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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숲 해설사‘에 대하여 자료를 찾아보던 중 우리나라 생태 숲 분야의 대가인 남효창 이학박사 (‘숲 연구소 이사장)가 “회남자(淮南子)는 일찍이 자연을 알되 인간을 알지 못하면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들고, 인간을 알되 자연을 알지 못하면 진리의 세계에서 노닐 수 없다“ 고 인용하였다. 참 뜻깊은 의미 심장한 말이라고 생각되어 도대체 회남자는 누구인가 궁금하여 알아보니 허참! 이렇게 무식 할 수가 없다. 회남자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나는 큰 충격속에 빠져들었다.
『회남자』는 중국 한대(漢代) 초기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한무제(漢武帝)에게 헌상한 책으로서, 제자백가 사상이 집결된 백과사전적인 작품이다.
공식적으로는 회남왕 유안의 작품이라고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유안이 초대했던 당대 문사 3천여명의 집단 저작이다.
오늘날 인터넷이 광대한 정보의 장으로 성장, 의사소통과 협업 기반의 '집단지성'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는데 기술적 기반이 달랐을 뿐 이와 동일한 컨셉의 시도가 이미 2천년 이상 전 시대에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롭고도 중요한 중국의 고전 <회남자>, <회남자>를 통해 한나라 초기 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중국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되는 회남자
에 대한 설명 자료를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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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淮南子)
* 자료 : 중국학 위키백과
개요
기원전 139년 회남왕 유안은 장안의 황실에 입조하여 그의 조카뻘되는 한 무제(武帝)를 알현하며 『내서(內書)』 21편을 황제에게 헌상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회남자(淮南子)』가 바로 이 『내서』 21편이다. 『회남자』는 한대(漢代) 초기에 유행한 다양한 사상과 문화 그리고 학문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일종의 '백과전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회남자』에는 황로학이라는 사상적 요소와 천문학·지리학·군사학·의학·종교학 등 다양한 요소들이 녹아 있다.
회남자의 탄생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
한대 초기의 정치적 상황은 황제 중심으로 천하를 일원화하려는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의 제후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권익과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지방 분권주의가 서로 충돌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제후들은 끝까지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남자』를 저술한 회남왕 유안이나 그의 아버지 유장 역시 그 희생자들이었다. 『회남자』는 바로 한 제국 초기에 나타난 이런 정치적 갈등 구조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상적으로는 전국 말기부터 유행한 황로학이 중요한 배경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한 제국의 성립과 그 특성
진시황 사망 이후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기점으로 진 제국 각지에서 반란 세력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들 세력은 이후 두 가지 큰 세력으로 양분되었는데, 바로 항우와 유방 세력이다. 항우와 유방의 세력 대결 끝에 유방이 승리했고 한(漢) 제국이 수립되었다. 한대 초기 지방 행정 조직은 진 왕조 시절의 중앙 집권제와 주 왕조 시절의 지방 분권제가 합쳐진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였다. 때문에 한 제국은 중앙에는 황제 중심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지방에는 황제의 직할제인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고 이와 동시에 지방 제후의 자치국인 왕국(王國)과 후국(侯國)을 설치했다. 그 결과 한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103개의 군(郡)과 국(國)이 수립되었다. 따라서 한 제국은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 분권주의가 공존하는 불안한 지방-중앙의 공존 체제로 출발했다.
이성 제후(異姓諸侯)
이성 제후(異姓諸侯)란 유방과 직접적 혈연 관계가 없는 성씨가 다른 제후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 제국 초기에 지방 제후로 봉해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성 제후(異姓諸侯)들이었다. 예를 들면 202년 유방이 황제로 즉위하며 봉한 제후 일곱 명은 초왕(楚王) 한신(韓信), 한왕(韓王) 신(信), 회남왕(淮南王) 영포, 양왕(梁王) 팽월(彭越), 장사왕(長沙王) 오예(吳芮), 연왕(燕王) 장도(臧荼), , 조왕(趙王) 장오(張敖) 등이었는데 모두 유방과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제후로 봉해졌는가? 그 이유는 이들이 유방과 항우의 대결 과정에서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을 발휘해 유방을 도운 전쟁 영웅들이자 개국 공신들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특히 초왕 한신은 능력이 탁월하고 세력이 커 유방이 경계하던 인물이었다. 이들 제후국들은 각국의 왕이 전적으로 통치하였다. 관료 임명에서 오늘날의 총리급 직책인 상국(相國)만 중앙정부에서 파견할 뿐, 제후국이 독자적 관료제도와 임명권을 갖고 있었다. 또 징세와 부역 동원을 포함한 재정권도 장악하였다. 따라서 중앙정부 입장에서 지방의 이성 제후국(異姓諸侯國)들은 불안 요소나 다름 없었다.
이성 제후의 제거와 결과
처음 반란을 일으킨 제후는 연왕 장도였다. 원래 연왕은 옛 연나라 땅에 반란을 일으키고 항우에 의해 연왕으로 봉해진 제후였으나 초한전쟁 기간에 부득이하게 유방을 도와 항우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때문에 연왕 장도는 평민 출신 유방을 가볍게 여기고 멸시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유방이 황제에 등극하자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장도의 반란군은 한 제국의 군대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장도는 포로로 잡혔다. 이밖에도 지방정부의 반란은 잇달아 발생했고, 이에 따라 제후를 제거하는 일은 빈번해졌다. 심지어 실제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중앙정부의 정략적 의도에 따라 지방 제후를 제거하기도 했다. 연왕 장도를 시작으로 초왕 한신, 조왕 장오, 회남왕 영포와 양왕 팽월이 차례로 제거되었다. 심지어 연왕 장도를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봉했던 연왕 노관(盧綰)마저 제거되었다. 즉, 강남의 장사왕 오예(吳芮)를 제외하면 이성 제후(異姓諸侯)들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그 결과 한 고조 6년부터 12년까지 7년 동안 모두 7명의 이성 제후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한 왕실과 같은 성씨인 유씨 제후, 즉 동성 제후(同姓諸侯)들을 봉했다. 중앙과 지방의 불안한 공존 체제는 중앙정부가 이성 제후들을 제거하고 동성 제후들을 그 자리에 앉혀서 중앙 집권을 확고히 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동성 제후국의 성장과 중앙의 대응
이성 제후가 제거된 직후 한 고조는 중앙 집권을 확고히하였다. 한 초기에 임명된 동성 제후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유씨들이었고, 이에 따라 중앙에서 승상과 태위를 파견하여 이들을 보좌하고 감독케 했다. 한편 지방 제후국의 모든 법령은 중앙정부를 따르게 하고 지방 제후는 중앙정부에서 발급하는 호부(虎符:군사지휘권)가 없으면 군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이에 따라 한 초기 동성 제후국들은 사실상 제후국이 아니라 일개 군현이나 다를 바 없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나이가 어렸던 유씨 제후들은 성년이 되고 제후국의 기반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문제·경제 때에 이르면 지방 제후국의 경제 및 군사적 역량이 크게 증대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기도 했다. 일부 제후국에서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내쫓고 법령을 마음대로 고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재차 위협을 느낀 중앙정부는 각 제후국을 여러 지역으로 분할함으로써 지방정부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방안은 가의(賈誼)가 건의한 안건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제후들을 많이 세워 힘을 줄이는" 것이었다. 제후 한 사람의 영지를 모든 자손에게 골고루 나눠주게 하여 개별 제후국들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문제(文帝)는 가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러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이에 따라 한 고조 말년에는 9개에 불과했던 동성 제후국이 문제(文帝) 말년에는 17개까지 늘어났다.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제후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오왕(吳王) 유비(劉濞)다. 오왕 유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철을 바탕으로 경제적 바탕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민심과 천하의 인재들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나라의 역량은 중앙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경제(景帝)는 조착(晁錯)이 건의한 '삭번책(削藩策)'을 시행했다. 삭번책은 제후 왕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제후국의 영지 일부를 몰수하여 중앙정부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경제(景帝)는 각종 죄목을 들어 초왕 무의 동해군, 조왕 수의 상산군, 교서왕 앙의 여섯 현을 박탈했다. 영지를 삭탈당한 제후들은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아직 삭탈당하지 않은 제후들 또한 중앙정부를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이에 오왕 유비는 주변의 여러 제후국들과 반란을 모의했고,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吳)를 중심으로 교서(膠西), 조(趙), 초(楚), 제남(濟南), 치천(淄川), 교동(膠東)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반란 또한 군사전략이 뛰어난 주아부(周亞夫)를 경제(景帝)가 총사령관으로 발탁하여 진압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란 10개월 만에 완전히 무너진 후 중앙은 집권화 작업을 신속히 진행했다. 중앙은 "제후는 제후국을 다스릴 수 없다"고 규정한 후 중앙에서 파견한 상(相)이 제후국을 다스리도록 했다. 또 수많은 제후국의 영지를 중앙으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제후국들을 분할하기 위해 여러 제후를 분봉(分封)했다. 영지가 극도로 작은 제후들은 더이상 정치적·경제적 권력이 강하지 않았고,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회남자』의 사상적 배경: '黃老學'
한편, 전국 시대 말부터 '황로학(黃老學)'이라는 독특한 사상이 유행했다. 황로학은 전국 중기 제나라의 직하학궁에서 발원하여 전국 말기를 거쳐 서한 시대 전기에 크게 유행했고, 동한 이후에는 도교의 형태로 변모하여 발전했다. 황로학에서 '황'은 황제(黃帝)를, '노'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따라서 황로학은 이름을 통해 보면 황제와 노자를 배우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이며 중국 민족의 시조로 여겨진다. 황제는 상고 시대에 또다른 강력한 제왕이었던 치우(蚩尤)를 제압하고 중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황제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노자(老子)는 춘추 시대 말에 생존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했던 사상가이다. 어찌보면 정반대의 것을 상징하는 '黃'과 '老'가 각각 정치 사상과 철학 사상으로서 하나로 결합한 것이 바로 '황로학'이라 할 수 있다. 황로학에서 가장 특징적인 사상은 '황로무위 정치 사상'이다. 통치자는 고요히 자기 자리를 지킬 뿐 가능한 한 백성들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황로학은 특히 군주의 고요한 자세를 강조한다. 군주가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고 고요히 있으면 천지 자연이 순조롭고 백성을 비롯한 만물이 저절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군주가 할 일은 다만 고요함을 유지하면서 천하의 유능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 정도다.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이 사상은 왜 한나라 초기에 대폭 수용되었을까? 그 이유는 한 초기에 지배 계층이나 피지배계층이나 모두 기나긴 전란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미 기나긴 전란을 통해 피폐해지고 기운이 소진된 백성과 제후는 모두 휴식을 원했다. 하지만 성립 초기 한 제국은 체제의 기틀 마련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기틀이 마련된 고조 이후 혜제(惠帝)와 여태후(呂太后) 시기에 이르러서야 황로무위 정치가 가능케 되었다. 황로무위 정치의 핵심은 선왕의 기존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공신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황제가 가능한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며 조세를 낮추고 사역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는 가혹한 법가 정치로 단기간에 멸망하고 만 진 나라를 거울 삼는 것이기도 했다.
회남왕 유안은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이자 5대 황제 한 무제의 숙부가 된다. 유안은 한나라 황실과의 이러한 특수한 혈연관계로 인해 '회남왕'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라 천하의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며 또 『회남자』라는 불후의 거작을 남겼다. 그러나 그 화려한 영광의 이면에는 3대에 걸친 비극적인 가족사가 있었다.
유장(劉長)은 한 고조 유방의 수청을 들었던 여인 조미인(趙美人)의 아들이다. 조미인은 유방의 혈육을 낳았으나 뜻하지 않게 조왕(趙王)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고,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혈육임을 사방팔방에 알리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옥중에서 한을 품은 채로 자살하였다. 훗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유방이 이를 뉘우치고 유장을 거두어 기르게 했다. 유장은 어려서부터 여태후를 잘 따랐고 여태후 또한 유장을 아꼈다. 때문에 여태후가 혜제 대신 섭정할 때 유씨들을 박해했지만 유장은 예외였다. 문제(文帝) 즉위 때 장년이 된 유장은 회남왕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유장은 틈만 나면 장안으로 올라와 황제를 알현하고, 때때로 황제를 "형님"이라 부르는 등 방자하게 행동했다. 신하들은 유장을 벌할 것을 문제에게 청했으나 문제는 유일한 형제인 유장을 눈 감아주었다. 한편 유장은 무쇠 솥을 한 손으로 던질 정도로 힘이 강했는데, 지난날 어머니 조미인이 억울하게 죽을 때 충분히 도울 수 있었으나 방관했던 벽양후(辟陽候) 심이기(審食其)를 증오하여 어느 날 소맷자락 속에 철퇴를 숨긴 채 벽양후를 만나 그대로 내리쳐 죽였다. 문제는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이유로 유장을 사면해 주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황실과 조정 모두 회남왕 유장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문제 6년(기원전 174년) 회남왕 유장은 반란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조정으로 체포·압송되었다. 평소 유장을 못마땅해 하던 신하들은 그동안의 죄목을 줄줄이 열거하며 사형에 처하라고 간청했다. 문제는 차마 사형시킬 수 없어 제후의 지위를 박탈시키고 촉(蜀) 땅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 사실을 견디지 못한 유장은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 어찌 이처럼 답답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며 스스로 굶어죽었다.
유안의 꿈과 몰락
회남왕 유안은 고조 황제의 친손자였다. 그리고 당시 황제는 태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회가 닿으면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야심가였다. 하지만 유안은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끝내 몰락하게 된다.어느날 회남왕 유안의 아들 천(遷)이 검술에 능했던 신하 뇌피(雷被)와 검술 대련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아들 천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에 아들 천은 분노하였고 지레 겁 먹은 뇌피는 장안으로 달려가 황제에게 회남왕 유안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던 조정에서는 회남국에 딸린 2개 현을 삭탈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했다. 하지만 이유 없이 영지를 빼앗긴 회남왕은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반역의 뜻을 더욱 크게 굳히게 되었다. 또 회남왕은 천(遷) 뿐만 아니라 불해(不害)라는 아들도 있었다. 나이가 천보다 많아 장남격이지만 서자였던 불해를 회남왕은 사랑하지 않았다. 왕후와 태자 천 또한 불해를 업신여겼다. 불해의 아들 건(建)은 자신의 아버지가 천대받는 것에 원한을 품고 자신의 아버지를 천(遷) 대신 태자 자리에 올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태자 천(遷)에게 들키고 건(建)은 심한 매질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건(建)은 황제에게 "회남왕의 태자 천(遷)과 그의 왕후 다(茶)가 저의 아버지 불해(不害)를 이유 없이 박해하고 있다."고 상소를 올린다. 이에 조정에서는 회남에 감독관을 파견해 회남왕의 죄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의 반역 음모가 누설될 지경에 이르자 회남왕 유안은 가장 신뢰하던 참모였던 오피와 함께 즉시 반란을 일으키기로 상의했다. 하지만 조정의 압박이 거세지자 오피마저 회남왕 유안을 배신했고, 회남왕 유안은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文에 뛰어났던 유안
회남왕 유안은 아버지 유장과 달리 武가 아니라 文에 뛰어났다. 『한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회남왕 유안은 그 사람됨이 책읽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즐기되, 말 타고 사냥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은밀히 덕을 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에 합치되고자 했으니, 그의 명성과 칭찬하는 소리가 널리 퍼졌다.
당시 무제는 예술과 문학을 좋아하였다. 무제는 유안을 숙부로 대접했고, 유안이 아는 게 많고 글을 잘 지으므로 매우 존중했다. 때문에 유안에게 문서나 글을 내릴 때는 늘 글을 잘하는 사마상여(司馬相如) 등을 불러 초고를 살피게 한 뒤 보냈다. 즉위 초 유안이 조정에 입조했다. ……유안에게 「이소전(離騷傳)」을 짓게 했는데, 유안은 식전에 명령을 받고는 점심 무렵에 완성해 올렸다.
유안은 문제·경제 시대를 거치며 동성 제후들이 대부분 제거된 상황에서 황제의 종친으로서는 가장 연장자였다. 게다가 유안이 文에도 탁월했기 때문에 무제는 숙부인 유안을 가볍게 대할 수 없었다. 유안이 文에 뛰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회남자』 탄생 100여 년 전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가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당시 『여씨춘추』의 저술을 주도했던 여불위는 본래 상인 출신으로 학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고, 단지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천하의 인재를 불러 모아 저술을 후원하는 역할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회남왕 유안은 그 스스로가 황제에게 천하의 문재(文才)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대동케 할만한 문예를 겸비하고 있었기에 『회남자』의 저술과 탄생에 직접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회남자』 저술
저술 방식
중국 고전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회남자』 또한 여러 사람이 참여해 공동으로 집필한 문헌이다. 하지만 『노자』, 『장자』, 『관자』 등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점차 형성된 고전들과 달리 『회남자』는 짧은 기간에 특정한 사람들이 참여해 써냈다는 특징이 있다. 회남왕 유안은 당시 한 무제와는 삼촌과 조카 사이였고 황실의 원로 종친이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감시와 감독을 많이 받고 있던 여타 지방 정부와 달리 상당한 자율권을 누리고 있었다. 유안은 이를 바탕으로 즉위 후 천하의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 초빙된 인재들은 순수한 학자 뿐만 아니라 방사(方士)와 술사(術士) 등도 포함되었다. 『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회남왕 유안은 그 사람됨이 책읽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즐겼으며……빈객과 방사와 술사 수천 명을 초빙하여 『내서』21편과 매우 많은 양의 『외서』를 지었고 또한 『중편』8권도 있었으니 신선과 연단술(煉丹術)에 관한 것으로 20여만 자나 되었다.
유안은 수천 명의 천하 인재들을 불러 모았고, 그 중에서 특히 학문적 소양이 높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사람들을 따로 모아 저술에 참여시켰다. 저술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유학자 뿐만 아니라 도가 계통의 학자이거나 황로학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회남자』의 판본은 대개 21권으로 편제되어 있다. 모두 13만여 자에 이르는 대작이다. 제1권 「원도훈」, 제2권 「숙진훈」, 제3권 「천문훈」, 제4권 「지형훈」, 제5권 「시칙훈」, 제6권 「남명훈」, 제7권 「정신훈」, 제8권 「본경훈」, 제9권 「주술훈」, 제10권 「무칭훈」, 제11권 「제속훈」, 제12권 「도응훈」, 제13권 「범론훈」, 제14권 「전언훈」, 제15권 「병략훈」, 제16권 「설산훈」, 제17권 「설림훈」, 제18권 「인간훈」, 제19권 「수무훈」, 제20권 「태족훈」, 제21권 「요략」으로 이뤄져있다. 이 가운데 「요략」은 『회남자』의 중심사상과 각 편의 요지를 간략히 소개하는 글로, 책 뒤에 붙는 후기(後記)에 해당한다.
저술 동기
유안은 비록 지방의 제후이긴 했지만 회남국이라는 국가를 통치하는 국왕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 모은 데에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작게는 회남국을 잘 다스리는 것이고, 더 나아가 크게는 거대한 통일 제국으로 수립된 한나라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경영할 통치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회남자』에서는 후자의 목적이 강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유안이 『회남자』를 완성하자마자 곧바로 한 무제에게 달려가 이 책을 바쳤다는 『사기』의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무제 즉위 초에 유안이 조정에 입조하여, 이제 막 완성된 『내편(內篇)』을 무제에게 바쳤다. 황제는 이것을 아껴 깊이 보관하였다.
또 유안 자신은 「요략(要略)」에서 『회남자』의 궁극적인 저술 동기 및 목적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20편을 지었고, [여기에는] 천지의 이치가 다 연구되고 인간의 일들이 다 다루어지고 있으니 제왕의 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제왕의 도"가 모두 담긴 『회남자』가 완성되자마자 유안이 이를 한 무제에게 바쳤다는 것은 『회남자』의 저술 동기가 바로 한 제국 전체를 잘 다스리는 법을 설명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안이 중요시 했던 것은 '천지의 이치'인 '천도(天道)'와 '인간의 일'인 '인사(人事)'에 통달하는 것이었다. 이에 통달하는 것은 예로부터 이상적 통치자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었다. 자연의 이치를 파악하여 자연계로부터 올 재앙이나 변화에 대비하고, 인간 사회의 이치를 파악함으로써 아래 신하들을 잘 부리고 백성들을 잘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회남자의 사상세계
기론(氣論)
기(氣)는 선진 시기의 문헌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 『상서』, 『역경』, 『춘추』의 본문에는 '氣'가 나오지 않는다. 춘추 시대 말 무렵에야 氣가 조금씩 출현하지만 『노자』에 3회, 『논어』에 4회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전국 시대 중엽이 되면 氣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 『맹자』에 19회, 『장자』에 39회, 『순자』에 22회 정도이다. 전국 시대 말이 되면 대부분의 문헌에서 氣를 발견할 수 있는데, 『여씨춘추』에 85회, 『관자』에 106회, 『회남자』에는 180회 정도가 출현한다. 특히 『여씨춘추』와 『회남자』 사이는 100여 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음에도 氣 출현 횟수는 2배 가량이다. 이는 『회남자』가 쓰여진 한대 초기 氣에 관한 논의가 매우 활발했고 氣의 세계관이 이미 보편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회남자』는 기론(氣論) 혹은 기 사상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회남자』의 저자들은 춘추 시대 말부터 시작되어 전국 시대 말까지 진행된 '기'에 대한 생각과 논의를 총정리하였으며, 더 나아가 한대 특유의 기 사상을 심화·발전시켰다. 그리하여 『회남자』에서는 우주 생성론을 비롯하여 자연계의 여러 현상, 인간의 생명 현상 등이 모두 기로 설명되고 있다.
천인감응
천인감응론이란 자연계의 변화가 인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예들들면 오랫동안 가뭄이 들면 인간에게 죄가 있어서,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신하와 백성은 무언중에 왕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왕은 부득이 하늘을 향해 자신의 부덕함을 사죄하며 비를 내려 달라고 간곡하는 기우제를 올리게 된다. 이때 하늘(天)이란 서양의 인격신과 달리 하늘과 땅에 두루 존재하는 원리를 상징하는 범신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회남자』에도 이러한 사유 방식이 녹아있다. 예를 들면 「정신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닮은 것이요, 발이 네모진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다. 하늘에는 사계절·오행·구해(九骸)·삼백육십오일이 있으므로 사람도 사지·오장·구규·삼백육십오 마디가 있다. 자연계에 바람·비·추위·더위가 있으므로, 사람에게도 받음·줌·기쁨·노여움의 행위와 감정이 있다. 그러므로 담(膽)은 구름이 되고, 폐(肺)는 기가 되며, 간(肝)은 바람이 되고, 신(腎)은 비가 되며, 비(脾)는 우레가 되어 천지에 서로 참여하고 마음이 이를 주관한다. 그러므로 눈과 귀는 해와 달에 해당하고, 혈기는 비·바람에 해당한다.
즉 인간의 신체 구조는 천지 자연의 구조와 형상을 그대로 본받아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인체의 각 기관들은 자연계의 여러 현상들에 해당하며, 따라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서로 간여하고 참여하는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천지와 우주는 한 사람의 신체이고, 육합(우주 전체)은 한 사람의 형체와 같다"고 「본경훈」에서 선언하고 있다.
무위(無爲)
『회남자』에서는 무위(無爲)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위'를 말 그대로 '아무런 해우이도, 움직임도 없는 고요한 상태'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수무훈」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혹 말하길, 무위라는 것은 조용히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히 움직이지도 않으며, 끌어도 오지 않고, 밀어도 가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곧 도를 얻은 모습이라고 간주한다.
즉 세간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태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을 무위라고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회남자』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도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논의가 깊지 못해, 단지 그 겉모습만 보고 거꾸로 청정(淸靜)을 상도(常道)로 삼고 염담(恬淡)을 근본으로 오해한다. 이에 나태해져 학문을 팽개치고 욕망이나 좇고 감정에만 빠져, 이로써 구차하게 자신의 안일만 구하니 대도(大道)를 깨닫지 못한다.
『회남자』에서는 청정을 상도로 삼고 염담을 근본으로 오해하여 나태와 게으름에 빠져 도를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참으로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정진이 필요핟는 말이다. 『회남자』에서는 소극적이고 정태적인 '무위'를 단호히 거부한다. 『회남자』의 저자들은 전통적으로 성인으로 추앙받는 위인들은 결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무위'를 행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번 시험 삼아 묻겠다. 가령 저 신농(神農),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이 성인이라 할 수 있는가? 논의하는 자는 반드시 그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다섯 성인을 보건대, 그들 중 아무도 '무위'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옛날에 백성들은 풀을 뜯어 먹고 물을 마시며 나무 열매를 채집하고 조갯살을 먹었으니, 때때로 질병에 걸리거나 독의 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신농이 백성들에게 오곡을 파종하는 법을 가르치고, 토지의 적합성과 건조함과 습함, 비옥함과 메마름 그리고 높고 낮음을 살피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온갖 풀의 맛과 샘물의 맛을 보고서 백성들로 하여금 취사선택할 수 있는 법을 알게 했다. 이때 신농은 하루에도 칠십 번이나 독에 중독되기도 했다. 요 임금은 효자와 인애를 세워 백성을 부리되 자제(子弟)와 같이 하였다. 순 임금은 방을 만들고 담을 쌓으며 지붕을 잇고 땅을 개간하고 곡식을 심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동굴을 버리고 각자 집을 지을 줄 알게 하였다. 우 임금은 장마 비에 목욕하고 거센 바람으로 빗질하였으며, 탕 임금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잠듦으로써 총명해지도록 힘썼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거두어들이는 것을 줄임으로써 백성들에게 관대하였으며, 덕과 은혜를 베풂으로써 곤궁한 자를 구제하고, 죽은 자를 조문하고 병든 자를 문병하며 고아와 과부를 양육하였다. 이 다섯 성인은 천하의 강성한 군주이면서도 심신을 수고롭게 하여 백성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인들이 백성을 걱정하여 수고하는 것이 이와 같이 분명한데, 그들이 '무위'하였다고 말한다면 어찌 실제 사실과 어긋나지 않겠는가?
천자 이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일이 잘 행해지고 삶이 넉넉해졌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무위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회남자』는 무위를 '열린 무위(通而無爲)'와 '막힌 무위(塞而無爲)'로 구분한다. 이들은 외형상 '무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같지 않으며, 이를 다음과 같이 '성인'과 '미친 자'의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 저 미친 자도 근심이 없고 성인 또한 근심이 없다. 성인이 근심이 없는 것은 덕으로 내면의 조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며, 미친 자가 근심이 없는 것은 화와 복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린 무위'와 '막힌 무위' 또한 '무위'라는 명칭에서는 동일하지만 무위하게 되는 원인은 각각 다르다.
'막힌 무위'란 사람들이 단지 '무위'라는 말에만 집착함으로써 오해하는 소극적이고 정태적인 무위를 가리킨다. 무위라는 말의 피상적 의미에만 집착하여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고요하게 은둔적 자세를 취하며 그러한 행위가 마치 도를 깨달은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열린 무위'란 무엇인가?
『회남자』에서 무위는 두 차례 정의된다.
1. 무위란 응결되고 정체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행위도 자기 주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내가 말하는 무위는 사사로운 뜻이 공적인 길에 끼어들지 않고, 개인적 욕망으로 인해 올바른 통치술이 왜곡되지 않으며, 이치에 따라 일을 실행하고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 공을 세우며, 자연의 형세를 밀고 나가 교묘한 기교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일이 이루어져도 자신이 한 일로 자랑하지 않고, 공을 세워도 그 명예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극을 받아도 반응하지 않고 공격해와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즉 『회남자』에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무위'를 주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외부의 객관적 질서나 구조 속에서 연관짓고 위치시키면서 그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곧 '열린 무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회남자에 대한 평가
부정적 평가
『회남자』는 그동안 중국 철학사에서 외면받아왔다. 지금까지 중국 철학사에서 『회남자』는 잠깐 스치듯 언급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는 『회남자』를 '잡가(雜家)'로 파악하는 주류적 관점 때문이다. 즉, 그동안 『회남자』는 다양한 사상과 내용을 단순히 하나로 모아 놓은 잡동사니, 즉 잡서(雜書)에 불과하다는 시각 때문에 외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책에서 『회남자』는 제자백가 중 어느 학파에도 속하지 않는 '잡가'로 분류되어 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은 '잡가'라는 말을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과 내용을 아무런 조리나 체계도 없이 이리저리 뒤섞어 놓은 것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범문란(范文蘭)은 『회남자』를 "비록 도로써 귀의처를 삼고 있으나 여러 사상을 잡다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일관된 사상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평가했다. 또 일본 학자 우노 데쯔도(宇野哲人)는 "『회남자』는 매우 조잡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책으로서, 그 안에는 천문, 역수와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신화와 전설도 있고, 민속 신앙이 있는가 하면 병가와 법가의 설도 있으므로 일종의 백과전서와 같은 것이다"라고 했다.
긍정적 평가
하지만 『회남자』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유흠(劉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잡가는 대개 의관(議官: 군주의 자문기관)에서 나왔으니, 그들은 유가와 묵가를 겸하였고 명가와 법가를 합하였다. 그들은 국가 경영에는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왕도 정치는 이들 모든 학파를 꿰뚫어야 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이 점이 바로 이 학파의 장점이다.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여 대만 학자 이증(李增)은 "'잡'이란 여러 학파의 사상을 통달했다는 의미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회남자』는 백가의 장점을 고루 섭렵했다고 주장했다. 양계초(梁啓超)는 『회남자』 자체의 유기적 체계를 인정한다. 『회남자』는 미리 세운 계획 아래 심혈을 기울여 저술되었으며, 따라서 일정한 조리와 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회남자』를 단순 '잡가'로 분류해 낮게 평가했던 것은 사실 『회남자』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부 학자들은 선진 시기에 유행한 사상으로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도가와 유가만 알았을 뿐, 그러한 사상들이 종합하고 융합되어 한대(漢代)에 발전한 황로학이라는 하나의 사상 조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한대에 유행했던 도가(道家) 사상은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도가와 크게 다른데, 이는 『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도가……의 술(術)은 음양가의 주장을 따르고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취하며 명가와 법가의 요체를 받아들인다. 때의 변천과 함께하고 사물에 응하여 변화하니, 풍속을 바로 세우고 일을 시행하는 데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기』「논육가요지(論六家要指)」
여기서 언급된 '도가'는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를 고루 섭렵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한대인(漢代人)들이 생각하던 '도가'의 모습이 '황로학', 또는 '황로도가', 나아가 『회남자』가 표방하는 그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회남자』는 전국 말기부터 한대 초에 유행했던 사상적 조류를 당시의 '도가 사상'를 중심으로 제자백가의 장점까지 방대하게 집대성했다고 볼 수 있으며, 『회남자』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사통(史通)』에서 다음과 같이 『회남자』를 찬탄했는데, 『회남자』가 가진 위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옛날 한나라 시대에 유안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름하여 『회남자』라고 하였다. 그 책은 천지를 아우르고 고금을 두루 관통하며 위로는 태공망까지 이르고 아래로는 상앙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천하의 사상들을 모두 모았으니 스스로 이르길, "여러 사상가들을 두루 겸섭하느라 힘이 다 소진되었다"고 하였다.
학술적 가치
현대의 중국 학자 모종감(牟鐘鑒)은 "뭇 학파의 학설들을 모아 도로 귀일시키니, 이것은 곧 서한 도가 사조 최고의 이론적 결정체이며, 중국 사상사(思想史)상 획기적 학술 거작이다"라고 극찬했다. 이에 따라 그는 "회남자를 읽지 않으면 한대 도가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노자지귀(老子指歸)』, 『태현(太玄)』, 『논형』 등의 출현과 위진 현학의 사상적 연원을 이해할 길이 없다"라고 했다. 『회남자』의 학술적 가치는 크게 4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첫째는 한대의 문화와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회남자』에는 중국 한대의 문화 형태와 사유를 반영하는 다양한 정보가 녹아있다. 사유의 방면에서 우주 만물이 어떻게 생성하고 전개되는가(우주 생성론),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상호 감응하는가(천인감응론) 등을 알 수 있다. 또, 한대의 지식과 문화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천문·지리·의학·병법·교육·역사·정치·신화 등 광범위한 지식이 『회남자』에 담겨있다. 즉 우리는 『회남자』를 통해 한대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둘째는 선진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회남자』에는 한대 이전 유행한 온갖 사상들이 수용되어 있다. 도가, 유가, 법가 음양가 묵가 명가 등 제자백가 총망라되어 있고, 특히 그 나름의 체계인 도사론(道事論)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회남자』는 선진 시대의 모든 사상들을 자신의 체계 안으로 끌어들였고, 우리는 이를 통해 선진의 제자백가 사상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는 고대 문헌들에 대한 자료적 가치가 풍부하다. 『회남자』에는 선진 시대의 문헌이 800여 곳에나 인용되어 있다. 『장자』, 『여씨춘추』, 『노자』, 『한비자』, 『역경』, 『시경』, 『주서』, 『한비자』, 『시자』 등의 풍부한 문헌이 『회남자』에 총망라되어 있다. 이는 선진 시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고문을 비교 검증할 때에도 굉장히 요긴하다. 예를 들어 『노자』를 읽을 때 의심되는 원문이 있으면 『회남자』 내의 『노자』 인용구들을 참조해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고유는 "앞서의 현명하고 훌륭한 유학자나 여러 선비 중 『회남자』를 끌어들여 경전을 징험하지 않은 이가 드물다"고 했다. 넷째는 선진 도가에서 위진 현학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 및 도가에서 도교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지금까지 도가 사상사의 주요 연구 대상은 선진 도가(특히 노장 사상)였고, 그 다음은 위진 현학이었다. 하지만 선진 도가와 위진 현학 사이에는 4~5백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는 선진 시대부터 위진 시대 가운데 놓인 한대(漢代)의 도가 사상을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회남자』는 바로 이 한대 도가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참고자료
1. 이석명, 『회남자- 한대 지식의 집대성』, 사계절, 2004
2. 김성환, 『회남자- 고대 집단지성의 향연』, 살림,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