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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건은 현재 진행형일지도…
“옷부터 입어라.”
윤은 맥주를 한 입 깊게 마시다가 민의 말에 자신의 복장을 한 번 훑어보았다. 뭔가 걸치기는 해야 할 것 같아 민의 옷 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그 사이 민은 인터폰 화면을 보았다. 인터폰 안에 있는 사람은 윤이 말한 우리의 동지 정민아가 아니었다. 서동현이 어떻게 여길…. 민은 현관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 들렀습니다.”
“들어오시죠.”
민은 거실 소파로 서동현을 안내했다. 미국에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옷차림이다. 머리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머리.
“맥주 한 잔 하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우리의 동지, 정민아님 오셨나?”
윤은 티셔츠와 편한 반바지 복장으로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정민아가 아닌 낯선 남자가 앉아 있다. 누구더라.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인사해, 이쪽은 서동현 씨. 정민아 씨 대학교 동창.”
윤은 그제 서야 낯선 그 남자가 익숙했던 이유를 알았다. 정민아에 대해 조사를 하다 서동현이라는 이 남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정민아가 미국 생활을 하는데 꽤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고, L그룹 서정민 회장의 숨겨 놓은 자식이라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다.
“음, 이상한데? 정민아 씨 대학교 동창이 왜 정민아 씨를 안 찾고 이 곳에 왔으려나?”
민은 서동현 앞에 맥주 캔을 하나 내려놓았고, 윤은 자신의 맥주 캔을 들어 서동현 앞에 놓인 맥주 캔에 부딪혔다.
“아! 이 쪽은 동부지."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친굽니다, 민이 불알친구."
윤은 민에게 찡긋했다. 검사라고 소개하기에는 이 친구가 윤을 경계할 것 같아서였다. 윤은 저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이 영 꺼림칙했다.
“그나저나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
윤은 민과 동현을 번갈아 보았다. 서동현은 맥주를 한 입 마셨다. 뭘 저렇게 조심하는 걸까. 말 한 마디 하는 게 저렇게 어려운 사람인데 이 저녁 시간에 민이는 왜 찾아 왔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아! 미국에 있을 때.”
“민아, 나 서동현 씨 목소리 좀 듣고 싶다.”
윤은 서동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민은 윤이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을 때 하는 말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윤은 서동현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있어서 불편한가? 서동현 씨, 나 있어서 불편해요?”
“아닙니다. 강 사장님께서 미국 출장 오셨을 때 저도 마침 미국에 있어 잠시 뵈었습니다.”
“그래요? 민이는 미국 출장 가서 동현 씨를 왜 만났어?”
“정민아 씨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
“음….”
윤은 서동현과 몇 마디를 하면서 서동현이 민에게 중요한 할 말이 있어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괜히 일을 그르칠까 싶어 윤은 자신의 남은 맥주 캔과 퇴근하면서 가져 온 서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중요한 얘기하셔야 할 것 같은데 전 이만 자리 피해 드리겠습니다. 서동현 씨,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민이 아는 윤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누군가와의 몇 마디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 어떤 상황인지를 정확히 판단했다. 물론, 윤은 심리학적인 통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간혹 틀릴 때도 있으나 승률은 좋은 편이었다.
“간다, 민아.”
윤은 민의 집에서 나와 민의 옆집인 자신의 집으로 건너갔다. 민의 집과 윤의 집의 인테리어는 동일했다. 민과 윤이 독립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을 때, 이렇게 집을 붙여 두신 이유를 들은 적이 있다. 윤은 늘 민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님은 민의 곁에 자신이 있어 늘 고맙다고 하셨다. 민이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윤은 아직 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알게 되더라도 윤은 민에게 실망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윤은 소파에 누워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곧 핸드폰 진동이 울려 가방에서 핸드폰도 같이 꺼냈다.
“강 윤입니다.”
[검사님, 서계장입니다.]
“네, 서계장님.”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알아봤는데, 아마도 부장검사님 쪽에서 사건 조사 중단을 지시하신 것 같습니다.]
“김정훈 부장님이요?”
[네, 그렇습니다.]
김정훈 부장이라면 윤이 대학교 때부터 줄곧 봐온 선배 검사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누구나 그렇듯 모든 사람에게 평판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구에게나 평판이 좋은 사람은 반드시 뭔가가 구린 부분이 있는 사람이다. 특히, 검사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L그룹이랑 연결될만한 고리는 없고요? 지금까지 아무 소리 없다가 사건에 L그룹이 들어오면서 조치가 내려진다는 게 타이밍 상 이상합니다.”
[김정훈 부장이 대학교 시절 L그룹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4년 내낸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건요?”
[겉으로 드러난 L그룹과의 연결고리는 그 부분 외에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세요.”
[강 검사님.]
“네.”
[멈추실 겁니까?]
“다 왔는데 멈추긴 왜 멈춥니까? 눈치만 좀 더 보면 되지요.”
전화 너머로 서계장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서계장의 웃음소리에 윤도 미소 짓고 만다. 윤은 검사가 되고나서 늘 서계장님과 함께 했다. 서계장은 경찰 경력까지 포함해 이 바닥에서 20년간 일한 배테랑이다. 경찰 일을 하다 검찰 공무원 시험을 봐 들어온 분이다. 경찰 쪽 인맥도 상당해 자료 조사에도 능했다. 처음 검사가 되고 나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도,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조사를 부탁했을 때도 자신의 일처럼 두 손 두 발 걷고 윤을 도왔다. 자신도 딸을 가진 부모라 도저히 사건이 놓아지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윤은 맥주 한 캔 더 먹을까 싶어 냉장고를 뒤졌지만, 집구석에 그 흔한 맥주 따위가 없다 투덜대며 옷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마침 정민아가 민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 하는 찰나였다. 이런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 한다.
“정민아 씨, 거기 말고. 오늘은 여기.”
윤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집 현관문을 가리킨다.
“맥주 좀 사올게요. 들어가 있어요.”
윤은 현관문을 열어 정민아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맥주를 사러갔다. 그 사이 정민아는 거실 소파에 앉아 두리번거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다. 사건번호가 적힌 서류라 보면 안 될 것 같아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지만, 자꾸 시선이 갔다. 자꾸 시선이 가는 건, 1989년 4월 12일, 00초등학교 화재사건이란 문구가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남소현 교수? 남소현…
[남소현 교수, 1988년 교통사고로 죽은 서동민 회장의 부인. 서동민 회장은 생전에 자신의 사생활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지독히 꺼림. 특히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함. 서동민 회장 사고 당시, 동생 서정민 회장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바람에 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노출된 적 없음. 서정민 회장이 남소현 교수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은 민이 휴민트를 이용해 알아냄. 결론적으로 1988년 4월 10일 있었던 교통사고에서는 남소현 교수의 남편이자 L그룹 회장이었던 서동민과 그의 아들, 그리고 아승준 3명 사망. 아직 사고인지 사건인지 아직 알 수 없음. 사고로 마무리가 되긴 했지만, 그 뒤에 무슨 배경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아내지 못한 상태. 가해자는 서동민, 피해자는 아승준. 1년 뒤 1989년 4월 12일 오후 4시에 있었던 00초등학교 화재사건. 이승아 여아 1명 사망. 용의자 서동민 회장의 아내인 남소현 교수.]
“뭐하는 거야?”
윤은 정민아에게서 서류를 빼앗았다.
“아무리 같은 사건에 대해 공유한다고 해도 이 서류는 안 돼. 어디까지 본거야?”
“용의자 남소현 교수. 남소현 교수요?”
윤은 서류를 재빨리 가방에 넣고 자신의 방안으로 휙 던져 버렸다. 윤은 거실로 나와 봉지에서 맥주와 땅콩 캔을 꺼냈다. 맥주 한 캔은 정민아 앞에 놓았다.
“알아, 남소현 교수?”
“몰라요.”
정민아는 윤이 건넨 맥주 캔을 땄다. 윤은 하얀색 화이트보드 판을 거실로 끌고 나왔다. 윤은 무언가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여기에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혹은 누구 앞에서 강의를 하는 것처럼 말을 하면서 적어가다보면 거의 모든 사건이 쉽사리 정리되곤 했다. 윤은 화이트보드에 1988년 사고와 1989년 화재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쭉 정리했다. 중간에 막히는 부분은 물음표로 표시해 두고 도식화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과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쭉 붙였다. 거기엔 강민, 강윤, 정민아의 사진도 붙였고, 남소현 교수의 사진도 그녀의 이름 아래 붙였다.
“잠시만요, 그 사람이 남소현 교수라고요?”
“그래, 남소현 교수. 왜?”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어디서?”
정민아는 생각을 하는 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머리를 깊게 쓸어내리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절에서요. 남자 분과 자주 오셨어요.”
“남자 분? 남자 분 누구?”
“남편이 아니었을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정민아 씨가 아주 어렸을 땐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지?”
“매번 비싼 과자 선물세트를 주고 가셨거든요. 절에서는 도무지 귀할 수 없고. 쉽게 맛 볼 수 없는 과자들이 잔뜩 있던 선물세트라 언니랑 저랑 아껴두고 오랜 시간 먹었어요. 그래서 기억해요.”
그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이 윤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정민아는 거실로 들어오는 민을 바라보았다. 이틀 만이다. 흰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반듯한 모습이다. 민은 정민아에게 눈인사를 하고 민아 곁에 앉았다. 정민아 곁에 앉은 민에게는 민트 향이 났다. 정민아는 그의 향 때문인지 자꾸 그에게로 시선이 갔다. 시선이 많이 간다는 것은 관심일까. 집중일까. 아님… 그 이상일까.
“갑자기 서동현은 왜 방문하신 거야?”
“동현이가 왔었어요?”
“그래서 내가 정민아 씨를 이리로 안내한 거야.”
민은 윤과 민아의 질문에 두 사람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민은 정민아 앞에 놓인 맥주 캔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한 번 민과 윤을 바라본다.
“뭔가 이상하긴 이상하다. L그룹 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다. 어디서 정보가 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민이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귀국하자마자 주지스님을 뵈러 간 적이 있다. 그 때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주지스님을 원망한 적이 있다. 절에 그냥 두지, 왜 자신을 세상 밖으로 내몰았냐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했고, 세상은 너무 각박하고 힘든 곳이라는 것을 몸소 깨달아 지쳐 있을 때였다. 윤과 민이 담배를 배우면서 세상을 배워가고 있던 그 무렵이었다. 그때 스님이 묘한 말씀을 했다.
[그 당시 네 주위엔 두 개의 큰 사건이 있었다.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너를 보내야 했고,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 시간동안 너를 내 곁에 두어야 했고, 그 시간이 됐기에 널 보냈다.]
두 개의 큰 사건. 3명의 사망자를 낸 교통사고와 1명의 여아가 사망한 화재사건. 화재사건이 있은 후, 민은 무언가에 쫓기듯 절을 떠났다. 스님은 그 시간동안 민을 곁에 두어야 했고,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아직 세 번째 사건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첫댓글 전부 다 모여 속풀이라도 해얄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