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52
8월17일[연중 제1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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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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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qRviGzWdPE
[수원교구 김정욱 마태오(고덕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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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이곳 태안에서는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마을 입구에 큼지막한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가정에서건, 학교건, 성당이건, 아동양육시설이건, 어디든지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상전 모시듯이 정성껏 양육하고 동반합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그간 너무한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남자 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아나 어린이 사망률이 높던 시절, 일단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 인간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들은 예수님께 축복을 청하러 오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과도한 사목활동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예수님이신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사도들은 언짢아하며, 그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린이들을 무시한 사도들을 크게 꾸짖으십니다. 어린이들도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여름 내내 많은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처럼 속이 구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도 않습니다. 노회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순수하고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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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린이처럼 다가가라>
인형인 줄 알았는데 악마였다는 설정의 공포영화들이 많습니다. 예전의 ‘처키’가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귀여운 처키 인형에 도둑의 영혼이 들어가 사람을 해치려한다는 설정입니다.
인형이 분명히 움직였는데 배터리를 확인하니 배터리가 없는 것을 발견할 때의 공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요즘엔 제임스 완 감독의 ‘애나벨’이 있습니다. 인형을 통해 마귀가 사람의 영혼을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입니다. 성당의 유리로 쓰였던 곳에 가두어놓고 매주 사제가 와서 기도하고 성수를 뿌려주지만 누군가 호기심으로 그 문을 열었다가는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마귀가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형은 그냥 죽어있어야 가장 예쁩니다. 인형이 칼 들고 서 있는 포스터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일까요? 나도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또 다른 사람도 나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런 많은 만남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사람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밀쳐내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가 위 공포영화처럼 겉모습은 인형이지만 손에는 칼이 쥐어져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왜 하늘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일까요? 어린이는 무언가 달라고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손에는 칼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안아주면 만족하는 인형과 같습니다.
어린이는 예수님께서 그저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 뭔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예수님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형에게 준 재산을 자신에게도 주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진 것이 없어야 어린이처럼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내 손에 쥐어진 칼입니다.
어린이는 왜 욕심이 없을까요? 무언가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먹어 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먹어보지 못해서 맛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고, 힘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을 쥐고 싶은 것입니다. 이 욕구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내 손에 쥔 칼이 됩니다.
톰 행크스의 ‘그린마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두 여자 아이의 살인누명을 쓴 몸집이 거인 같고 험악하게 생긴 흑인 죄수와 그를 지키는 간수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처음엔 그 거인에게 잡히면 자기 목숨도 위험할 것 같아서 항상 주의했지만 나중엔 마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자신의 병도 고쳐줍니다.
사실 그 흑인은 죽어가는 두 아이를 살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생김새만 보고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죽였다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인데, 어린이들은 사적인 욕구가 적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어서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린이처럼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욕심이 없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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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철학 시간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영국 경험론의 석학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는 실로 그물을 만들어 놓고, 먹이가 들어오면 유유히 잡아먹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는 그물을 던져서 죽음으로 몰았던 대사제와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사기꾼들이 그렇습니다. 독재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그물을 던져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세력이 그렇습니다. 조작과 회유, 별건 수사와 압박으로 거짓 증언을 시켜놓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아놓고 사냥하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은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성서는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개미는 누구를 해치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솝우화에서 개미는 배고픈 베짱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미형 인간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가톨릭교도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 전쟁과 폭력은 개미형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미형 인간이었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꿀벌은 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수분(受粉; pollination)시켜 줍니다. 꿀벌은 꿀을 얻는 대신에 나무의 번식을 도와줍니다. 남는 꿀은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율법 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꿀벌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노래는 암울했던 시대에 맞서 투쟁했던 이들에게 귀한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들었던 소극장 ‘학전(學田)’은 젊은 연극인들에게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연출한 작품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꿀’이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달릴 길을 다 달렸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꿈꾸었던 ‘이 세상 어딘가에’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 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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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3-15: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13절) 제자들은 아이들 때문에 예수께서 피곤해지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하셨다. 이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예수께 올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막고 있다. 순진한 어린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막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빛바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4절)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거룩한삶의 방식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갖추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어린이들처럼 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되지 않는 한,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18절) 사도 바오로는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1코린 14,20)라고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하느님께서는 어린이가 지닌 자질들을 우리가 선택하여 갖추기를 바라신다. 즉 순박함, 남들에게 당한 악을 악으로 갚을 줄도 모르는 것, 부모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자질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으신 것은 바로 그 안수를 통해 그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장하게 해 주신 것이다. 아이들에게 축복하시고 떠나시는 예수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초대하신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도 순박한 어린이와 같이 앞뒤를 재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천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삶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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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라고 묻습니다. 어린이들은 그런 물음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늘 복음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그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19,13)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그렇게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당하다고 하여야 할까요?
그러나 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은 이들의 신앙에서, 나이 들어 교리와 신학을 연구한 이들의 신앙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께서 부어 주시는 신앙이 그들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른들이 “데리고” 온 어린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먼저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시고,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곁을 내주십니다. 그 어린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19,14)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묻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거저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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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소외와 차별은 큰 죄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3-15)
1) 여기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라는 말은,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거나, 아니면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지 말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람들을 막은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0,14) ‘언짢아하시며’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막은 일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2)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라는 말씀은, 어린이들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해 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또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일을 해야 하고, 원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연결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사명인 ‘복음 선포’는, 바로 그 ‘연결 통로’가 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연결 통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이유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는 말씀과,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말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라는 임무를 주신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늘나라에는 소외와 차별이 전혀 없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에 없는 소외와 차별이 지상의 교회에 있다면, 그 교회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작은 이들, 즉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작은 이들’이 한 사람도 소외당하지 않고, 차별 당하지 않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라고 계시니,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회 안에 ‘소외’와 ‘차별’이 분명히 있고, 그 소외와 차별 때문에 신앙생활 하기를 어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연결 통로’가 되기는커녕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목소리가 큰 사람들, 즉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이기도 하고, 공동체 전체의 죄이기도 합니다.
4) 사도들은 그 소외와 차별을 대단히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은, 사도시대 때부터 있었던 일이고, 사도들은 그것을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소외와 차별은 사랑의 정반대 쪽에 있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아주 엄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그래서 교회를 다스릴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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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에제키엘 예언서 18,30)
오늘날 사회는 불공정한 출발점이 문제가 됩니다. 옛적에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하였지만 오늘날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출발점이 차이가 나면 왠만해서는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부모의 기본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사회적 성공을 거두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정하십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무 상관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직 우리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열심한 신앙인이었다해도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큰 죄인이었다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그 어떤 유형무형의 유산도 나의 구원에는 아무 영향을 못미칩니다.
신앙은 누구가 대신해 줄 수가 없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그 누구도 환경 탓을 할 수 없으니 하느님은 참으로 공정하신 분 아니신가요?
오늘 우리도 하느님처럼 공정한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도 그의 배경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 자체만으로 평가한다면 우리도 공정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차별없이 공정하게 대할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공정하게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자비를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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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오 19,14)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을 꾸짖습니다(19,13).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니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손을 얹어주십니다.(9,14-15)
여기서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귀찮게 하는 것으로 보고 어린이들의 접근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대자를 데리고 온 것도 아니었고 어떤 재화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축복을 빌어달라는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하신 것을 보면 어린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힘없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이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처신은 사회적 약자들이 하느님과 관계 맺는 것을 막은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지닌 지위나 재물, 세상의 지식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료 인간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참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어린이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순진무구함, 무죄함 또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이런 영적 순수함을 지닌 가난한 이들은 어린이처럼 전적으로 남에게 종속되고 온전히 의존합니다.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하늘나라는 오직 하느님께 집중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기준을 주님께 두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시선을 가지런히 하여 영으로 단순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그분의 축복 안에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개방성과 수용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고,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으신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소외시키지 말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존귀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고요히 주님 앞에 자신을 두고, 혹시라도 마음의 문을 닫고 제한적으로만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며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며, 주님의 축복을 청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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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우리는 지난 주부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8장과 그다음 복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대단원을 시작합니다.(18,3-4) 이어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정말 중요한 요소들, 곧 ‘용서’와 ‘하느님 나라와 부자’ 그리고 ‘혼인의 불가 해소성’과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다시 한번 하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형적인 말씀의 반복입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말씀을 ‘강조’하려는 대표적인 글쓰기 방식입니다. 이렇게 한 단원의 시작과 끝 또는 단원의 연결점에 같은 단어, 같은 내용의 문장을 배치하여 반복하는 복음사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 단원에 담겨 있는 용서의 문제, 부와 가난의 문제, 혼인과 이혼의 문제들을 관통하는 해석의 열쇠가 어린이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 주십사고 청하는데,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복음에 비추어 선택해야 하는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용서해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가난해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가정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해하고 참아야 합니까?’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성숙도는 우리가 얼마나 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인가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녀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신 ‘사람’은 자녀의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죄를 지었습니다.(창세기 3,5 참조) 우리는 정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사는 그분의 자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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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9,14)
어른은 예전에 모두 다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어린이다움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 어린이들을 보면서 어린이다움을 정의하지만, 어린이다움을 한마디로 정의한다, 는 게 쉽지 않음을 느낄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모든 어린이는 다 다르고, 서로 다른 어린이가 각자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한 어린이에게도 다양한 특성과 마음이 있는데도 대개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보편의 어린이다움을 찾으려 합니다. 어린이들에게서 각자 다른 점을 보려 하기보다는 어른을 기준으로 해서 어른과 대비되는 어린이들만의 공통된 특성을 찾고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으며, 그 점들 상당수는 어른이 본받을 만큼 반짝이며, 그 점이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물론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린이를 잘 모르고, 어린이다움이 무언지 잘 모르지만, 다만 어른이 되면서 어른들을 볼 때, 어른을 두고 어른다움으로 묶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어른은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이는 자기가 기준이 아니고 여전히 어른이 기준이어서 어린이다움으로 묶으려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어린이다움이라는 동일하고 고정 불변한 속성으로 어린이를 묶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다움을 모른다고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 어린이의 존재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에선 아버지가 아들에게, 율법 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을 빌어주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요즘 모든 본당에서 영성체 시간이 되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어른 예비 신자들과 어린이들이 축복받기 위해 나오기도 합니다. 축복을 내려주고 축복받고자 하는 마음 밑바닥에는 하느님께서 여기 함께 계시다, 고 하는 믿음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9,14)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어린이들이 지닌 그 무엇이 하늘나라에 가장 최적화된 영성적인 면일까를 궁리하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이현주 목사의 「예수에게 도를 묻다.」라는 책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책에 보면, 오늘 복음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10,13-16의 대목을 해설하는 부분인데 그 대목을 잠시 인용하려 합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그래서 악과 선이 따로 없고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따로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물을 받아들이고 불이 불을 받아들인다. (...) 사람은 어른이 되면서 어렸을 때 지녔던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좋은 것은 잡고 싫은 것은 버리는 ‘분별심’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에게도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자녀보다 더 귀한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프랑스의 종교 학자인 르낭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국의 요소는 첫째로 어린아이이고, 둘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즉 소외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 시대 가장 작은 자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호의가 넘치셨기에 늘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언제라도 어린이들에게 축복을 내리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어 축복하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19,15)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며 축복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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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곧바로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포기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전자가 우리의 기도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특별한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적, 장소적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완벽한 장소, 완벽한 시간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장소와 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상관없이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 맛을 알고 또 기도의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엄마에게 매달려서 계속 칭얼거리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무엇을 부탁했고, 엄마는 안 된다고 거절한 상황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끈기가 대단합니다. 저 정도 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아이를 보면서 저도 저럴 때가 있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맞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쉽게 포기했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냥 쉽게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포기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린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쉽게 깨닫습니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기도를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분심이 빠집니까? 이 분심에 빠지지 않기 위한 어떤 노력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에서 자기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를 가리켜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자기를 낮추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매달리는 우리이지만, 그 매달림은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임해야 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엄마, 아빠’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것을 찾는 삶이 아닌 주님 곁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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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린이들과 같은 모습>
오래전의 일입니다. 구역 미사를 봉헌하러 갔더니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했습니다. 어른들‘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하면서 특혜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 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시끄럽고, 철없고 교회의 거룩함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고 십자성호를 긋는 동작이 기특합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막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구라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 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주일학교 미사 때 가장 신나고 크게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저학년 유치부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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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앞에 한 아이>
마태오 19,13-15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내 앞에 한 아이>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보니
나를 보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웃으니
내게 웃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다가가니
내게 다가오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손 내미니
내게 손 내미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건네니
내게 건네네
내 앞에 한 아이
내가 안으니
나를 안네
내 앞에 한 아이
너를 보니
내가 보이네
내 앞에 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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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린이와 같이 되라>
-회개의 여정-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어제 저녁식사중 찐 계란이 담긴 작은 잔마다 깨알같이 작은 영문 글자가 있어 자세히 읽어봤고 반가워 옆 수도형제와 나눴습니다.
“Happiness is enjoying the little things in life”
(행복은 삶에서 작은 것들을 즐기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이같은 단순함의 특징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에서도 어린이같은 단순함이 빛납니다.
“공자의 진정한 뜻은 문장과 글자가 아니라 일을 이룸에 있다.”<다산>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간직하겠습니까, 아니면 팔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논어>
이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단순함 역시 어린이같음의 특징입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천진무구天眞無垢, 마음의 순수는, 어린이다움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진리 추구의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도 어제 결혼에 대한 잠언처럼 통찰과 지혜가 가득합니다. 제가 50년전 20대 후반 초등학교 교사시절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예언자>를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부하는 마음, 배우는 마음으로 독수리 타법으로 “아이들에 대하여” 일부를 옮겨 봅니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뿐 너희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을 지라도 너희의 소유가 아니니라
너희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라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음으로
너희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이런 경외의 마음으로 대할 때 어린이같은 아름다운 겸손한 영혼입니다. 분명코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어린이같음의 최정상에 있는 분이라 단언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했을 때 사람들을 꾸짖은 제자들의 완고함은 꼰대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과연 달랐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같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단순성, 개방성, 배움의 정신, 편견으로부터 자유, 변화와 적용에 준비되어 있는 유연성일 것입니다. 오직 이런 이들이 온전히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어린이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얹어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다음,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유유히 떠나시니 뒷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즉시 연상되는 앞서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18,4)
하느님 앞에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역시 기도와 회개도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요 어린이같음의 순수와 진실, 그리고 겸손입니다. 어제 교황님은 기도와 평화의 복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는 변형의 시작이다. 기도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오늘날은 어느때 보다 인류는 평화의 복음을 필요로 한다. 모든 신자는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나누라 불림 받고 있다.”
평화의 복음 선포에 앞서 기도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회개의 구체적 내용을 적시합니다. 공정과 정의의 의로운 사람들이요 어린이와 같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1.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2.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3.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4.강도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5.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6.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7.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8.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주님의 규정들을 따르고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이런 삶의 현장에서 회개의 구체적 실천에 충실한 자들이야말로 어린이와 같은 좋은 심성의 사람들입니다.
죄지은 자만 죽습니다. 위에서처럼 역겨운 짓을 한 이들은 살지 못합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가 죽은 책임은자신에게 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선행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어린이와 같은 삶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요! 기도와 회개를 일상화하는 “기도와 회개의 시스템” 같은 수도원 일과표가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충고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생 영을 갖추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회개의 여정과 어린이와 같은 삶은 함께 갑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날로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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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
오늘 복음(19,13-15)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누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인가?
요즘 우리가 독서로 듣고 있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완전 패망 후 바빌론 유배지에서 듣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그 대전제는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불륜을 저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깨끗해지는 것', '영혼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들!
영혼의 때(더러움)가 없는 사람들!
영혼이 죄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신앙 여정'은 이런 사람들,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고 또 쌓는 여정이 아니라,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되려고 애쓰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육신의 때(더러움)'가 있으면 씻어내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때'가 있으면, 이 때를 씻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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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 14)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같이
자라나는
나라입니다.
자라나기에
막을 수 없고
자라나기에
사랑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아버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바로
어린이들입니다.
은총 가득하신
하느님의 등에
업혀 있기에
그 어떤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이들의
눈물을 아시듯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손을 놓지 않는
이들이
어린이들입니다.
어린이들은
그래서
정확하게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작아져야 할
길입니다.
작아져야
하늘을 닮을 수
있는 순수입니다.
눈 앞에 펼쳐진
축복에
진정 감사할 줄
아는 오늘이고
싶습니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맛보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귀를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는
참행복을 맛보는
어린이들의
나라입니다.
자라나는
기쁨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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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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