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상 시집 『마스카라 지운 초승달』(푸른사상, 2022. 5. 12)
■ 표4
권위상 시인에게 인생은 거품을 튀기면서 살아간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일깨우는 바다 앞에 선 작은 항구다. 파도에 밀려 “새하얗게 부서지는 갈망/그리움이 닿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절반의 바다」)라고 묻는다. 그래서 시인은 “이 목숨을 값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추궁하다가 “생명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고 굳게 믿어왔건만/생명이 다하는 날 생명보험 회사는/직업과 월수입, 학식과 장래성 따위가/각자의 가격임을 호프만식으로 명쾌하게 제시해주었다”(「생명보험」)라는 허망 앞에 서게 된다. 불확실성 시대 앞에서 시인은 “오직 반복하는 실험과 두드려야 하는 수식들. 내가 나를 믿고 나의 확신을 믿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패”(「나트륨」)를 거듭한다. 그는 겨울의 빈 들판에 선 허수아비처럼 “빈 가지에 굴뚝새 점 찍힌 목소리/그만큼 가는 누이의 감성을 밟고/겨울이 흘러가는구나”(「겨울 일기」)라며 봄을 기다린다. 아니, 시인은 봄을 기다리지 않고 “제 몸을 녹여/단절된 세상을 이어주는 용접봉/저 불꽃에 심어져 있는 파란 희망”(「도림동 철공소」)을 향해 역사의 전위에 선다.임헌영(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권위상의 시는 나트륨 금속에서 집을 지키는 아내를, 오실로스코프 장비에서 등이 굽은 어머니를, 비금속 탄소에서 자동차 안에 탄불을 피우는 청년을 발견하고 품는다. 밤새 실험한 데이터에 사과나무 묘목도 심는다. 서로 다른 대상들을 외면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끌어안아 존재의 의의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시인의 그 의식과 태도는 상상에 함몰되거나 기운에 기울지 않을 만큼 견고해서 이치를 지향한다. 그리하여 고아원의 아이들이며 도림동 철공소며 공사장 가는 길이 관념적이지 않다. 캄캄한 지하실에서의 전기고문이며 여순사건이며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이며 촛불 집회가 추상적이지 않다. “눈물은 모든 것을 씻어가지 않”(「조난」)는다는 시인의 인식은 얼마나 실제적이고 가치적인가. 맹문재(시인·안양대 교수)
■ 차례
제1부
절반의 바다 / 나트륨 / 고아원 부근 / 도림동 철공소 / 대머리 가계도 / 포클레인 / 밥상의 내력 / 안개 / 강화도 / 저격수 / 소문 / 데드 마스크 / 명품 가방 / 전기구이 / 폭염
제2부
소소한 관조 / 목욕탕 / 얘들아 / 지구 이야기 / 오리나무 / 탄소의 본질 / 상처 / 별 / 사과나무, 융복합 / 고향 / 조난 / 그들 / 생명보험 / 벽보를 붙이며 / 현대인으로 사는 법
제3부
GP에서 / 흔들리는 일몰 / 장마 / 등 / 폭풍전야 / 청춘들 / 한탄강 / 와사풍 / 사라진 봄 / 공사장 가는 길 / 폭설 / 저수지 자동차 / 오실로스코프 / 우리는 아직 멀었다 / 문자의 행적
제4부
겨울 일기 / 물류 창고 / 당신의 영역 / 우리가 알고 있던 부동산 투자는 끝났다 / 정립 / 상가 / 투수 변천사 / 직공 / 슈더에게 / 칼 / 겨울강 /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1 / 친일 문인 기념 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2 / 어둠을 밝히다
작품 해설 : 아이러니에 깃든 세계의 진실 - 이명원
■ 시집 속의 시 한 편
여기는 무덤 속 혹은 구름 속, 박제가 된 채
저격수가 조준경 십자선을 통해 목표물을 훑다
저 아래 수만 인파 속으로 날리는
단 한 방의 저격으로 그의 신념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를 쓰러뜨리면 이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사라질 수 있을까
반대로 엄청난 혼란과 소요 피의 보복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
누구는 테러라 할 것이고 누구는 의거라 하겠지만
대체로 불리한 자들의 변명
이 사건을 역사에 맡기자는 주장에 저격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신호가 잡힌다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로 목표물이 등장한다
어금니를 깨물며 방아쇠에 검지를 올려놓는다
숨을 들이켜고 적정선에서 숨을 멈춘다
목표물이 멈추자 총구가 고정됐다
격발 순간
목표물은 비틀거리고
경호원들이 다급히 목표물을 덮쳐 에워싸고
도처에 배치된 요원들이 대응사격을 한다
동시에 조준경이 깨지고
저격수의 심장에서 내뿜는 피
상황이 종료되었다
저격수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와 목표물은 한날한시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동시대를 거쳐간 역사의 흔적으로 남았다
이들이 흘린 피는 각자의 신념이었고
이로써 역사의 한 페이지는 붉은 줄을 그으며 넘겨진다
역사는 그런 것이다
-「저격수」전문
■ 시인의 말
계가가 끝났다
꽃놀이패에 걸린 대마를 살리기 위해
식은땀을 꽤 흘렸다
두텁게 두지 못해 쫓기다가
안에서 궁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곤마
두 눈을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집이 부족하다
내내 초읽기에 몰려 살아온 인생
데드라인을 넘나들던 기억
끓는 된장국 거품을 걷어내며
숟가락을 얹어본다
밤하늘 별빛이 아름답다
2022년 4월
권위상
■ 권위상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2년 『시에』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산하 민족문학연구회 사무국장, 한국작가회의 연대활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친일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폐지를 위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첫댓글 권위상 시인님의 첫 시집 『마스카라를 지운 초승달』 출간을 축하합니다. 뜻 깊은 활동과 함께 문학 행보 더욱 환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