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218. 묵상글 ( 2024년 12월 18일. - 요셉처럼. 등 )
----------------------------------------------------
241218. 2024년 12월 18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8 03:59
- 요셉처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어제 우리가 들은 예수님 족보의 맨 마지막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오심을 가장 가까이서 맞이한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요셉처럼 주님 오심을 맞이하기’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꿈이랄까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을 꾸밀 결혼 계획이었고,
자기의 자손을 많이 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이 모든 계획을 좌절시키셨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요셉처럼 주님이 내게 오시게 하려면
내 계획의 실패가 주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기회,
주님께서 내게 개입하여 오시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하느님 뜻에의 순종이고,
인간적 실패를 영적인 기회로 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 다음은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은 것뿐 아니라
자기 여자를 고집하지 않고 성령께 양보한 것이고.
그리하여 마리아를 성령의 궁전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요셉에게는 자기 뜻도 없고,
자기 아내도 자식도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하느님밖에 없는데,
이것이 제가 생각하기에 가난입니다.
가난 그것은 하느님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사랑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주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서
요셉처럼 순종과 정결과 가난을 살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기는 주먹을 꽉 쥔 채 태어납니다. 온몸에 힘이 꽉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주먹을 풀며 힘을 뺍니다. 그 뒤 계속 힘 뺀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 웃고 잘 웁니다. 긴장된 모습으로 계속 있지 않습니다. 또 얼마나 유연한지 다리를 180도로도 쉽게 찢을 수 있고, 발바닥 박수가 손바닥 박수만큼 편합니다. 수월하게 물에 뜨고, 빠르게 언어를 익힙니다. 모두 힘을 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사는 것도 이렇게 힘을 빼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힘이 계속 들어가고 있습니다. 힘이 들어갈수록 사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수영 배울 때를 떠올려 봅니다. 처음 배울 때 강사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 빼요~~~”
이 말을 듣는다고 힘이 빠졌을까요? 힘을 빼야 한다고 머리에서는 알지만, 몸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복된 연습을 통해 힘을 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수영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물 위에 잘 뜨게 되었고, 앞으로도 쭉쭉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힘을 주고 빼는 것의 반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진정한 성장은 힘을 뺐을 때 이루어 지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힘만 주고 있습니다. 낑낑대면서 어렵고 힘들다고만 외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계속된 힘에 쉽게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걱정과 불안만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커다란 힘을 갖게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주님 안에서만 힘을 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주님 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려고 합니다. 계속 힘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셉 성인이 꿈에 천사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성모님의 잉태 소식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을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잉태 소식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을까요? 그래서 주님의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므로 하느님의 뜻이 요셉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요셉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굳은 믿음을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편하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힘을 쭉 빼는 삶, 그래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힘 들어갈 일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럴수록 주님 안에서 힘을 쭉 빼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만이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또 더 발전하는 삶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하기를, 죽어 있을 시간은 아주 기니까(스코틀랜드 속담).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1독서>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예레 23,5-6)
<복음>에서는 그분을 모셔 들인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는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두 가지 예언의 성취를 통해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은 요셉의 믿음에 찬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복음>에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이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보다 높은 법, 곧 은총의 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야흐로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아직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거룩한 신비를 알려주고 깨우쳐준 까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천사는 단지 예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약속으로 요셉을 이해시켜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21)
이렇게 그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곧 아버지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마태 1,22).
그렇습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요셉 성인과 함께 의심하기보다 신비를 받아들여 살아야 할 일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여, ‘행동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쫒아 “의로움 사람”으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오로지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
241218. 2024년 12월 18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 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사람으로 지닌,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성조들이 전쟁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를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과 고통,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고, 숨었을 뿐입니다.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의로움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율과 잘 융합하여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당황, 고뇌,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어 상대를 배려해 주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어디 있을까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구약에서 임마누엘은 희망의 약속입니다. 임마누엘은 아하즈 왕에게 주어진 징조로,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구원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임마누엘의 이름은 당시 정치적, 영적 혼란 속에서 하느님이 여전히 자기의 백성과 함께하심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은 단지 먼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곁에서 인류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 임마누엘의 예언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완전히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단순한 동행이 아닌, 인간의 고통, 기쁨, 삶과 죽음의 모든 면에 참여하신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임마누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저는 임마누엘에 대한 두 가지 체험이 있습니다. 1991년 9월 5일입니다. 저는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보름 넘게 입원했습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제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던 분이 있습니다.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열이 나면 수건을 물에 적셔서 닦아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힘들어하면 온몸을 주물러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과 정성은 바로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저는 퇴원하면 어머니 곁에 임마누엘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짐은 1달이 안 돼서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매일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하겠다는 다짐도, 한 달에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겠다는 다짐도, 매달 용돈을 드리겠다는 다짐도 봄에 눈이 녹듯이, 제 마음에서 녹아내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의 행동에 대해서 한 번도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힘들었을 때, 고통스러웠을 때도 어머니를 통해서 저와 함께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아플 때도, 어머니가 외로울 때도 사제라는 이유로 함께하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12월 24일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가족 잔치가 있었습니다. 노래, 연극, 장기 자랑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녀님과 ‘하얀 성탄’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너무 열심히 불렀는지, 미사 후에 나가보니 눈이 무릎까지 쌓였습니다. 어두운 밤이고, 길이 좋지 않아서 우리는 모두 성당에서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지냈습니다. 목동이 주님의 성탄을 축하했듯이, 동방박사들이 주님의 성탄을 축하했듯이, 우리는 전도 부치고, 찌개도 끓여서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드렸습니다. 33년 사제 생활 중에 가장 잊지 못할 성탄 전야 미사였습니다. 예전에 베네딕토 성인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오빠와 더 있고 싶어서 기도했더니, 밤새 비가 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베네딕토 성인은 밤을 새워 동생과 이야기하였습니다. 2001년 성탄에도 하느님께서는 눈을 내려 주셔서, 본당 교우들이 밤을 새워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저는 첫 본당 신부의 소임을 행복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꿈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길을 해변 위의 발자국으로 보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삶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에 발자국이 두 줄이 아니라 한 줄만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청년은 몹시 상심하며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 왜 저를 홀로 두셨습니까? 제가 당신의 사랑을 의지했는데, 그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너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한 줄의 발자국만 보았던 그 시기에 나는 너를 품에 안고 걸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가장 기뻤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성체 성사, 말씀, 공동체 안에서 임마누엘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함께하시는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임마누엘의 현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까요? 사랑, 연대, 그리고 기도로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은 단지 과거의 예언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 신앙 속에서도 매일 새롭게 체험해야 할 진리입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그대는 꿈 한 번에 인생을 걸 수 있을까요? 특히 결혼이라는 일륜지 대사를 꿈 한 번에 결정할 수 있을까요?
요셉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늘 요셉의 모습을 보면 오늘뿐만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꿈에서 많은 삶의 해답을 찾아왔던 사람처럼 보입니다.
꿈에서 깬 요셉은 두말하지 않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요셉은 꿈속에서 그것이 하느님께서 하신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의로움은 ‘정의로움’ 즉 공평과 불의와 악에 맞서는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 요셉의 ‘의로움’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는 불의와 맞서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의이다.’라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스스로 정의와 불의를 나누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로운 사람들로 인해 메시아는 지상으로 내려오실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요셉뿐만 아니라 의로움의 모범인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도 말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복음 속 ‘의로움’이 자라나기를 희망합니다. 이미 자라났다면 잘 가꿔나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 그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늘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캔디
집무실 한켠 수납장에 캔디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한 분 한 분이 주신 캔디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홍삼 캔디
도라지 캔디
목청 캔디
용각⭘ 캔디
레몬 캔디
어릴 적 ‘눈깔사탕’이 생각납니다.
커다란 사탕 하나 입에 물면
사탕이 너무 커서 가끔 침이 삐져나왔던 그 캔디….
자기 전에 먹다가 다 못 녹여서 머리 위에 고이 간직하고 잠들었던 그 캔디
모두 달달한 캔디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기억과 추억은 다양합니다.
오늘은 캔디 하나를 물어야겠습니다. 건강에 좋은? 달달한 것으로 말입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의인 성 요셉
“하느님 중심의 삶”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대림2부 12월 18일의 “오 후렴”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 앞서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역사의 엄중한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자를 통해 개입하십니다. 수도생활 초기부터 참 많이 강조했던,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끝까지 강조할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세월이 사납게 지나갈수록 마음의 중심을 다잡는 것이 알 수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다산>
마음이 하느님 중심을 잃었을 때 엄습하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온전한 삶을 위해 마음의 중심을 잡는 일이,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신중하라, 한겨울 살얼음 낀 내를 건너듯.
두려워하라, 사방이 에워싸인 듯.”<도덕경>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자는 매사 신중하며 두려워합니다. 부정적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경외의 두려움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성 요셉입니다. 어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어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다루며 주인공은 우리 수도원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입니다. 이미 예수님 탄생의 전조가 이미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예고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이런 예수님 탄생에 앞서 등장하는 의로운 사람 성 요셉입니다. 어제에 이은 화답송 후렴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더욱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정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정의와 평화의 세상일 것입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정의와 평화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참으로 정의로워야 평화로울 수 있고, 정의없이는 참평화도 없습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중심의 정의와 평화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결정적 협조자인 의인 성요셉입니다. 의인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의인 성 요셉은 배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아주 상식적인 사랑의 표현이 배려와 존중입니다. 일상에 충실한 사람은 상식적이며 이건 영성 이전의 기본입니다. 좌파나 우파가 아닌 상식과 비상식, 정의와 불의, 진리와 거짓이 분별의 잣대가 됨이 온당합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살리기 위한 성 요셉의 사랑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사랑의 배려에서 나오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대목에서 성 요셉의 마리아에 대한 배려의 사랑과 지혜가 빛납니다. 하느님의 탁월한 안목이 놀랍고 고맙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대목을 대할 때 마다 떠오르는 불암산에 관한 짧은 자작시입니다. 그대로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크고 깊은 사랑에 고요한 믿음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둘째, 의인 성 요셉은 경청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수한 마음, 침묵에 저절로 따라오는 경청의 겸손입니다. 영성생활에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잘 듣는 경청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경청의 훈련과 습관이 일상화된 요셉같습니다. 마침내 결정적 순간에 이런 요셉의 꿈에 개입한 주님의 천사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요셉의 태몽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요셉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주님은 천사를 통해 당신 속내를 환히 밝히십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모험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는 본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히브리말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성령으로 잉태된’ 세상 구원의 사명을 지닌 ‘또 하나의 예수’란 생각도 듭니다.
셋째, 의인 성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자발적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입니다. 다음 대목을 통해 성 요셉의 순종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성 요셉의 지체없는 자발적 순종의 믿음이 하느님께는 얼마나 고마웠겠는지요! 분명 감동하셨을 하느님입니다. 성 요셉의 순종의 응답을 통해 마침내 이사야 예언은 실현되니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신비롭고 영예로운 이름 임마누엘인지요! 우리 역시 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또 하나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의인 성 요셉은 닮은 배려와 경청, 순종의 사람이 되어, 또 하나의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걷는 길>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마태 1,20)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오 1,24)
닫힌 나
없는 틈
애써 비집고
님 오시니
나 열어
님 모시고
님과 함께
나의 길
나와 함께
님의 길
늘 새로이
떠나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요셉의 생각
아마 요셉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마리아의 죄를 덮어 준다면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그 일을 밝힌다면 그들은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일 것이다. 혹시 마리아의 임신은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닐까? 사라도 아흔 살 나이에 임신하여 아이를 낳지 않았던가? 하느님께서는 마른 장작 같은 여인이 꽃을 피우게 하셨는데, 신께서 마리아가 남자의 도움 없이 아기를 잉태하기 원하셨다면?
여자의 임신이 남자에게 달렸는가? 여자의 임신이 언제나 남자에게 달렸다면, 남자가 원해야 여자가 임신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남자가 여인이 임신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셔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 여자의 임신이 남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달렸다면,하느님께서 그 여자가 남자 없이 자식을 낳기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 그리 놀라운가?
그러니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마리이를 조용히 멀리 보내야겠다. 정황이 불확실한 경우라면 죄 없는 사람이 죽임올 당하는 것보다는 누구나 아는 창녀가 벌 받지 않고 빠져나가는 편이 낫다. 의로운 사람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불의한 사람이 정당하게 벌을 피하는 편이 실로 정의에 더 가깝다. 죄 있는 사람이 벌을 한 번 피한다 해도, 다음번에는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이 죽으면 그를 되살릴 수 없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둘째로, 여러분은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모든 것을 여읜 마음만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여러분은 없는 것(無)이 없어야 합나다. 사람들은 지옥이 무엇을 불사르느냐고 묻습니다. 영성의 대가들은 지옥이 의지를 사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없는 것이 지옥에서 불타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다음의 비유를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글거리는 숯불이 내 손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만일 내가 숯불이 내 손에서 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일 것입니다. 나를 사르고 있는 것을 정확히 말하면, 내게 없는 것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숯불은 내 손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없는 것”이 나를 사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손에 숯불이 가지고 있는 것이 들어 있고, 내 손이 그것을 견딜 수 있다면,내 손은 불의 본성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설령 어떤 사람이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내 손에 놓을지라도,그 불덩이가 나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을 관상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안에는,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들어 있습니다. 이 ‘없는 것’이 지옥에서 영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지, 의지나 어떠한 불꽃이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여러분은 완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해지고 싶거든, “없는 것”이 없게 하십시오.(298)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교황권과 슈타우펜 제국 사이의 결전:
인노첸시오4세(1243-1254)는 이 위험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후 수년 동안 양측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프리드리히는 제1차 리옹 공의회(1245)에서 다시 파문되었다. 수없이 쏟아져나온 논란서들이 이 전쟁을 지지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서구세계 질서의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임을 점점 뚜렷하게 깨달았다. 인노첸시오는 슈타우펜 왕가의 포위 위험에서 더이상 피하는 일이 없기 위하여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교황의 봉토로서 앙주의 샤를에게 양도하였다. 황제권은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1250) 후 다시 한번 무서운 위기에 빠졌다. 독일에서는 이중 선거가 평온을 뒤흔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콘라트 4세(1250-1254)가 슈타우펜 왕가의 유산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가 26세로 사망하자 그의 이복 형제인 만프레드는 그의 조카로 “슈타우펜 왕가의 마지막 사람”인 겨우 2세 된 콘라딘으로 하여금 이탈리아의 지배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만프레드의 사망(1226) 후, 연소한 콘라딘은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자신의 제국을 탈환하기 위해 1267년 가을에 대담하게 출정하였다. 그는 탈리아코에서 샤를에게 패하고, 열두 명의 충신들과 함께 1268년 10월 29일에 나폴리에서 참수되었다. 이로써 슈타우펜 왕가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고, 황제권은 참혹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횡권도 더없이 타격을 받았다. 그것은 퓌로스적 숭리였으므로 교황권의 보편적인 지위를 오래 주장할 수가 없었다. 교황권은 특수 이해를 가지고 분기하고 있는 민족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기댈 데가 없었다.
서구 공동체의 해체는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제 유럽의 가장 강한 세력이었다. 교황직이 방금 획득한 그 우위를 민족적인 프랑스 왕국에게 양도해야 할 시점은 이제 멀지가 않았다. 교황권은 불명예스럽게도 프랑스에 예속되게 되었다.(246)
----------------------------------------------------
241218. 2024년 12월 18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은총의 길을 간 의로운 요셉 성인 /
박윤식 [big-llight] 241217. 21:03 ㅣNo.178555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결혼 관습은 보통 세 단계를 거쳐 정식 부부가 된단다. 결혼은 성스러운 것으로, 어렸을 때 부모는 자기 자녀를 다른 집안 자녀와 약혼하는 게 첫 단계다. 다음은 정혼이다. 약혼한 사이라도 여자 측에서 결혼을 원치 않으면 파혼할 수 있고, 결혼 의사를 밝히면 정혼이 성립되어, 일 년 동안 이 기간이 지속된다나. 서로 남편과 아내라고 부르지만 부부 생활을 하지 않는 상태며, 여자는 시집이 아닌 친정에 머문다. 마지막으로 ‘결혼’ 단계이다.
‘의로운 사람’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 단계에 있었는데, 그는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물론 이는 간음죄가 성립되어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지만, 그는 남모르게 조용히 파혼하려고만 마음을 정했다. 그때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그녀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려 주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면 어떤 이가 의로울까? 요셉과 같은 경우일 게다. 그는 하느님을 먼저 보고, 세상일을 한 이라 분명히 여겨진다. 사실 그는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다. 이를 세상일로만 봤다면 그녀를 거리로 내몰고서, “내 약혼녀가 아기를 가졌소.”하고 고발해 돌에 맞아 죽게 하였으리라. 그러나 하느님만을 보았기에 생명을 존중하여,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그녀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고 또 믿었다.
세상일만을 바라본 이었다면, 이런 ‘개’같은 꿈을 어찌 믿겠냐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단정했을 수도. 그러나 누구보다도 의로운 요셉은 하느님 안에서는 불가능이란 일체 없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수도, 또 예언자가 일러준 바 그 아기가 ‘구세주’가 될 것도 믿을 수 있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이렇게 요셉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를 맞았다.
이에 대해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주위에서는 다소간의 의심도 했으리라. 먼저 세상일만을 본이는 바로 이러할 때에 천사의 말을 무시한 채, 자기가 본디 생각한대로 분명히 하려 했을 게다.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먼저 보고, 세상일을 일구는 의로운 이였기에 순명밖에 모르는 수줍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요셉에게는 자신이 본디 꿈꾸던 미래는 사라지고 새로운 앞날이 펼쳐졌다. 그렇게 의로운 요셉은 구세주의 양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로 말미암아 겪을 미래의 몫도 감수했다.
이렇게 그는 그녀를 아내로 삼았을 때에 찾아오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마저 자기 삶의 한 부분이라는 ‘성가정의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구세주 지상 순례의 길에 조용히 등장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갈 때나, 피난 다닐 때나 단 한마디 대화도 없었다. 그저 가족을 철저히 보호하고, 묵묵히 자신 일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정녕 의로웠고, 신앙인인 우리는 요셉의 의로움을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이로써 그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구세주와 그 어머니의 든든한 보호자인 울타리가 되었다. 그의 의로움이 자기 비움으로, 메시아를 세상에 오시게 한 거다. 주님 오시기 전에 이미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실 주님을 따라나선 것이다. 그 길은 모든 이를 위한 은총이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요셉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그가 마리아에게 느꼈을 배신감과 상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성문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게 할 수도(신명 22,23-24 참조)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약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고,
또 그 남자에게 가기를 바란다면 자유롭게 해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통하여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요셉은 마리아를 생각하여 내린 자신의 ‘옳은 결정’이 하느님의 계획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내 그는 하느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여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입니다(1,24 참조).
‘의로운 사람’ 요셉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이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 하느님의 계획에 어긋남을 알게 되자
그분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을 가진 이였습니다.
이 같은 그의 믿음은 ‘다윗의 후손’에서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도 요셉의 믿음을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옳은 결정이라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기꺼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용기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1,24). 아멘.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35)
==========================================================
----------------------------------------------------
241218. 2024년 12월 18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요셉의 협력을 들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약혼자의 임신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서
마리아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남모르게 파혼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듣고
마침내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요셉의 결정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사의 말에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의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의 역할,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요셉은 의로움이 실현되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그 의로움은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나 한 사람의 의로움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날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더 많은 의로움을 이룬다는 점에서
나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을 잠시 멈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태오 복음사가가 인용한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단지 나 혹은 너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심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혈연적인 당신 백성에서 확장되어
온 세상이라는 믿음의 당신 백성에게 적용됩니다.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확장은
요셉이 자신의 의로움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이의 구원에 초점을 두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오늘 복음에서
요셉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의 협력이 모여 점점 더 가능해집니다.
그 협력에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나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긍정적으로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 20)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모든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아프고
힘든 일이
가장 행복한
일로 바뀝니다.
십자가를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는
우리 주변의
성숙한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맞아들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고귀한 약속은
탄생합니다.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고귀한
약속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맞아들이는
사랑은
얽혀있던
실타래를
풉니다.
우여곡절이
있어도
받아들이는
사랑이
있습니다.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탄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소중한 만남을
지켜주는
마음의 빛!
성탄이
있습니다.
맞아들임과
껴안음
사이에
태어나는
소중한
성탄입니다.
우리의 만남을
새롭게하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탄생하실 아기의 이름 두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이름은 예수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원자시다.’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모세의 후계자로서 요르단 강 건너 약속된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여호수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후 파괴된 이스라엘 성전과 의식을 재건하는데 앞장섰던 대사제 예수와의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엘르아잘과 시라의 아들로서 지혜교사이자 집회서의 저자 역시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하지 못했던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구원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두 번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탄생하실 메시아께서는 이름부터 너무나 은혜롭고 감지덕지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신데,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보니,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우리 내면 깊숙이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임마누엘 주님 현존 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 남은 날들이 외적으로 볼 때는 조금은 우울하고 슬플 것입니다.
여기저기 탈이 나고, 점점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한명 한명 떠나가고, 우리네 삶은 회색빛일 것입니다.
그럴수록 꼭 기억해야 할 대상이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꽃다운 이팔청춘 내 인생에도 함께하셨지만, 쪼그라든 노년기의 삶에도 굳건히 함께하십니다.
힘겨운 병고의 순간, 우리 인생을 총정리하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임마누엘 주님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로운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셨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겠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받는 은총의 수준은 내가 하는 사랑의 수준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요셉은 임신시켜놓고 약혼자를 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힙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결단의 순간에서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이 은총을 얻어냅니다.
요셉은 성모님의 남편이 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사랑만이 은총을 얻어냅니다.
인간의 사랑을 지향하는 아기는 인간의 사랑을 받지만, 늑대 정도의 사랑을 지향하는 늑대 새끼는 늑대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이 은총입니다.
요셉은 하늘의 은총을 원했던 것이고 하늘에 합당한 사람임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죄인임을 자처했듯이, 자신도 자기를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죄인임을 자처한 것입니다.
은총은 내가 지향하는 사랑의 크기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중 하나인 ‘면죄부 판매원 이야기(The Pardoner’s Tale)’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이 왜 은총을 잃는지 잘 표현됩니다.
이 이야기는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방탕한 삶을 살던 세 젊은이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원인을 ‘죽음’의 탓으로 돌리며 비난합니다.
이들은 오만하게도 죽음을 찾아내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길을 가던 중 이들은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그들에게 존중과 축복을 요청하지만,
이들은 그를 조롱하며 약하고 초라하다고 비웃습니다.
또한 죽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무례하게 묻습니다.
노인은 상징적으로 한 나무를 가리키며 거기서 죽음을 찾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나무 아래서 죽음 대신 이들은 많은 금화를 발견합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처음의 목적을 잊고 그 금화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기심은 서로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각자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려 합니다.
가장 어린 이는 도시로 가서 음식을 사 오면서 두 사람을 독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반면 나머지 두 사람은 돌아온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젊은이가 돌아오자 두 사람은 그를 죽입니다. 이후 두 사람은 축하하며 독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결국 모두 죽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죽음을 찾으러 갔다가 서로의 탐욕과 배신으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타인을 가혹하게 판단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세 젊은이는 탐욕과 오만으로 서로를 적으로 보았고, 그 결과 행복과 구원의 기회를 모두 잃었습니다.
어떤 형이 큰 공을 세워 살인죄로 갇힌 동생을 위해 사면권을 받아 감옥을 찾은 형과 같습니다.
형은 동생을 떠보기 위해 풀려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동생은 자기를 신고한 사람과 판사를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형은 사면권을 동생에게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사면권을 찢어버립니다.
은총은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의 단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주어집니다.
낮은 단계의 사랑 수준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적은 은총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총이나 칼이 주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은총을 주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가 잘못된 사회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예언을 받은 사람 중 하나는 유다입니다.
유다는 요셉이 막내 베냐민을 가둔다고 하자 동생 대신 자신이 갇히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유다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당신이 그 죄를 다 뒤집어쓰십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받는 은총을 받으려면 타인의 잘못을 나의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는 서기 316년, 현재의 헝가리 지역에서 태어나 로마 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춥고 가난한 거지에게 자기 외투의 반을 찢어서 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그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르틴이 거지에게 준 외투의 절반을 입고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곁에 있는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틴은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입혀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마르틴은 경외심과 새롭게 다가온 믿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베푼 친절이 곧 그리스도께 드린 사랑의 행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결국 투르의 주교가 되었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은총은 바로 누군가의 헐벗음을 자기 탓임을 느끼고 자기 옷을 그에게 입혀주는 일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도 막상 내가 피해 볼 상황이 되면 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의 죄를 벗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자신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작은 덮음을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연습이 필수입니다.
그렇게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일로 나에게 크게 잘못한 이를 덮어준다면 요셉처럼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셉도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1) 하느님께서는 메시아 예수님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선택하실 때,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셨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6-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라는 말은, 예수님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선택하실 때, 요셉과 약혼한 사실이 중요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마리아와 요셉을 함께, 어쩌면 요셉을 먼저, 선택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섯째 달’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때부터 계산해서 여섯 번째 달, 또는 여섯 달 뒤라는 뜻입니다.
그 여섯 달은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하기를 하느님께서 기다리신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함께 선택하신 것은, 더욱이 두 사람이 약혼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신 것은, 예수님이 어머니만 있고 아버지는 없는 아기로 태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는 것, 부모가 모두 있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가정의 아기로 태어나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요셉과도 함께 계셨을 것입니다.
마리아하고만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면,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로 힘든 결정을 내릴 때에도 함께 계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2월 18일의 복음 말씀은, 하느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음을, 또 성령께서 요셉을 도와주셨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2)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잉태 사실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잉태가 ‘성령 잉태’였음을 알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셉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리아가 요셉에게
그 일을 알려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녀간 뒤에
곧바로 요셉에게 모든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잉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요셉의 심정은 ‘배신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어서 ‘당혹감’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그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가 하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1) ‘남모르게’ 파혼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기의 아버지가 요셉인 줄로만 알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도, 아기도 모두 무사할 수 있습니다.
(2) 아기의 진짜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요셉 자신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남모르게 파혼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3) 남모르게 파혼하면, 파혼한 뒤에도 요셉은 여전히 마리아의 남편으로, 또 아기의 보호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어떻든 남모르게 파혼하는 것은, 마리아를 위해서, 또 아기를 위해서 요셉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것이긴 해도, 인간적인 방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나타나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결혼식을 하고 부부로 살아가라고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24절에는 ‘명령’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전체 상황을 보면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조언’입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마리아의 잉태는 분명히 ‘성령 잉태’ 라는 것을, 또 마리아가 요셉에게 한 말이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해 준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마리아에게 전한 말을(루카 1,31-33) 다시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메시아의 보호자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처럼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도 바로 그 응답과 순종입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8-24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이제 대림시기도 후반기를 넘어 점점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기다리는 구세주의 탄생이 임박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외치는 “보라, 그날이 온다”는 소리가 보다 의미심장하게, 나에게 곧 일어날 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은 내가 그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오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주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뭔가를 함으로써 오게 만드는 걸까요?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이 세상에 일어날 일들을 죽 나열함으로써 오시는 주님께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그 날’이 오게 만드는 우리의 역할 쪽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대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시어 구세주를 잉태할 것을 예고하신 일을 요약하여 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자기 정혼자 마리아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잉태했음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지요. 보통의 유다인 남성이었다면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며 정결법을 어긴 약혼녀를 회당에 고발하여 벌을 받게 했겠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돌에 맞아 죽는 걸 보고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자신이 혼인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나쁜 놈’이라는 비난을 감수함으로써 그녀가 새 삶을 시작할 기회를 주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정말 대단한 결정입니다. 요셉이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십니다. 마리아가 함께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하신 일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명령하십니다. 한 여인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써 누릴 수 있는 ‘인간적’인 행복을 뒤로 하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협조하는 협력자이자 구세주가 되실 분을 양육하는 보호자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도, 그런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고뇌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컸을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지켜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기에 누리게 된 의로움이었습니다. 요셉의 순명 덕분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 꼭 지켜야 할 계명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라는 이름 안에 담긴 의미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명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하느님의 선한 계획이 이 세상에 온전히 실현되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실 ‘그 날’이 성큼 다가올 겁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
정의라는 말은 ‘올바르다’라는 한 면에서만 볼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다윗을 두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그의 공정과 정의의 실현을 예언자는 구원을 받고 안전하게 사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희망은 과거에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구하셨듯이 이제는 유배를 떠났던 이방인의 땅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해주시는 배려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당신의 성실하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전의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의로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올바른 사람’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구약의 법을 어긴 자신의 약혼녀는 두 가지로 잘못을 했습니다. 하나는 법을 어긴 것이고 하나는 약혼의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그는 약혼녀에게 토라의 잣대를 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이라면 옳지 않은 약혼녀를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고 그래서 그녀의 불행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배신에 대한 보복으로 앙갚음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이란 사랑을 바탕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요셉은 마리아와 파혼하여 마리아 곁을 조용히 떠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럴 때 하느님께서 중재로 나서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설명을 듣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우리에게 의문은 한낱 꿈으로 돌릴 수 있는 천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리아를 이해하여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구원의 역사는 인간이 갖는 한계의 세계를 그대로 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나 요셉에게 미리 준비시키거나 설명을 하셔서 오해를 갖지 않게
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침묵으로 요셉은 마리아에 대한 믿음에 시련을 겪습니다.
마리아는 그녀대로 처녀로서 아기를 잉태한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고 요셉은
요셉대로 약혼녀에 대한 신뢰의 한계를 겪어야 했습니다.
가장 쉬운 해결은 고발하든지 아니면 갈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꿈이었지만 요셉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불신을 접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로움이란 반듯함도 있지만 그보다 하느님의 너그러우심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
241218. 2024년 12월 18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41218. 2024년 12월 18일.
주님께로 돌아서는 삶
<2024.12.18> 아침을 여는 묵상 (말 2:17~3:12절)
❝주님께로 돌아서는 삶❞
❚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자는 심판을 받지만, 돌아오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 심판을 당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경고하는 메시지들을 듣고 돌아서야 합니다(2:17~3:6절).
이스라엘은 말로써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여호와는 그런 사람을 좋아 하신다...공평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17절,쉬운성경).. 그러면서도 그들은 괴롭게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분의 사자(나의 사자, 말라기)곧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를 보내시겠다 말씀하십니다(1절). 그분이 임하시는 날에는 아무도 견딜 수 없는 심판이 행해 질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을 연단하여 금과 은처럼 연단하여 의롭게 만들어 줄 올바른 감사의 예물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2~4절). 언약의 사자가 정결케 하는 일을 완수하고 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모든 악행을 심판하실 것입니다(5절).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정의의 원칙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6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자들에게 임할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한 자에게는 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한 마음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참된 신앙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을 담을 수 없습니다. 사실 죄를 범하고 반역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고, 엄중한 심판 속에서도 멸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약속은 현재 진행형이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 복음을 배우고, 경고하는 메시지들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그럴듯한 종교 생활을 벗고 돌아서야 합니다(7~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조상 때부터 현재까지 하나님의 규례와 언약을 떠나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라고 한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도,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7절). 하나님은 그들이 십일조와 감사의 예물을 도둑질한 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 하나님의 것을 훔쳤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8절). 이처럼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죄로 인해 이스라엘에 저주를 내리셨다(9절)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돌이키길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경건과 종교 생활에 빠져 있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의 죄악을 한탄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한다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내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예물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일조와 봉헌을 하지 않는 것을 도둑질이라고까지 표현하십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을 예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른 것이 죄가 아니라 감사함이 없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매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물을 드리며 아까운 마음이 든다면 우리 자신이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을 쓰고 이기적인 유익만을 추구하는 그럴듯한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갑이 열리지 않는 회심은 가짜 회심’이라고 존 웨슬리는 지적했습니다. 온전한 믿음과 주신 사명을 위해 물질을 쓰지 못하고 오히려 맘몬에 사로잡혀 있는 내 자신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감사와 헌신이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한낱 종교 생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럴듯한 종교 생활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돌아서는 진짜 신앙 생활을 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거짓되고 불성실함을 벗고 돌아서야 합니다(10~12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어질 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가 쌓을 공간이 넘치도록 너희에게 복을 붓지 않나...”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10절). 진정한 의미는 시험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를 믿고 순종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릴 때, “...너희 작물을 해충들이 먹어치우지 못하도록 하겠으며, 너희 포도밭의 포도가 익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11절,쉬운성경)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좋은 땅을 가지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음을 인정하게 될 것(12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헌신을 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을,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많은 것을 받았음을 믿고 감사함으로 예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에 언제나 감사하며 기쁨으로 헌신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의심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온전한 감사를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아울러 많은 헌금을 했다고 해서 그의 신앙이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족과 감사가 없으면 물질적 풍요는 오히려 영적인 방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경외하는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물은 가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얼마를 드렸냐고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거짓되고 불성실한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을 도둑질하지 않고, 단순한 종교 생활이 아닌 온전한 신앙생활을 살아갈 뿐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형식적인 예배와 예물과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말 2:17~3: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