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올바른 신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마음에 번뇌가 없으므로 상념에 혼돈이 없고,
항상 신불에 의해 빛의 보호를 받고 있기때문에,
마음은 넓고, 모든 현상에 현혹되는 법이 없다.
항상 중도의 마음을 갖고,
선악을 초월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상계에 있어서 일체의 모든 현상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
근심도 없고, 항상 자신에게 족(足)함을 알고,
마음은 평온함을 갖고 생활을 하고 있다.
현상의 일체에 이끌리지 않는 마음을 불퇴전의 마음이라 하여,
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음 (1)
우리의 의식의 중심은 마음이다.
그 구조를 먼저 서술해보자,
마음의 구조는, 정확히 풍선처럼 되어 있어
부자연한 사상에 의해 자유를 잃고,
스스로 작은 틀 안에 들어가서, 변형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다.
또 반대로, 자유자재로 우주를 삼킬 것 같은 마음이 넓은 사람도 있다.
그것은, 각자의 마음의 바른 자세와 행위에 의해 바뀌는 것이다.
마음의 세계는 일념삼천(一念三千)으로 무한대로 넓고,
생각하는 마음은, 차원이 다른 선악(善惡) 어느 세계로도 통해 버린다.
상념은, 사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오관을 통해 일어나는 상념과, 마음속의 상념,
그 위에 차원이 다른 세계를 통해 통신되는 상념도 있다.
이들 상념의 바른 자세가,
팔정도에 따라 중도의 생활을 하는 것에 의해,
우리는 불지(佛智)를 열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에 그 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 본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크게 구별하면,
정확히 본능의 영역부터 지성, 이성, 감정의 영역이 있어
과거세, 현세에서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현재의 자신의 마음, 자신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상념이 그 영역(領域)에 작용해,
의지로 되어 정신적, 육체적 행위로 현상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사를 바르게 판단하지 않고,
감정의 영역이 부풀면,
반드시 이성의 영역이 움푹 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곰보도 보조개로 보이는 연인 사이의 경우도,
본능과 감정만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의 현상이며,
마음의 풍선의 그 부분만이 너무 부풀려지는 것이다. (하트 모양의 점선 부분)
즉 지성은 잃어버리고 중도를 잊기 쉬운 것이다.
또 물질적인 욕망도, 동물적 본능이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원만히 조화하는 길은 하나.
팔정도(神理篇 參照)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중도의 길인 것을,
그림에 의해서도 깨닫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의 원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임을 자각했다면,
마음을 조화하는 것이 선결,
이라는 생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작고 부자연스런 틀 속에 들어가는 일 없이.
넓은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에서,
이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나 모세는, 요컨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설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신불은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형태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언가에 기대려고 하는 습관을,
구원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괴로움이나 슬픔이 있다면,
그 원인을 추궁하고, 바른 상념과 행위로 스스로 다스릴 것이다.
그것이 또한 행복에의 단계로 알고,
탐닉하지 말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 수행이기 때문이다.
방황의 언덕에서, 깨달음의 피안에로,
고뇌는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면 된다.
인내와 노력, 극단적으로 내달리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중도를 가는 중에,
마음의 조화가 생겨나고, 바른 판단이 생겨나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깨달음에의 길은,
자기 자신의 마음 이외에 결정하는 것은 없다.
그것이 신불의 자식,
만물의 영장다운 사람의 엄격한 법칙인 것이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