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의 押韻은 律格과 함께 韻律 형성의 대표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漢詩의 絶句나 律詩 그리고 서구의 소네트(sonnet)와 같은 정형시에서는 압운이 詩의 형식을 결정하는 필수조건으로 작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한시나 서구시에서는 압운법의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시에서는 압운이 시의 필수 조건으로 요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시에서는 압운법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이러한 요인은 한국시에서의 운율의 빈곤을 낳게 했다. 혹자는 한국어가 압운을 형성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론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한국어가 압운의 취약성을 지닌 언어인가는 학구적인 규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속단하기 곤란한 일이라 생각된다.
한국시의 압운에 관한 관심은 梁柱東 李秉岐 趙潤濟 등에 의해 드러난 바 있으나 극히 미약한 것이었고 좀더 적극적인 논의는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다. 역대 詩歌들 속에서 압운을 추적해 보려고 시도한 金昔姸과 金善豊, 그리고 영시의 압운 이론을 적용하여 한국 현대시의 압운을 고찰한 許米子, 그동안의 압운론을 부정적으로 비판한 金大幸 등의 논문들이 있으나 아직 한국시에서의 압운의 이론을 정립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는 압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한국시에서의 압운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우선 한국시의 실정에 부합한 압운의 개념 규정을 시도하고자 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시의 압운의 유형을 설정함과 동시에 한국시의 압운 이론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다.
二. 압운의 개념 규정에 관하여
주지하다시피 律格은 高低, 長短, 强弱 등의 소리의 성질이 빚어낸 일정한 틀이 반복되면서 만들어 낸 운율인데 반하여 押韻은 동일한 소리의 반복에 의해 형성된 리듬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복되는 소리의 범주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제기된다. 말하자면 반복되는 소리의 단위를 單音으로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音節이나 혹은 語節 이상까지로 확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지금까지의 압운론자들은 압운의 범주에 대한 뚜렷한 한계를 설정하지 않은 채 대개 반복되는 소리를 막연히 압운으로 다루어 왔다. 그런데 논자 가운데는 동일한 단어의 반복이나, 동일한 조사나 어미 곧 형태소의 반복은 압운으로 다룰 수 없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전자를 압운의 擴大論者라고 한다면 이와 상반된 후자를 압운의 限定論者로 구분하여 논의토록 하겠다. 확대론자들에게는 압운의 개념 규정에 관한 명료한 논급이 없으므로 한정론자의 대표적인 논문이라 할 수 있는 김대행의 '押韻論'에 제시되어 있는 압운의 이론을 대상으로 하여 한국시에서의 압운의 범주 내지는 개념 규정을 시도해 보도록 하겠다.
가) 最小單位인 音素에서부터 最大單位인 文에 이르기까지 어떤 條件 아래서도 형성될 수 있는 同音反覆 가운데 어디까지가 押韻論의 領域이 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앞서 引用한 漢詩는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押韻에 해당하는 것은 音聲의 차원이다. 여기서 확대되어 語彙論·統辭論的인 同一要素反覆은 押韻論을 벗어나 文章 修辭學的 反覆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과 같은 詩를 보면 押韻이 音聲論的 次元의 것임은 더욱 分明해 진다. 여기에 보인 韻은 [侵 ch'in]韻으로서 이처럼 押韻이란 音節 全體가 完全히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인 音聲의 同一을 요한다. 그런 바에야 押韻이 音聲單位의 논의라야 할 것임에는 再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硏究家들은
물구슬의 봄 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香氣 불긋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金素月:꿈 길―
과 같은 詩를 押韻된 形態로 제시해 왔다. 여기서 反覆되는 同一音 '길, 숲'은 분명 同音反覆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의 押韻論에 의한다면 이는 押韻에 포함될 성질의 것이 못된다고 할 것이다. 그 까닭은 '실, 숲'들이 이미 音韻論의 범위를 벗어나 語彙論的인 同一形態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同綴異義語(homograph)가 아닌 한, 그것은 文章 修辭學의 범주에 들 것이지 押韻論에서 취급할 것은 못된다.
라) 차원의 혼란으로 인한 혼동은
芙蓉을 꼬잣난닷 白玉을 믓것난닷
東溟을 박차난닷 北極을 괴왓난닷
―鄭澈:關東別曲―
와 같은 예에서 押韻現象을 발견하려는 데서도 드러난다. 여기서도 '―난닷'의 반복은 이미 音素의 단위가 아닌 形態素의 反覆이다. 보다 큰 단위에 의해 형성된 同一性은 그 下位部類의 同一性을 제압해 버리므로, 音聲의 同一性을 認識하기 전에 意味의 同一性을 가져 오고야 마는 것이다. 따라서 音聲上의 효과라는 押韻의 예로서는 적당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가)의 요지는 압운은 音聲의 문제이므로 그 범주를 어휘나 형태소의 반복에까지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나)는 漢詩를 예로 들면서 압운은 단음의 반복만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다. 다)에서는 한국시에서의 동어반복은 압운이 아니라 수사학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라는 비판이고 라)에서는 동일 형태소의 반복 역시 압운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첫째, 위의 주장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위의 압운론은 漢詩의 압운을 전제로 해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시에 기존의 전통적인 압운 이론이 없기 때문에 漢詩나 서구시에서의 압운의 양상을 원용하여 일반적인 압운의 개념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한국시에서의 압운이 漢詩나 서구시에서의 압운의 형태와 반드시 동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서구 그리고 한국의 언어 구조들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이다. 曲尾語인 서구어와 膠着語인 한국어는 언어 구조상 큰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表意的인 漢詩와 表音的인 한국시는 그 표기 수단에서 원초적인 변별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같은 조건에 놓고 운율을 따지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漢詩의 압운법이 이러하니 한국시의 압운법도 이러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漢詩의 律格構造가 高低律이니 한국시의 율격도 고저율이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설득력을 지닐 수 없다. 필자는 한국의 현대시는 중국의 漢詩나 서구시(poetry)와도 다른 것이기 때문에 한국 현대시를 漢詩나 서구시의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것의 부당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독특한 언어구조를 지닌 한국어가 만들어 낸 한국시의 운율을 상이한 언어구조에 의해 형성된 외국시의 운율 이론에 종속시키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漢詩나 서구시의 경우를 근거로 하여 한국시의 압운의 범주를 단음으로 한정하려는 것은 조급히 서둘러 결정할 일이 아니다. 한국어의 언어 구조적 특성을 면밀히 살핀 다음에 결정해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글 다)에서는 동어 반복이 압운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음운론의 범위를 벗어나 어휘론적인 동일 형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同綴異義語가 아닌 한, 문장 修辭學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글의 요지는 同音異義語가 아닌 한, 단어의 반복은 압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 역시 漢詩에서의 압운처럼 단순한 음운(단음)의 반복만을 압운으로 보아야 한다는 선입견을 전제로 한 것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압운이란 소리의 반복이 빚어낸 諧調(euphony)的 현상이다. 그러한 해조적 현상이 단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음절이나 어절의 반복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해서 거부할 까닭이 없다. 물론 단어는 단음과는 달리 소리와 함께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어 반복은 감각적으로는 소리의 반복과 더불어 심리적으로는 의미의 반복을 실현한다. 의미의 반복은 내면 세계에 심리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이러한 심리적인 파장을 필자는 內在律을 논한 자리에서 意味律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미율이 압운 현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미의 파장 때문에 음성적 파장 현상이 장애를 받는가 아니면 도움을 얻는가 하는 문제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상호상승의 관계에 있다. 단순한 소리의 반복보다는 의미가 곁들었을 때 더욱 명료한 파장이 형성된다. 물론 동어 반복의 표현 기법은 문장론이나 문체론적 입장에서는 수사학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운론적 입장에서는 운율론에서 다룰 수 있다. 수사학에서 다룰 성질의 것이니까 운율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셋째, 글 라)의 요지는 형태소의 반복 역시 압운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논자는 그 이유를 '보다 큰 단위에 의해 형성된 동일성은 그 하위 부류의 동일성을 제압해 버리므로, 음성의 동일성을 인식하기 전에 의미의 동일성을 가져오고야 마는'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논지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으나 대강 다음과 같은 의미로 짐작된다. 대개 한 음절 이상으로 이루어진 형태소의 반복은 단음 반복의 효과를 제압해 버리고 형태소의 기능적 동일성만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이리라. 이 주장 역시 압운의 범주를 단음으로 한정하겠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를 펼친 것으로 보인다. 만일 압운의 범주를 보다 크게 설정하면, 작은 단위(단음)의 반복보다는 큰 단위(음절 혹은 어절)의 반복이 보다 강렬하게 작용한다는 논자의 주장도 긍정적으로 압운론에 수용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膠着語인 한국어는 實辭 뒤에 虛辭, 곧 의미소 다음에 형태소가 질서정연하게 연결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체언에는 조사 용언의 어간에는 어미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면서 문법적 기능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의 문장은 의미소와 형태소의 교체 배열로 이루어진 율동적인 구조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실사와 허사, 문장의 주성분과 부속성분 들의 교체 배열이 빚어낸 리듬을 필자는 構文律로 명명한 바 있다. 한국어는 원초적으로 풍부한 구문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압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어의 어절이나 문장 그리고 시행의 끝은 거의 형태소에 의해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에 형태소를 압운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한국시에서의 압운 시도는 거의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시의 압운에 대해서 비관적인 입장에 선 사람들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복잡하지 않다. 압운의 범주를 단음으로 고집하지 말고 음절 이상으로까지 확대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어 구조에 맞는 압운의 틀이다. 양복의 단추가 하는 구실을 한복에서는 옷고름이 한다. 그 하는 구실은 비슷하나 모양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자가 한복에 양복의 단추를 끌어다 옷고름 대신 고집한다면 이 얼마나 격에 마지 않은 일이겠는가. 양복은 양복의 체제가 있고 한복은 한복의 체제가 있다. 이와 같이 한국어는 중국어나 서구어와는 다른 한국어 고유의 체제가 있다. 한국시의 압운법도 이 체제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압운은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면서 빚어낸 諧調的 현상이다. 그 반복되는 소리의 양이 작든 크든 그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漢詩의 경우가 그러니까 단음으로 한정하자는 것은 마치 한복에 단추를 고집하는 일처럼 물정을 모르는 주장이다. 더욱 주목할 일은 의도적으로 압운을 시도하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이 단음만으로 그 한계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시의 압운의 범주는 단음을 위시해서 음절, 어절 그리고 나아가서는 시행의 반복까지도 포괄하도록 할 일이다. 압운이란 명칭이 거슬리면 적절한 다른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三. 압운의 분류
1. 音量에 의한 분류
가) 單音韻
가장 작은 음량인 단음이 압운의 단위가 되는 경우다. 이는 子韻과 母韻으로 구분할 수 있고 자운은 다시 初聲韻과 終聲韻으로 구분되며 이에 상대적으로 모운은 中聲韻이라고 할 수 있다.
[예시 1]
목화밭 청무우 시린 다복솔
옥양목 달에 젖은 부신 저고리
시오리 가리맛길 잠든 산마을
시루봉 머리 위에 걸린 달무리
―林步 <달밤>
[예시 1]의 제1행과 제3행의 끝이 자음 'ㄹ'로 압운되어 있다. 또한 제1행과 제2행의 첫음절이 모음 'ㅗ'와 자음 'ㄱ'이 압운되어 있다. 이 경우는 중성과 종성운을 아울러 지닌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나) 音節韻
발성의 자연스런 단위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에서 이루어진 음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시의 압운은 단음보다는 음절 단위에서 활발히 일어난다. [예시 1]의 제2행과 제4행의 마지막 음절 '리'와 제3행과 제4행의 첫음절 '시'는 각각 동일한 초성과 중성으로 이루어진 음절운이다. 이 경우는 한 음절이 되풀이되는 單音節韻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두 음절이상이 단위가 되어 압운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多音節韻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예시 2]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최승자 <네게로>
직유의 기능을 지닌 형태소 '처럼'이라는 조사가 행의 끝에 반복되면서 압운의 구실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2음절운이라고 할 수 있다.
다) 語節韻
한 어절이 단위가 되어 반복되는 경우다.
[예시 3]
꽃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 바위가 있고 바위 끝에 다리가 있고
다리 위에는 내일이 있고 문명이 있고
그 건너에는 집이 있고 거리가 있고 떠들석한 사람들이 있고
―박의상 <招魂> 부분
서술어 '있고'가 계속 반복되면서 이어지고 있다.
라) 句節韻
반복되는 단위가 두 어절 이상인 경우다.
[예시 4]
느릅나무 향나무 이깔나무들
계집같이 안 잊히는 때는 어느 때인가.
백일홍 복숭아 꽃숭어리들
가슴결에 피어나는 때는 어느 때인가.
―강우식 <사행시초·스물아홉>
제1행과 제3행의 마지막 음절 '들'에서는 단음절운이 실현되고 제2행과 제4행의 밑줄친 '-는 때는 어는 때인가'에서는 세 어절 이상의 구절운이 실현되고 있다. 다음절운은 2음절 이상의 형태소나 어절이나 구절 들의 반복을 포괄하게 된다.
마) 行韻
반복이 행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다.
[예시 5]
너를 보듬어 안고
구김살 없는 잠자리에서
몸을 섞고
너를 보듬어 안고
안개로 둘린
푸짐한 잠자리에
산머리여
너를 보듬어 안고
흥건하게
적셔적셔 흐르는 강물줄기에
해도 달도 태어나고
東도 西도 없는
잠자리에
너를 보듬어 안고
적셔적셔 흐르는 강물줄기여
너에게로
돌아간다.
―朴木月 <同寢>
[예시 6]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끝없는 우름 바다를 안으올 때
葡萄빛 밤이 밀려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물건너 외딴 섬, 銀灰色 巨人이
바람 사나운 날, 덥쳐 오듯이,
그 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鄭芝溶 <風浪夢1>
[예시 5]에서는 밑줄친 한 행 '너를 보듬어 안고'가 네 번 반복되고 있는 單行韻이다. [예시 6]에서는 '당신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의 두 행이 반복되고 있다. 二行韻이면서 연 단위의 반복이니까 聯韻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音位에 의한 분류
압운이 실현되는 위치에 따른 분류다. 하나의 행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면 行內韻이라 하고 행과 행 사이에서 실현되는 것이면 行間韻이라 한다.
가) 行內韻
행내운은 行內單音韻, 行內音節韻, 行內語節韻 등으로 구분되고 행내단음운은 다시 行內初聲韻, 行內終聲韻, 行內混聲韻, 行內中聲韻으로 분류된다.
ㄱ) 행내단음운
[예시 7]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 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여 볼까.
―김소월 <千里萬里> 부분
[예시 8]
가을과 겨울 사이
서성거리는 썰렁한 가슴을 아느냐
만남과 헤어짐 사이
한없는 흔들림의 그 아픔을 아느냐
―채희문 <혼자 젖는 시간의 팡세·19> 부분
[예시 7]의 제1행에서는 초성 ㅁ이 4회, 제2행에서는 2회 반복되면서 초성운을 만들고 있고 [예시 8]의 제1행에서는 ㄱ초성운이 제2행에서는 ㅅ초성운이 제4행에서는 ㅎ초성운이 실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1행에서는 ㄹ종성운이 제2행에서는 ㅇ과 ㄹ종성운이 제3행에서는 ㅁ종성운이 그리고 제4행에서는 ㄴ과 ㅁ과 ㄹ종성운 들이 실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시 9]에서는 ㄹ이 초성과 종성의 자리에 뒤섞여 나타나는 혼합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모음만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예시 7]의 제1행은 ㅣ모음이 5회 ㅏ모음이 3회 제2행은 ㅏ와 ㅣ가 각각 4회 제3행은 ㅏ가 5회에 걸쳐 주도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예시 8]의 제4행에서는 특히 ㅡ모음이 압도적으로 많이 구사되고 있다. 이처럼 동일한 모음들이 반복되면서 빚어낸 운을 중성운이라 부르기로 한다.
ㄴ) 행내음절운
행내에서 반복되는 음운의 단위가 음절인 경우다.
[예시 10]
일자리 잃고
집에서 지내네
아내는 안에서
한숨이 한이 없고
나는 난감하여
낯빛이 납빛이네
돈은 돌고 돈다는데
돈에 돌아야 도는 걸까
―채희문 <우울한 日誌·15> 부분
[예시 11]
나무들은 나무랄 데다 없네
사이사이 나쁜 사이
사람들 사이처럼
남을 탓하는 일 없이
말만 많은 만물의 영장처럼
말썽 만드는 일 없이
―채희문 <혼자 젖는 시간의 팡세·18> 부분
[예시 10]의 제1행에서는 '일'이 제2행에서는 '지'가 제3행에서는 '아', 제4행에서는 '한', 제5행과 제6행에서는 '나', 제7행과 제8행에서는 '도'가 각기 두 번 내지는 세 번씩 반복되면서 음절운을 만들고 있다. 한편 [예시 11]의 제5, 6행은 한 음절인 '마'가 압운의 단위지만 제1행에서는 '나무' 제2행에서는 '사이'의 두 음절이 압운의 단위를 이루고 있다.
ㄷ) 행내어절운
[예시 3]에서의 '있고'처럼 동일한 어절이 행내에서 반복되면서 만들어 낸 압운이다.
[예시 12]
말이 운다. 여섯 필 은빛 말이 달을 보고 운다. 달 아래 흘러가는 江을 보고 운다. 산을 보고, 들을 보고, 저잘 보고 운다.
―박두진 <달과 말> 부분
위의 시행에서는 '운다' '보고' 등의 두 어절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압운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보고 운다'를 단위로 잡는다면 행내구절운이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나) 行間韻
행과 행들 사이에 빚어진 압운이다. 이는 행들의 끝에 달린 行末韻, 행들의 첫머리에 달린 行頭韻 그리고 행들의 중간에 자리한 行中韻으로 구분할 수 있다.
ㄱ) 行末韻
행들의 맨 끝에 실현되는 압운으로 그동안 흔히 脚韻이라 일러 온 것들인데 용어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하여 편의상 행말운이라 부르도록 한다. 이도 음량에 따라 행말단음운, 행말음절운, 행말어절운 행말구절운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시 13]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젖는다.
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可口可樂 물냄새
구국 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꽂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민영 <龍仁 가는 길에>
[예시 14]
생갈치
이치
서울치
눈치
저치
미국치
그렇지
좋지
―범대순 <치돌림>
[예시 15]
그대 얼굴은 담배 연기에 갇혀 있고
그대 말씀은 노래에 젖어 있고
그대 눈짓은 찻잔에 잠겨 있고
그대 젊음은 사랑에 녹아 있고
―제해만 <찻집에서>
[예시 16]
원추리 비비추 개부랄꽃 백제쪽으로 가고 있다.
서기 감도는 보랏빛 구름 백제쪽으로 가고 있다.
대숲 아래 서슬 푸른 강물 백제쪽으로 가고 있다.
여윈 꿈이 보름달로 떠서 백제쪽으로 가고 있다.
비단옷을 입은 무당들이 백제쪽으로 가고 있다.
―김석규 <삼국유사의 마을·7>
[예시 13]의 제1연과 제4연에서는 행말중성운이 실현되고 있는데 모음 'ㅔ'와 'ㅏ'가 교체반복되고 있다. 제2연에서는 다음절운 '∼ㅣ지던'과 종성운 'ㄹ'이 교체반복되고 있고 제3연에서는 종성운 'ㄴ'과 중성운 'ㅣ'가 역시 같은 관계를 만들고 있다.
[예시 14]는 짧은 단행시인데 각행(여기서는 어절이기도 함)의 끝에 동일한 음절 '치'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압운을 시도하고 있다.
[예시 15]에서는 각행의 끝에 '있고'라는 동일 어절이 반복되면서 행말어절운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의 각행 첫머리도 '그대'라는 동일어가 반복되면서 두운을 만들고 있다.
[예시 16]에서는 각행의 끝이 '백제쪽으로 가고 있다,'라는 세 어절로 이루어진 동일구가 반복되면서 구절운을 빚어내고 있다.
ㄴ) 行頭韻
행말운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각행의 첫머리에 동일한 소리로 압운되는 형상이다. 이 역시 압은되는 소리의 양에 따라 행두단음운, 행두음절운, 행두어절운, 행두구절운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시 17]
메밀꽃 보고
무얼 생각누
머언 山허리
멈춘 落照에
牧童의 피리
머흘 머흘이
멍든 가슴을
만져만 주는
暮色 하늘은
물든 장미빛
―章湖 <모밀꽃 보고> 부분
[예시 18]
그만 묻어 두고 싶다.
그 말씀을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듯이
바라는 것이 많아서
바램이 무엇인지도 모르듯이
조용히 일러 주리라
조금만 다가 오라고
―金光林 <戀歌>
[예시 19]
내 얼굴 쓰러지면
니 얼굴 와서
내 얼굴로 피어나고
니 얼굴 쓰러지면
내 얼굴 가서
니 얼굴로 피어나리니.
―조태일 <얼굴> 부분
[예시 17]은 각행의 첫머리에 'ㅁ' 초성운이 실현되고 있고 [예시 18]에서는 '그''사''바''조' 등의 음절이 반복되면서 행두운을 만들고 있다. 또한 어절이 행두운으로 실현되는 경우는 [예시 15]의 '그대'에서 이미 보았거니와 두 어절 이상이 반복되는 구절 역시 행두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예시 19]는 'ㄴ' 초성운이면서 '니 얼굴'과 '내 얼굴'을 단위로 보면 교차되는 구절운이라고 할 수 있다.
ㄷ) 행중운
각 행의 중간 상응한 위치에 규칙적으로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는 압운 현상이다. 이미 논의된 [예시 15]는 행말운('있고')과 행두운('그대')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행의 제2어절은 주제격조사 '은'이 그리고 제3어절엔 처소격조사 '에'가 규칙적으로 사용됨으로 행중음절운을 형성하고 있다.
[예시 20]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김광규 <생각과 사이> 부분
위의 작품은 '생각하고'의 행말어절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행의 제2어절이. '오로지'라는 동일어절이 반복되면서 행중어절운을 만들고 있다.,
3. 配形에 의한 분류
配形이란 음의 배열 형태를 말한다. 말하자면 압운되는 형태에 따른 분류라고 하겠다. 같은 소리가 거듭 이어지는 형태는 疊韻이라 하고 다른 소리들이 번갈아 이어지면 交韻이라 하고 첩운이 바뀌면서 계속 이어지는 형태를 轉韻 그리고 불규칙적인 압운의 양상을 混韻이라 부르기로 한다.
가) 疊韻
첩운도 音位에 따라 행내첩운과 행간첩운으로 구분되며 행간첩운은, 행말첩운, 행두첩운, 행중첩운 등으로 구분되고, 또한 音量에 따라 이는 다시 단음첩운, 음절첩운, 어절첩운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행내첩운 역시 음량에 따라 같은 방법으로 세분화될 수 있지만 산문시가 아닌 分行自由詩인 경우는 행의 길이가 길지 않으므로 다양한 종류의 행내운들이 실질적으로 실현되기가 용이치 않다.
[예시 7]의 제1행에서는 'ㅁ'이 행내단음첩운으로 작용하고 있고 [예시 10]에서는 제1행의 '일',제2행의 '지'. 제3행의 '아' 등이 행내음절첩운으로 작용한다. [예시 3]의 '있고'나 [예시 12]의 '운다' 등은 행내어절첩운이라고 할 수 있다.
행말음절첩운의 대표적인 예는 [예시 14]에서, 행말어절첩운의 예는 [예시 15]에서 그리고 행말구절첩운의 예는 [예시 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예시 17]에서의 'ㅁ'은 행두단음첩운, [예시 15]에서의 '그대'는 행두어절첩운이 된다. 행중운 역시 [예시 15]에서의 조사 '은'이나 '에'는 행중음절첩운이라고 할 수 있고 [예시 20]에서의 '오로지'는 행중어절첩운라고 할 수 있다.
나) 交韻
두 종류의 소리가 서로 교차되면서 압운되는 현상으로 행내교운과 행간교운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음량에 따라 다시 여러 가지로 세분된다. 첩운과 마찬가지로 교운도 행내에서보다는 행간에서의 실현이 보다 명료하고 적극적이다.
행내교운의 예로는 [예시 8]의 제1행 '가을'과 '겨울'에서의 'ㄱ'과 'ㄹ'의 단음교운을 볼 수 있고, [예시 10]의 제4행에서는 '한'과 '이'의 두 음절이, 제6행에서는 '나'의 한 음절과 '비치'의 두 음절이 교운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행말교운의 적절한 예로는 [예시 1]의 'ㄹ'과 '리', [예시 4]의 '들'과 '∼는 때는 어느 때인가' 그리고 [예시 13]에서의 각 연 중심의 다양한 교차운을 들 수 있다.
한편 각행의 첫음절 '내'와 '니'가 교차되는 [예시 19]를 행두교운의 예로 지적할 수 있다.
다) 轉韻
압운의 형태가 바뀌면서 전개되는 현상이다. 행간전운 연간전운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시 10]은 제1,2연의 각 행들이 압운을 달리하고 있다. 즉 각행의 압운의 단위는 '일''지''안''한,이''나''나,비치' 등 행이 바뀜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이처럼 행 단위로 압운이 전화되는 현상을 행간전운이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연단위로 전운되는 경우도 있다. [예시 18]은 행두연간전운의 경우고 [예시 13]은 행말연간전운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예시 18]은 첩운전운 [예시 13]은 교운전운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라) 混韻
두 가지 종류 이상의 다양한 압운이 실현되고는 있으나 일정한 규칙이나 질서가 없이 섞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四. 압운의 효율
압운은 물론 소리의 반복이 빚어낸 조화로운 율동감이다. 청각적인 미감을 창출해 내는 시적 장치다. 그런데 눙률적인 압운이 되려면 반복되는 소리가 지닌 음감과 시행이 담고 있는 정조가 서로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슬픈 정조를 담고 있는 시행에 압운된 소리가 명랑하고 밝은 느낌을 준다든지, 즐거운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시행에 무겁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소리로 압운이 된다면 이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예시 21]
밤하늘에 부딪친 번갯불이니
바위에 부숴지는 바다를 간다.
―송욱 <쥬리에트에게> 부분
김대행은 'ㅂ'음이 지닌 상징적 효과를 파괴, 충돌, 투쟁 같은 것으로 보고 [예시 21]에서 반복되고 있는 파열음 'ㅂ'은 격렬한 감정과의 연합에 성공한 예로 지적하고 있다. 한편 김소월의 <千里萬里>(예시 7)에서 반복되고 있는 'ㅁ'은 몸부림치고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ㅁ'의 음상징은 흥겹게 노래하는 청각영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ㅂ' 파열음에 대한 견해는 수긍이 가나 'ㅁ' 순음에 대한 생각에는 선뜻 동조하기가 어렵다. 만일 'ㅁ'의 음상징을 위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무겁고 느린' 것으로 본다면 시의 내용과 어울리지 못할 것도 없다. 더욱이 김대행이 원용하고 있는 음상징의 이론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인의 이론이라는 데 문제가 없지 않다. 어떤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음감이 민족을 초월하여 언제나 한결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소리라도 민족성이나 문화환경에 따라 음감은 다양한 차이를 지니게 된다. 더 정확히는 개인의 체험에 따라 음감은 각기 달리 감지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음성상징에 대한 연구는 최소한 언어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한국어의 음성상징 곧 音相에 관해서는 일찍이 국어학자들에 의해 거론된 바 있다. 李熙昇은 한국어의 모음을 얕잡는 말인 指小稱 계열의 모음(ㅏ,ㅐ,ㅑ,ㅗ,ㅚ,ㅛ,ㅘ,ㅙ,ㅏ,ㅏ,ㅐ,ㅐ,ㅑ)과 보통말인 平稱 계열의 모음(ㅓ,ㅔ,ㅕ,ㅜ,ㅟ,ㅠ,ㅝ,ㅞ,ㅡ,ㅣ,ㅣ,ㅢ,ㅣ)을 대척적인 관계로 설정하여 어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즉 전자는 明,陽,輕,淸,小,寡,銳,薄,强,速,少…이에 상대적으로 후자는 暗,陰,重,濁,大,多,鈍,厚,弱,遲,老…의 느낌을 준다고 한다. 한편 자움의 음상은 平音(ㄱ,ㄷ,ㅂ,ㅈ,ㅅ,ㅇ)과 濃音(ㄲ,ㄸ,ㅃ,ㅉ,ㅆ)과 氣音(ㅋ,ㅌ,ㅍ,ㅊ,ㅎ)으로 구분하여 평음은 順平한 語勢, 농음은 强銳한(새된) 어세, 기음은 硬濁한(거센) 어세로 분별하고 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같은 양성모음 가운데서도 ㅏ와 ㅗ의 어감의 차이라든지 혹은 같은 음성모음 가운데서 ㅓ나 ㅜ,ㅡ,ㅣ 등의 어감의 차이 그리고 유성자음인 ㄴ,ㄹ,ㅁ,ㅇ 등이나 무성자음인 ㄱ,ㄷ,ㅂ,ㅅ 등의 개별적인 음운들이 어떤 개성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음상의 문제는 언어학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시학의 압운론에서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보인다.
한국어의 자모음에 대한 음상의 개별적인 연구는 우선 언어통계학적 입장에서 접근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ㅅ의 대표적 음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ㅅ음이 개입된 수많은 어휘들을 추출하여(특히 의성어, 의태어. 형용사, 동사 등) 그것들이 지닌 보편적인 정조를 찾아본다든지 혹은 언중을 상대로 하여 어느 특정한 소리에 대한 음감을 시험하여 그 소리에 대한 보편적 정조를 추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五. 끝맺는 말
압운은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면서 빚어내는 조화로운 미감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소리의 단위를 單音으로 한정하고자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漢詩나 서구시에서의 압운의 경우를 전재로 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시의 운율을 한시나 서구시의 운율론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곤란하다. 이는 언어구조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고립어인 중국어나 곡미어인 서구어와는 달리 교착어로 實辭 뒤에 虛辭가 규칙적으로 첨가되면서 문장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반복되는 허사는 단음이기보다는 음절 이상의 분량이기 때문에 특히 시행의 끝에 설정되는 행말운을 단음으로 한정할 경우 한국시에서의 압운의 기대는 난감하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시에서의 압운의 개념을 단음으로 한정하지 않고 반복되는 모든 소리로 확대 규정하여 한국 현대시에서의 압운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했다.
그리하여 다움과 같이 한국현대시의 압운의 분류를 시도했다.
1. 음량에 의한 분류--단음운, 음절운, 어절운, 구절운, 행운
2. 음위에 의한 분류--가) 행내운--행내단음운, 행내음절운, 행내어절운
나) 행간운--행말운, 행두운, 행중운
3. 배형에 의한 분류--첩운, 교운, 전운, 혼운
한편 압운의 효율적인 구사를 위해서는 음성상징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단음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인 음감에 대한 연구는 과제로 남겨 놓았다.
아무튼 현대시는 극도의 자유형식을 추구한 나머지 운율장치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하나 이는 운문이라고 하는 시의 원초적 특성을 망각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현대시에서의 운율의 회복은 서정성 회복의 일환이며 미적 감동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율격과 함께 암운은 운율의 대표적인 장치의 하나인데 그동안 한국시에서의 압운의 소홀은 우리시를 그만큼 매마르게 만든 요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시에서의 압운의 빈약은 언어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시인들의 압운에 대한 관심의 부족 때문으로 생각된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우리 언어구조에 맞는 압운을 다양하게 시험해 본다면 한국시의 독특한 압운법이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