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민음사 펴냄
『처녀들, 자살하다』와 『미들섹스』 단 두 편의 장편소설로 “오늘날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프리 유제니디스. 그의 최신작 『결혼이라는 소설』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십 대 시절의 불안을 다룬 첫 작품인 『처녀들, 자살하다』(1991)는 출간 즉시 『호밀밭의 파수꾼』,『데미안』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문제적인 성장 소설로 알려지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도서관 협회(ALA)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소피아 코폴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두 번째 작품인 『미들섹스』(2002)는 간성(間性)으로 태어나 성별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평생 살아간 칼리오페의 이야기를 통해 성과 젠더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 소설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20년간 단 두 편이라는 과작(寡作)으로 이미 미국 현대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한 유제니디스는 2011년 발표한 세 번째 작품 『결혼이라는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저력을 과시했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미국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가디언》《워싱턴포스트》《살롱》이 꼽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으며 《살롱》 소설상을 수상하면서 독자와 평단의 극찬을 동시에 불러 모았다. 미국 동부 명문대 졸업생 세 명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사랑을 통해 현대 젊은이들의 고민과 방황을 꿰뚫어 그린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뿐만 아니라,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읽게 될 ‘올해의 소설’이 될 것이다.
가슴 아픈 사랑, 그리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했던 우리 모두가 지나온 시절.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내던져진 청년들의 단면을 유쾌하게 그려 낸 작품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매들린, 레너드, 그리고 미첼은 모두 학업을 끝내고 사회에 던져지며 진정한 성인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앞날에 대해 확신도 없고 당장 손에 잡히는 결과도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매들린은 단지 문학이 좋아서 영문과를 선택했고, 부모님이 지원해 주는 덕에 대학원 준비를 하는 등 언뜻 어렵지 않은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연애와 결혼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판단하는 현실적 감각이 부족하다. 레너드는 이루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은 많지만 억제할 수 없는 감정적 널뛰기, 부정적이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생각과 타인에 대한 날선 태도 탓에 힘겨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미첼은 가장 평범한 인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경험을 통해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의 일화는 현재 청춘을 보내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미 거쳐 온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만하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올바른 선택이 뭔지 모른 채 방황했던 시절은 비단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청춘을 지나온 모든 사람에게 이 소설은 각자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이 현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상황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많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1980년대에 겪고 지나온 경험을 그린 이 소설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며 사회적 변화의 양상이 세계적으로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묘미 중 하나다.
“넌 정말로 해피엔딩이 있다고 생각해?” 전통적인 소설 속 여성은 언젠가는 멋있는 남자를 만나 로맨틱한 사랑을 하고 결혼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현대의 여성에게도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소설 속 매들린은 제인 오스틴과 롤랑 바르트식 연애론에 감명 받으며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문학소녀다. 그러나 그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레너드는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맞지 않는 남자였다. 좌충우돌 연애 과정을 거쳐 결혼까지 하게 된 매들린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가족의 반대에도 연연하지 않고 돌진했다는 점에서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매들린의 애정 모험은 요즈음 젊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고민으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다. 그러나 작가는 반전과도 같은 결말 부분을 통해 이 시대에 과연 결혼이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전통 소설 속에서와 같은 낭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회, 정해진 관습대로, 정해진 신분대로 살며 사랑만 얻으면 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미래에 대한 확신도, 타인에 대한 확신도 부족한 현대에서 결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씁쓸한 단상을 남긴다. “성적 혁명이 본격화된 현대의 나날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연애 이야기.”(《워싱턴 포스트》)라는 평을 얻기도 한 이 작품은 여러 현지 언론 리뷰를 통해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 『여인의 초상』과 같은 전통적인 결혼 소설의 뒤를 잇는 동시에 현대의 연애와 결혼관을 다루는 소설로 평가되었다.
이 작품에는 현대 젊은이들이 열광하거나 고민하고 있는 키워드가 가득하다. 유제니디스는 1980년대 미국 대학생들의 일상을 리얼하게 그리는데, 이는 30여 년이 지난 현대의 한국의 사회적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매들린과 레너드는 연애하면서 곧 동거를 시작하는데,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그려지며 보수적인 매들린의 부모님조차 딱히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매들린이 참석하는 영문학회에서는 한창 문학 내에서의 페미니즘 분석론이 활발해져 있으며, 이는 프랑스에 간 미첼이 만난 페미니스트 클레어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레너드는 조울증을 겪으며 약을 복용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심리 상담이 활발해져 우울증이나 조울증이 정신병이라는 오명을 씻고 양지로 드러난 현 시점의 국내 상황과 맞닿아 있다. 한편 미첼이 졸업 후에 사회 진입을 뒤로 미루기 위해 세계여행을 가는 장면, 매들린이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지만 스펙이 부족해 떨어지는 장면 등에선 인문대 대학생들의 취업난에 대한 촌철살인과도 같은 메시지를 준다. 이렇듯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을 통해 유제니디스는 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겪는 여러 문제를 그대로 그려 낸 리얼리즘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다. 헬조선과 삼포세대로 대표되는 국내 젊은이들의 현실과도 일맥상통하는 미국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가슴 찡한 공감과 숨 가쁜 재미로 독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