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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잘못으로 국력을 상실하야 애 꿎은 이땅의 여인들이 수난을 당하니
정묘/ 병자호란의 환향녀
인조는 큰아버지 광해군의 왕위를 찬탈 하였으나 정치나,특히 외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왕이 된 임금으로 서인들이 하자는 대로만 할 수 밖에 없었고 서인들이 권력을 잡고자 반역을 한 명분은 광해군이 배은 망덕 하게도 명나라와 손을 끊고 오랑캐 인 후금(청)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니
인조 반정 후에도 계속 다 망해가는 명나라를 바뜰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평안도를 지키던 이괄이 자신의 자존심 문제로 난을 일으켜 국경 방비가 소홀해졌고, 이는 곧 후금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정묘호란 퇴위 시키고 친명파들이 정권을 쥔데 대한 불만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인조가 강화도로 재빨리 피난을 가자 후금은 사신을 보내 명나라의 장수를 자신들에게 보내고 명나라를 치는데 군사를 보태어 명과 손을 끊은것을 실증으로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조선의 조정에서는 후금이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의 약속을 하겠다는 어정쩡한 답을 보냈다. 그러나 명은 사실상 망하는 나라였으니 명나라를 적대시 하고 말것도 없었고 아직까지 자기네 후금을 오랑캐 취급하던 조선 조정에서는 오랑캐라던 자신들을 형제국으로 한다니 후금은 물러갔다. 이를 정묘호란 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지나족인 명나라만 자기네 상국이고 후금은 여전한 오랑캐 취급을 하여 후금의 사신이 오면 오랑캐는 사대문 안에 들어 오게 할수도 없다며 여진히 괄시 하니 후금이 그냥있를리 없다.
정묘 호란이 있은뒤 6년 후인 1636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이라고 바꾼뒤 화가 머리끝 까지 난 청은 조선에게 이번에는 형제국이 아니라 아예 청의 신하가 되고, 공물과 군사까지 바치라고 요구해왔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오랑캐 한테는 형제국도 할 수 없는데 신하국이란 말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즉 조선은 오직 지나족 명나라의 신하국일 뿐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1636년 12월 1일, 12만 대군을 일으켜 압록강을 ,건너 개성에13일도착 은평구 갈현동에14일 당도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조정은 곧 왕족 등을 강화도에 먼저 피신시켰다. 그리고 인조와 신하들도 곧 그 뒤를 따르려 했는데, 어느 새 청나라 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버렸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피신중. 살을 에이는듯한 추위와 얼마 되지 않는 양곡으로 더이상 버틸수 없는 인조는 지금의 서울송파에 서 항복을 했다.
그리고 전쟁사에서 참을 수 없는 굴욕인 아홉번 엎드리고 세번 절하는 구곡삼배를 하며 청나라의 황제에게 무릅을 끓었고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삼전도 비 이다.
이땅 여인들의 수난사. 還鄕女(화냥년) 화냥년은 '환향녀'에서 나온 말이고, 이는 우리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일어났던 이 땅 여인들의 비극이다. 사내들이 서로 권력 다툼이나 하고 양반 체면만 따지다가 국가를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국권을 잃으면서 생긴 이 땅 여인들의 비극이다.
먼저는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契丹族)을 평정할 때 몽골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로 관계를 갖게 된 이후, 몽골은 고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고 과다한 공물(貢物)을 요구하여 왔는데, 이 공물 중에는 많은 여자도 달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에 분개한 고려에서는 앞뒤 계산도 해보지 않고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를 암살해버렸다.이 몽골 사신이 피살되자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고려 고종 18년부터 30여 년간 몽골의 고려 침입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니 몽골군이 처 들어올 때마다 고려 여인들은 수 없이 수난을 당했다. 고려에서는 군사적으로 당할 수 없으니 차라리 화평 정책을 썼다. 수많은 공물(貢物)을 바치기로 했는데
이 물목에는 여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몽골군의 위안부가 되었다. 결국 고려는 몽골의 여자나 조달하는 부마국(駙馬國)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몽골 군은 조약 이외에도 수많은 고려 여인을 더 요구했다.
고려에서는 할 수 없이 결혼도감(結婚都監)과 과부 처녀를 징발하는 과부처녀 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 등 특별 관청을 설치하여 여자를 징발하였고,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초기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로 보낸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는 50회 이상에 이르렀다.
몽골족을 야만족으로 보는 고려 여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녀가 부족지자 역적의 부인이나 첩, 그리고 승려의 애인이나 딸까지 충당하는 일도 있었고, 그래도 여자가 모자라자 충렬왕 때는 온 나라 안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처녀등록제를 실시하였다.
공녀가 부족하자 공녀의 나이를 내려 13~15세까지의 어린 소녀까지도 대상으로 징발하였으므로, 이 연령의 소녀를 가진 집안에서는 금혼령이 내리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써 10세가 되면 혼인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과 데릴사위 등의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고려 때 이 공녀들은 어쩌다 궁중에 들어가 시녀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 가장 출세를 한 사람이 바로 기 황후이고 그는 결국 원나라와 고려까지도 망치게
지나족인 명(明)나라도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예쁜 소녀들을 골라 바치라고 요구했고,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상국이니 이를 바쳐야만 했으며, 이들도 어느 정도 늙으면 돌아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고향에 돌아온 여자란 뜻의 '환향녀(還鄕女)'라는 본격적인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조 인조, 병자호란 때부터였다 . 즉, 청나라는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인데, 이 만주인은 고구려 또는 발해의 유민들이 많았고, 이들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족속이었다. 이들은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화북(華北)으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 한민족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현지인을 가르쳐가며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다.
지나족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라의 태조이다.
이 청나라가 세워지기 전 만주족들은 사실 고구려나 발해의 유민들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아기 엉덩이에 푸른 점이 있는 같은 핏줄이니, 조선이 들어와 합병해 통치해주길 바랐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할 때도 수없이 신숙주, 성삼문을 만주로 보내 우리 뿌리말을 찾았던 그 만주인들이다. 이때 조선에서 그들 요구대로 말뚝 하나만 박았으면 지금 만주 땅은 우리땅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그 잘난 선비들은 상전국인 지나족 명나라가 그들을 오랑캐 야인으로 보고 있으니 우리도 그들이 비록 발해 유민이라 하더라도 오랑캐로 봐야 한다며 받아주지 않자, 그들은 조선의 국경을 침범해와 노략질을 해가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초기에 그들에게 회유 정책을 쓰려 했다가 당정의 반대에 휘말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삭탈관직까지 되었으며, 원균 같은 이는 그 야인들 목을 수 없이 많이 자른 것을 큰 전공으로 자랑 삼았다.
선조의 임진왜란이 끝이 난 다음 광해군 당시에는 명나라는 다 망해가고 있었고, 청나라의 위세는 날로 떨쳐갔다. 청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조선과 형제국이 될 것을 원했다.
상전 국가가 아닌 형제 국가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우리를 도와준 것보다 피해를 준 것이 더 많았고, 또 국가 안보를 위해서도 다 망해가는 명나라를 더 이상 상전 국가로 섬길 필요를 느끼지 않아, 지나족인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차라리 청 나라와 형제국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신하들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주었다는 의리를 핑계로 광해군을 배은망덕한 자라 하며 몰아내고 인조를 세워 자기네 마음대로 정권을 휘둘렀고, 청나라 사신이 오자 "오랑캐 주제에 어딜 오는냐"고 만나주지도 않은 채 쫓아버렸다. 정말로 호랑이 앞에 쥐새끼가 까분 격이었다.
결국 청나라 군사들은 물밀듯이 처들어왔다. 그리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버틸 대로 버티었으나 결국 그 수 많은 어린 아이들과 백성들이 그 혹독한 추위에 얼어죽고 굶어죽자, 인조는 한강 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으면서 인조는 청태종의 요청에 따라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대는(三拜九叩頭禮) 항복의 수욕(受辱)을 겪었다. 즉, 그렇게 앞뒤 계산도 없이 양반의 예의와 의리와 체면만 따지던 신하들이 자기네 백성을 다 죽이고 자기네 임금을 이렇게 처참하게 만들었다.
이 청나라 군사들도 군율이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남의 나라에 들어가 함부로 부녀자 강간 등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처들어온 목적이 그 양반입네 하고 의리만 따지는 양반들을 골탕먹이는 일이었기 때문에 군졸에 강간령을 내렸다. 특히 그 양반들, 즉 사대부집 여자는 처녀고 부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강간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하룻밤만 자고 나면 남산은 하얗게 되었다. 모두 목 매달아 죽은 여인들이다. 즉, 강간당한 여자들은 자살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숨어 나오지 않으면 남편이나 아이들을 마당에다 끌어다놓고 목을 자르려 한다.
이렇게 되니 숨어 있던 아내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강간을 당하면 남편은 아내의 자살은 당연한 걸로 알고, 나중에 열녀문을 신청하여 명문가임을 자랑하고 첩을 얻어 잘 먹고 잘 산다. 이 얼마나 양반들의 파렴치한 짓이며 이 얼마나 이땅 여인들의 비극인가?
사태가 이렇게 되자 결국 타협을 한다. 즉, 조선 에서 공물등 11가지 여기에 처녀 50만 명을 청나라 군사에게 바치기로 한 것이 포함되었다.. 그저 만만한게 여자다.
물론 처녀들은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공출을 했다. 그들은 집에 남아있을 엄마, 언니의 정조 보전을 위해서 울며 울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의 성적 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역시 어느 정도 늙으면 새 소녀들과 교체되어 그 일부가 돌아왔다. 그들이 고향에 돌아왔다 하여 '환향녀(還鄕女)'라 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정조를 지킨 여자들은 그들을 환향년이라고 욕을 하며 괄시를 했다. 혹시나 그 정조가 없는 더러운 년들에게 자기 남편이 갈까 걱정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살아야 한다. 그들 역시 동네 밖에서 술과 몸을 팔아가며 생계를 이 갔다. 그 뒤 우리말에 이 사내 저 사내를 상대하는 여자를 화냥년이라 했고 , 서방 질하는 것을 화냥질 이라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선비들은 밥만 먹으면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하는 것이 일이었고, 이조 말년 고종 때는 시아비와 며느리가 역시 권력 다툼만 하다가 일본에게 당했다.
그래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또 수많은 이 땅의 처녀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우리는 지금복지에 우선 국력 "전투력" 에 투자를 하여야한다 2015,9.1 청호 한기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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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서 작일 일본 아사히 신문이 폄하한
명성황후 민씨(1851~1895) 에 대하여 약기 하여보면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1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종=헌종=철종 3대
60년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왈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청호 한기수
민씨와 대원군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에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내제하고 있었어요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 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황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결탁하여 최익현이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내었다
@청호 한기수
1873년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
창덕궁 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폐쇄되고 그는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였다.
대원군 실각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랑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청호 한기수
그녀는 재빨리 궁을 탈출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서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 하기도한다
.
하지만 이때에도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찿았어요.
@청호 한기수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새태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등
유연성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상태가 되었을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관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청호 한기수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독일,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수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낭인들이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하게된다
@청호 한기수
지금 그 시해장소는
경복궁 남단 세종문화회관에서
북단 건청궁까지는
속보로 10분 정도 걸린다.
120년 전 조선에 있던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치가
왕비 시해 현장을
그린 경복궁 지도의 순로는
1895년 10월8일 새벽
광화문을 돌파한 일본군 수비대 주력은
왕비가 머물던 건청궁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달렸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의 두 차례 저항은 쉽게 무너졌다
@청호 한기수
일부는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다
경복궁 난입에서
시해까지 몇시간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를 끌어들인 왕비의
외교정책으로 시국은 살벌하였다
일본이
왕비를 살해할 것이란 소문이 장안에 떠돌았다
그런데도
경비는 허술하였고
왕비는 서양인 몇 명을 곁에두면
일본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날 서양인은
그 참상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청호 한기수
건청궁 지도에
영사 우치다는 붉은 글씨로 1,2,3 숫자를 섰다
인근 언덕의
남쪽엔 4자를 적었다
그가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1은 왕비를 습격한 건물인 장안당,
2는 1지점서
왕비를 끌고 가 살해한 장안당 뒷마당,
3은 왕비의
시신을 옮긴 옥호루,
4는 왕비의
시신을 불태운 鹿山 이다
당시 건청궁에는
고종과 훗날 순종이 된 왕세자 와
세자빈도 있었다,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해 고종은 옷이 찢켰고
왕세자는
상투가 잡혔고
왕세자비는 왕비를 찾아내라는
일본군의 칼끝 위렵을 받았다,
왕비앞에서
일본군을 막은 충신 이경직은 두 팔이 잘려 죽었다
@청호 한기수
왕비는
궁녀들과 함께 凶刀 에 쓰러 졌다
건청궁은
언제나 보아도 소박한곳이다
넓은 경복궁에서
왜 구태여 이런곳에 살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사건 장소인
장안당과 옥호루는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모든 일이 일어났다
왕과 왕세자는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을까.
비명을
듣지도 못했을까
건청궁에 가보면
일부러 눈을 감고 귀를 막지않는 이상
보거나
들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까
결국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 전략한 치욕 때문 이었을까
고종과 순종은
그날 보고 들은 일을 말하지 않았다.
@청호 한기수
당시
명성왕후의 외교정책은
청일전쟁 승리로 구축한
일본의 한반도 패권을 일거에 흔들어 놓은 모험이었다
한성신문 사장으로
시해에 가담한 아다치 겐조의 훗날 기록이
당시
일본의 속내를 드러낸다
조선놈들이
머리를 불쑥 쳐들고 와서 일본을 경멸했다
아다치와 함께
시해에 가담한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일본 제국이
완전히 반도에서 배척당하는데 일대 위기였다 고 기록했다.
대한의 자손으로서 대대 손손 잊지않고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야할 역사의 교훈입니다.
청호 선생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건강과함께 즐거운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
원부님 다녀 가셨군요
저는 앉으나 서나 걷거나 강병부국 이람니다
좋은계절
기쁨.건강.감사의 마음을 드림니다.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외교 노선 전환과 함께
당시 조선반도에 반드시 필료했던 개혁까지
일본의 요구였다는
이유로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읽으면
청일전쟁 승리와 함께 야수처럼
조선을 농단한
폭주를 그 외 무슨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까 고민하게 된다
왕비의 노선 전환과
시해 사건은 아관파천으로 연결되면서
조선에서
일본의 기세를 꺾였다
그 후 일본이
패권을 되 찿는데엔 러일전쟁까지 10년이 걸렸다
여기서 청호는
왕비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인색해도
당시 왕비의 정책 자체는
국권 방어를 위한 고육책으로 평가 받아야 하지않을까.
왕비가
죽음으로 남긴 긴 시간을
살아남은 자들이
강병부국과 국권수호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청호 한기수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년 열병식에 참석한다
천안문 망루에
중국 주석과 함께 선 박대통령의 모습은
통일외교를 상징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120년전
국권수호를 위하여 향한 열망만큼
지금 통일을 원하는
국민은 박수를 칠 것이다
지금 이순간
천안문 망루의 우리 박근혜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내며
대담한 통일 외교의 성공을
거듭~~~거듭 청호는 기원한다.
@청호 한기수
하지만
일본 우익은 분노하고 있지않는가
조선 왕비를
향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분노가
대상과 방법을
바꿔 분출할 것이다
12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그 속성은
이미 언론 간판을단
인터넷 과 산케이신문의 배설구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지 않는가...
알고보니 신임기자도 아니고
아주 고참 기자가 마음먹고 쓴 기사이었다.
조선 놈들이
머리를 불쑥 쳐들고 와서 일본을 경멸 했다 는
아치다의 분노가
그대로 지금 그들의 속내라고 생각한다 참 독한 왜놈들 ...
@청호 한기수
일본이 남긴 일명
스나가 노트 는 명성왕후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한다
."왕비는 위를 향한채 쓰러졌고
후우,후우,하며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 (시해범)들은
사진과 왕비의 얼굴을 대조해보고 있었다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왕비는
얼마간 살아 있었다
희미한
숨을 이어가다 가
鹿山의 화염속에
절명을 하였다는 기록이다
자신의
나라가 행한 일임에도
영사 우치다는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가 없는 흉악"이라고 기록으로 남겼지않는가.
걷다르고
속다른 왜놈들...
@청호 한기수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략시키도록 강요를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이 되었다
@청호 한기수
민비가
출생 하였던 집터는
경기도 장호원에서 중부내륙 으로 진입하는
개천 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숲속에 보이는
지금의 성당이 바로 그 곳이며
행정구역은 충청도 음성이고 일명 충청도 장호원 이하고 한다.
민비가
최후 를 맞은 곳은 건청궁 이라
왕비를 끌고 가 살해한 장안당 뒷마당
왕비의 시신을 불태운 녹산의 그 곳을 여러차례 답사하며
지인들과
사적 자료를 종합 이를 약기 하여 보았으며
행여 질문사항이 있으시면
청호는 정성것 답변 드리겠습니다.
다시한번
강병부국...................................................................................................을
청호 , 참장하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글을 올려주다니 , 잘 보아는데 뭐라 표현 해야하나 .....모두가 볼것이오 ,
계룡님 !
강병부국을 ...
항상 감사의 마음을 ...
편안한 밤이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