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53
부처님 법문은 다 우리한테 이익되고 또는 부처님 법문을 법을 지킴으로 해서 우리한테 우리 건강으로 보나 어떤 걸로 보나 우리를 그렇게 행복스럽게 유도하신단 말입니다. 『반야심경』 말씀이나 또 『금강경』 말씀이나 또는 『화엄경』 말씀이나 모두가 다 근원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이 꼭 그 외워두실 아집ㆍ법집이라, 아집ㆍ법집을 떠나는 거란 말입니다. 아집ㆍ법집을 떠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 떠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됩니다. 우리 중생들은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도몽상(顚倒夢想)으로 봅니다. 『반야심경』에서 그 모두가 다 모든 가르침이 전도몽상을 떠나서 참다운 진리를 깨달으라는 그런 말씀 아닙니까.
전도몽상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가 다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해악이 끝도 갓도 없다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마음도 가볍고 몸도 가볍고 자기 집안도 화목하고 사회도 그럴 것인데, 이 생명이란 것이 천지 우주가 하나의 생명인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가 반야바라밀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거꾸로 보고 뒤바뀌어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너는 너고 나는 나란 말입니다. 하나의 불성(佛性) 위에서 우주는 지금 진여불성이 우주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주에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각 원자, 원자가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원자의 끄트머리가 무엇인가, 원자의 근원이 무엇인가. 이것은 현대물리학에서는 근원을 모릅니다. 근원은 오직 성자의 투철한 안목에서만 원자의 그런 기본을 압니다. 원자의 기본이 즉 말하자면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알기도 천하에 쉽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물리학은 모양이 있는 자리까지만 규명해내는 것이지 모양이 없는 것을 현대물리학은 알아차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물질적인 것만 현대물리학은 압니다. 그러나 물질의 그 가장 끄트머리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原理)라. 그 투철한 물리학자가 다 증명해낸 걸로 보면 확정스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원자 그것도 시시각각으로 변동해서 마지 않습니다.
서로 상호교환되고 또 몇 초도 못가서 원자의 그런 경계에 있는 소립자는 그때그때 변화가 되고 맙니다. 어느 것도 물질이란 것이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도리를 부처님께서는 벌써 그 당시에 그 당시에 투철하고 소상히 말씀했다 말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것은 다 실재가 아니단 말입니다. 다 가상(假相)에 불과하다, 우리 몸도 이것도 저것도 그 소중한 다이아몬드도 모두가 다 허상에 불과하다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확실히 믿어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우면 피가 맑아져서 우리 몸이 병고로 나쁜 그런 병액(病厄)으로 해서 침범을 당하지 않습니다.
가장 건강한 생활도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오로지 믿는 생활입니다. 여러 가지 부처님 공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것을 고집은 절대로 말고 또는 자기가 인연 따라서 취한대로 화두를 선택했으면 화두공부를 열심으로 하고, 또 염불을 선택했으면 염불을 하고 다만 그 뿌리는 다 똑같다 말입니다. 오직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본래의 자리를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헌데 공부를 하다 보면 자기 공부가 좀 잘 되어가면 아이 이것은 내가 하는 공부만 제일 좋고 다른 사람은 이건 좋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팔만사천법문은 모두가 다 성불하는 길로 인도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우리가 그 법집을 말으시고 법집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말로 해서는 근본주의ㆍ원리주의입니다. 법 법[法]자, 집착할 집[執]자, 법집(法執) 이것이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고 사회도 해칩니다. 따라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니 천지 우주는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 진리뿐입니다. 진리뿐인 것을 우리가 그래저래 거꾸로 보는 지혜로 해서 우리가 시비분별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마음도 괴롭고 자기 가정도 괴롭고 또 가정도 화합도 안 되고 말입니다.
부처님 진리로 사는 것이 자기 개인적으로 보나 가정으로 보나 사회로 보나 어느 면으로 보나 제일 수승한 법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참 건강하게 금생을 지내시고 또 우리 죽음이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업(業)에 따라서 잠시간 모아진 이 몸뚱이 이 가상假相, 가상만 그때그때 인연因緣이 다하면 바꾸어지는 것이지 우리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 아닙니까.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숨이 끊어지면 그냥 그 허튼 업으로 해서 모아놓은 이 몸뚱이 세포는 그대로 사라지겠지요. 그러나 생명 자체는 그냥 즉시에 일초의 시차도 없이 즉시에 또 내생에 가서 몸을 받습니다.
천상도 분명히 있고 극락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천상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 선업(善業) 따라서 어느 공간에 공해가 적은 공간에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극락세계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 마음에 번뇌가 없으면 우리 마음에 아집과 법집이 없으면 어디에나 다 극락세계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정거천(淨居天)이라, 청정한 또 성자가 지내는 그런 처소가 있어요. 그런 데가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성자들은 성인들은 그 도처에가 이대로 극락세계고, 제가 더 확실히 말씀드리면, 이 세계가 본래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스스로가 어두워서, 어두워서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고, 그런 우리가 좁혀서 보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아주 옹졸한 그런 세계가 된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마음만 닦아지면 유마거사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 따라서 마음이 5만치 닦아지면 이 세계도 5만치 정화가 되고 우리 마음이 10만치 닦아지면 또 그때는 10만치 정화가 되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화 여하에 따라서 이 세계는 좋게도 보이고 나쁘게도 보이는 것입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평등일여(平等一如)의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이 금타(金陀)대화상은 위대한 스님입니다. 금타대화상은 제가 생각할 때는 1300년 전에 나오신 6조 혜능스님, 그 법문하고 금타대화상께서 내놓으신 『금강심론』, 저는 대조를 다 해봤어요. 대조를 여러 번 해봤습니다.
헌데 그 6조 스님 다음에 6조 스님 법문을 가장 충실하게 깨닫고 또 펴신 분이 저는 금타대화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그 법문에 증거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무엇인고 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맨 처음에 우리가 봉독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 6조 혜능스님이 그 내놓으신 『육조단경』, 『단경』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과제가 즉 말하자면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로 부처인데 우리마음 그 본래로 부처 공덕은 삼신(三身)이라, 청정법신(淸淨法身)이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의 본체성은 청정법신이요, 우리 마음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은 원만보신(圓滿報身)이요, 또는 일체 차별 지혜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은 그때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요, 이래서 6조 스님께서 하신 『육조단경』의 핵심이 즉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 ‘삼신사지(三身四智)’를 다 온전히 갖추고 있다, 이런 뜻이라 말입니다.
또는 6조스님께서 『육조단경』의 「부촉품」에서, 「부촉품」이란 것은 그 경經의 가장 마지막에 아주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부촉품」에 가서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종지는 모든 종종 차별의 지혜를 다 종합한 지혜가 일체종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체종지를 깨달을라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지니라, 이런 대목이 있고 또 『육조단경』의 법문에 가서는 다섯 군데나 일행삼매란 말씀이 언급돼 있어요.
그러고 『육조단경』에서는 또 자성(自性)ㆍ불성(佛性),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그런 자성(自性)이나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자성ㆍ불성 말씀이 백 군데가 넘습니다. 조그마한 『육조단경』에 가서 백 군데나 자성ㆍ불성이란 말씀이 넘어요. 그렇게 해서 그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말씀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지금 금타대화상 『금강심론』에도 일상삼매ㆍ일행삼매가 그대로 해서 역설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법문에 있어서 똑같으니까 결국은 그야말로 6조 스님께서 떠나신지가 1300년 동안인데, 1300 년 동안에 위대한 그런 선지식들이 많이 나오셨지만 그 6조스님 말씀을 그대로 신수봉행(信受奉行)해서 구현(俱現)한 분이 금타대화상이라고 저희들은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육조단경』도 보시고 또 『금강심론』도 보시고 비교를 해보시면 아, 과연 그 말이 이것이 사실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고, 또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보리방편문」, 「보리방편문」하고 6조스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 그 우리 마음 속에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부처의 공덕을 조금 더 부연(敷衍)시키면 법신ㆍ보신ㆍ화신이란 말입니다. 법신ㆍ보신ㆍ화신을 다 몰아서 다 종합을 시켜가지고서 하나의 생명체로 하나의 우주적인 생명체로 표현하면 그것이 아미타불입니다.
그것이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이란 것은 그냥 저만치 우리 밖에 있는 어느 부처가 아니라 우리 몸에나 우리 마음에나 바로 우주의 생명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 유기적인 우주의 생명이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리고 아미타불을 우리가 부르는 것은 마치 자기 생명 본래의 자리, 자기 생명의 고향 자리, 영원한 마음의 고향 자리를 우리가 흠모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신장이나 어떠한 아귀나 귀신이나, 제일 좋아하고 또는 제일 두려운 것은 아미타불 우주 생명 자리입니다.
귀신이나 그런 나쁜 업장이 무거운 것은 부처님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고, 천상 사람들은 부처님과 거리가 좀 가깝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다음이고 그러겠지요. 지옥이나 그런 것은 부처님과 가장 거리가 먼 자리입니다. 그러나 지옥 중생도 역시 지옥도 역시 그 부처님의 성자의 바른 눈으로 보면 다 모두가 다 한결같이 진여불성입니다. 천지 우주에 부처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승적인 불법은 다 그러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어두워서 그때그때 분별시비로 해서 우리 스스로 마음도 괴롭고 또는 다른 사람과도 그런 사이가 그마만치 다 부자연스럽고 부조화한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본래는 반야의 지혜라,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불법이고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불법이 아닙니다. 반야의 지혜는 우주를 일원적으로, 이원이나 삼원이나 나누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일원적으로 보는 지혜가 바로 반야바라밀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앞으로 훌륭한 불자님이 되시고, 또 필연적으로 갖추고 있는 불교의 불교 가운데 불교의 가장 그런 공덕, 가장 수승한 공덕이 즉 말하자면 우리 생명이 보다 빛나고 부처님과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공부한다는 것은, 부처님과 더욱 더 가까워질 것이고 또는 동시에 우리한테 있는 모든 그런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아집과 법집이 떨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아집과 법집의 모서리가 떨어져야 이른바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온화해지고 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우리가 바꾸어져야 됩니다. 바꾸어져야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바꾸어져야지 오늘도 그만 내일도 그만 참선방에 가서 몇 철 공부해도 그대로라면 우리는 닦은 보람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바뀌어져서 부처님 가까워져서 우리 스스로가 그런 모서리를 떠나서 아집ㆍ법집이 없이 우리가 금생에 정말로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그렇게 아주 행복스러운 그런 생활을 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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