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과 고종황제를 찾아서
2020년 4월 22일 대원군 묘소와 고종황제가 잠들어 있다는 홍릉을 답사키로 하고 나들이길에 나섰다.
화창한 봄날이 연일 계속되더니,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급강하하는 이변이 있었는가 하면,본래 출발 예정은 넷이서 동행키로 탐방계획을 세웠는데,김명렬박사께서 긴급한 업무관계로 동행이 무산되어지기도 했고.....
상봉역에서 세사람이 만나, 춘천행 지하철로 환승하여 마석역에서 하차해야하는데,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아차하는 순간 하차를 못하여 다음 정거역 대성리역에 하차하는 실수가 있기도 했다.
그런 덕분(?)에 3,40분간 홀라당 시간을 까먹고,마석역에 되돌아와 어느 어른께 대원군묘소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묘소가 지금은 없다고 하질 않는가.
이미 다른곳으로 이장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지만,설마하며 헛탕칠 각오를 하면서 안내하는 윤 회장을 따라, 산길로 30여분간 올라가니 묘소는 멀쩡하게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이날 찾은 대원군 묘소에는 이씨 후손이라며 경찰출신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고,공교롭게도 이날은 대원군이 탄생한지 만 200주년이 되는 그런해이기에 더욱 뜻깊은 답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도 되었다.
마석역에 도착하여
남양주 8경이 소개되는 관광 안내도
대원군 묘소를 찾아가는 길
분홍빛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있었고.....
국태공 원소
대원군 묘소를 국태공 원소라 이름하였다.
대원군은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조씨(大王大妃趙氏 : 翼宗妃, 憲宗의 生母)의 명에 따라 흥선군 하응(興宣君昰應)의 2남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자, 하응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하여졌다.
조선시대 대원군에 봉해진 사람은 모두 4인이지만, 흥선대원군을 제외한 3인은 그들이 죽은 뒤 추존되었고, 오직 흥선대원군만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표면상으로는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섭정(攝政)으로, 모든 정책의 결정권을 부여받아 내외의 격변하는 시기에 10년 동안 혁신정책을 폈다.
대원군이란 이름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왕족 가문 중에서 임금을 세우는데,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봉하던 작위를 가리키며, 이를 다른 말로는 국태공(國太公)이라고 한다.
바로 인근에 또 다른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대원군 직계 후손들이 아닐까 생각되었는데,여기에는 위패만 모셔져 있었고....
정여사께서 일부러 찰밥에다 멋진 오찬을 준비해 왔다.
잔디밭에 앉아서 푸짐하게 준비한 오찬을 즐기고....
하산하는 길에 복사꽃이 아름다워....
다시 홍릉을 가기 위해 마석역에서 금곡역으로 이동하였고....
조선 왕릉 홍릉과 유릉을 찾아
이곳에는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고종과 명성황후가 함께 묻힌 홍릉과, 그의 아들인 순종과 두명의 황후가 합장된 유릉이 있는가하면,의민황태자(영친왕)의 영원(英園)이 있기도 하고,의민황태자의 아들인 황세손 이 구의 회인원,그리고 고종황제와 귀빈 양씨의 딸로 태어났던 덕혜옹주의 묘가 있어 고종황제의 일가의 묘역을 이루고 있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영친왕인 의민 황태자는 고종황제와 순현왕귀비 엄씨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그해 12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에서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는가하면,1920년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 마사코와 정략 혼인을 한후 첫아들 이진은 덕수궁에서 태어나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둘째아들 이 구를 두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고 있는데,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원이 13기이며,묘가 64기라고 한다.
참고로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그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과 동등하게 묘라고 칭한다.
이곳 홍유릉에서는 릉과 원, 그리고 덕혜옹주의 묘까지 조선시대 왕실 무덤의 전체적인 양상을 돌아볼수 있는 곳이어서 더욱 그 의미가 크다할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홍릉과 유릉은 조선시대 유일한 황제 묘역이기에, 여타의 능과는 구별되는 그런 특별한 묘역이기도 하다.
유 릉
조선의 마지막 능으로 순종황제 (1874~1926)와 원비 순명효 황후 민씨(1872~1904), 계비 순정효 황후 윤씨(1894~1966)
의 삼 합장릉이다.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순명효황후 민씨 사망시엔 양주 용마산(현 서울 광진구 능동 일대)에 안장했으나 순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 근처로 이전하여 함께 안장하게 되었으며, 그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사망하자 3명의 부부가
함께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비각에는 순정황제와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의 동봉 삼실릉임을 알리는 비가 있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순종의
재위 기간은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에 종언을 구하는 비사(悲史)와 민족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저항의 통사(痛史)의
시기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는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왕"으로 강등된 순종은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승하했다.
순종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이 일제에 항거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순명효황후는 1897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 즉위전에 승하하여 지금의 능동 어린이공원에 모셔졌다가 순종 승하시
천장하여 함께 모셔졌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 계비가 되었다가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나라를 잃은 후 일제의 침탈행위,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던 순정효황후는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슬픔을 달래다가
1966년에 72세로 승하하여 유릉에 합장되기에 이르렀다
유릉은 조선왕릉중 유일한 동봉 삼실 합장릉이기도 하다.
동강 할미꽃
홍릉앞에 조성된 수련 연못
홍 릉
홍릉은 고종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1851~1895)의 합장릉이다
고종은 개똥이라 불렸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를 하게되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의 지명에 따라, 12살 어린나이로 졸지에 왕위에 올랐다.
고종은 조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겼고,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또한 고종은 1866년 명성황후를 맞아들였는데 민씨의 척족들은 강력한 쇄국정치를 폈던 대원군에 맞서 대외 개방정책을 취했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사이가 악화되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이 일어나고,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그 와중에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민비를 폐서인 시켰다가, 하루 만에 서인에서 빈의 칭호를 내리고, 그 해 다시 황후로 복위 시켜, 숭릉
오른쪽에 숙릉이란 능호를 내려 국장절차를 진행하다가, 김 홍집 내각이 실각함에 따라 5개월만에 중단되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황제가 되었다.
이때 민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고 능호를 홍릉이라고 다시 정하였으며,2년만에 국장을 마무리 하였다.
이곳이 오늘날의 청량리 홍릉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후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1919년 승하하자,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에 고종의 능을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었던 민비의 능도 옮겨와 합장릉으로 하게 되었단다
홍릉은 유릉과 더불어 석물과 침전 등을 황제릉의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능을 만들 때 명나라를 세운 태조(주원장朱元璋)의
능인 효능을 모방하여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덕혜옹주 묘역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필자는 이날 홍릉을 찾은게 초행인줄 알았는데,여길 와보니,예전에 답사했던 곳이란걸 알게되었다.
이 호랑이 작품은 윤 회장께서 소장하던 귀한 소장품인데 필자에게 선물한 것이다.
윤 회장은 홍릉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별내에 있는 자가에 들려 이 작품과 은행 한자루 헛개나무 잎들을 선물로 가져왔다.
한편 우리 일행은 충무로에 있는 김 명렬박사께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여 닭곰탕집을 찾았다.
비록 여행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며 대화의 시간을 가진후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늦게야 해산했다.
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