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뭘 자랑 할 것이 있느냐 (롬 3:23-28)
롬 3:23-2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됐어!” “말을 말자!” “당신이 그렇지 뭐!”
“내가 너에게 말해서 무엇 하겠느냐!” “내가 너랑 말을 섞어서 무얼 하겠느냐!” “니 주제가 그렇지 뭐!” 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부 싸움 중에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가를 조사 한 내용입니다. 쉬운 말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부간에 싸우더라도 이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됐어!” “말을 말자!” “당신이 그렇지!” 라고 하는 것은 말 할 상대가 아니란 뜻이에요. 상종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건 상대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조사한 기관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혼율이 급증하는 이유도 모두가 상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짧은 말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에 제일 기분 나쁜 것이 무엇이냐?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면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은 상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인간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은 송장으로 보아요. 죽은 송장에게는 썩은 물만 나옵니다. 죽이는 것만 나와요. 실제로 인간들이 토해내는 것은 모두가 죽이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아요. 인간들 스스로는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에게도 선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선(善)을 들고 신(神) 앞에 나옵니다. 인간이 성심성의껏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도 인간의 정성을 갸륵하게 보아서 응답을 해 주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나아올 때 자기 정성으로 나옵니다. 인간은 이 정성을 의(義)라고 해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들고 오는 정성이라는 의(義)는 자기 행함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율법에 의(義)”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뭔가요? 의(義)에요.
의(義)란? 옳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어떤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드리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걸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러자면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바라는 그 의(義)를 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열심보다 앎이 먼저입니다. 먼저가 앎이에요. 앎이 없이 행하게 되면 불의가 되어요. 죄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하면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삼아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간과해 주심으로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신실하심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을 의역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나타나셨는가요. 그건 죄인을 멸망시키지 않고 길이 참고 있다가 예수를 보내서 화목 제물로 삼아서 죄인과 화목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자 이 말을 차근 차근 살펴봅시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죄인을 당장 멸하지 않고 길이 참으시고 용납 한다는 것은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손해를 본 것입니다.
길이 참음이나,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나, 죄를 용납해 준다 라는 말은 자기를 비우고 죽일 때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더군다나 당장 멸망 시켜야 할 죄인을 죽이지 않고 도리어 살리고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삼아서 구원을 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포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째서 이러한 불가능한 일을 하셨을까요? 왜? 이러한 불가능한 일을 하시고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할까요? 이는 하나님 스스로의 약속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정의하기를 식언치 않고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고 마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까.
누구랑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 1장 4-6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창세전에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신 약속입니다. 이걸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창세전이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합니다. 그럼 만물도 만들어지기 전에 누구랑 약속을 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 자신과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입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등하신 분이니 결국 자기 자신에게 약속을 하신 셈입니다.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라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한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우리”라는 무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는 말은 죄가 사해진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벌써 창세전에 자기백성들이 죄 아래 가두어질 것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자기 백성이 비 거룩과 흠 있는 자로 있다가 그리스도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쉬운 말로 죄인으로 출생이 된 자를 예수님의 피 흘려서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였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퀀스 즉 시방서란 말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일을 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기회를 타서 들어 왔다고 합니다. 기회를 타서 들어 왔다는 말은 때가 되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걸 에덴동산에서 보여주셨어요. 드디어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마귀가 기회를 엿보다가 죄를 인간에게 쓱 집어넣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그 죄를 가리기 위해서 흠 없는 제물이 희생당합니다. 죄를 흠 없는 제물이 덮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창세전에 하신 약속의 한 모습이에요.
이 창세전 약속을 근거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만물은 이 약속이라는 시나리오를 이루기 위해서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보여주셨던 것을 에덴동산 밖에서 펼쳐 보이십니다. 정한 때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역사 속에서 그려나가십니다.
이제 그 정한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십니다. 에덴동산에서 희생당한 흠 없는 제물의 실상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뿌려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제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삼아서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는 일을 빈틈없이 또한 하나도 차질이 없이 다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봐라! “내가 창세전에 약속한 것을 다 지키지 않았느냐!” “너희들 앞에 보이지 않았느냐!” 그러니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와우~ 하나님은 진짜 멋쟁이십니다!” “어쩜 그렇게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이루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정말 경하(敬賀) 드립니다!” “하나님 찬송을 받으소서!”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예레미야가 말했어요. 예레미야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예레미야 33장입니다.
렘 33장 2-3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고 하나님이 끝을 낸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요?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호와의 일하심을 알기 위해서 와서 물으라고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은 물으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알려 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크고 비밀한 것을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을 어떻게 구현시켜 나가는지 알려 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자기가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가 하면 자기 아들을 죽여서라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은 당장 멸망 시켜야 할 자들을 길이 참으셔서 예수를 화목 제물로 삼아서 자기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TV 광고에서 강호동이와 송해가 인사돌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비교해서 말을 합니다.
강호동이가 갈비를 뜯는 송해에게 말합니다. “어쩜 그렇게 튼튼하세요!” 그러자 송해가 대답합니다. “나야 보약 먹잖아!”
바울이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어쩜 그렇게 약속을 잘 지키세요!”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야 신실하잖아!”
그럼 우리는 “하나님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 새 노래를 불러요.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 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어린 양의 피로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이 새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어요. 지금 이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이미 천국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그 안에 천국이 임한 성도는 이미 새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이건 강요가 아니에요. 구원의 은혜를 아는 성도는 반드시 자발적으로 부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이 새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도록 간섭을 해 나가세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더 높고 더 넓게 알아가는 것이에요. 이 앎은 하나님과 많은 부대낌을 통해서 알아가게 됩니다. 부대낌을 통해서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많이 부대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스킨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킨십을 많이 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자꾸 부딪치다가 보면 처음엔 하나님이 멀리 있고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점차 더 가까이 또렷이 보이게 되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보인다구요. 예전에는 나 하고 상관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감사거리를 구분하여서 감사 하였는데 이젠 범사가 감사하다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만큼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온 세계에 성도들에게 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안목이 생기기를 기도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일수록 자꾸만 사건을 일으켜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안목이 만개가 되면 농부가 잘 익은 곡식을 추수하듯이 하나님도 성도를 추수하여서 천국 곡간으로 이동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둘 필요가 없어요. 이 역사라는 곳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곳이에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일을 당하게 되어요. 그리하여 하나님만 찬미하는 경지로 나아가게 되어요. 우리 모두가 이 경지로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세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도록 간섭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아주 단순해요.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범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범사에 믿음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먹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돌려 드릴수가 있어집니다. 이때 드리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잘 사용했습니다! 라는 감사로 돌려 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성도는 봉사하면서 감사하고! 연보하면서 감사하고! 구제하면서 감사하고!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트리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여셔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달아가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이 깨닫는 자는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게 깨닫는 자는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가 깨달은 만큼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주를 사랑하고 감사하고 사는지는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에요.
깨달음이 없이 행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아요. 깨달음이 없이 행하게 되면 반드시 그 댓가를 도로 찾게 되어 있어요. 나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 입 싹 닦을 겁니까? 라고 따지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을 거래하는 뇌물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뇌물이란? 반대급부를 노리고 바치는 미끼에요. 하나님은 미끼를 받지 않아요. 우리와 거래하지 않아요.
성경은 죽은 자는 감사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찬송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죽은 자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가 드리는 것은 예물이 아니고 뇌물이에요. 예물(禮物)은 하나님 것을 드리는 것이고, 뇌물(賂物)은 자기 것을 바치는 것이에요. 예물(禮物)은 사랑 받은 자가 드리는 것이고, 뇌물(賂物)은 사랑 받고자 바치는 거예요.
구약 이스라엘은 이 뇌물을 바쳤어요. 복을 얻어 내고자 바쳤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는 이런 뇌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어요.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다시는 내게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젠 역겨우니 성전 문을 닫으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신앙은 외식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니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기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삯을 바라고 하나님께 갖다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일컬어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강도의 굴혈이란? 그 속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다 강도란 말입니다. 신앙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자기 의(義)를 삼아서 자기 유익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이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서 도적질 하는데 도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이고 백성이고 다 탐욕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도적질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을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신 형벌이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불과 같아서 자신을 태워요. 탐욕은 내 몸을 장작으로 삼아서 불을 태워요. 죄인이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 때문이에요.
지옥은 탐욕으로 살고 천국은 만족으로 살아요. 탐욕이 지옥이라고 한다면 천국은 만족이에요. 천국이 언제 주어지는가 하면 탐심이 죽을 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탐욕을 거두어 가는 방식으로 간섭을 하세요.
그럼 천국 백성은 욕망을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되겠지요. 맞아요. 하나님께서 욕망을 빼앗아가는 일을 하십니다.
지옥을 일컬어 무저갱이라고 하는 것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무저갱이 인간들 마음속에 있어요. 인간들 속에 있는 욕망이라는 무저갱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요. “나” 라는 놈은 만족이 안 되기 때문에 채울 수가 없어요.
성경은 인간을 거머리라고 표현을 합니다. 거머리가 어떤 놈인가요? 남의 몸에 기생하면서 남에 피를 빨아 먹는 놈이잖아요.
언제까지 빨아 먹는가요? 자기 배가 터지도록 빨아 먹어요. 결국 배가 터져서 죽습니다.
요즈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일가의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들끼리 법정 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탐욕 덩어리인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재산이 수 조원이에요. 그럼 몇 천억 뚝 떼어주면 좋잖아요. 그런데 그러지 않아요.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어요. 못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안 주고자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씁쓸해요.
꼭 이 시대 교회들을 보는 것 같아요. 점점 커지고자 하잖아요. 큰 교회들이 작은 교회들을 좀 챙겨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러지 않아요. 더욱 더 자기 배를 채우고자 해요.. 작은 교회 교인들마저 빼앗아가고 있어요. 훔쳐가고서는 그리곤 전도했대요. 이 우라질 놈들이!
제가 아는 어떤 목사는 교회가 작으면 하나님이 창피를 당한데요. 그래서 개척교회는 다 사라져야 한다고 해요. 이게 거머리지 무슨 목사입니까. 이 시대 교회는 세상을 보여주는 축소판이에요. 교회나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종말의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바로 거머리처럼 배가 터져 죽을 때까지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달려가는 존재들입니다. 많이 움켜잡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많이 움켜잡을수록 불행해요. 많이 움켜잡을수록 지켜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고민거리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옛말에 천석꾼은 천(千) 가지 걱정을 하고, 만석꾼은 만(萬) 가지 걱정을 한다고 했어요. 이는 소유가 많을수록 걱정도 많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뭔가를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거리가 더하여 졌다는 뜻이에요. 세상 적으로도 지위가 높아질수록 근심걱정거리가 많아져요.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높아지고자 한단 말이에요. 결국 인간은 불행을 자초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이 점점 더 확장 되면 어찌 되는 줄 아세요. 거머리처럼 펑! 하고 터져서 죽어요. 풍선 터지듯이 터지고 말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아라는 풍선에 매일 같이 욕망이라는 바람을 불어넣고 있어요.
그 욕망 속에 구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생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진시황제처럼 불로장생하고자 묘약을 찾듯이 신(神)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종교 장사가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종교가 인간의 욕망을 이루어준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만수무강 영생불사를 얻어 주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들이 어떻게 만수무강 영생불사를 얻어주는가 하면 지성이면 감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마다 인간의 정성과 열심이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종교 장사꾼들이 넘쳐나는 곳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마다 목사들이 영혼을 사고 팔고 있어요. 보리 두어 움큼을 얻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돈 몇 푼 얻어먹으려고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신앙으로 붙잡게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 미혹 당한 교인들은 자기 행함을 자랑하게 되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나요? 우리의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 의로움을 마치 자기가 얻어낸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자랑하지 말라고 하나요? 그건 우리 행위로 얻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어서 화목을 시켜주었어요. 그러니 자랑을 하려면 예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랑하고파 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아들을 자랑하고 싶어 해요. 예수님 때문에 자기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 죽음으로서 수 많은 자기 백성이 살아났어요. 그러니 얼마나 예수님이 자랑스럽겠어요.
우리에게도 다른 것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구원을 시켜주었더니 구원 받은 자기를 자랑하고 있어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요.
구원이란? 하나님과 화목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화목이 되었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화목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화목은 우리의 원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함에서입니다.
이사야 43장 입니다.
사 43장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한다고 하지요. 여기서 나란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그럼 본문을 직역하면 “나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너희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라는 말이 됩니다.
왜?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도말하십니까?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죄를 용납 할 수가 없어서 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죄를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엄마의 성품이 너무도 깔끔해서 집안의 더러움을 방치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깨끗한 성품 때문에 더러운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아이들 방을 정리 정돈해 놓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깨끗한 집안에서 사는 것은 엄마의 깨끗한 성품 때문입니다. 엄마의 깨끗한 성품이 더러운 아이를 씻기고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한 엄마의 성품처럼 더러운 것을 두고 보지 못하세요. 죄를 두고 보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죄가 보이지 않게 도말을 해 버린 것입니다. 도말이란? 안보이게 덮어준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죄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덮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이 홀로 다 하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예수의 피로 죄를 가리운바가 된 것이에요.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 옷으로 수치를 가려준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으로 수치를 가려준 것은 아담과 하와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들의 수치를 보고는 하나님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수치를 가려준 것입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곁에서 여호수아의 더러움을 참소합니다. 죄를 고발하고 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흰 옷을 입혀줍니다. 마귀의 참소를 막아버립니다.
수치는 우리가 가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려주세요.
그것도 우리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이에요. 하나님이 죄인의 수치를 가려주는 방법이 바로 죄인을 대신하여 의로운 제물이 죽음으로 대신 담당해 주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두고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죄인을 눈 앞에 안 보이도록 치우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당신의 치마폭에 폭 감싸고 하나님 눈에는 안 보이게 한 것입니다. 이걸 구속이라고 하고 또는 덮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으로 덮었나요? 예수님의 피로 덮어 주셨어요. 예수님의 피로 덮으면 하나님 앞에서 우린 안 보이고 예수님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 눈에는 죄 없는 예수님만 보이는 거예요.
죄 문제는 우리가 처리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세요. 우린 하나님이 다 해 놓으신 것을 혜택만 받으면 되어요. 그래서 값없이 와서 마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값없이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니 자랑치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니들이 자랑 할 것이 뭐가 있느냐 에요. 신앙생활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의(義)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 하시는 줄 아세요.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영광만 돌려 드리면 되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은혜로우신 일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고 예수님을 통하여서 우리를 구원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해 주셨다고 합니다. 간과해 주신다는 말은 있어도 없는 척 눈감아 준다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죄가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셨기 때문에 죄 없는 것으로 인정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의로운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쉬운 말로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 중요해요.
성도란? 의로운 자가 아니라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에요.
내가 의로운 자라고 하면 나에게 독자적인 의(義)가 있다는 것이 되어요. 그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성도는 늘 자신의 죄인된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난 죄인인데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어!”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義)로 살고 있어!”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는 예수님만 자랑 할 수밖에 없다!” 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면 자신이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거하지 않고 의인의 행함을 추구하고자 해요. 그러니 “예수를 믿고 난 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까요?” 라는 말은 정형화된 삶을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질문의 의도는 알아요. 하지만 이러한 질문 속에는 마귀적인 발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옳은 질문이라고 동의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된 자에요. 의인이 아니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에요. 죄가 없는 자가 아니고 죄가 없다고 간과하심을 받았어요. 우리 행위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행위를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라는 우리 행위를 이야기 하면 안 되어요. 이렇게 살아도 예수님 때문에 살고! 저렇게 살아도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서는 “어떻게 살까요” 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든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면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피 뿌림에 흔적들을 늘 찾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이 늘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義)를 뽑아내는 일을 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일을 하세요.
어떤 사람은 너무 착하게 살아서 그것이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것이 되면 악함으로 넘어지게 만들어서 자신이 죄임임을 알게 만들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을 자기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죄에서 건져준 구원을 욕되게 하면 징계를 가함으로서 아! 내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구원을 내 몸에 사욕으로 이용하였구나! 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죄를 짓도록 하시고 어떤 사람은 왜? 죄를 짓느냐고 하신단 말입니다. 여기서 죄를 짓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잠시 방치한다는 뜻이에요. 죄인을 그냥 방치 하면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다윗을 보세요. 하나님이 완전 범죄를 꾸밀 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계시잖아요. 그러다가 아! 이제 되었지! 라고 할 때 나단을 보내서 확 까발리잖아요. 에이! 나쁜 새끼!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다윗이 스스로 의로운 척 하니까 넌 의로운 자가 아니고 죄인이야! 라고 까발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일 때까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지 않고 가만히 두고만 보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나요. 이는 다윗에게 너는 내게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넌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죄인인줄 몰랐어요. 나쁜 짓을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 짓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 나 죄인입니다 라고 하지 않았어요. 죄가 발각당하지 주여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 이놈아 넌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너 자체가 죄라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다윗이 예 맞습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 맞네요. 그러니 내가 내 행동을 가지고 이것은 죄이고 이것은 의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죄였군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죄를 지어도 말리지 않고 가만 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자 네 이놈! 죄인아!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간과하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나고 못남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기를 원하세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의롭다 여기심을 입고 산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세요.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만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너희들 예수를 떠나면 죄인 그대로 라는 말이에요. 쉬운 말로 더러운 것을 보자기로 덮어 놓았는데 보자기를 거두면 더러운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보자기에 덮여 있어야만 해요.
이처럼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계속하여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머물러 있다 함은 독자적인 나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없기 때문에 내 삶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걸 그릇 해석하게 되면 성도의 삶을 따로 구분하게 되어요. 성화주의자들이 이러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화주의자들은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답다” 라는 말은 규정된 틀을 말해요.
한국교회에서 불문율처럼 가르치는 “성도다움” 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술을 먹어선 안 된다!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도적질 하면 안 된다! 살인하면 안 된다! 간음하면 안 된다!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 주일성수해야 한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틀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우리의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어요. 이러한 것은 지키나 안 지키나 우린 죄인이에요. 이런 것을 지킨다고 의인이 되지 않아요.
이건 인간의 건덕상의 문제이지 의(義)에 문제가 아니에요. 의(義)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주어져요. 그러니 이러한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치게 되면 도리어 믿음으로 주어진 의를 가리는 것이 되고 말아요. 가르치려면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키나 안 지키나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자랑하고 사셔야 합니다. 예수님 의(義)만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윤리도덕적인 행동강령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나 착하게 살았잖아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착함을 들고 의롭다고 큰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 바깥에서 하는 말이에요. 예수 바깥은 자기 행함으로 선(善)이다 악(惡)이다 구분을 해요. 그러니 신자다운 삶을 따로 정한다는 것은 예수 바깥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또는 저렇게 살아야 한다! 라는 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을 진리로 알고 있는 교인들은 그 틀에 맞추어서 살고자 자기 삶을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삶에서 선한 삶과 악한 삶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술 안 먹으면 선이고! 술 먹으면 악이다! 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행동은 의롭고 저런 행동은 불의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행함에서 의(義)와 불의(不義)가 구별이 되게 됩니다. 이건 예수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로 사는 것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살았어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했다! 나는 구제 했다! 나는 전도 했다!
나는 뭘 했다는 것을 들고 나왔어요. 자기 행함으로 나왔어요. 죄인의 행함을 의지하고 나온 것이 바로 죄에요.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른 채 자기가 행한 것 중에서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의(義)라고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해서 마귀 새끼라고 한 것입니다.
신자다움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깔고 있어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자기 삶을 의(義)냐 불의(不義)냐 구분하지 않아요. 예수 안에서는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선(善)이다! 악(惡)이다! 의(義)다! 불의(不義)다! 구분하지 않아요. 예수 안에서는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해진 규범이 없어요. 오직 나는 예수님 때문에 산다고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만 있어요.
규범은 법입니다. 그럼 그 규범에 갇히게 됩니다. 규범에 갇히면 그 규범에서 벗어나면 신앙이 없다고 낙심하게 되어요. 이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꼬라지로 낙심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義)가 우리의 삶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에 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지요.
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을 지켜서 얻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지요. 이 말은 성도가 의롭게 된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우리 바깥에서 예수님이 만들어낸 것을 공짜로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믿음에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즉 자랑 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자랑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義)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화목된 것을 믿게 해 주셔서 그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러는 거예요. 니가 만든 것이 아닌데 왜? 자랑하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게 정리가 안 되면 신앙이 미친 여자 널뛰듯 하게 됩니다. 자기 꼬라지로 갈 지(之)자로 왔다 갔다 하게 되어요. 아침엔 천당에 있다가 저녁엔 지옥에 가 있어요.
신앙이란? 내가 어느 영역 안에 있느냐의 본질에 문제이지, 내가 어떻게 사느냐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 안에 있으면 창기도 천국에 가지만, 예수 밖에 있으면 바리새인도 지옥에 가요. 그러므로 성도는 내가 지금 누구 안에서 사는지 늘 확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사는지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지 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여야 해요.
신앙에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그 안에 믿음이 없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의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라는 것을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행동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증거가 없으면 목사에게 눈도장을 찍고자 해요.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조직에서는 조직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고자 해요. 모임이 있으면 나 참석했습니다! 라고 출근부 도장을 찍어야 해요. 억지 춘향으로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몸 담고 있는 조직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사람은 예수 믿는 성도가 아니고 종교인이에요.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하면 불안하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목사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제발 목사에게 자기의 신앙을 확인 받고자 하지 마세요. 목사가 교인들 신앙을 판단해 준다고 하면 그 놈은 가짜에요. 사기꾼이에요. 은근히 자기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믿음 없다는 투로 말을 하는 놈들은 예수를 팔아서 밥 빌어 먹는 삯꾼이에요.
이 시대 복음 복음하면서 교주 노릇하는 놈들이 의외로 많아요. 자기하고 함께 하면 복음 알고 자기하고 함께 하지 않으면 복음 모른다고 하는 놈들이 있어요. 이런 놈들은 항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공갈을 쳐서 자기 수하에 두고자 해요. 자기를 못 떠나게 해요.
그럼 자기 안에 증거가 없는 교인들은 그 목사를 못 떠나요. 떠나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조직에서 짤리면 죽는 줄 알아요. 그렇게 쇠뇌당하여 있어요. 그러니 조직의 눈치를 살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가 안 믿어지면 믿지 마세요. 안 믿어지는 것은 그 무슨 짓을 해도 안 믿어져요. 그러니 목사에게 아양 떨지도 말고 교회에 충성하고자 하지도 마세요. 예수는 기도하고 성경 공부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은 인간 쪽에서 만들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가 안 믿어지면 그냥 집에서 쉬세요. 반면에 예수가 믿어진다고 하면 그 어떤 것으로 그 믿음을 관리하고자 하지 마세요. 자랑하지도 마시고!
다시 설명합니다. 무엇을 자랑 할 데가 없다고 합니까? 의롭다 하심이지요. 의(義)에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 것이에요. 행위가 아니고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된 것이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려면 의(義)가 있어야 해요. 의(義)란?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 주는 의(義)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생각 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산 자들을 의로운 자라고 했어요. 반대로 율법대로 살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이건 유대인들의 오해에요.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 식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들 생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고 갑시다.
성경을 보면 두 가지 의미에 말씀이 있어요. “로고스”라는 말씀과 “레마” 라는 말씀이 있어요. 쉬운 말로 “로고스”는 문자적인 말씀이고, “레마”는 생명의 말씀이에요. 잘 이해하셔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창조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질 때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말(언어)”이라는 그릇에 담겨서 주어져요. 하나님의 말씀은 말이 아니에요. 생명이에요.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곧 생명이에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지요. 무엇으로 주십니까? 인간의 언어(言語)로 주셨어요. 인간의 언어 속에 하나님 말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언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인간들 눈에는 생명은 보이지 않고 그냥 글만 보이는 겁니다. 문자만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글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글을 누가 지키나요. 인간들이 지키지요. 그건 글을 지키는 것이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은 말씀 자체가 살아서 일을 하세요.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만이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지킬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맞아요.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만 지켜요. 우리는 예수님이 지키신 것을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이지요. 이는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말씀을 지킬 수 없는데요! 예수님이 말씀을 지키셨는데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해요.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이에요. 그런데 이 생명이신 말씀이 인간들에게 주어질 때는 인간의 언어인 “말”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말은 곧 말씀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씀이 “말(언어)”이라는 그릇에 담겨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질 때에는 인간의 글로서 주어졌지요. 그러나 그 하나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졌어요.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그냥 글이에요. 말이에요.
아무리 유식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하여도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설교는 아무리 들어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건 그냥 말장난에 불과해요. 지식 놀음이에요. 이게 신학이에요.
신학이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거에요.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학문이지 생명이 아니에요. 그래서 신학으로는 생명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성령이 감동케 하시는 말씀 속에서만 나와요.
그러므로 못 배우고 무식하고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으면 그 말씀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요. 말씀이 생명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말씀에 사로잡혀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말씀을 “레마” 라고 합니다. “레마” 란? “살아 있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말(문자)”이 “말씀(생명)”이라는 “레마”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이 일어날 때 그 말은 말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로고스”가 아니고 “레마” 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받은 말은 “레마”가 아니고 “로고스”에요. “로고스”란? “레마” 라는 말씀을 담고 있는 말씀이에요. 그러니 “로고스”는 “레마”를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로고스”를 받아요. 그럼 성령이 감동하시면 “레마”로 역사해요. 그럼 그 말씀은 반드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요. 뭔가 창조적인 사건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지요. 이는 예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레마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권세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움직인다고 하지요. 심령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지요. 이게 “레마”에요. 생명의 말씀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니 목사의 설교에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면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거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드러나게 되어요.
이러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되어요. 내 모습이 예수로 변한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예수님의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로고스”로 받았어요. 율법 속에 “레마”를 보아야 하는데 그걸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율법이라는 문자를 지키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지키니까 율법을 가지고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생명으로 나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 속엔 예수라는 생명이 들어 있어요.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를 만나게 되어 있다는 뜻에서 율법 속에 예수라는 생명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내가 죽고 예수라는 생명을 붙잡아야 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도리어 펄펄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못 만났어요. 예수가 눈 앞에 있는데도 몰라보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전에 그랬어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에 급급했어요.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이런 유대교인들의 사고가 죄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건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악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반대로 예전에 호형호제하면서 동문수학 하던 자기 친구들에게 얘들아~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만나야 된다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의 옛 친구들이 야~ 너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러면서 바울을 이젠 적으로 간주하고 핍박하고 죽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안 알려 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얻어맞으면서도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죄 없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 주신 것을 근거로 의롭다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근거로 의롭다 여겨 주신다는 것이에요. 이걸 믿음에 법이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두 가지 의롭다 함을 받는 체계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행함이냐! 믿음이냐! 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을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데 두었습니다. 율법 지킴에 두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인간들의 행동으로 얻어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를 근거로 공짜로 그냥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인간을 의(義)에 문제에 있어서는 쏙 빼버립니다. 인간을 예수 안으로 종속을 시켜 버렸어요. 예수만 드러내고 있어요,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하고 믿음에 법이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내가 살아 있었어요. 내가 말씀을 지키고자 했어요.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나는 없는 자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義)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내가 있어요. 그러나 믿음 안에는 내가 없어요. 이걸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율법 아래서 “나 있음”으로 살던 자가 예수 안에서는 “나 없음”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에요. 이렇게 십자가로 태어난 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요.
옛 언약 아래서는 인간이 설 자리가 있었어요. 율법 아래서는 내가 율법을 지키든지 안 지키든지 그 주체(主體)가 “나” 였어요. 율법 아래서는 “나” 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는 내가 말씀대로 사느냐 마느냐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 있어요. 내가 설 자리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 아래서는 내가 뭘 하느냐 마느냐 는 없어요.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혜택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하에서의 신앙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만 있는 것입니다.
이건 내가 가만히 있다는 것이 아니고 내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의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판단의 대상이 안 되는가 하면 의(義)냐 불의(不義)냐 라는 판단 대상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행위를 가지고 의(義)냐 불의(不義)냐 묻지 않아요. 오로지 예수의 피가 발려져 있느냐 없느냐만 보세요. 너 예수 믿어! 안 믿어! 만 물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대로 살아도 예수 안 믿으면 저주의 대상이고! 비록 율법대로 살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요. 이처럼 새 언약 안에서는 예수님에 의(義)로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라는 믿음에 법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함에서 예수님 행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쉬운 말로 인간이 예수님 안으로 흡수가 되었어요. 이걸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인간은 없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 라고 해요. “우리”가 되려면 “나”는 없어야 해요. 예수 밖에서는 내가 있지만, 예수 안에서는 내가 우리 안에 흡수가 되어요. 오직 예수만 있어요. 그러니 구원이란? 내가 죽고 예수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꼬라지가 이래도 예수님의 지체에요. 그러니 내가 아니고 예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세요. 마귀도 이를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의롭다 여기시고 예수 바깥에 있는 자는 불문곡직(不問曲直)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바깥에 있는 자로 구분해요. 이것이 새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정의한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이 법칙을 근거로 심판하십니다.
중요하니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어디에 있다구요? 믿음이지요.
누구를 믿는 믿음인가요?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누구 것을 믿는다구요? 예수님에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것이에요. 내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것을 믿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믿음이란? 내 쪽에서 발생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한 것을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은 우리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하면 우리더러 행하라고 하지 믿으라고 하지 않아요.
하지만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날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라고 합니다.
무얼 믿으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이 되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잖아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는 자를 의롭다 여겨주세요. 이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예수님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으면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이고! 이걸 안 믿으면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가 아니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이게 안 믿어지는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이게 단순한 것 같지만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하면 자기 쪽에서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요. 그래서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두 반응이 나타납니다.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아~ 이게 또 난해한데!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고자 하신 말씀이에요. 이건 우리 더러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누가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누가 예수 밖에 있는 자인가를 구별하고자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지만 예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겠다고 나서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그러니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은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함이에요. 예수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총을 들이대고서 너 예수 안 믿으면 죽인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어요.
복음 전하는 목사에게 복음을 듣는다고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만약에 유명한 목사로부터 설교를 들어서 믿음이 생긴다고 한다면 사도바울에게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어야 했어요.
그러나 사도행전 28장을 보세요. 바울이 그 좋은 복음을 전해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사람들이 회개한 것이 아니라 낭떠러지로 밀어서 죽이려고 했어요.
제발 착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 그 어떤 목사도 자기 능력으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를 쫓아다니지 마세요. 거기서 무슨 믿음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말인데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진의를 아시란 말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세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사람은 이단 속에 있어도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들의 조건에 가두어지지 않아요. 어디에 있어도 택한 백성은 한 알갱이라도 빠지지 않고 다 찾아내세요.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시란 말이에요.
믿음은 목사에게서 나오지 않아요. 지식으로는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이해하는 것이지 믿음은 아니에요. 예수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만나고 믿어져야 하는 것이에요.
예수를 만나려면 예수님이 찾아와 주셔야 해요. 예수가 믿어지려면 믿음을 받아야 해요. 예수님은 우리가 콜! 한다고 해서 웨이터처럼 오시지 않아요. 오직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에게만 찾아가 만나 주세요.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되었으면 우리가 부르지 않아도 예수님이 알아서 찾아오세요.
그래서 제가 예수가 안 믿어지면 교회 다니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저 교회로 우르르 옮겨 다니지 말고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꼭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진리를 찾았다고 하는 자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해요. 상좌에 앉아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연약한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잘난 척을 해요. 한마디로 말쟁이에요.
복음을 알았으면 복음에 자신이 잠식당하여야 합니다. 마치 양념이 김장에 배어 맛을 내듯이 복음에 배여서 교회에서 덕을 세워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의 맛은 내지 않고 마귀 행세만 한단 말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처럼 일하는 소의 발목에 힘줄을 끊어버리는 일을 해요.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서 시끄럽게 해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이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요.
그래서 이제는 누가 복음 안다고 하면 겁이 나요. 진짜로 복음 아는 사람은 복음 안다고 나대지 않아요.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복음 아는 성도는 말없이 섬겨요. 여러분 스스로가 한번 돌아보세요. 나는 누구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세요. 복음 전하는 목사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우리 쪽에서 발생 시킬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어느 특정한 목사를 추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를 추종하게 되면 그 목사는 교주 행세를 합니다. 제발 순진한 목사를 교주 만들지 마세요.
예수는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러니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준 사람은 믿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아요. 믿고자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살아요.
이 믿음은 안 믿을래가 안 되어요. 참으로 이상하지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고!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성도는 예수를 안 믿고 싶어도 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순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부인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봅시다.
딤후 4장 17-18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잘 보세요. 바울 곁에 누가 서 있나요. 주께서 서 계시지요. 주님이 바울을 강건케 하시지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보니 수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깁니다. 그때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지켜주십니다. 고난을 피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고난 속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계세요. 하지만 그 고난을 넉넉히 이기고 기어코 그의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지요. 그래서 주님에게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 전하다 보면 수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준 사람은 그 고난 속에서도 예수를 믿어요. 우리 인간의 본성은 안 믿고자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믿도록 하세요. 그러니 죽어가면서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지 않으면 자기 앞에 위험이 닥치면 예수를 부인해요.
베드로가 이 두 가지를 다 보여주었어요. 베드로가 스스로 예수를 믿고자 할 때는 못 믿었어요. 스스로 믿고자 할 때는 그토록 큰소리치면서 예수님을 지켜주겠다고 하였지만 막상 죽음이라는 위협 앞에 서자 예수님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저주하고 부인을 했잖아요. 이게 인간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자 이젠 예수 믿지 말라고 공갈을 치고 핍박을 하여도 싫어 나 예수 믿을래! 그랬어요. 유대인들이 죽인다고 하자! 그래 죽여라! 그랬다구요.
예수는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자들 손에서 죽어요. 베드로처럼 스스로 믿겠다고 장담하는 자들에게 죽임 당해요. 장담을 한다는 것은 자기를 믿고 있다는 증거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자기 힘으로 예수를 지켜내고자 하니까 뭐라고 했나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지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했잖아요.
그럼 죄가 뭔지 나타났어요. 죄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죄란? “나” 라는 주체가 살아 있는 것을 말해요. “나” 라는 주체가 살아서 “나” 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이 “나”에요.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말은 예수 바깥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 있지 않고 떨어져서 남남이란 말입니다. 예수와 남남이니까 내가 뭘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을 봅시다.
약 4장 13-16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어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타지(他地)로 가서 장사하여 돈을 벌고자 하지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지혜로운 일이에요. 계획을 세워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야고보는 이걸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인 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뭐냐?자기 인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생이란? 안개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안개는 언제 사라질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해를 뜨게 하면 금방 사라져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언제 부를지 몰라요. 그러므로 자기 인생이 내일이 있다고 믿고 사는 것이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획을 세우고 산다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일을 내 날이라고 믿는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세요.
그러므로 성도는 늘 오늘만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생의 나라에요. 영생의 나라에서는 내일이란 없어요. 항상 오늘 뿐이에요.
내일로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은 나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에겐 내일은 없어요. 항상 오늘만 있어요. 왜냐하면! 피조물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뭘 하겠다고 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였지요. 쉬운 말로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기쁨조로 창조가 되었어요. 하나님 기쁨조가 되려면 내 생각이 없어야 해요. 내 생각이 있으면 하나님의 기쁨조 노릇을 할 수가 없어요.
내 생각을 가지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왜?” 라는 단서를 달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자꾸만 왜? 왜? 왜? 라고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성은 아이를 키워보면 알 수가 있어요.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아요. 부모의 말에 의문이 없어요.
그런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토를 달기 시작합니다. 머리가 굵어진다는 것은 자아(自我)가 확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아가 확립하기 시작하면서 왜?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아가 정립이 되면서 이젠 부모와 나는 타자(他者)가 되어요. 부모의 생각과 내 생각이 부딪치게 됩니다.
이럴 때부터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품 안에 자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식이란 부모의 품 안에 있을 때만 자식이란 말입니다. 품 안에 있을 땐 자식의 생각이 없었어요.
부모의 품 안에서는 자식은 부모의 생각에 무조건 따랐어요. 자식과 부모는 하나였어요. 부모의 생각이 곧 자식의 생각이었어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러나 자식이 크고 부모의 품을 떠나면서 부모와 자식은 둘이 됩니다. 한 몸에서 타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부모의 속을 썩이기 시작을 합니다. 부모들은 이때부터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하게 되어요.
이걸 성경식으로 말하면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고부터 인간들의 자아(自我)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아가 자기 생각을 갖게 하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에게 반기(反旗)를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 반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 뜻에 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을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하나님 말씀을 듣기보다 행하는데 앞섰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나아요.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겠다고 분주하게 나대는 것보다 났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 가정에 예수님에 것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생명을 주시려고 가셨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받고 있는데 마르다는 자기에게는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받지 않고 도리어 주겠다고 하였어요. 이게 죄에요.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 갑니다. 그곳에는 온 세상의 신(神)들을 모셔 놓은 신전(神殿)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신전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 신전에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도 있는 겁니다.
인간들의 정성이 얼마나 갸륵한지 행여 인간들이 감지(感知)하지 못하는 신이 있을까봐서 그 신에게도 제사를 지냈어요. 대단한 신 섬김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건 당연히 칭찬받아야 할 일이에요.
여기서 바울이 그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알지 못한다고 하는 신이란 바로 인간의 생각을 벗어나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섬겼어요. 다만 자기들 생각으로 섬긴 것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하나님이에요. 자신들이 신에게 섬김을 받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는 분이라고 알려 줍니다.
섬기는 것하고! 섬김을 받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에요.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요.
섬긴다고 하면 그 섬김이 의(義)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함이 되어요. 하지만 섬김을 받고 있다고 하면 달라져요. 당당함이 사라지고 감사함이 나와요.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랐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기를 바랐어요. 이게 창조주의 마음이에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주의 말씀을 많이 들으라는 말이에요.
뭘 요구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에요.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에요.
사무엘이 법궤 옆에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잖아요.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기도하자 알려주잖아요.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고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당하는 것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여주었어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 뜻에 굴복당하기 위해서 하셨어요. 천사들도 하나님 뜻에 굴복하라고 수종을 들었구요. 이게 기도에요.
그런데 이 시대 기도가 전부 자기 소원 이루는 식으로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성경을 곡해하여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결국 엉터리 신앙을 낳고 만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귀한 일이에요. 하지만 왜? 하는지를 모르고 하게 되면 자기 탐욕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아요. 그러니 기도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여야 해요. 무엇을 기도하여야 할지를 알고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들으세요. 하나님 말씀을 안 들으면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왜? 이러한 말씀을 하세요?” 물으세요.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이에요.
하나님 말씀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예! 하고 순종한다고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아요. 죄인에게는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가 정죄하는 법이에요. 죄인을 고발하는 형식을 담고 있어요.
말씀이 거울이에요. 거울 앞에 서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 안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해요. 내가 지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위하여 살고 있는지 달아보아야 해요. 그리하여 자기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도 그 지킴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지킴으로 자기 의(義)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인지 저울질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순종한 것을 자랑으로 여겨진다고 하면 그건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 아니에요.
죄인은 애초부터 불순종의 자식들이에요. 그런데 본인들은 몰라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유구무언이 되어야 합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관념이다 보니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여도 지식이에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설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악하게 살아서가 아니에요. 도리어 너무도 착하게 산 것이 문제에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의(義)가 되는 줄 안 것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율법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었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키겠다고 덤빈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요! 라고 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어줄게요! 그런다구요.
이처럼 자기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에요. 자기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죄에요. 피조물은 창조주와 떨어지면 죽어요.
피조물은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서 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이 되어 있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있어요. 생명(生命)이라는 말이 곧 하나님이 살으라고 지시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살으라는 명령이 곧 피조물의 생명이에요.
하나님께서 야! 정낙원이 너 살어! 그러면 제가 살고!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이제 그만 살고 죽어! 그러면 나는 죽어요.
내가 살고 죽는 권한은 하나님에게 있어요. 그러니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이게 피조물의 생명이에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허락(許諾)이란? 명령이란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보여주셨잖아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야~ 이제 죽어 그러니까 즉시로 말라버렸어요. 무화과나무는 지금까지 예수님 말씀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야! 나무야 살고 있어! 그러니까 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야! 이제 그만 살고 죽어! 그러니까 죽은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졌어요.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라고 하였어요. 믿음을 받으면 모든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믿어져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말씀(명령)으로 살고 있고! 참새도 하나님 말씀(명령)으로 살고 있고! 나무도 하나님 말씀(명령)으로 살고 있어요. 믿음을 받은 자는 이게 믿어져요.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는 내가 산다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살게 해 주셔서 살고 있다고 해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구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해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성도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챙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드려요. 이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소유한 것은 모두가 창조주가 주신 것이에요. 자기 것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믿음으로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것이란 것을 알아요.
생명도 하나님 것이고! 의(義)도 예수님 것이고! 믿음도 하나님 것이에요.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에요.
이처럼 피조물은 철저하게 하나님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들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걸 은혜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주셔야지만 믿어져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준 사람들은 신자다운 삶을 따로 정해 놓지 않아요. 어떤 규범을 만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떻게 살까요”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요. 쉴만한 물가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망의 음참한 골짜기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일어섬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넘어짐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앉고 일어섬이 하나님의 권한이지 우리가 선택하여서 얻어내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인생을 선택하여서 산다고 하면 우린 다 영웅호걸이 되어 살고자 합니다. 최고가 되어서 하나님처럼 살고 싶어 해요.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가 몰고 온 현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세요. 그리하여 내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평생 이 싸움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주권을 하나님께 차압당하는 인생살이를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내 이름이 삭제 당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겨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광은 차압당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죄가 내 인생을 살라고 하였고! 죄가 내 영광을 추구하라고 하였고! 죄가 내 세계를 확장하라고 하였고! 죄가 내 이름을 떨치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 데리고 가서 죽여 버렸어요. 그리곤 예수 안에서 다시 살려 놓았어요. 이젠 너로 살지 말고 예수님의 것으로 살라고 합니다. 이걸 우리 삶에 적용을 시키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 안에 와 계신 성도는 자기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자기 꿈을 빼앗겨요. 그리곤 예수님의 꿈을 심어 넣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산 사람이 바로 구약의 신진들이에요.
요셉을 대표로 살펴봅시다. 요셉은 합환채를 먹고 태어난 자입니다. 합환채란? 성령을 상징해요. 그러니 신약 식으로 말하면 요셉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줍니다. 무슨 꿈입니까? 만유의 주(主)가 되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하여 살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주(主)가 되는가 하면 형제를 위하여 대신 고난당하고 주(主)가 되어요.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만유의 주(主)가 된 것과 같아요. 그래서 요셉은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主)가 되게 하는 인생을 대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 간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온 세상에 기근을 해결하고 애굽이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들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인생 속에는 자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표상이면서도 또한 우리 성도들의 표상이에요. 그럼 우리 성도들도 우리가 소유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요.
생명을 물론이거니와! 의(義)도 내 것이 아니고! 믿음도 내 것이 아니고! 구원도 내 것이 아니에요.
구원이나, 죄사함이나, 영생이나, 믿음이나, 의(義)나, 은혜나, 은사와 같이 영적인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 것이에요.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은 우리가 소유(所有)화 하고 사유(私有)화 할 수가 없어요. 영적인 것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거저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선물이에요.
예수 안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그 속에 있는 것들을 혜택으로 누리게 되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이러한 것들을 자기 힘으로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믿음도 소유하고자 합니다. 은혜도 은사도 소유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가지고 큰 소리치고 싶은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으뜸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의(義)를 소유한 것처럼 여겨요. 이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의(義)로 여기신다고 합니다. 여겨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은 실제로는 의롭지가 않은데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감사하고 사는 사람이 천국 안에서 사는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을 자랑치 말고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행여라도 예수 믿는 나를 자랑치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랑거리는 오직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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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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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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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