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유럽의 진정한 비극은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이다.”
‘납치된 서유럽’이란, 중앙 유럽이 유럽 정치, 사회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간과하여 서유럽 자체가 사라질 위험을 가리켜 쿤데라가 한 말로, 이는 세계사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지 못하고 변방에 자리함으로써 늘 소멸 위기에 시달리는 중앙 유럽의 작은 국가들의 비극적 처지를 뜻하기도 한다. 체코어라는 비주류 언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어 프랑스 망명의 기회를 잡고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된 쿤데라는 지역의 한계를 넘지 못한 체코 문학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깊었다. 그리고 오랜 침체기 끝에 1960년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은 체코 문화가 스탈린주의라는 또 다른 장애물에 의해 다시 파괴되는 것에 대해 깊은 분노를 느꼈다. 「문학과 약소 민족들」에서 발견되는 이 같은 문제의식은 「납치된 서유럽」에서 유럽 통합과 세계화라는 거대한 통합을 향해 나아가던 서유럽과, 그들과 같은 역사적·문화적 뿌리를 공유함에도 외면당하는 중앙 유럽 약소국들의 운명으로 확장된다. 그는 소련의 탄압하에 언어와 문화가 위협받는 중앙 유럽 약소국들이 국가 정체성을 잃고, 결국 서구 세계마저 파괴될 것이라 호소하며 서구의 각성을 촉구한다.
여기서 중앙 유럽이란 구체적으로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을 일컫는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체코, 헝가리, 폴란드는 흔히 동유럽으로 일컬어지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동유럽은 비잔틴, 정교회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체코, 헝가리,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문화에 뿌리를 둔 서유럽 문화권에 속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서진 욕망 때문에 이들 세 국가가 ‘슬라브 세계’라는 실체 없는 개념에 묶여 동유럽으로 인식되었고, 바로크 문화를 꽃피우고 서유럽과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유럽 문화 사조의 역동적 발전에 기여한 중앙 유럽의 중요성은 점점 간과되어 이제 그 존재조차 희미해졌다는 것이 쿤데라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망각과 소멸을 가장 강력하게 추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서유럽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이상 문화가, 그리고 한 사회의 대표자로서의 지식인(작가)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게 된 서유럽 사회의 상업적 변화이다. 가장 강력한 정체성으로서의 문화를 부정하게 됨으로써 서유럽은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하기에 이르고, 그럼으로써 “최소 공간 속에 최대 다양성”을 표방하는 중앙 유럽은 더 철저하게 지워진다.
쿤데라에 따르면 약소 민족들로 이뤄진 중앙 유럽 국가들이 결집한 역사가 있다. 바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합스부르크 제국이다. 그러나 제국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를 막을 실질적인 방책은 사라졌다. 이후 중앙 유럽의 약소국들은 물론 오스트리아마저 더 강대한 독일 민족과 문화에 동화되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나라가 없어 전 세계 모든 곳이 조국이었던 유대인이자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소설을 쓰기를 선택한 체코인 카프카에게서 쿤데라는 중앙 유럽의 운명을 발견한다. 병합에 가까운 더 큰 문화에의 동화와 그로 인한 다종다양한 문화의 소멸에 관한 밀란 쿤데라의 깊은 염려는, 세계화가 가속화한 지 오래이며 인터넷의 발달로 전 세계가 동시에 몇 안 되는 창작물에 열광하는 지금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온다.
격동하는 21세기 유럽 정세를 예견한 거장의 눈
밀란 쿤데라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와도 같은 책
『납치된 서유럽_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에 실린 두 편의 에세이는 밀란 쿤데라가 발표 이후 한 번도 단행본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들로, 작가로서 그가 조국으로 택한 프랑스에서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작가의 전작을 싣는다.)를 펴냈을 때도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글들이다. 그러다가 수십 년 후인 2021년 11월 프랑스 갈리마르의 ‘데바 총서’로 출간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몇 개월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 사태를 예견한 그의 글들은 다시 한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의 집요한 서진 정책으로 근접한 국가들의 안보는 물론 세계 정치 경제까지 요동치는 현재, 『납치된 서유럽_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길을 제공한다. 또한 이 책은 쿤데라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열쇠와도 같은 책으로, 그중에서도 후기 작품들과 논픽션의 씨앗이 된 생각들을 엿볼 수 있어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물론 작가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논지와 성찰이 담긴 이 두 편의 에세이는 살아 있는 신화 밀란 쿤데라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다.
소위 창연한 역사를 지닌 유럽 강국에겐 그들이 그 안에서 발전을 거듭해 온 유럽적 배경이 당연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각성기와 수면기를 번갈아 겪어 온 체코인들은 유럽적 의식의 발전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단계를 놓쳤고, 그리하여 매번 유럽의 문화적 배경에 적응해야 했고,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어 재구성해야 했습니다. 체코인들은 그들의 언어나 유럽에의 소속, 그중 어느 것에서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경험을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20쪽)
오늘날 우리 예술이 번창하는 것은 바로 정신의 자유가 진전된 덕분입니다. 체코 문학의 운명은 이제 그 자유의 정도에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자유를 언급하면 화를 내고, 사회주의 문학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면서 항변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자유에 한계가 있다는 말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 한계는 지식의 상황, 편견의 규모, 교육 수준 등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렇지만 어떤 새로운 진보의 시대도 자체의 한계에 의해 규정된 적이 없었습니다! (28쪽)
1983년 11월 《데바》지(27호)에 실린 뒤 곧바로 대부분의 유럽 언어로 번역된 이 글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영향을 미쳤다. 20페이지 분량의 이 글은 동유럽에서는 독일과 러시아에서 촉발된 토론과 논쟁 등으로 넘쳐나는 반응을 일으켰다. 또한 서유럽에서는, 자크 루프니크의 표현에 따르면, 1989년 이전 “유럽에 관한 마인드맵을 다시 그리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과연 이 글에는 어떤 폭발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35쪽)
1956년 9월, 헝가리 통신사의 편집부장은 포격으로 자신의 사무실이 파괴되기 몇 분 전, 당일 아침 개시된 러시아의 부다페스트 침공에 관한 절망적인 메시지를 전 세계로 타전했다. 급전은 “우리는 헝가리를 위해, 그리고 유럽을 위해 죽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 문장은 무슨 의미였을까?
(…)
“조국을 위해, 유럽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모스크바에서도 레닌그라드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부다페스트나 바르샤바에서는 가능하다. (39~40쪽)
독일이나 프랑스 지식인은, 이런 저항들이 문화로부터 지나치게 큰 영향을 받으면 그 저항은
진정한 것일 수 없고, 진짜로 민중적인 게 아니라고 여긴다. (…) 그들은 앞서 말한 봉기들보다는 ‘연대’ 운동을 더욱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대’ 운동은 본질이라는 면에서 봉기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연대’ 운동은 봉기의 정점일 뿐이다. 그것은 민족과 국가 문화 전통과의 결합, 즉 공격당하거나 무시되거나 핍박받던 문화 전통과의 가장 완벽한(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결합인 것이다. (45~46쪽)
한 폴란드 작가가 러시아의 위대한 여성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를 만났다. 폴란드 작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금지되었다는 것이었다. 안나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투옥되었었나요?” 폴란드 작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최소한 작가 연맹에서 추방되었겠군요?”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뭐가 불만이세요?” 아흐마토바는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51~52쪽)
20세기에 들어서 다른 상황들이 목격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했고, 러시아가 영토를 병합했고,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중앙 유럽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 폭동들은 미지의 해결책을 두고 벌이는 큰 금액이 걸린 도박에 불과하다. (62쪽)
20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중앙 유럽의 모든 위대한 작품은 유럽인의 종말 가능성에 관한 오랜 성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7쪽)
갑자기, 우리는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위대한 화가, 극작가, 음악가는 있었지만, 그들은 유럽의 정신적 대표자로 받아들여질 만한 도덕적 권위자라는 특권적 지위를 사회에서 더 이상 차지하고 있지 못했다. 이제 문화는 최고의 가치가 실현되는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당시 내가 살고 있었던 구시가 광장 쪽으로 걸었고, 끝없는 고독을, 허탈감을, 문화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유럽이라는 공간의 빈자리를 느꼈다. (7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