀신의 덕이라며 귀신신봉이 극에 달했다. 孔甲이 죽고 아들 皐(고)가 뒤를 이었으나, 3년 만에 병사하고, 공갑의 손자 發(발)이 제위에 올랐다. 이때부터는 몇몇 제후들이 조공을 바치지도 않았다. 황하를 중심으로 사방 1만여 리를 관할했으나, 桀왕 때는 단지 몇몇 방국과 제후들만 남아 있었다. 桀은 소국인 유시씨(有施氏)를 완전히 정복하고자 서둘렀다. 이에 유시씨는 걸이 여색을 탐한다는 것을 알고 여동생 매휘(妹喜)를 걸에게 바쳤다. 흡족해한 걸은 백성의 재산을 갈취해 연못에 술을 채우고, 오색 배를 띄우고 즐겼다. 이때에도 충신이 있어 말렸지만 듣지 않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33년간 통치하던 桀은 역사상 최초의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夏·尙의 역사를 보면 이때도 분명히 술은 있었다. 술은 당연히 제사에 올리고 손님을 접대하는 데 썼을 것이지만, 걸왕의 주지육림 외에 문헌상 술은 한나라 때 의적(儀狄)이 술 만드는 법을 알렸다고 하고, 민간에서는 두강(杜康)을 酒神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5, 6천 년 전에 이미 술을 빚은 대형 독과 항아리가 있었다는 것은 이때부터 술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77년 하북성 평산현 옛 중산(中山)국 왕릉에서 2만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중산국은 춘추시대 말에서 전국시대 초까지 300여 년간 지속된 나라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청동단호(靑銅丹壺)와 편호(扁壺)에 술이 가득 들어 있었다. 실로 2천여 년간 숙성된 경이로운 술이 아닐 수 없었다. 술은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접해 있어서 새해를 맞으면 ‘年酒’를 마시고, 결혼식에는 ‘喜酒’자녀가 태어나면 ‘滿月酒’나 백일주를 마셨을 뿐 아니라 어른들의 장수를 빌며 ‘壽酒’를 마셨다. 현대사회에서도 술을 마실 이유는 넘쳐난다.
술을 酒라고 하는데, 닭유(酉)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酉는 원래 물이나 술을 담던 목이 잘록한 항아리를 말했다. 이것이 간지에서 열 번째로 동물과 배합하여 닭과 결합되면서 닭酉가 된 것이다. 제사에 올린 酉가 간지로 쓰이면서, 酉에 水를 붙여 술 酒가 된 것이다. 아무튼 갑골문으로 시작한 책 읽기를 통해 3300년 전 尙代의 왕실 계보는 물론 천문, 역법, 기상, 농업, 상업, 건축, 전쟁과 질병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싶다.
중간에 적지 못한 것 중에서, 복희씨와 염제씨 등의 이름에 씨를 붙인 것은 공자, 맹자처럼 존칭의 의미로 쓰인 것인데, 우리도 이름 뒤에 ‘씨’를 붙이면 존경의 의미가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우리에게는 ‘님’이란 고운 존칭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많은 전설과 신화 이야기를 빼먹은 것 같기도 한데, 마지막으로 구정(九鼎)이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줄일까 한다.
禹가 夏나라 왕위에 오른 후 천하를 아홉 개로 나누었으므로 九州라는 행정구역이 생겼다. 우는 일찍이 황제가 솥을 주조했다는 荊州山 자락에서 아홉 개의 솥(九鼎)을 만들게 했고, 이것은 하나라의 상징이기도 하고 제사에 썼던 禮器다. 鼎의 몸체에는 각지의 특징과 특산물은 물론 괴물과 귀신을 도안으로 새겨져 있어서 각주를 대표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를 궁궐문 앞에 진열하여 백성이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재앙을 막는 역할을 하게도 했다.
夏나라가 망하자 尙나라는 九鼎을 옮겨갔고, 상나라를 정복한 周나라(BC 1046∼ BC 221)는 6만의 병사로 구정을 끌고 갔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西周의 세력이 약해지자 제후국들이 수시로 구정을 넘보았는데, BC 606년 楚 莊王이 구정을 빼앗아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속내를 보였으나, 주나라 대부 왕손만(王孫滿)이 “구정보다 중요한 것은 덕이다”라고 그를 설득해 마음을 돌리게 했다고도 한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구정은 秦나라로 옮겨갔는데, 그만 사강(泗江)에 빠뜨렸고 진시황이 이를 찾고자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漢나라 때도 그것을 찾지 못해 九鼎의 고사를 石板畵로 제작하여 현재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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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