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지우개 / 玄光 윤성식
어둠을 비집고 상처지우개연구소 문을 닫으려는데, 헐레벌떡 뛰어든 A국회의원.
“오늘 업무 끝났으니 내일 오세요.”
소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제가 대한민국 국회의원입니다. 지울 상처가 큰데, 시간 내어 지금 꼭 지워주셔야겠습니다.”
국회의원이 앞세운 고약한 권위. 세상 사람들은 그걸 속된 말로 ‘무데뽀’라고 한다.
“작년에 지워드렸는데, 또 지울 상처가 있나요?”
“또 생겼어요. 이번엔 매우 고약한 상처라 빨리 지우고 싶어요.”
작년 이맘때쯤, 처음 상처 지우러 온 A국회의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상처를 지우고, 오로지 국민만을 생각하며 정의로운 정치 꿈을 실현하겠다고 했다. 그건 사람들의 꿈을 되살려주는 상처지우개의 규정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래서 뇌물,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몇 개의 상처를 지워줬었다. 그런데 또 상처가 생겨 지우러 왔다니….
A국회의원을 치유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이번엔 어떤 상처인가요?”
“바닥에 떨어진 볼펜 줍다가 여비서 허벅지에 손이 살짝 스쳤는데, 그걸 성추행이라고 우기고 공론화시켜서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지울 게 그거 하나뿐인가요?”
“또 우리 딸은 자신의 실력으로 AB대학에 들어갔는데 입시 특혜라며 난리부리지 않나, 아들에게 채용 비리 굴레를 씌우지 않나. 공격을 너무 많이 받아 마음 상처가 심합니다. 잘 지워주시면 앞으로 상처 만들지 않고 국민을 위해 정치생명을 다 바치겠습니다.”
‘국민을 위해 정치생명을 다 바치겠다.’ 상처지우개를 방문하는 국회의원마다 똑같이 되풀이하는 그들만의 가면.
소장이 문득 요즘 이슈를 떠올리며 물었다.
“땅투기하고 강남 재건축아파트 네 채 굴려 100억 원 벌었다면서요? 투기해서 불로소득 거뒀다고 뉴스에 나오던데…”
“아, 그거 투기도 아니고 불로소득도 아닙니다. 남보다 한 발 빠른 고급 정보를 이용해서 열심히 발품 팔아 땀 흘려 번 돈입니다. 사람들의 질투일 뿐입니다. 그건 상처가 아니니 지울 필요가 없고요. 하여간 집값 올라 큰일입니다. 집 없는 서민들과 취업 못한 청년들 보면 국회의원으로서 가슴이 찢어집니다.”
참 어이 없다. 말문과 논리가 막히면 억지 고함과 삿대질로 방패 삼던 A국회의원. 도대체 논리도 철학도 영혼도 없는 그는 국민보다 정보를 더 사랑했나 보다.
소장은 A의원이 앉은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상처측정기를 준비했다. 측정캡을 머리에 쓰면 뇌에서 발산되는 전기장이 영상변환기에 전송된다. 그러면 사람의 다양한 상처가 컴퓨터 화면에 구현되는 것이다.
소장은 A의원의 머리에 측정캡을 씌웠다. 의원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컴퓨터 화면에 의원의 상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의원이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주운 후 여비서 다리를 힐끔거린다. 느닷없이 치마 속에 손을 넣어 허벅지를 온통 움켜쥔다. 이런 썩을! 이걸 손이 살짝 스쳤다고!? AB대학 총장에게 전화를 한다. 대학 비리를 눈감아 줄 테니 책임지고 딸을 입학시키라고 협박한다. CD공기업 대표를 의원회관으로 불러들인다. 국정감사에서 잘 봐 줄 테니 아들 필기 및 면접 성적을 적절히 마사지하여 채용시켜 달라고 강요한다. 그 외 상처가 연이어 화면에 펼쳐진다. 금품수수,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병역 비리, 지역감정 유발하기, 음주운전, 폭력, 근거 없는 비방, 서류 위조, 허위 서류 꾸며 정부의 정책 연구 용역비 편취….
이런 비리로 당한 국민의 공격을 상처라고 생각하다니, 망할!
그러나 사람들은 상처지우개 앞에서 평등하고 누구나 괴로운 상처를 잊어버릴 권리가 있다. 국민을 위해 정치생명을 다 바치겠다고 했으니, 또 한 번 믿어보는 거다.
소장은 A국회의원의 정수리에 지우개 패치를 붙이고 지움 단추를 눌렀다. 지우개 패치가 의원 정수리를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의원은 여전히 죽음보다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상처가 지워지면 비로소 잠에서 깰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상처가 많아서 그런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1시간이 흐르고 2시간이 지나가고 3시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 소장도 처음 겪는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우개 장치에서 삐비빅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컴퓨터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이런 메시지가 떴다.
‘현재 남은 시간 10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