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면서 그라운드의 열정을 느껴보시길.. 기사분야 : 야구 게재일자 : 1998년10월27일 현대 김경기는 ‘인천 야구의 자존심’으로 불린다. 상인천중―인천고 출신인 그는 인천 연고의 프로구단 삼미(83∼85년)와 청 보(85년) 감독을 지내며 ‘인천야구의 대부’로 자부하던 아버지 김진영씨와 인천고 야구부 선후배 사이.고려대를 나와 90년 인천의 3번째 연고구단으로 바통을 이어받았던 태평양에 우선지명으로 입단했다. 김경기는 이후 3할은 못쳤지만 꾸준히 2할대 후반의 높은 타율을 올려 팀 의 간판타자로 자리잡았다.96년 4번째 연고구단인 현대가 인천에 진주했어도 그는 여전히 ‘부동의 4번타자’ 였다.. 올해로 30살,프로 9년차인 김경기에게는 아직 아버지 때부터 풀지 못한 숙 제가 있다.인천 연고팀이 아직까지 한번도 우승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전국 7개 프로야구 연고지역 가운데 전주와 인천만이 패권을 차지 못했다. 그러나 91년부터 레이스에 뛰어든 막내 쌍방울과 프로 원년 멤버인 인천팀은 비교할 게 못된다. 김경기는 이번이 자신의 선수생활중 3번째 한국시리즈 도전이다.94년에는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LG와 맞붙어 4전 전패를 당했고 96년 현대로 출전,해 태에 2승4패로 졌다. 이번 한국시리즈를 뛰는 김경기의 각오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 로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왼쪽 눈에 다래끼가 생겨 타격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그는 1,2차전동안 9타 수 4안타로 4할4푼대의 맹타를 휘둘렀다.게다가 온 몸을 던지는 멋진 수비로 현대 1루에 철옹성을 구축했다. “이제 한국시리즈 우승이 눈앞에 보인다”는 그는 “오래 끌 것 없이 LG 에게 4연승으로 이겨 우승기를 안고 인천에 돌아가겠다”며 활짝 웃었다.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 눈물의 역사 1998년10월31일 인천야구가 한을 풀었다.프로야구 원년인 82년 삼미 슈퍼스타즈를 시작으 로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로 구단이 바뀌면서 한번도 정 상에 올라보지 못했던 인천야구가 17년만인 98년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인천야구의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원년 삼미는 6위로 꼴찌.이때 승 률 0.188은 아직도 역대 한시즌 최저승률로 남아 있다.83년 재일동포투수 장 명부를 수입,일약 3위로 뛰어올랐지만 이후 또다시 추락.85년 청보,88년 태 평양이 구단을 인수한 뒤에도 여전히 바닥권을 면치 못했다.박정현이 신인왕 에 올랐던 89년 3위가 그나마 좋은 성적. 그러나 94년부터 2년 터울로 인천연고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 ‘짠물야구 ’가 바야흐로 중흥기를 맞았다.94년 정민태 위재영 정명원 등 막강투수진을 구축한 태평양은 플레이오프서 한화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LG와 격돌했 으나 결과는 내리 4연패.그리고 96년에는 4백30억원에 구단을 인수한 현대가 우승에 도전했다.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서 2연패뒤 3연승을 거둬 한국시리 즈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해태에 2승4패로 밀려 두번째 좌절을 경험했다. 그리고 98년.현대는 꿈에도 그리던 우승기를 품에 안아 인천야구의 비원을 풀었다.현재의 전력으로 볼 때 향후 몇년간은 현대의 상위권 유지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출처 스포츠 서울.
기사분야 : 야구 게재일자 : 1998년10월27일
현대 김경기는 ‘인천 야구의 자존심’으로 불린다. 상인천중―인천고 출신인 그는 인천 연고의 프로구단 삼미(83∼85년)와 청 보(85년) 감독을 지내며 ‘인천야구의 대부’로 자부하던 아버지 김진영씨와 인천고 야구부 선후배 사이.고려대를 나와 90년 인천의 3번째 연고구단으로 바통을 이어받았던 태평양에 우선지명으로 입단했다. 김경기는 이후 3할은 못쳤지만 꾸준히 2할대 후반의 높은 타율을 올려 팀 의 간판타자로 자리잡았다.96년 4번째 연고구단인 현대가 인천에 진주했어도 그는 여전히 ‘부동의 4번타자’ 였다.. 올해로 30살,프로 9년차인 김경기에게는 아직 아버지 때부터 풀지 못한 숙 제가 있다.인천 연고팀이 아직까지 한번도 우승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전국 7개 프로야구 연고지역 가운데 전주와 인천만이 패권을 차지 못했다. 그러나 91년부터 레이스에 뛰어든 막내 쌍방울과 프로 원년 멤버인 인천팀은 비교할 게 못된다. 김경기는 이번이 자신의 선수생활중 3번째 한국시리즈 도전이다.94년에는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LG와 맞붙어 4전 전패를 당했고 96년 현대로 출전,해 태에 2승4패로 졌다. 이번 한국시리즈를 뛰는 김경기의 각오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 로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왼쪽 눈에 다래끼가 생겨 타격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그는 1,2차전동안 9타 수 4안타로 4할4푼대의 맹타를 휘둘렀다.게다가 온 몸을 던지는 멋진 수비로 현대 1루에 철옹성을 구축했다. “이제 한국시리즈 우승이 눈앞에 보인다”는 그는 “오래 끌 것 없이 LG 에게 4연승으로 이겨 우승기를 안고 인천에 돌아가겠다”며 활짝 웃었다.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 눈물의 역사 1998년10월31일 인천야구가 한을 풀었다.프로야구 원년인 82년 삼미 슈퍼스타즈를 시작으 로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로 구단이 바뀌면서 한번도 정 상에 올라보지 못했던 인천야구가 17년만인 98년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인천야구의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원년 삼미는 6위로 꼴찌.이때 승 률 0.188은 아직도 역대 한시즌 최저승률로 남아 있다.83년 재일동포투수 장 명부를 수입,일약 3위로 뛰어올랐지만 이후 또다시 추락.85년 청보,88년 태 평양이 구단을 인수한 뒤에도 여전히 바닥권을 면치 못했다.박정현이 신인왕 에 올랐던 89년 3위가 그나마 좋은 성적. 그러나 94년부터 2년 터울로 인천연고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 ‘짠물야구 ’가 바야흐로 중흥기를 맞았다.94년 정민태 위재영 정명원 등 막강투수진을 구축한 태평양은 플레이오프서 한화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LG와 격돌했 으나 결과는 내리 4연패.그리고 96년에는 4백30억원에 구단을 인수한 현대가 우승에 도전했다.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서 2연패뒤 3연승을 거둬 한국시리 즈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해태에 2승4패로 밀려 두번째 좌절을 경험했다. 그리고 98년.현대는 꿈에도 그리던 우승기를 품에 안아 인천야구의 비원을 풀었다.현재의 전력으로 볼 때 향후 몇년간은 현대의 상위권 유지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출처 스포츠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