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53
8월18일[연중 제20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Io6eLx5WYA
[안동교구 차광철 베다(진보, 점촌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시간!>
오늘 우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주님 말씀을 접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찾고 갈구하던 주님께서 멀리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랍니다. 아주 가까이 지척에 현존하신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신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
더 은혜로운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 너무나 쉽다는 것입니다.
엄청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미사에 참석하면 됩니다.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인해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체성사에 참여하긴 하는데, 도통 주님 현존 체험보다는 부재 체험으로 기우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관건은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요 습관처럼, 후딱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성체성사를 대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돼지 목에 걸린 진주 목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좋은 제안을 몇 가지 건네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간을 잘 쓰랍니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금쪽같은 시간을 잘 사용하랍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미사 입당송의 한 말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오늘 우리의 매 시간들이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 뜨락에서 지내는 거룩한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권고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하루 하루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놀라운 업적과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찬미가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불평불만을 멈춰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절 어두웠던 상처는 자비하신 주님께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모두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저 오늘 주님 현존 안에 기쁨의 찬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zxOlW_qITk
++++++++++++++++++
<성체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하는 분임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말다툼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 중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입니다. 이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거나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나고 또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입니다. 어떻게 에너지가 없었는데 온 우주라고 하는 어마한 에너지 체계가 저절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생명체도 무생물보다는 높은 에너지입니다. 생명체가 죽어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무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동물도 하등 동물보다 에너지 체계가 높습니다. 그래서 고등동물이 세포가 분해되는 건 있어도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동물이 양성생식을 하는 복잡한 체계를 가진 동물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반됩니다. 아무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모든 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육체만 에너지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정신적인 에너지도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에너지입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죽고 싶어집니다. 에너지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배고프게 살아갑니다.
톨스토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랐습니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배고픔을 쾌락으로 채우려 했으나 채워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50세가 넘어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이때 그는 만들어진 것은 창조자에게서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존재가 존재를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으며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을 뒷받침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 생명의 희생으로 받은 생명입니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게 하는 일과,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한 장암 환자를 치료해줍니다. 암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합니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라고 대답합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밤에 습격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며 솔제니친은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생명도 받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악하며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가 지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영혼을 깨끗이 함으로써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는 저절로 생성되거나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죽음 앞에서 생명력이 풍부한 사람이 됩시다. 톨스토이는 마지막에 신상에 귀의했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깨와 소금이 만나면 ‘깨소금’이라고 합니다. 깨와 설탕이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깨달음’이라고 하네요. 설탕이 달기 때문에 ‘달음’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운명처럼 만나서 세상을 변화 시킨 인연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후에 ‘일체유심조’라는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이순신과 유성룡이 만나서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을 구하였습니다.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만유인력’이이라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만나서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을 만들었습니다. 2024년 저는 댈러스로 와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남길곳이라고 이름 지은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그 창고에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7기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27기 사목회는 신명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말씀과 친교가 넘쳐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27기 사목회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합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삶과 죽음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이 먼저고, 죽음이 나중이니 삶과 죽음은 순서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은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사고락, 생사를 함께한 전우, 생사여탈, 생사확인’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과 삶을 이야기한 말도 있습니다. ‘사생관, 사생결단’과 같은 말입니다. 삶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우리의 삶은 자칫 허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슬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흙이 되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죽음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한줌의 흙이 되는 것도 아니고, 관계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삶은 그 이정표를 향해서 떠나는 순례입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려는 자영업자들에게 해 주는 ‘조언’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의 말은 믿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이곳에 투자하면 많은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수익이 나고, 성공할 거라면 본인이 하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업은 경쟁자가 많아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영업자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기술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수고와 헌신이 없는 성공과 재물은 마치 사막에서 보이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신기루는 허상일 뿐입니다. 회개와 십자가 없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뿌리지 않고 열매 맺는다는 신앙도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과정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수고와 헌신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빵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그래서 또 다시 배고프게 하는 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선과 악을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셨다.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 살이라고 하셨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당신의 피까지도 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구체적으로 그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빵”(6,48.50)이라고 하셨을 때는 모호했지만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51절)이라고 하신다. 이 때문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고 한다. 이 말씀 때문에 많은 제자가 떠나간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3.58절)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 즉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우리의 삶에서 이 두 가지 행위는 “생명”을 강하게 해주고 새롭게 만듦으로써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이제 성체성사와 연결하면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먹음으로써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며, 거기에서 그분의 구원이, 그분의 생명 자체가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다. 그 생명은 시간과 우리의 죽음 자체를 넘어 계속되게 된다. 바로 죽음은 성체성사의 생명에 의해 극복될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4절)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이 충만한 생명이 되셨다. 즉, 부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육체까지 완전히 가지셨다. 이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와 일치되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몸 자체를 마지막 부활 때 변화시킬 생명력을 그분으로부터 얻게 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를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전하고 나누어주기 위해 받아 모신다. 그래서 활동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신자들은 성체성사에 보다 열심히 참여한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의 최고의 표현인 성체성사를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또한 피는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그분은 참으로 당신의 모든 피를 우리를 위해 흘리셨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최고의 희생의 순간을 신비스럽게 재생시켜 우리 신앙에 제시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를 기억하게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온전히 내어주는 행위를 최고로 표현해 주는 사건이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활력소를 공급하는 심장과도 같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교회의 심장이라고 한다.
“형제 여러분,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 5,15-16절) 성체성사 거행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기주의, 폭력으로 가득 찬 이 ‘악한 때’의 어두움을 없애기 위해 사랑과 봉사로 자신의 신앙인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말씀은 성체성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는 성체성사가 중심이 되는 전례적 모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18-20절)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성체성사가 감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체성사 안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에게 감사하시는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신다. 모든 일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살로 오신 그분을 찬미하며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받아 모셔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두 독서와 복음 모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사람들을 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없는 이에게”(잠언 9,4) 자신이 주는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어려운 점은, 지각없는 사람이 과연 그 초대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금보다 귀하다고 거듭 말하지만, 그 지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게 지혜의 초대는 수고스럽게만 보입니다.
한편 에페소서는 술에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도록 초대합니다. 이 초대도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지금이 악한 때라고 하면서 어떻게 모든 일에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고 말할까요? 어리석은 자라면 아마도 악한 때의 흐름에 휩쓸려 살거나, 아니면 악한 이 세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악한 세상 안에서도 지금 주어진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복음 또한 초대입니다. 잠언의 초대에서와 비슷하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를 받아먹으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초대 때문에 “말다툼”(요한 6,52)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사람들에게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하여 주실 때는 말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많은 이가 모여들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과 음료를 받으라고 하실 때는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다만 육신의 양식을 구하려 하는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서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를 구하여 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ㄴ-58)
1) 여기서 ‘먹는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을 아주 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먹는다는 말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신 것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또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온전히 믿는 믿음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그쳐도 되는 일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일’입니다. <‘온 삶’을 다 바쳐서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곧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만 강조하셨는데, 나중에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셔서 신앙인들이 당신의 살과 피를 실제로 받아먹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8)
성체성사는 ‘영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입니다.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영성체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영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받아먹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실제적인 일’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은 ‘영적인 생활’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생활’입니다. <온 삶으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취미생활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기복신앙으로 변질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으로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께 현세적인 소원을 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나도 희망해야 하고, 예수님의 기쁨과 슬픔이 곧 나의 기쁨과 슬픔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것은 바로 나의 구원이고,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내가 구원받는 것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의 슬픔은 내가 멸망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3) ‘살과 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단순한 초대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신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멸망을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53절의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말씀이 바로 ‘경고 말씀’인데,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너희는 멸망한다.”입니다. 당신을 믿기를 거부하고, 당신과 하나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멸망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 반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인데,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서게 되고, 마지막 날에 그 생명이 완성된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지금은 너무 멀게 느껴지고, 너무 막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덕분에 ‘인생의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이미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신앙인의 신앙여정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순례 여행입니다.>
4)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라는 말씀은, 성체성사 때에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신 말씀인데,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당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요한 15,4)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과의 일치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다는 뜻입니다.
=====================
[대구대교구 오영재 요셉 신부님]
<성체성사 : 어리석음의 신비>
8월 중순 늦여름의 무더위만큼이나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오늘 우리가 4주째 듣고 있는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연중 제17주일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에 매료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갈릴래아를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당신께 열광하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대뜸 건네신 말씀은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6,26)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사랑하는 모세를 언급하며 그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6,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으로 소개하며 당신의 신원을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다인들에게 혼란을 줍니다.(6,52 참조) 급기야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메시아 상(像)에 예수님을 맞춰 넣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구세주의 모습은 광야에서 만나를 받은 모세만큼만 입니다. 그 이상은 원하지 않았죠. 그들이 원했던 구세주는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 친척들 모두 잘 알고 있는 어느 동네의 아무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 땅에 강림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고 내어주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기들이 원한 메시아가 아닌 것을 확인한 군중은 그대로 예수님을 떠나 버립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지혜는 “똑똑한 사람들”이 아닌 “어리석은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지혜는 처음부터 일곱 기둥을 손수 깎아 집을 짓고 짐승을 잡아 음식을 차리며 술과 향료를 빚어 상을 차리고 여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똑똑한 이들은 초대해 준 이에게 답례를 해줄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혜가 차려준 음식을 평가하며 “이건 좀 짜다, 이건 맵다, 이건 달다” 하고 말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답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지혜가 차려준 음식을 순수하게 맛볼 따름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코린 1,23 참조)
성체성사의 신비는 어쩌면 우리에게 어리석음을 강요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살과 피를 반드시 우리에게 내어주셔야 했는지, 왜 당신의 죽음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려오다(카타바이노 καταβαίνω)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이 땅 위에 하늘 나라를 소개하셨고 이 땅 위에서 한 인간으로 사신 분이 우리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각자의 삶 안에 내려오시어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다른 곳,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은 실은 유다인들의 불신과 닮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이 예수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
[마산교구 이슬기 안토니오 신부님]
<배고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들과 함께라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기쁘게 산을 올라갑니다. 올라갔다 내려오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지고 산 아래 마을과 가까워지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보다 주변 국수집, 파전집으로 눈을 돌립니다.
적당한 가게가 나오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가게에 앉아 음식을 기다립니다. 국수 한입, 파전 한 조각이 입에 들어가고 막걸리 한잔이 입에 들어 가면 다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허기를 달랬기에 함께한 사람들이 다시 보이게 된 것 입니다.
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들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배가 고파지고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면 내가 살아온 하루가 달콤했는지 씁쓸했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채워진 배는 지속되지 않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면 비워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채워짐과 비움의 반복 속에서 끝나지 않는 허기짐을 느끼고 공허함 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치고 공허함이 몰려오는 순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 까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떠오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분명히 알고 있는 말씀인데 왜 항상 잊고 살아간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오늘 군중이 그러하였듯, 내 안에 티끌만한 의심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아니라고 다잡았지만, 그 의심은 나도 모르게 남아서 주님의 말씀 을 잊게 만든 것입니다. 그 티끌만한 의심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어려움과 고통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심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음료를 잊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오는 의심이라는 티끌을 씻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음료를 떠올렸다면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씻어낸 자리에 우리는 다시금 주님에 대한 믿음을 채울 수 있을 것이고, 그 채워진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배부름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맛보고 깨달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녀인 우리는 이제 하느님을 사랑 하는 마음을 주님께 보여드리며 약속하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맛난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으십니까? 오늘도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허기짐을 느끼십니까? 주님이 차려놓은 만찬은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 주님의 만찬으로 채워진 배부름의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이근일 마태오 신부님]
<슬기로운 신자생활>
현대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바로 ‘삶의 질’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드러난 화두인 웰빙(well-being)이 아닐까 싶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바쁜 일상이나 인스턴트 식품에서 벗어나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생활방식으로, 우리말로는 ‘참살이’다. 그리고 웰빙에서 다양한 용어가 파생되는데 ‘웰빙족’, ‘웰빙 푸드’, ‘웰빙 케어’ 등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고자 애씀에 뭐라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육체적, 세속적인 것에서 한 단계 차원을 높일 줄 아는 지혜를 신앙인들만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달에 편승하는 사조가 바로 세속화로서 이는 신앙인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 그래서 하느님도 필요 없다는 생각, 혹 신앙을 갖더라도 현세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모습이 팽배하고 있다.
여기서 인디언 속담을 들어보자. “우리가 죽을 때 손에 쥐고 갈 수 있는 것은 생전에 우리가 남에게 베푼 것이다.” 웰다잉(well-dying)을 생각하지 않고는 웰빙을 논할 수 없다고 본다. 인천 승화원화장로에서 천이삼백 도의 불로 두 시간 만에 한줌 재로 변하는 것이 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다. 신앙인은 그 이상의 것에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은 진정한 웰빙을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4-58)
세상을 초월하여 우리 수준을 높여주는 웰빙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살되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가치를 누리고 차지하라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중 잠언에서는 우리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가기를 바랐고, 바오로 사도도 구체적인 웰빙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 18-20)
성령으로 가득한 찬양과 감사의 삶이다.
이제 이 시대에 신앙인이 누릴 웰빙 방법은 무엇일까? 자주 고백성사를 통해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하느님의 작품인 대자연 속에서 자연 피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학생들도 점수 따기 식이 아닌 진정한 봉사활동으로 참 기쁨을 알고, 가진 바를 나눠주는 자선 활동이나 어려운 이웃의 소리를 들어주고 위로하기 등등은 어떨까?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준은 자신의 몸이 쪼개지고 먹히기를 바랐던 예수님처럼 사는 것, 즉 나 자신도 쪼개지고 나눠지는 모습에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신앙인의 웰빙은 성체성사의 삶을 사는 것, 요약하자면 ‘예수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인은 웰빙과 웰에이징(well aging)을 거쳐 웰다잉으로 초대된 사람임을 기억하고 오늘이 그러한 모든 과정을 잘 맞닥뜨리는, 성령으로 가득한 찬양과 감사의 삶을 봉헌하는 나날이 되면 참 좋겠다. 슬기로운 신자생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연중 20주일입니다. 지난 세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으라는 <잠언>의 외침을 들었고, <제2독서>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몸과 피가 어떻게 우리의 음식이 되는지를 말씀해주시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빵을 먹었을 때의 일입니다. 곧 “그 빵을 먹으면”, 그렇게 되겠지만 먹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예수님께서는 마치 어머니들이 건강에 꼭 필요한 음식이나 약을 자녀들에게 먹일 때에 으름장을 놓으며 먹도록 위협하거나 그럴싸한 약속으로 어르고 꼬듯이, ‘당신의 살’인 이 빵을 우리에게 먹이기 위해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최상의 약속으로 우리를 어르고 꽤 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우리의 밥이요, 양식이며, 그 양식은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잠언 9,5)
사실, 우리는 오늘도 물과 피를 섞어 마십니다.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 때 사제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물을 조금 섞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한 후, 사제는 축성된 빵 조각을 포도주가 든 성작에 넣으며 혼자 기도합니다. “여기 하나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를 받아 모시는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
이처럼, 오늘도 우리는 섞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음료로 먹고 마시며, 신적생명에 참여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귐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리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의 사귐이요,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사귐이 아니겠습니까?”(1고린 10,16)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관계’를 말하며,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을 말하며,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사랑의 관계를 배우고, ‘예수님의 피’에서 유대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배웁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 6,5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는 이 ‘안에 머물며’,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증여하십니다.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곧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사랑의 관계를 가지겠다는 응답이요,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오늘 제가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를 풀이하면 장작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복수’가 담겨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와 월이라는 두 나라는 서로 다투며 원한을 주고받았는데, 먼저 월의 왕이 급습해서 오나라의 왕을 죽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오나라의 새 왕은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를 맹세하지요. 시간이 지나 월을 공격한 오나라는 월나라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이후 월나라 왕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했고, 결국 오나라를 쳐서 복수에 성공합니다.
와신상담 끝에 복수에 성공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수에 성공했을 때는 순간의 만족과 기쁨이 있었겠지만, 결국 아픔과 상처만을 남기고 또 다른 복수를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다가옵니다.
역사 안에서 전쟁은 결국 모두 망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평화를 쫓아야 합니다. 평화만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하지만 자기만족만을 위해 복수를 다짐하고 실행하면서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길은 모두를 위한 길이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죄인이나 의인이나 상관없이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그래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이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자주 보입니다. 국가 간의 전쟁도, 또 개인 간의 원한도, 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모든 모습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제1독서의 잠언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은 어리석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은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시면서, 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유다인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말다툼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이 아닌, 성사적 표지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주고받는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단순한 먹거리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2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길만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는 참된 양식, 참된 음료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당신의 사랑을 몽땅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두가 참된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미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변화”, “영성체”. 예, 다 중요합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성변화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변화되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살아있는 미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거듭 태어나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성변화의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분을 먹고, 마셨으니, 그분을 닮고, 아니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영성체는 개인적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으로 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체를 갈망하고 잘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내가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분명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늘의 양식을 받아 모시면서도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깊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8-29) 자신을 성찰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한 후 영성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것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13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하셨던 구엔 반 투안 주교님은 감옥 안에서 ‘위장약’이라고 쓴 꼬리표와 함께 작은 병에 담아 보내진 미사주와 습기를 피하도록 손전등 안에 숨겨 보내진 ‘제병’을 가지고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저의 제대였고 주교좌성당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불사불멸의 약,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 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 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바오로 딸)
이에 비하면 우리는 미사참례를 얼마나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미사참례를 자주 하지 못합니다. 미사는 의무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빵으로 오시는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성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성체를 단 한 번이라도 받지 못하여 그로부터의 혜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유리아노 예마르)
사람들에게는 체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체질은 선천적인 것도 있고 후천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후천적 체질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음식입니다. 고기를 많이 먹느냐 아니면 야채를 먹느냐에 따라서 알카리성 체질, 산성체질이 될 수 있고 몸짱이나 비만형이 되기도 한답니다. 요즘은 특별히 웰빙식품을 선호하며 건강을 챙깁니다. 그러나 육적인 건강 못지않게 영적인 건강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양식인 성체를 잘 모시는 사람은 ’성체체질‘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니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가없는 희생적 사랑을 살게 됩니다. 모름지기 향을 싼 종이에선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신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성체를 모시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를 이룹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유입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성체의 은혜가 충만하여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일화입니다. 한국에 오셨을 때 어느 인터뷰에서 테레사 수녀님은 “하루에 성체를 두 번 모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루에 미사를 두 번 참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만나고 그 후에는 일을 하며, 즉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예수님을 두 번 모신답니다.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과의 만남이 두 번째 영성체라고 하신 수녀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내 것을 나누고 이웃과 함께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그곳에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혹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이가 거룩해 지나요? 그렇게 해서 사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나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이라야 만날 수 있습니다. 매번 성체를 정성껏 모시고 성체를 모신 힘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라고 하셨습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머물렀다”의 과거 얘기가 아니라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게 된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영성체로 “지상의 천국”(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살과 피>
요한 6,51-58 (생명의 빵)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
주님의 살과 피는
주님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는 곧 주님입니다
하늘과 땅을 다시 이으시려는 주님의 간절함을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열렬함을
죽음에서 생명을 돋게 하시는 주님의 생생함을
작은이들과 먹고 즐기시는 주님의 소탈함을
흠 많은 이들과 어울리시는 주님의 관대함을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부드러움을
쫓겨난 이들을 품으시는 주님의 따스함을
짓눌린 이들을 일으키시는 주님의 강건함을
하느님을 왜곡하는 이들을 내리치시는 주님의 매서움을
불의한 이들을 일깨우시는 주님의 엄함을
재물과 권력에 얽매인 이들을 풀어주시는 주님의 자유로움을
그러기에 주님의 살과 피는
입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입으로만 먹고 마신다면
주님의 살과 피를 제대로 먹고 마실 수 없고
주님의 살과 피를 제 입맛에 맞춥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도
나는 나이고 주님의 살과 피는 주님의 살과 피일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살과 피는
가슴으로 삶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삶으로만 제대로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가슴으로 삶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에
내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가 나를 먹는 것이고
서서히 주님의 살과 피가 내 안에 퍼져
나는 주님의 살과 피가 되어갑니다
가슴으로 삶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을 그리고 주님의 모든 것을 내 안에 담고
나를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하늘과 땅을 다시 이으려는 나의 간절함을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려는 나의 열렬함을
죽음에서 생명을 돋게 하는 나의 생생함을
작은이들과 먹고 즐기는 나의 소탈함을
흠 많은 이들과 어울리는 나의 관대함을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는 나의 부드러움을
쫓겨난 이들을 품는 나의 따스함을
짓눌린 이들을 일으키는 나의 강건함을
하느님을 왜곡하는 이들을 내리치는 나의 매서움을
불의한 이들을 일깨우는 나의 엄함을
재물과 권력에 얽매인 이들을 풀어주는 나의 자유로움을
그리하여
주님이 내 안에 머무르시게
내가 주님 안에 머무르려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가슴으로 삶으로 온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
[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몇 번의 엠티와 두 번의 캠프를 다녀오고나서 느낀 것인데 우리 청년들 술을 정말 좋아들하고 잘 마시는 것 같습니다. 기운 없이 축 쳐져있다가도 술 한잔 들어가면 저렇게 기쁜 표정이 나오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세상살이가 오죽 힘들고 괴로우면 그럴까하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제로서 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다른 청년들처럼 술과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있느라, 정작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하느님 말씀이나 기도 같은 것들이 주는 영적 즐거움에는 소홀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지요.
그런데 그런 걱정은 옛날 초기 교회 때부터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 공동체의 형제들에게 이런 권고를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집중하고 전념해야 할 ‘참된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당장 눈에 자주 띄고 접하기 쉬운 세상 것들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술, 게임, 도박, 마약, 성적인 쾌락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것들이 쉽고 편하고 빠르게 즐거움을 가져다주기에 당장은 만족스러울지도 모르나, 그런 것들에 취하기 시작하면 금새 ‘중독’에 빠지고 영혼과 정신이 피폐해지게 됩니다. 그것들이 주는 즐거움은 굉장히 자극적이만 오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쉽게 내성이 생겨 점점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 것들 말고 주님 말씀에, 그분 사랑에, 참된 희망에 취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먹고 마시며 맛들여야 할 게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지난 몇 주에 걸쳐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추구하고 먹어야 할 참된 빵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 이야기의 종합편이자 결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생명의 빵’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밝히십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여기서 ‘살’로 번역된 그리스어 ‘사륵스’는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의 ‘육신’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런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맺는 ‘인간 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형제를 ‘내 살’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가까운 가족을 ‘살붙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우리에게 내어주신다는 것은 그분과 우리가 혈연으로 묶인 한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한편 레위기 17, 11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기에 예수님께서 당신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을 즉 당신 전부를 내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단지 배고픈 이들에게 빵을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과 깊은 사랑이 이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의무가 주어집니다. 바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면 예수님은 내 몸 안에, 마음 안에, 영혼 안에 머무르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이 내 안에 머무르신다고 해서 갑자기 내 행동거지가 달라지거나 삶이 180도 변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고 계심을 믿고 떠올리며 도움을 청하면, 그분께서 언제나 든든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나와 함께 해주시며 힘을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추구하시는 ‘머무름’입니다. 나를 당신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시는, 내 안에서 일일히 간섭하고 혼내며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시다가 우리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깨우쳐 주시고 도와주시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주시는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도움과 보호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주님께 받은 사랑에 맞갖게 살아가고 있는지, 성체성사의 신비를 삶 속에서 충실히 드러내고 실현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체를 내 안에 모시고 세상에 파견되고서도 주님과 관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주님을 모르는 이들보다 더 심한 거짓과 위선, 게으름과 나태함, 탐욕과 이기심 등의 죄를 지어 내 안에 머무르시는 예수님을 속상하게 만든다면, 절대 ‘주님 안에 머무른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참된 생명의 양식인 성체를 단지 입 안에만 모실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 깊숙이 받아 모셔야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해야만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무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표현하시지요. ‘딸 바보’인 아빠는 사랑하는 딸에게, 아들이 자기 삶의 전부인 엄마는 소중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아빠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신을 힘들고 괴롭게 만드는 직장에 오늘도 출근할 수 있는 것은 ‘아빠, 힘내세요!’라고 외치며 힘을 주는 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해도해도 끝이 없는 힘겨운 집안 일을 오늘도 묵묵히 해낼 수 있는 것은 슬며시 뒤로 다가가 뭉친 어깨를 주물러주는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살아갈 힘이자 이유가 되어주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 사랑의 힘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사는 이유이자 삶의 의미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라는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느라 힘들고 괴로우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일이었기에, 당신의 순명과 희생이 아버지께 큰 기쁨과 영광을 드릴 수 있음에 행복해하셨습니다. 그것이 참된 사랑이 지닌 힘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진정으로 기뻐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된 기쁨과 보람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괴로워도 예수님 때문에 살기를, 그분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부터 살아갈 이유를 찾고 힘을 얻으며 용기를 내기를 바라십니다. 그 용기와 힘을 바탕으로 당신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과정에서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찾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은 선택이다>
-주 예수님을 선택하십시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참 행복한 분들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최고의 선택을 하셔서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시편들이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바로 주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최고의 선택을 한, 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한 시편저자의 감격에 넘친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고백도 주님을 선택한 행복을 노래합니다.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저절로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뿐만 아니라, 시편들 대부분이 주님을 선택한 기쁨을 찬미와 감사로 노래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마지막 말씀도 악이나 거짓이 아닌 선을, 평화를 선택하라는 촉구입니다.
“네 혀는 악을 조심하고, 네 입술은 거짓을 삼가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찾아라.”
선을 행하며 평화를 선택한 자에게 참행복입니다. 바로 선이자 평화이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지혜를 선택한 이들의 기쁨을 엿보게 합니다.
“어른은 밖으로 벽을 세우지 않고, 속을 채우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기른다.”<다산>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은 꾸준히 속을 채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키웁니다.
“게으르고 교만하여 간사하고 편벽된 기운을 신체에 베풀지 않도록 하고, 이목구비와 마음과 온몸을 다해 올바른 길을 따라서 의로움을 행하라.”<예기>
역시 지혜로운 이들은 올바른 길을, 의로움을 선택하여 따르고 행합니다. 제가 즐겨바치는 행복기도중 다음 부분 역시 선택의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살 줄 몰라 불행을 자초한 이들은 선택을 잘못한 결과입니다. 살 줄 알면 행복한 이들은 지혜이신 주님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삶은 선택이지만, 행복은 선택이지만 동시에 선택은 은총입니다. 저절로 좋은, 올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참으로 가짜가 아닌 참행복을, 참희망을, 참평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의 은총이, 그리고 부단한 공부요 노력이 필수입니다. 혹자는 제 수도사제의 성소를 선택한 것을 잘했다 하지만 속 사정은 단순치 않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제 글에 나오는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직수사를 지망하고 신학교육을 받아 1989년 7월11일, 만40세에 수도사제가 되었다. 누가 내 성소를 물어보면 하는 대답이다. ‘하느님이 밀어붙이셨습니다.’ 결단력있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주저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들 중에 찬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맨땅에 머리를 박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을 것이다.”
성소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주님의 부르심의 큰 은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 한 선택이고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이 선택뿐이 없을 것입니다. 무지의 눈먼 선택이 아니라, 참 좋은 선택을 위해서 은총이, 평상시 기도와 공부와 노력이 전제되어야 함을 통감합니다. 분명코 말하건데 언젠가 갑자기의 좋은 선택의 요행은 없습니다. 말그대로 진인사대천명의 결과가 좋은 선택의 길로 이끕니다.
우리가 삶은, 행복은 선택임을 말하지만 타고난 것들에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혹이고 지옥입니다. 잘 깊이 들여다보면 타고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능도 소질도 인성도 성격도 외모도 지병도 끝이 없습니다. 가정도 부모도 환경도 선택할 수 없이 타고나는 것들입니다. 사실 세상에 좋은 것들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으며 불행한 이들도 많습니다. 이래서 운명을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머물면 좌절과 절망, 원망과 실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래서 삶은 선택이라 하는 것입니다. 운명도 선택이요, 행복도 선택인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주님은 은총으로 이렇게 참 좋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타고난 것들에 좌절하기로 하면 끝이 없고 바로 이것이 악마의 유혹이고 이 상태가 지옥입니다. 반대로 좋은 것을 선택하기로 하면 하루하루 무궁무진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용감하게 적극적으로 희망을, 사랑을, 진리를, 지혜를, 평화를, 행복을, 기쁨을, 감사를, 겸손을,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이 아닌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잘 선택하면 행복이고 잘못 선택하면 불행입니다. 물론 기도하면 주님은 은총으로 잘 선택하도록 돕습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결정체인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 또한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제1독서 잠언의 의인화된 지혜는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주님을 뜻합니다. 그대로 미사 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 말씀처럼 들립니다. 지혜로운 듯 하지만 대부분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인 우리들입니다.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걷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지혜로운 삶’을 선택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라 하십시다.
“1.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2.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3.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이런 이들이 참 좋은 선택을 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참 좋은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의 선택을 오늘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 예수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다음 주님 의 말씀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선택과 은총이 얼마나 놀랍고 탁월한지 잘 보여줍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고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세상에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생명의 밥으로 오시는 주 예수님입니다. 나이 70이 넘으면 밥심으로 산다 하는데 주님과 일치의 거룩한 밥심으로,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신 성체성사, 생명의 빵 예수님을 선택한 우리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참 좋은 선택으로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8).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쓴맛의 단맛을 본다.>,
지지난 주일부터 계속되는 영원히 살게 하고, 살아 있는 빵이신 주님의 몸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화답송도 지난주와 같은 화답송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이 시편과 함께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쓴맛의 단맛을 보게 된다!!!
시편의 이 구절이 제게는 가장 사랑하는 시편 구절 중 하나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제가 그리고 여러분이 맛보고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것으로 끝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구절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미국을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그때 제가 국수주의적이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거부감이 컸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영화도 보지 않았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미국 음식은 다 Junk Food(정크 후드) 곧 쓰레기 음식이라고 여겨 미국의 대표적인 음식인 햄버거는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시시 성지순례를 했고, 그때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저의 형제들이 제 입맛에 맞을 거라면서 올리브를 한번 먹으라고 권하였는데 먹어보니 과연 제 입맛에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미국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먹었어도 미국 사는 동안 음식으로 덜 고생했을 것이고, 한 번 맛이라도 봤으면 맛 들이게 됐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때 저는 머리를 한 대 맞듯 큰 깨달음이 왔고 그때부터 앞서 얘기한 시편 구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얼마나 좋으신지 한 번이라도 맛을 보면 진짜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한 번 맛을 보지 않습니까?
그 한 번을 맛보지 않는 이유가 올리브를 안 먹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길들은 입맛, 맛 들인 입맛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길들고 맛 들인 입맛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먹던 것만 좋다고 하고 먹던 것만 고집하기에 새로운 것은 맛없다고 하며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맛의 전환 곧 새로운 맛 들임은 단맛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단맛의 쓴맛을 보는 것, 단맛이 쓴맛으로 바뀌는 체험은 내가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체험은 주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자기의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좋아하고 원하던 것을 주님이 좌절케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쟁에서 지고, 병에 걸리고, 원하던 기사가 되지 못하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데 우리가 설상가상이요 엎친 데 덮쳤다고 하는 이런 일들은 프란치스코의 경우처럼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즉시 알아채야 하지요.
그런데 보통은 뒤늦게야 그것이 하느님의 개입이요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단맛의 쓴맛을 봤다고 맛의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기까지 해야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쓴맛이 저절로 단맛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이것도 은총에 의해서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나병 환자를 보는 것은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자기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다고 그는 회고하며, 나병 환자를 껴안았을 때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고 비로소 세속을 떠났다고 합니다.
세속의 입맛은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포기하게 되고, 천상의 입맛은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것을 우리 스스로 택하지 않기에 주님께서는 고통이라는 은총으로 우리 입맛을 바꾸시고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통의 은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55)
<지혜로운 사람!>
오늘 복음(요한6,51-58)은 8월 주일복음으로 듣고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유다인들, 눈에 보이는 것 안에만 갇혀있었던 유다인들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6,52)
사실 '생명에 빵에 관한 말씀'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 '성혈'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당시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솔로몬이 하느님께 청한 지혜와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지혜는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이며,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그러니 지혜는 곧 '믿음'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위대한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들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지혜로운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고,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도록 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부터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복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하느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믿음이며, 침묵'입니다.
오늘도 이제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내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53.55)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5)
우리에게는
욕심과
어리석음을
일깨워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 생명을
중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양식이고
말씀이 참된
음료가 됩니다.
결코 마르지 않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그냥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주고받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명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가장 진실한 사랑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사람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
한 몸입니다.
참된 양식은
목숨이고
참된 음료는
우리를 향한
영원한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영원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생명을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밥값을 하며
산다는 것은
우리도
누군가를 위한
기도의 빵
용서의 음료로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빵은
주님의 사랑에
함께 머무르며
사랑해야 할
오늘의 사랑입니다.
오늘의 사랑이
모여 영원한
생명, 사랑이
됩니다.
생명의 빵을
받아 드시는
사랑 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