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성화를 품은 탄생]
구원엔 신분의 변화와 수준의 변화,
이 두 가지가 포함돼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쪽에서만 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선물'이라 부르는 것이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기에
성경용어로는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로마서에서는 특히 '율법과 믿음'의 상관관계를
자세히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동사적 용법'으로만 생각해서 풀게 되면
'내가 주체가 되어 믿는 믿음'으로만
생각하기 쉽다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이 '믿음'의 속성을 2가지로
구분해서 말함으로써 '신분과 수준'을
동시에 설명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로마서 1:17의 예가 바로 그 예인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개 '무엇으로 무엇에 이르게 한다'고 할 때
처음에 나오는 '무엇'은 '방법'이어야 맞고,
두 번째 나오는 '무엇'은 '결과'여야 하는데
여기서는 방법도 믿음이고,
결과도 믿음으로 되어 있어서
말이 전혀 안 맞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나오는 믿음과
두 번째 나오는 믿음의 '품사'가 달라서
문장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즉, 첫번째 '믿음'의 품사는 '명사'로서
'행위'가 포함되지 않은 의미를 가집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faith'가 됩니다.
명사라는 것은 도시 이름이나 사물,사람의 이름처럼
어떤 상징적 뜻을 내포한 것일 뿐
그 안에 어떤 행위적 의미는 없습니다.
즉, 이 명사형의 '믿음'은
인간의 어떠한 일체의 행위가 없이
오직 하나님쪽에서만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용어입니다.
두 번째 '믿음'은
인간의 행위가 포함된 용어로서
어떤 반응을 나타낼 수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영어로 하면 'trust'나 혹은 'believe'가 됩니다.
즉 '믿다'라는 뜻이지요.
이 '믿다'엔 '누가', '무엇을'이 반드시 포함되기 때문에
행위의 주체자와 내용이 포함되게끔 돼있습니다.
그럼 왜 '믿음'이라는 용어를 굳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성경에 설명하려고 했는가 하면
그것은 인간의 상태를 나타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명제는,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이 스스로 살아날 방법이 없기에
누군가 와서 죄의 대가를 치르고
살려내시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그래서, 죄속에 있는 인간과
죄에서 탈출된 인간을 구분함으로써
인간이 어떻게 죄에서 나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깨닫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믿음의 두 가지 표현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첫번째 믿음의 효과로 살아난 인간은
두번째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가 있게 되는데,
첫번째 믿음이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면
이제 두번째 믿음은 수준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첫번째 믿음은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부분이지만
두번째 믿음인 성화는 신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진행되는 쌍방향적 부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무수한 설명들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납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설득하시는 하나님!'.
얼마나 하느님의 설득에 납득되었는가에 따라
신앙수준이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납득은 그 사람의 성정에 따라,
또 동의여부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말 안 듣는 자녀를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고집부려봤자 부모님 말대로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면 이쁨 받고 좋을텐데
제 생각이 옳다고 주장해서 반항하면
매 맞고 가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화의 원리가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야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이고
일단 태어나면 어찌 됐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의 관계속에서 자녀로서의 역할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듯
하나님의 자녀도 이 원리를 생각하면
신앙생활이 뭔지 알기 쉽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인간답게 되어지지 않듯
하나님의 자녀도 구원받은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
곧바로 모든 것이 완성되질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하나하나 배우며
아주 깊은 부분까지 알게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자청한 것같이
신자도 좁은길을 자청하며
하나님나라(천국)를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기엔 '믿음'이 필수이고,
인내와 십자가의 죽음을 날마다 연습하려는
각오와 실천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통해 훈련시키시는 삶의 내용 속에서
질 때도 많고 넘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성공하는 예는 없으니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매일 시도하십시오.
그 반복된 연습속에서 신자답게 되어갈 겁니다.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니
무인도같은 삶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담을 높이 쌓아
사람과의 관계를 차단하는 삶은
결코 성화될 수 없는 삶입니다.
지지고 볶는 일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단련해가심을 깨달아
매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과정과 결과를 체크받고
다시 힘을 내어 도전하는 생명력 있는
신자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누구나 고통은 싫어합니다.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내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만 남으면
그 모든 것이 괴롭질 않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전11:30)
신자의 자신감은 자존심을 버린데서 옵니다.
나를 지탱하던 자존심이라는 기둥을 빼고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면 자존심이 사라졌으니
나의 약한 것을 공격해도 아무렇지 않은 겁니다.
이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왜 행복한가 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비밀이요 전우주의 원리입니다.
실체를 알고 나면 모든 불확실한 것들이
우습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부정적으로 확신한다거나
이미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여 연연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향하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오직 나의 미래는 하나님께 있으며
과거의 잘못은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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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은혜로운말씀입니다.예수믿는다고 온전한 사람으로 바로완성되어지지않는다는말공감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