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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아래본문 참고자료=애 꿎은이땅 여인들 수난사~還鄕女(환향녀=화냥년)
청호 한기수 추천 0 조회 116 15.09.01 23:07 댓글 2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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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9.02 22:47

    첫댓글
    여기서 작일 일본 아사히 신문이 폄하한
    명성황후 민씨(1851~1895) 에 대하여 약기 하여보면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1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 작성자 15.09.03 10:26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종=헌종=철종 3대
    60년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왈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 작성자 15.09.03 10:28

    @청호 한기수


    민씨와 대원군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에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내제하고 있었어요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 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황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결탁하여 최익현이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내었다

  • 작성자 15.09.03 13:04

    @청호 한기수


    1873년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
    창덕궁 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폐쇄되고 그는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였다.

    대원군 실각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랑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 작성자 15.09.02 23:30

    @청호 한기수

    그녀는 재빨리 궁을 탈출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서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 하기도한다
    .
    하지만 이때에도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찿았어요.

  • 작성자 15.09.03 13:06

    @청호 한기수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새태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등

    유연성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상태가 되었을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관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 작성자 15.09.02 23:55

    @청호 한기수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독일,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수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낭인들이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하게된다

  • 작성자 15.09.03 13:08

    @청호 한기수


    지금 그 시해장소는
    경복궁 남단 세종문화회관에서

    북단 건청궁까지는
    속보로 10분 정도 걸린다.

    120년 전 조선에 있던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치가

    왕비 시해 현장을
    그린 경복궁 지도의 순로는

    1895년 10월8일 새벽
    광화문을 돌파한 일본군 수비대 주력은

    왕비가 머물던 건청궁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달렸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의 두 차례 저항은 쉽게 무너졌다

  • 작성자 15.09.03 00:15

    @청호 한기수

    일부는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다

    경복궁 난입에서
    시해까지 몇시간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를 끌어들인 왕비의
    외교정책으로 시국은 살벌하였다

    일본이
    왕비를 살해할 것이란 소문이 장안에 떠돌았다

    그런데도
    경비는 허술하였고

    왕비는 서양인 몇 명을 곁에두면
    일본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날 서양인은
    그 참상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 작성자 15.09.03 10:53

    @청호 한기수

    건청궁 지도에
    영사 우치다는 붉은 글씨로 1,2,3 숫자를 섰다

    인근 언덕의
    남쪽엔 4자를 적었다

    그가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1은 왕비를 습격한 건물인 장안당,

    2는 1지점서
    왕비를 끌고 가 살해한 장안당 뒷마당,

    3은 왕비의
    시신을 옮긴 옥호루,

    4는 왕비의
    시신을 불태운 鹿山 이다

    당시 건청궁에는
    고종과 훗날 순종이 된 왕세자 와

    세자빈도 있었다,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해 고종은 옷이 찢켰고

    왕세자는
    상투가 잡혔고

    왕세자비는 왕비를 찾아내라는
    일본군의 칼끝 위렵을 받았다,

    왕비앞에서
    일본군을 막은 충신 이경직은 두 팔이 잘려 죽었다

  • 작성자 15.09.03 13:12

    @청호 한기수

    왕비는
    궁녀들과 함께 凶刀 에 쓰러 졌다

    건청궁은
    언제나 보아도 소박한곳이다

    넓은 경복궁에서
    왜 구태여 이런곳에 살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사건 장소인
    장안당과 옥호루는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모든 일이 일어났다

    왕과 왕세자는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을까.

    비명을
    듣지도 못했을까

    건청궁에 가보면
    일부러 눈을 감고 귀를 막지않는 이상

    보거나
    들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까

    결국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 전략한 치욕 때문 이었을까

    고종과 순종은
    그날 보고 들은 일을 말하지 않았다.

  • 작성자 15.09.03 11:18

    @청호 한기수

    당시
    명성왕후의 외교정책은

    청일전쟁 승리로 구축한
    일본의 한반도 패권을 일거에 흔들어 놓은 모험이었다

    한성신문 사장으로
    시해에 가담한 아다치 겐조의 훗날 기록이

    당시
    일본의 속내를 드러낸다

    조선놈들이
    머리를 불쑥 쳐들고 와서 일본을 경멸했다

    아다치와 함께
    시해에 가담한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일본 제국이
    완전히 반도에서 배척당하는데 일대 위기였다 고 기록했다.

  • 15.09.03 11:12

    대한의 자손으로서 대대 손손 잊지않고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야할 역사의 교훈입니다.
    청호 선생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건강과함께 즐거운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

  • 작성자 15.09.03 11:32


    원부님 다녀 가셨군요
    저는 앉으나 서나 걷거나 강병부국 이람니다

    좋은계절
    기쁨.건강.감사의 마음을 드림니다.

  • 작성자 15.09.03 11:30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외교 노선 전환과 함께
    당시 조선반도에 반드시 필료했던 개혁까지

    일본의 요구였다는
    이유로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읽으면
    청일전쟁 승리와 함께 야수처럼

    조선을 농단한
    폭주를 그 외 무슨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까 고민하게 된다

    왕비의 노선 전환과
    시해 사건은 아관파천으로 연결되면서

    조선에서
    일본의 기세를 꺾였다

    그 후 일본이
    패권을 되 찿는데엔 러일전쟁까지 10년이 걸렸다

  • 작성자 15.09.03 11:38



    여기서 청호는
    왕비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인색해도

    당시 왕비의 정책 자체는
    국권 방어를 위한 고육책으로 평가 받아야 하지않을까.

    왕비가
    죽음으로 남긴 긴 시간을

    살아남은 자들이
    강병부국과 국권수호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 작성자 15.09.03 12:12

    @청호 한기수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년 열병식에 참석한다

    천안문 망루에
    중국 주석과 함께 선 박대통령의 모습은

    통일외교를 상징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120년전
    국권수호를 위하여 향한 열망만큼

    지금 통일을 원하는
    국민은 박수를 칠 것이다

    지금 이순간
    천안문 망루의 우리 박근혜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내며

    대담한 통일 외교의 성공을
    거듭~~~거듭 청호는 기원한다.



  • 작성자 15.09.07 20:54

    @청호 한기수

    하지만
    일본 우익은 분노하고 있지않는가

    조선 왕비를
    향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분노가

    대상과 방법을
    바꿔 분출할 것이다

    12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그 속성은

    이미 언론 간판을단
    인터넷 과 산케이신문의 배설구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지 않는가...

    알고보니 신임기자도 아니고
    아주 고참 기자가 마음먹고 쓴 기사이었다.

    조선 놈들이
    머리를 불쑥 쳐들고 와서 일본을 경멸 했다 는

    아치다의 분노가
    그대로 지금 그들의 속내라고 생각한다 참 독한 왜놈들 ...

  • 작성자 15.09.03 12:08

    @청호 한기수

    일본이 남긴 일명
    스나가 노트 는 명성왕후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한다
    ."왕비는 위를 향한채 쓰러졌고

    후우,후우,하며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 (시해범)들은
    사진과 왕비의 얼굴을 대조해보고 있었다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왕비는
    얼마간 살아 있었다

    희미한
    숨을 이어가다 가

    鹿山의 화염속에
    절명을 하였다는 기록이다

    자신의
    나라가 행한 일임에도

    영사 우치다는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가 없는 흉악"이라고 기록으로 남겼지않는가.

    걷다르고
    속다른 왜놈들...

  • 작성자 15.09.03 12:24

    @청호 한기수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략시키도록 강요를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이 되었다

  • 작성자 15.09.04 09:24

    @청호 한기수

    민비가
    출생 하였던 집터는

    경기도 장호원에서 중부내륙 으로 진입하는
    개천 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숲속에 보이는

    지금의 성당이 바로 그 곳이며
    행정구역은 충청도 음성이고 일명 충청도 장호원 이하고 한다.

    민비가
    최후 를 맞은 곳은 건청궁 이라

    왕비를 끌고 가 살해한 장안당 뒷마당
    왕비의 시신을 불태운 녹산의 그 곳을 여러차례 답사하며

    지인들과
    사적 자료를 종합 이를 약기 하여 보았으며

    행여 질문사항이 있으시면
    청호는 정성것 답변 드리겠습니다.

    다시한번
    강병부국...................................................................................................을

  • 15.09.03 18:35

    청호 , 참장하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글을 올려주다니 , 잘 보아는데 뭐라 표현 해야하나 .....모두가 볼것이오 ,

  • 작성자 15.09.04 00:09


    계룡님 !
    강병부국을 ...

    항상 감사의 마음을 ...
    편안한 밤이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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