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
응급실이 지금 꽉 찼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엄마와 나를 슬쩍 보았다. 나는 엄마가 휠체어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엄마는 신음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휘휘 팔을 내저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과 싸우는 것처럼, 아빠는 손바닥으로 안내 데스크를 탕 내리쳤다. "저기 좀 보세요, 당신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저 여자는 여기서 죽을 거에요." 아빠는 미쳐 날뛰었다. 입꼬리에 하얗게 거품이 껴 있었다. 아빠가 그 사람들 중 하나를 때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저기요!"나는 빈방을 하나 발견하고 외쳤다. "저 방이 비었어요!제발요." 그 사람은 마침내 우리에게 방을 내어주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의사가 들어왔다. 엄마는 탈수 상태였고, 내가 기억하기론 마그네슘과 칼슘 수치도 위험할 정도로 낮았다. 엄마는 그날 바로 입원을 해야 했다. 간호사들은 엄마가 누운 침대를 빼서 2층에 있는 새 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엄마의 상태를 안정시킬 약을 투여하는 장치를 몸에 부착했다. 아빠는 엄마 물건을 가져오라고 나를 집으로 보냈다.
병원 문을 나서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차에 온전히 혼자 있게 되자 그제야 하루종일 받은 충격이 몰려와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살면서 해온 모든 일이 터무니 없이 이기적이고 하찮게 느껴졌다. 내 자신이 미웠다.은미 이모가 아팠을 때 이모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지도, 더 자주 전화하지도 않고, 나미 이모가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고 고생한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도 못한 내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유진에 더 일찍 오지도, 진료 예약날에 같이 따라가지도 않고 진작 주의를 기울여야 했을 증상들도 까맣게 몰랐던 내 모습도 미웠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내 증오는 이제 슬금슬금 아빠에게로, 여러 가지 경고를 귓등으로 흘린 아빠에게로 향했다. 처음 증상이 나탄났을 때 우리가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만 했어도 이런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니까.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닦고 창문을 내렸다. 그날은 6월 첫째 주였고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밤하늘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눈썹달이 반짝였다. 엄마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달 모양은 세 종류밖에 없는데, 엄마가 자기 마음대로 지어내서 좋아한다고 놀렸다. 나는 5번 고속도로를 타고 레인 커뮤니티 칼리지를 지나 윌래밋 로드에서 속도를 올렸다. 복잡한 생각들을 털어내고 내 앞에 놓인 길에만 집중하려 해썼다. 커브길에서는 언제 불쑥 사슴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집에 도착해 거실에서 보드라운 무릎 담요를 집어들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엄마의 로션과 클렌저와 토너와 세럼과 챕스틱을 챙겼다. 내 하루치 짐과 엄마가 퇴원할 때 갈아입을 옷도 쌌다, 리버랜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 아빠는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엄마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혼자 누워 있을 걸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빠에게 가서 좀 쉬었다가 아침에 오시라고 말하고는 방석이 놓인 창가 벤치에 드러누웠다.
그날 밤 엄마 옆에 누워 있으려니 어렸을 때 차가운 발을 녹이려고 엄마 넓적다리 사이에 슬며시 발을 끼워넣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르를 떨면서 속삭였다.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 할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 부츠가 떠올랐다. 내 발이 까지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도록 엄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은 부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