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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왕가의 몰락 (삼상31:1-6절)
다윗이 유다 남쪽 경계에서 아말렉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있는 동안 사울의 불행한 통치의 마지막 장이 이스라엘 북쪽 먼 곳에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블레셋 군사 지도자들에 의해 쫒겨난 후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을 다시 공격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기인 병거를 십분 활용하기 위하여 유대의 산지보다 북부의 수넴 땅 평지를 자신들의 전투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산지에서 싸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이스라엘 군사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무시한 사울 왕 역시 갈보아 산 근처의 평지 동쪽 끝에 병력을 집결시켰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양쪽 군사들의 접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시작부터 블레셋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삼상31:1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치매‘ 라는 히브리어 ’라함‘은 ’삼키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먹이처럼 잡아먹히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치 큰 짐승이 작은 짐승을 순식간에 덮쳐 잡아 먹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국력에 비하면 블레셋은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와 국력, 그리고 패전하고 있는 하마스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소국인 블레셋이 한 번 공격하자 대국인 이스라엘이 무참히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전투를 벌인 길보아 산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4번의 전쟁이 치러진 곳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여사사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친 기손 전투입니다. 둘째, 기드온의 용사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친 미디안 전투입니다. 셋째, 요시아 왕이 애굽의 바르느고와 싸우다가 죽은 므깃도 전투입니다. 넷째, 사울 왕이 치른 블레셋 전투입니다. 요단과 이스르엘을 잇는 중요한 지점인 길보아 전투에서 패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전쟁 전체에서 패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전투에서 사울의 세 아들이 전사하였고, 사울 역시 큰 부상을 당하여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사울 왕가는 마침내 몰락하고 만 것입니다. 사울 왕가의 몰락은 인본주의적 동기에 의해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 된 자로서 신본주의적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삼상12:15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언 같은 교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오늘은 사울 왕가의 몰락의 원인을 살펴 보고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사울 왕은 타락한 가나안 족속의 자손이었습니다.
생물 학자 찰스 다윈은 사람들에게 진화론의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단세포 동물이 점점 진화해서 원숭이가 되고, 이것이 다시 사람으로 변한다는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원주민이 살고 있는 섬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느 날 그는 원숭이처럼 생활하는 주민들이 모인 미개한 섬을 발견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며, 법도 언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옳지, 이곳을 잘 연구하자.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존재가 바로 이곳임을 밝히리라.’ 다윈은 30년 후 이 마을을 다시 찾았는데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있었습니다. 마을 한복판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예배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미개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다윈은 더 이상 진화를 증거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은 끝까지 그의 진화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한 자기의 길로 끝까지 간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 왕가의 몰락을 논하기 전에 그의 족보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9:35-36 기브온의 조상 여이엘은 기브온에 거주하였으니 그의 아내의 이름은 마아가라 그의 맏아들은 압돈이요 다음은 술과 기스와 바알과 넬과 나답과...
*대상9:39-40 넬은 기스를 낳고 기스는 사울을 낳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으며 요나단의 아들은 므립바알이라 므립바알은 미가를 낳았고...
사울 왕의 조상은 기브온 족속이었으며 그들은 베냐민 지파에 귀속한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기브온의 조상 여이엘에게 바알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사울의 아들 중에도 에스바알이라는 아들이 있으며, 요나단의 아들도 처음 이름이 므립바알이었습니다. 므립바알의 뜻은 바알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므비보셋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가장 큰 축복이 때로는 가장 악한 저주로 변하고 마는 사실은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하나님께서 좋다고 생각하실 때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급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시간표에 따라 왕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할 수 없이 허락을 내렸습니다. 시작이 이처럼 상서롭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정 정치는 사실상 밝고 긍정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첫 번째 왕 사울은 외모가 준수했고 통치를 시작한 지 처음 얼마 동안에는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했으며, 장차 위대한 일을 할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필적할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우 인상적인 젊은이였으며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삼상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하나님의 영이 권능으로 사울에게 임했으며, 그는 암몬 사람에게서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기 위해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시험과 부족에 노출되었습니다. 신정 국가의 왕인 사울은 자기 신하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일차적인 책임이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사울은 유능한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에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은 사사시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가 다스린 40년간의 통치 기간 중 거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다스렸습니다. 그의 통치와 개인 생활에 금이 간 것은 그의 통치가 10여 년을 남긴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다윗과 불화하고, 정치는 분열이 시작되면서 내전으로 악화됩니다. 그는 통치의 기본이념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신정 국가의 통치 이념이나 세상 국가의 통치 이념이나 다 똑같이 알아두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시편 기자가 노래합니다.
*시2:10-12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사울의 실패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왕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에 대하여 주권적이며, 은혜롭게, 구속적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지상에 전시해 놓은 진열장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다스리는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으며, 그가 섬기는 제도는 참되신 왕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시였습니다. 사울은 약간의 실수를 범했거나 영적인 분별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이 좀 모자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또 공인으로서 사적인 죄를 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가 실패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자기의 소명을 철저하게 부인했으며,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했고,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무시하고 자기 임의대로 처신했습니다. 그 첫 번째 경우로 블레셋과 전투할 때에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선지자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사태가 급박해지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법을 무시하고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망령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왕권몰락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삼상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두 번째 경우는,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 중에 임의로 금식령을 내렸습니다.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일은 백성들의 범죄를 유발시켰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지 못했던 왕자 요나단이 꿀을 먹은 죄로 죽음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경우는,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할 때에 여호와의 명령을 거절하고 아말렉 왕 아각과 양과 소의 좋은 것을 살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왕위의 폐위 소식을 들었습니다.
*삼상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시한 것이 사울의 가장 큰 죄였고 이것이 그의 몰락을 초래하였습니다.
2. 끝까지 자신의 길로 걸어간 사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거부를 당했기는 했어도 사울은 오랫동안, 심지어 상당한 나이가 들 때까지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대략 70세 가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떠났으며, 그는 계속하여 자기 길로 갔습니다. 갈 때까지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증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이려고 몇 차례나 시도했으며, 놉의 제사장을 모두 학살했습니다. 거기에다 죽기 얼마 전에 엔돌에 있는 무당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미리 말씀을 주신 바 있었습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점치는 죄와 같은 거역의 죄를 범한 사울은 마침내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서 직접 점치는 죄를 범했으며, 자신의 목숨과 왕국의 보존을 위해 사탄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왜 무당을 찾아갔을까요. 그 이유는 사울 왕의 유일한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이제 그의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그의 곁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과 은혜가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사울이 불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크게 떨린지라.‘ 이스라엘이 진 친 길보아 산은 불레셋이 진 친 수넴보다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전략상 유리할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세밀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사울이 왜 그토록 그 마음이 크게 떨렸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으나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울과 싸우기를 그쳤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어두운 심령의 세계로 향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변장하고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무당에게 선지자 사무엘을 사자의 세계에서 불러오라고 합니다. 무당은 그가 요구한 대로 했으며, 놀랍게도 사무엘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사울이 정말 사무엘의 영을 만났는가, 아니면 사단의 영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당을 접신녀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바알라트 오브‘라는 이 말은 ’귀신을 다스리는 자.‘이며, 히브리어 ’쇼엘 오브‘라는 말은 ’귀신에게 묻는 자.‘ 라는 뜻으로 접신녀란 귀신을 불러 미래의 일을 묻는 자, 또는 기도나 주문으로 자신에게 신이 내리게 한 뒤 자신과 인간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는 영매자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것을 초혼이라고 하는데 초혼술이란 접신녀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신18: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그러므로 접신녀가 베푸는 초혼술은 이교적 사술로서 하나님께 지극히 가증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이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접신녀에 의해 사무엘이 불러올려졌다면 이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이며, 그의 정체는 사탄이나 또는 귀신입니다. 그렇다면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상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미 하늘 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런 선지자가 무당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강권적인 역사로 거짓 선지자 발람을 통해서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변화산으로 모세와 엘리야를 오게 하여 예수님과 대화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특별한 역사를 하십니다. 그것은 천국에 있는 사무엘로 하여금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접신녀 앞에 나타난 것은 사무엘의 형상을 입은 영의 실제적인 출현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사탄의 기만이라거나 사울의 단순한 환영이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당이 죽은 자를 사자의 세계에서 데려올 정도로 힘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은 접어두고서라도 그녀가 어떤 술수를 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라는 말에서 ’보다‘ 라는 히브리어 ’라아‘는 ’확실히 보다. 증명하다.‘ 라는 뜻이므로 그녀는 무엇을 본 것이 확실합니다.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사무엘 선지자의 출현에 당혹한 나머지 충격을 받은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서 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으로 보통 하나님으로 번역되는데 하나님으로 쓰인 뜻은 아니더라도 귀신이나 사탄의 영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라고 할 때에 ’겉옷‘이라는 히브리어 ’메일‘은 ’덮는다‘ 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 발목까지 덮이는 긴 외투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입는 종교적 제복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인정할 때 사무엘의 출현은 무당의 신력이나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그를 통하여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 거부당했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불러낸 데 대하여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면 선지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하신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왕국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며, 그 사람은 바로 다윗이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예언했습니다. 그는 또 사울이 블레셋 군대에게 패할 것이며, 그와 그의 아들들이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슬픈 인생 위에 새긴 하나님의 묘비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지만 저주의 말씀이든지, 심판의 말씀을 듣고 그 즉시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이 전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더라면 그가 전투에는 지고 육체는 말씀대로 심판을 받았을지라도 그 영혼은 구원을 받았을 것인데 그의 영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당시 사울은 심히 군급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심히 급박한 상태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는 그의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신 것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블레셋의 손에 붙이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내일 이맘때가 되면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들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 사무엘과 같은 입장이 되기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려 올렸나이다” 그 질문에 대해 사무엘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사울은 두려워 쓰러졌습니다. 땅에 온건히 쓰러졌습니다. 너무 늦은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큰 전쟁을 앞두고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마음이 없이 행해지는 형식적인 경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사울은 심히 고통 했습니다. 자신과 아들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경각하며 몸서리쳤습니다. 그는 이제 쓰러졌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그가 치러야 했던 영적 전쟁에서 완전히 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으로 지내 온 40년의 세월. 그토록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만왕의 왕 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못하고, 주님의 모습을 백성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이제 그의 육신과 그의 자녀들의 죽음에 대한 예고와 자신의 왕좌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는 소리에 그 영혼과 정신이 다 녹아 버린 철저한 육에 속한 인간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용사였고 왕이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한 육신의 인생이었습니다.
3. 사울은 자기 인생에서 온전히 패전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책 인생론에서 인생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습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사자를 만나 도망하다가 마침 우물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피하려하니 그 속에는 뱀이 꽈리를 틀고 앉아 있기에 하는 수없이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위험을 모면했습니다. 그런데 위를 쳐다보니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나와서 나뭇가지를 갉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나뭇가지는 부러질 것입니다. 나그네는 극도로 불안했지만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냥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이 인생임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은 궁지에 빠진 나그네 같은 한계 상황에 몰려있습니다. 사울 역시 사느냐 죽느냐의 마지막 상황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러한 불신자의 인생의 마지막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세 가지의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 쫒김을 받게 됩니다
*삼상31: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사울은 전쟁을 피하여 도망했지만 블레셋 병사들이 그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 미쳤습니다. 여기서 “따라 미치다” 라는 히브리어 ’마차‘는 ’알다. 찾다. 화를 당하다.‘ 라는 뜻으로 기본적 의미는 ’만나다‘ 입니다. 이 말은 목숨을 찾는 자가 도망자의 의도를 미리 알고, 도망자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기필코 붙잡아서 화를 당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운명이 이와 같아서 칼로 몰살을 당하고, 여기서 살아남은 자는 포로가 되며, 또 애굽으로 도망하는 자에게는 칼과 기근이 끝까지 따라붙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자는 끝까지 쫓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울에게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쳐서 중상하게 만들고 이제 그의 최후를 맞이하게 만듭니다.
둘째,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쫒기는 자와 그 주위에 있는 자를 강하게 사로잡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노라” 라는 말 ’이스레‘의 기본의미는 ’떨다‘ 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주위를 의식하여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사울이 두려워했던 것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이 와서 자신을 모욕할까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할례받은 족속이요 이방인과 다른 사람일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요 세속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한평생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 것입니다.
셋째, 삶을 포기 합니다.
사울은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욕을 포기하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때 그는 그의 칼 위에 엎드려졌습니다. “엎드려지다” 의 의미는 ’망하다. 항복하다‘의 뜻을 지닙니다. 사울은 자신의 삶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는 심정으로 삶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분이 “단추를 채우면서” 라는 시를 섰습니다. 이 시인은 옷을 입으면서 인생의 삶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모양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 /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 그래, 그래, 산다는 것은 / 옷에 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것, / 옷 한 번 입기도 힘들다는 것...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 쉽고 간단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살다가 보면 모든 것이 실수요, 실패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지만 다시 산다 해도 바른길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울이 패전했다고 했습니다. 나플레옹은 말하기를 ’나의 몰락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의 탓이다. 내가 나 자신의 최대의 적이었고, 나 자신의 비참한 운명의 원인이었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패전하다‘ 라는 히브리어 ’카베드‘의 기본의미는 ’무겁다‘입니다. 사울의 일생을 이 의미에 접목시켜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존귀하고 높임 받는 왕으로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나 마음이 강퍅하고 둔하여 하나님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순종하기를 싫어함으로써 결국 맹렬한 전투에서 패전하여 그 전쟁이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그 짐에 눌리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우리의 미래에 길보아 전투는 없는지 살펴보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사는 길이요. 영생을 얻는 길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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