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 ‘부럼사상’에 대한 큰스승님의 말씀들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www.kimjoonwon.net)
오늘은 정월대보름이다. 여러분은 부럼을 깨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부럼이 뭔지, 왜 깨었는지 하는것을 제대로 체계있게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우선 '보름과 부럼'은 서로 상대적인 말이다.
우리 민족은 달의 민족이다. 우리의 터가 양성이기 때문에 문화로는 음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그와 반대로 터가 음성인데 비해서 양의 문화를 갖고 있다.
특히 우리와 반대되는 문명을 지니고 있는 곳이 태양을 숭배하는 나라들이다. 이를테면 모든 기원을 태양으로 하는 잉카제국이나 이집트, 또 태양신을 받드는 그리이스가 우리와는 반대적인 문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달을 보고는 기원을 하지만 태양에게는 기원을 하지 않는다.
달의 문화, 음의 문화이다. 그래서 달을 관찰하다 보니까 가장 크고 둥근달이 바로 오늘, 정월대보름이다.
‘보름, 부럼’은 상당히 상대적인 비중이 있고 저울에 달아도 양쪽으로 될 것같은 그런 말이다.
‘부럼’은 우선 부른다는, 불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는 부풀어 오른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배가 부풀어오른다는 의미인데 거기에서 가진 뜻은 잉태, 생장, 나고 크고 하는 뜻이 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창조해서 생장하는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름에 응한다는 생각을 했다.
씨앗이 싹이 트기위해 부풀어 오르려면 대자연의 어떤 힘이 불러줘야 한다, 불러 일으켜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는 것과 부풀어 오르는 것이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아마 우리의 대자연관일 것이다.
생명이 하나 잉태되어도 조왕신이 점지를 해서 아이로 되는 식의, 먼저 부르고 그 다음에 생기고, 거기에 응답하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름에 응답해서 부풀어 오르는데에, 즉 싹이 터 나오는데에 가장 지장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껍질, 딱딱한 껍질이다. 그 껍질을 깨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부럼을 깬다‘고 한다.
그러한 것이 중간과정에서 여러가지 의미 변화를 해서 경상도에서는 부스럼깬다, 하는 쪽으로도 갔다.
부스럼이란 것도 역시 젊은 혈기가 왕성하게 부풀어 오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똑같은 의미인데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다른 뜻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러한 열기를 혼자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눈다.
나누기 위해서 부럼을 깬다, 더위를 판다, 즉 그 열기를 서로 나눈다는 것이다. 불러서 대답하면 내더위 사가라, 하는 식으로 서로 열을 나누는 것이다. 실제로 내더위 사라는 것은 내 열기를 나누겠다는 뜻이기 때문에 나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생장하는 과정으로 가게 되는데, 그때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힘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가 부럼을 깰때에 쓰는 것들은 딱딱한 껍질이 있음과 동시에 기름기가 있는 것이다.
땅콩, 잣, 호두등이 기름성분이 있는 것이고 밤은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 땅콩,잣,호두등과 한 통속인 영양가 있는 뭔가, 생장하는데에 뒷받침을 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소화해 낼때에 큰 과정을 두었다. 즉 노동이란 것에 비중을 크게 둔것이다. 아홉번 물긷고 아홉번 밥 먹고, 그래서 생장하고 성장하는 것으로 노동에다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오곡밥 먹고 아홉가지 나물을 먹는다. 오곡밥에다 아홉가지 나물이라면 옛날같으면 우리가 먹는 나물을 거의 총망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9란 숫자는 우리가 가질수 있는 거의 최대의 숫자이다. 거의 마무리 숫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홉가지 나물이란 것은 꼭 아홉가지를 얘기하는것이 아니라 모든 나물을 말한 것이다. 9라는 숫자가 아니라 모든 나물, 여러가지 나물이라는 뜻이다.
오곡밥이란 것도 그렇다. 옛날에 대충 농사짓고 쓸수있는 것이 한 다석가지라는 것이지 꼭 다섯가지만 써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못 꿰맞추다 보니까 아, 오행에 따라서 오곡인가 보다하는 식으로 되어서 하나가 더 들어가도 안되고 빠져도 안되는 것으로 생각이 잡히게 되어 있다.
사실상 우리가 생장하는데에 가장 저해되는 것을 껍질이라 보고 그 껍질을 깨어야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볼 때에, 우리의 근본 부럼사상은 굉장히 자유로운 것이다.
우리 민족이 유교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었는지, 정말로 의문이 갈 정도로 자유스러운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유교는 대단히 딱딱하게 짜여진 그물과 같은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딱딱하게 그물같이 짜여져 있으면 굉장히 답답하게 여겼던 민족이고, 모든것에서 풍덩하고 여유있고 헐렁헐렁한 것을 좋아한 그런 민족이었는데, 불교가 고려말기에 워낙 타락했기 때문에 이씨조선에 들어와서는 그 불교를 민족의 정신적은 지주로 삼을 수가 없었으므로 숭유억불정책으로 바뀌어졌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히 큰 장애를 일이켰다고 본다.
결국 지금 서양에서 서양학생들과 우리나라 학생들을 보면 초등학교 때에는 우리 학생들이 월등하게 낫다. 우리가 짜여지는 교육에는 굉장히 익숙하다.
어릴 때는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뭘 하나씩 하나씩 집어 먹도록 가르치는 것이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서양 아이들이 우리보다 뒤떨어진다.
그런데 고등하교, 대학교로 가면 그쪽 학생들이 우리 학생보다 월등히 앞선다.
생각이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는 짜여진 틀속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이것은 이렇게 하면 안되고 요렇게 하면 안되고... 딱 가둬져 있고 짜여져 있어서 못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부럼사상이나 단군신화을 보면,
우리 민족은 그렇게 딱딱하게 짜여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 아니다.
단군신화에서도 보면 고통을 못이겨 포기하고 도망갔던 호랑이를 잡아서 벌을 주었다는 역사는 아무데도 없다. 그냥 묵인해 준 것이다.
갔으면 간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의 사고는 그렇지 않다. 자기 백성을 이끌고 나오라고 했을때 모세가 그 일을 않고 도망을 가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복종을 하게 된다.
그것과 우리의 단군사상과는 천지차이이다.
우리는 해봐라 하는 것이지, 누구누구가 해라가 아니다.
‘호랑이와 곰이 해라가 아니고, 누구든 하고 싶은 사람이 해라’ 라고 된다.
자원해서 한 것이고 또한 하다가 어느 하나가 포기하고 가버렸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잡아다가 네가 왜 갔느냐 조금만 더하면 될텐데, 이런 소리가 없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굉장한 수용력, 용서, 화해, 이해의 철학이다.
그리고 붙잡고 늘어지고 벌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방관하는 것,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그러한 우리 민족의 철학이 부럼의 철학과 일치한다.
억지로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불러주면 그 다음에 스스로가 깨고 나오도록 한다.
닭이 알을 품다가 병아리가 나올 때쯤 되면 ‘꾸꾸꾸...’하면서 바깥에서 소리를 내면서 안에 있는 병아리를 부른다. 어느 자리를 맞추어서 그렇게 부르면 그 자리를 알아서 병아리가 안에서 쪼아나온다. 마치 그런것과 같다. 이것이 대자연의 법칙이다.
이렇게 대자연에 순응했던 우리들이었는데 아홉번 물을 긷는다. 아홉가지 나물을 먹는다. 또 오곡밥을 먹는다 하는 것은 바로 다섯가지, 아홉가지가 아니고 여러가지란 뜻이다. 건물을 하나 지으려면 시멘트만 가지고 짓는 것도 아니요 모래만으로 짓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건축재료가 있어야 된다.
그것처럼 한 인간을 구성해 나가는데도 다양한 재료가 필요하다.
지금에 와서야 사람들이 진화의 요소중에 참 중요한 것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씨앗전쟁이 일어났다. 말하자면 누가 더 많은 종자를 가질 수 있느냐, 이 다양성이 앞으로 미래를 주도권을 쥔다해서 미국이나 구소련, 일본같은 나라들은 씨앗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던데 그 종류가 우리의 - 물론 우리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 약 14-15배 정도라고 한다.
미국인들이 6.25사변때 와서 우리나라에 있는 종자들을 다 가지고 갔다.
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입에 무엇이 맞는가, 쌀도 그때부터 연구를 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성공한 쌀이 켈리포니아쌀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 쌀값보다 아주 낮은 가격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지금 모르고 있는 그런 종자들을, 세계각국은 서로 확보해두려고 애를 쓴다.
미래시대에는 다양성이 주도하게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부럼의 철학을 밑바탕으로 깔때에 다양성이 모든 것을 주도 한다는 것이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곡식중에서도 다양한 곡식, 나물도 다양한 나물, 그것이 이 전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재료이다라고 하고, 어느 한가지를 편식시키지 않았다.
묘하게도 보름이라는 지금 이시기는 신선한 야채가 거의 없었을 때이다.
지금은 온실에서 신선한 야채를 내놓곤 하지만 옛날에는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신선한 야채가 없었기 때문에 제일 부족해질 수 있는 영양소가 비타민 성분이다. 이 비타민 성분이 부족해지고 결핍되면 모든 다른 영양분이나 여러가지를 활성화 시키지 못한다. 그러한 비타민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이 나물들이다.
그래서 상당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것이 보름의, 부럼의 철학이다.
그리고 우리가 달의 민족이기 때문에 정월대보름날에 갖는 행사, 달불놀이 쥐불놀이 놋다리밟기.... 그 종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행사나 놀이가 다양하게, 거의 대보름날에 집중되어 있다. 그만큼 대보름을 큰 명절로 쳤던 것이다.
그 놀이 중에 널뛰기가 있는데 널뛰는 장면을 보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대단히 크다.
일본 사람들의 경우에는 행사를 할때에 어떤 목표지점이 있다.
목표지점이 있어서 전부 공동으로 뭉쳐서 그 지점까지 몰고 간다. 그래서 이 민족은 굉장히 단합을 잘하고 어떤 목표지점만 정해주면 끝까지 밀고 간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면이 잘 없다.
거의다가 이곳저곳이 부딪친다. 와- 해서 서로 부딪친다든지 또는 줄다리기를 해서 서로 당긴다든지, 널뛰기를 해서 이쪽이 올라 갔으면 또 한번은 저쪽이 올라가는 식의, 그런 사고들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이 더 철학적이냐 하면 바로 우리 것이 더 철학적이다.
널뛰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자.
텅- 뛰면 이쪽이 올라간다. 올라가서 있지를 않고 내려온다. 텅- 하고 내려오면 다른 쪽이 올라간다. 어느 것도 자기 힘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굴려줘야 올라간다. 우리는 상대를 생각해 주는, 남의 입장과 남을 생각해 주는 그런 철학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다.
서양식은 음식을 먹어도 딱 자기것이 있어서 자기 혼자 자기 맘에 들도록 썰어먹게 되어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남의 입에 맞도록 간까지 다 맞추어서 준다.
항상 상대를 생각해 주는 철학이지 네가 알아서 해라는 식의 개인주의 철학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주부라면 가정의 입맛에 잘 맞추어서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다. 서양식은 거의 기초재료만 주면 자기 입맛에 맞게끔, 자기입에 맞게끔 잘라서 먹는다. 그러니 개인주의가 발달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개인주의가 발달하기가 굉장히 힘이 든다. 전부 상대를 위해서 한다.
이것이 널뛰기 철학과 똑같다.
상대가 굴려줘야 올라간다. 내가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게 아니다.
자기 인기를 높이려고 자기가 발버둥치는게 아니고 상대들이 자기를 탁- 굴려줘야 올라간다. 우리 속담에 머슴을 잘둬야 양반행세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상대가 잘해줘야 내가 잘되는 것이지 내가 올라가려 한다고 되는게 아니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 또 널뛰는 장면을 가만히 보면 한 사람이 내려갔을 때에는 한 사람은 올가가 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올라갔을 때에는 상대방은 내려가 있다.
이 장면을 반복한다. 반복한다는 것은 대자연의 원리이다.
언젠가 올라간 것은 내려오게 되고 내려온 것은 또 올라가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올라간 자에게는 항상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교만하지 말라는 경계를 준다. 또 내려간 자에게는 이미 내려가서 떨어져 버린 것이 아니고 다음에는 올라간다는 희망을 준다. 그래서 좌절을 극복하게 한다.
교만하지 않게 하고 좌절을 극복하게 해주고, 그렇게 해서 대자연의 법칙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묘하게도 널 뛸때에 중간에 앉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해주느냐에 따라서 많이 틀리게 된다.
그런 조정자의 역할이 있다.
이것이 태극 사상이다.
태국의 중심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꼭 그런 역할을 한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어느쪽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세계에서 굉장한 비중을 갖게 되는, 그런 역할을 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된다. 지금 일본이라는 경제대국과 또 부상하는 거대한 중국사이에서 마치 널뛰기의 조정자같이 되어 있다.
어느 쪽으로 해주느냐에 따라서 힘이 달라진다.
우리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중간에서 어느쪽으로 해주느냐에 따라서 양이 클 수도 있고, 음이 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태극사상이다.
우리의 관습이나 여러가지가 그냥 아무렇게나 야, 이거 재미있으니까 하자, 이렇게 내려오는 게 아니다. 결국은 재미있는 것같이 되어도 그것이 우리민족 공통의, 공감대가 형성되니까 오랜 전통을 가지고 내려온다.
우리 민족속에 바로 그런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차전놀이에서도 보면, 두개가 부딪쳐서 올라간다.
이것이 믹스사상, 정반합의 변증법과 똑같다.
두개가 부딪쳐서 서로 상승효과를 낸다.
어떤 것이든지 서로 부딪쳐서 어느 하나가 국복하든지 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부딪치면 서로 상승하는 효과를 내는, 이것이 차전놀이가 갖는 철학이다.
서양식의 놀이에서는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를 굴복시키게 한다. 하나는 굴복당하고 하나는 승리자가 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부딪치면 서로가 상승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부딪치는 상대를 서로 상승의 조건으로 삼는다.
대단한 철학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다.
오늘이 보름이므로 아침에 부럼을 깬다, 뭐 한다 했겠지만 그 속에 깔린 것은 그러한 사상들이니 잘 알고 부럼도 잘 깨시기 바란다.
아침에 부럼을 깨고 나온 것도 그러한 것이지만 지금 영혼의 벽을 깨려고 앉아서 공부하시는 분도 부럼을 깨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도 큰 영적인 힘이 부르고 있는데 거기에 응답하기 위해서 자기의 벽, 영적인 벽을 깨려고 공부하고 있는것이 이런 장면과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