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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분야; (뜨거웠던) 나의 보훈수기.
백 동 환
그러니까 식민(植民)이 물려간 뒤에도, 나는 북의 고향땅에서 그쪽에 들어선 공산정권으로부터 나의 출신지주(地主)성분에다 서슬 푸른 볼셰비키(Bolsheviki)나름의 초법적 계급투쟁이념을 뒤집어 씌워갖고서 핍박을 일삼아오면서, 마침내는 근면(勤勉)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유재산마저 몽땅 몰수수탈하고 나서도, 난데없이 숙청(肅淸)이란이름의 알몸으로 시베리아를 방불케 하는 낭림(狼林)산멕 오지(奧地)로 유배(流配)돼가던 날벼락극형을 뿌리쳐버리고 나서 ....... 어렵사리사선(死線)을 넘어, 대한민국 새 조국으 작자 자화상
로 망명(亡命)해 와서, 1950년1월14일 육군사관학교 9기 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되어18연대소대장에 부임되는, 이른바 약관(弱冠)의 나이에 흡사 로망 플뢰브[Roman fleuve 대하(大河)소설] 같은 간난(艱難)과 영예의 길을 두루 거쳐 온 몸이기도 합니다.
그 소대장부임6개월 만에야, 노고에 베풀어진 6,24 저녁부터 2박3일간의 보상외박이 허용되기도 했었는데, 글쎄 그것에마저 뒤따라 파고드는 그 6,25로 쳤을 땐, 아무래도 그들은 사사건건 나와는 원수를 굳히겠다는 인연이 아니고서야.......,
6,25. 그 아침 부리나케 비상소집에 복귀해서 보니, 나라가 침략을 당했다는데, 글쎄 그 것을 물리쳐야할 주력부대가 수송수단이 없어서, 징발된 민간 버스를 기다리노라고 27일 저녁에야 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하물며 그것을 지내놓고서도, 그런 연유들을 깡그리 외면 햔 채, 그 6,25가 북의 남침이 아니라, 남의 북침에서 비롯됐다는 뜬소문이 팽배했었다는 거야요.
사뭇 실의를 다그치던 6,25였지만, 고래로 전쟁의 전말엔 승패의 역전도 빈번했던 것. 당시의 나로선 전투원 30여명에다, 성능 좋은M-1, 연발카빙, 자동소총BAR과, 그러고도 총유탄까지 장비한, 신분도 당당했던 백골(白骨)부대소대장이라는, 마구 피려던 꽃봉오리였거든요.
수도경비사령부산하의 18연대는 서울삼각지, 현재의 전쟁기념관 자리 병영에 주둔하던 우리는, 뒤늦게나마 적 침공의 주공방향이던 포천-의정부를 잇는 구릉(丘陵)선에다 방어진을 쳤습니다. 진지편성을 끝낸 정면엔 아무런 적정도 없으면서, 좌 우 양측 비낀 전(前)방위에선, 피아분간이 안 되는 포성만이 요란했습니다. 일몰은, 때맞춤 음력5월13야(夜)의 으스름달밤이어서 전선분위기를 심난하게 부추겼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느닷없이 철수명령이 내려졌는데 아무런 요식도 안 갖춰진 채, 그냥 딸아 나서라는 거야요. 이윽고 의정부방향으로 접어들던 행군이, 돌연 튕겨나는 것을 보면, 비로소 철수이유가 짐작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의정부전선이 뚫린 상황이라면, 지형 상 서울 진입도 좌절된 채, 북한산 북측 계곡의 송추방향으로 우회해 가는 거 같았습니다. 때맞춤 장대처럼 퍼붓는 폭우가 을씨년스런 밤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울을 우회해서 한강을 건너는 수단만을 강요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엎친 데다, 주간이동을 숨긴다면서 28일 저녁 늦게 서야 행주 나루에 도착해서 보니, 놀랍게도 거긴 전군의 서열이 몽땅 운집한 듯, 대혼란이 소용 돌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돌연대대장을 마주쳤는데, “백 소위”를 외치다가, 소용 밖이란 듯이 그냥 어디론지 가버렸습니다. 군의조직이 외압에 의해서 일시 뿔뿔이 군중(群衆)화된 우린, 마치“악어”에 쫓기는 “누” 떼가 연상 됐지만, 나의 소대만은 똘똘 건재했습니다. 조고만 나룻배 몇 척이 도하수단의 전부였다 보니, 그나마 관심 밝히던 소대는, 새벽녘에서야 찰랑찰랑 만선(滿船)을 염려시키는 뱃전을 손바닥들로 덧대는 도하를 끝내고서야, 한숨 놓던 순간에,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글쎄 거기 강변 갈대밭엔, 시꺼먼 둥근 탄창의 적성(敵性)장비 체코 식 기관총이 나뒹굴고 있었으니, 나는 찬물을 끼얹은 듯 소스라쳤습니다. 부리나케 수신호(手信號)로 소대를 엎드리게 하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려 살핀, 주변의 움직임은 우리뿐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숫제, 그것이 왜? 용도를 포기하고 여기 나뒹굴고 있느냐며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아마도 먼저 도하해간 우군들이 상황을 굳혀 논 것이라 치면서, 개활한 강바닥보단 강둑제방으로 소대를 이동시켜놓는데,
퓽, 퓽, 퓽.......,! 어, 야.......?
누리를 가르면서 어디선지 총알이 날아옵니다. 근거리사격은 아닌듯했지만. 사격은 새로 노출된 우리를 노리는 표적사격이 분명했습니다. 방향은 그 지역 김포공항일대를 감제하는 개화산(128.4m)쪽인 듯 했는데, 돌출상황은, 나의 판단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는, 도전해오는 이 적정을 회피하고 남으로 본대를 따라나서는 것이 철수명령에 추종되는 임무 같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나 고립된 소대가 적을 조우했다면, 그 처치를 우선해야한다는 판단이 섰던 겁입니다. 더군다나 나에겐 개전 이래 허탕만 처 왔던, 최초의 총알 선물이다 보니, 이 납득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은, 나 스스로가 밝혀내서 나의 소대로 하여금 본때 있게 처치해보고 싶은 신선한 전의(戰意)가 솟구치는 거였습니다.
“딱”엄지와 중지를 서로 교차해서 튕기는 나의 본때 있든 쾌재(快哉)신호음이 총성에 끼어들었습니다. 이 지역을 감제하는 개화산이라면, 또 우리에게 가해지는 사격의 어림방향이기도 하니, 바로그것은 문제를 밝혀줄 결정적 단서를 품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급한 심정은 지체 없이 막무가내하고, 그 개화산을 목표로 소대설형대형으로 현 위치 제방을 LD로 삼아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곧 선임하사에게 기동지휘를 일임해놓고. 나는 모호한 상황을, 한발 앞서 밝혀내야겠다는 강박(强迫)에 사로잡혀 무조건 앞장을 섰습니다. 이욱고 먼 거리(距離)산 중복의 약사사(藥師寺)에서 황갈색 군복들의 준동이 발견됐지만, 초전이어서 피아식별을 주저하다 그만 소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접적 실마리로 확신하면서, 늘 내 품에 지녀왔던 내 충정의 상징“태극기”를 나의카빙소총에다 달아맸습니다. 지금의 나는 상황을 수집하는 척후병이자, 또 그것을 판단해서 소대로 하여금 처치해야하는 이른바 독불장군이었습니다. 저항 없는 상황이 곧 젊은 나로 하여금 목표에 이르게 유도해서 마침거기 비어있는 산병호에다 본능적으로 몸을 담았습니다. 참호 형태가 무언지, 낯설었고, 바닥에 널려있는 탄피들은 적의 것이 분명합니다. 오오라, 지형 상 이곳 개화산정상은 한강방향을 통제했던 지휘소자리가 분명했습니다. 이것이 비워진 까닭은 불투명했지만, 급한 용변(用便)용무가 아니었다면, 내 태극기의 위용에 기죽어 피신해갔을 수도 있는, 오묘(奧妙)한 시제론(時制 論)의 때매김 철학(哲學)이 내 무운(武運)을 뒷받침해준 것이라 여기면서, 어쨌거나 고개를 들어 태극기를 휘저어 점령 신호를 했더니.......,
으 왁! 야. 글쎄, 바로 내 우 측방 발밑 게에, 적 산병들의 옆구리들이 훤히 내려다보이질 안습니까. 난데없는, 태극기 사태에 혼비백산 다급해하는 것이 야요, 갈팡질팡 몸을 비틀며, 나를 향한 대공(對空)사격 자세가 뜻대로 안 되는 양 북새통들이 야요.
그러나 나는 바로 그들 위에 군림(君臨)하는 존재이다 보니, 발밑에서 혼란 하는 무리들에다 대고 연발사격을 퍼부었으니, 당장에 눈앞에서 몇 놈이 널브러졌습니다. 우르르, 동요하면서 저항을 포기하고 경사진 그들 후 사면으로 뒹굴어 흩어지는 겁니다.
뜻밖의 상황에 기선을 잡긴 했지만 서도, 나도 다급하긴 마찬가진데. 게다가 돌발 상황을 감지한 적들도 어디선지 모르게 나에게 집중 사격이 가해지면서 의지하는 참호 앞면에 쿡, 쿵, 탄착 진동이 몸으로 전해옵니다. (관통되지만 말아다오. 하면서,,,,,,,) 머릴 들 수가 없으니, 그 사격의 주체가 어딘지 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적세야 등 뒤에다 대고 소대 전진을 다구처댔지만, 총성을 의식해선지, 호응이 없다가, 이윽고 우물 주물 겁먹은 표정들로 올라와줘서, 그나마 곧 우리는 진용을 갖추고 일제사격에 가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그적 세야 고개를 들어 정면을 훑어볼 수 있었으니, 우리가 점령한 개화산은 남 봉(南 峰)이고, 그 북측 소총사정권에, 또 하나의 유사한 북 봉이 발견됐습니다. 그 정상 넘어 배(背) 사면의 중복쯤에 폐광(廢鑛)으로 보이는, 동굴의 개구(開口)가 우리 쪽으로 아귀를 벌리고 있는 것이 심상치 가않았습니다. 거기다대고 예광탄사격으로 대응을 살폈더니, 글쎄 내부가 정통으로 사격에 노출되는지, 혼줄 난 적들이, 하나 둘 다급하게시리 우리 앞을 가로질려 구비 처 좌측 방 공항 활주로방향으로 도주하고 나서는 겁니다. 더 많은 무리들이 뒤를 잊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치 거리의 파칭코( パチンコ ) 경품(景品) 사격인 양, 그냥 퍼붓는 소대일제집중사격의 집속(集束)다발은 그야말로 괄목할만했습니다. 동굴 앞에다 사체무대기가 쌓이는 것을 보면서도, 0점 조정 탓인지, 어쩌다 캥거루 거름으로 도망치는 행운아(?)도 없진 않았습니다.
욕심 같아선, 곧 전과확대였지요. 마침 우리 남 봉 능선과 평행을 이룬 북 봉 능선에서 멍청히 우리교전을 구경하고 있던 인접부대가 요긴해지면서, 전령으로 하여금,
“지금 그쪽의 위치에서, 그 정상 너머의 터널의 상부로 안전하게 진출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정면에서 지원사격 하는 동안, 그 곳으로 진출해서 함께 적을 소탕하자”고 협조를 요청 했으나, 응해주질 않아서, 내친김에 우리 분대 돌격조로 하여금, 그 동굴 속까지 말끔히 청소해버렸습니다.
피아가 공통으로 부인할 수없는 이, 전략적 요충 김포공항은, 일찌감치 김포반도로 상륙한 적이 기습 점령했던 것입니다. 또 그것을 우리먼저 도하해간 주력들도 흘리고 지나갔던 이른바 낙수(落穗)였는데, 뒤늦게 서 나마 나의 소대가, 그 공항 수비 중대병력을 몽땅 전멸해버릴 수 있었던, 통쾌했던 나의 초전인 동시에, 또 6,25전사(戰史)를 장식할 “전략적 요충의 재탈환”이라는 굵직한 승전보(勝戰報)이기도 했습니다.
나의소대는 태극기를 휘 들으며 한창 전승에 열광하는데,.......
글쎄 난데없이, 남쪽 하늘에서 굉음을 울리면서 웅장한B-29 편대가 유유히 다가오는 거가 아니겠어요. 두말없이, 공항활주로상공에서 폭탄을 퍼붓는 거야요. 새 깜 하고 통통한, 마치 어족(魚族)을 닮은 폭탄들이 조롱조롱 내려오더니, 땅위에다 활짝 핀 장미꽃송이들을 무수히 널려놓는가 싶더니, 그 뒤끝에, 어마어마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면서, 산위에 엎드려있는 우리 몸뚱이들을, 들었다 놨다 요동치게 하면서, 마침내 피어오르는 분진(粉塵)장막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나의 서전(序戰)의 종막(終幕)을 덮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 다시없이 통쾌한 승전에 도취돼서, 역사적 장면을 눈앞에서모니터(Monitor)하면서, 뜻밖에 전개된 승전의 여흥(餘 興)인양, 지켜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그 포항에 얽혔던 콤플렉스는 참아, 빼어놓을 수가 없어요.......
시간을 거슬려서......., 그 망각속의 어느 날, 공중에서 우리 프라페라 항공기가 심상치도 않게 시리, 전선 상공을 선회하면서 새하얀 종이 장들을 창공에다 뿌려댔던 거야요.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던, 아군의 공세이전(攻勢移轉)을 다짐 하는 거였다고요.
아, 아, 그러면 그렇지!......, 좋게 표현을 해서 전술적 후퇴(戰術的 後退)를 거듭하면서, 패잔(敗殘)의 수모를 겪어오던 우리가, 이제 악착같이 뒤돌아선다는 바람에 대뜸, 압축(壓縮)되는 전선엔 쨍쨍 불꽃이 튀었습니다.
6,25와 더불어 뒤늦게 시리, 의정부 포천 선을 헛짚었던 나의18연대는, 한강을 도하해선 김포에서 내가 초 전을 치르고서 부터는, 줄줄이 오류동, 한강, 시흥, 안양, 천안, 수원, 진천, 청송, 의성, 영천, 안강(安康), 기계(杞溪), 그리고도 포항으로 이어졌던 퇴각은, 매일이다시피 돌격과 진내 전으로 지새웠던 참혹한 패잔의 장정(長程)이었지만 서도, 전의(戰意)만은 악착같았습니다.
일찍이 타격을 받은 18연대는, 벌서 안양에서 우리를 모체로 3연대와 8연대를 각각 대대로 축소재편성하는 바람에, 소모를 무릅쓴 장교 사태로, 최초로 적을 맞는 전초소대장은 줄곧 내 몫이었습니다.
전차를 앞세운 여세로 파죽지세로 낙동강전선까지 진격해온 적은, 목전의 부산 함락으로 침략을 마무리 짓겠다는 기세였던, 골수 팔로군(八路軍) 서열의 조선의용군 예하의 무정(武丁)이 지휘하는 2군단의 주력 5사단 10연대와의 우리대진(對陣)은 서로가 강철과 강철이 맛 부닥치는 위세가 번쩍였습니다.
촌토(寸土)를 드나들던 고착 전황에서 적은, 우리진영에다 대고 육성으로
“국방군들아 이제부산으로 쫓겨 가선 바다로 빠져들어 용궁(龍宮)으로 갈 건가? 손들고 나와서 목숨만은 구해야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리는 판국이었어요.
점차 진영을 가다듬고 되돌아선다는 우리 앞엔, 상대적으로 공격축선(軸線)이 신장(伸張)된 적을 앞에 논 낙동강전선에서의, 피아의 전세는 무르익을 대로 영글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벼르던 공세이전을 위해선, 피치 못하게 포항 외곽을 흐르는 장애물“형산강”을 건너서 대안(對岸)에다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해야만했습니다.
더군다나 적은 그 장애물을 앞에 놓은 유리한 지형으로의 맛 물림에서, 우리는 도하장비도 없는 맨몸 우격다짐으로 건너야만했던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고전이었습니다.
글쎄, 그 도하(渡河)작전은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에다, 수많은 이 나라 젊은 목숨들이 마지막 단충(丹忠)을 표시하는, 너무나도 농밀한 붉은 피로 아로새기는 추상화(抽象畵)를 강물 캔버스(Canvas)에다 얼룩 지으면서 떠나려가야만 했던 겁니다. 대안에 접근할수록 지척에서 적의저격을 맞는 순간, 강물에 부침(浮沈)하면서 숨바꼭질 하던 몸뚱이는 붉은 피로 강물을 물들이다가 기운이 소진되면, 죽어서도 태극문(太極紋)같은 와류(渦流)에 휩쓸리면서 애긋게 소실 되가는 거였다 구요.
“까딱 하단, 꺼떡 한다.”던 전장(戰場) 판 유행어가, 까딱 순간에 하나뿐인 생(生)을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나라를 위해선 그것을 수궁해야했던 드높은 고뇌가 수반되던 거였습니다.
나는 비교적 소강(小康)했던 바로 그 바운다리 너머의 광경이 나려다 보이던 인접고지여서, 숫제 그 처절한 광경을 외면할 수 없었던 뜨거운 양철지붕 위 같던 피 마르는 존재였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사이니까, 이제 국민들에겐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처럼 처절했던 동족 침략을 치렀던 나라의 국민들이라면, 고매한 상상력에 호소해서라도 그 붉은 강은 연상되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이 나라 역사를 골 깊게 할퀴고 갔던 그것들은 이제 무정한 세월이 잊으라고 다그치지만, 나에겐 그 극한(極限)의 정경들은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이승에서의 감당할 수 없게 새겨진 콤플렉스(complex)였습니다. 그것들은 세기가 바뀐 아직도, 눈감으면 당시의 임장감(臨場感)이 되살아나면서 식은땀에 젖곤 합니다.
바야흐로 무정한세월은 그런 바탕에다대고, 또 다른 불심(不審)한 장(場)을 덧입혀가고 있는 겁니다.
* *
궂은 가을비가나리던 바로그날 밤은 1950년9월19일을 지새운, 20일 새벽이었습니다. 마침인천에서의 상륙작전과 맞물렸던 날이기도 합니다. 피아가 한데 엉켜, 그야말로 처절에 겨웠던 밤을 지새웠던 미명(未明), 기진해서 바위 비탈에 의지하던 나는, 또 밤 공제선(空際線)에 떠오르는, 지척에서 나에게 따발총을 들어대는 적병을 대단치도 않게 일격에 처치했다싶었는데, 글쎄, 또 그 등 뒤에서 줄줄이 달려드는 후속무리들에겐, ‘아이쿠 나’위기를 느끼면서 가슴팍에 대롱대던 수류탄에 손이 가 던 순간, 벌서 의지하는 암석엔 뜨르륵....... 탄착 불꽃이 튀였습니다. 거의 동시에 눈앞에다 곱빼기 수류탄으로 그들을 후려쳤다싶었을 때.......,
아차! 자타(自他)가 함께 위험 권에 드는 것을 직감하면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M2연발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다 힘을 실으면서 뒹굴고 말았던 긴 순간이었습니다.
쾅, 쾅, 폭발음과 함께 또 다른 톤(Tone)의 연발 총성을 등 뒤 귓전에다 남기면서, 그곳 포항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침식(侵蝕)된 불모(不毛)의 단에(斷崖)로 굴려 떨어져갔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피사(pisa)의 사탑(斜塔)에서 중력을 타고 당돌하게 추락해가던 시험 추(試驗 錐)같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차리고 보니, 울산의 23야전병원 병상 위였어요. 피 냄새 흥건한 생사의 분기점에서도, 병원은 외람되게도 개전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놓이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다음 날, 같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입원한 소대원도, 짐작 끝의 수소문으로 날 찾아와서 그때 정황을 소상히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날 날이 새서 구조된 나는 흉부를 강타당한 낙상(落傷) 탓에 피를 토하고 실신한 상태에서 후송됐던 모양입니다.
그 병사도 황해도에서 단신 월남 입대했었는데, 글쎄 그는 그 다음날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포탄이 튕긴 돌이 흉부를 때렸다던 그는 아마도 내출혈(內出血)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비통이치밀어 올라서, 식어가는 그를 껴안고 엉엉 오열(嗚咽)했습니다. 전장(戰場)에서 같은 운명을 지새우던 전우는 뜨거운 혈육이었습니다. 아직도 정겹게 다가왔던 그 낭랑했던 마지막 음성 “소대장님.......“이 내 가슴을 때립니다. 그 북쪽의 권속들에겐 끝내 영문 모르는 응어리에 맴돌 세월을 생각하면, 인생은 너무나 허무해집니다. 그는 나에게 그 실마리를 풀어줄 것을 남기고 나를 대신해서, 또 여러분 국민들을 대신해서 비정을 치려갔지만 서도, 깜깜 세월은 아직 그 회답을 허용해주질 않습니다.
나의 흉부부상이 늑막염으로, 또 늑막 유착(癒着)으로 악화되는 바람에 부산의 3육군병원으로 후송돼 갔었다가, 곧 전선을 등진 부산 밤거리의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흐느적거리는 이국(異國)풍경에 식상해서, 미처 치유되지도 않은 몸으로 본바탕전선으로 복귀해갔었다 구요.
나는 마치 작난감 같은 무공훈장과 함께, 젊어서 전장(戰場) 폭발음에 거덜나버려서, 이젠 대화도 차단된 귀머거리에다, 숨 가쁘게 결려드는 늑막유착과 COPD(만성폐쇄성 폐질환) 가슴 아리 선물을 지니면서, 젊었을 때 산하를 누빈 활동 덕에 90고개를 넘기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정서들을 곰씹는 호국영웅칭호로 살아갑니다.
글쎄 엊저녁애도 또, 포항 북방 교외를 두고두고 거듭 거듭, 뒤흔들어 댄 그 끈질긴 지진의 여진(餘震)들이, 오래전에 힙 쓸고 간 그 곳의 참상을 잊으려는 ‘어깃장 민심’에다대고 두고두고, 깨우침을 일깨워주는 호소라고 나는 꿰뚫어 봅니다.
--여기, 전쟁 리얼리즘(Realism.사실주의)을 더듬어야하는 이 작업이, 숨겨졌던 그 아픈 세월을 다시 일깨워주는군요.-- 끝
작자 설명
성명; 백 동 환 (白 東 煥).
생년월일; 1926년 07월 13일생.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 35길39, 404호
(서교동 서교빌라). 우;04052.
전화 ;02-325-9025. HP; 010-3251-3000.(청각장애자)
E-mail; hyoma3000@naver.com
추모현시; 어느 의로운 죽음의 묘비명(墓碑銘)
백 동 환
그 이름, 김 승철(金 承鐵) 육군중위, 군번; 15792.
그는, 6,25 전란이 발발해서 한창혼란에 소용 돌던 1950년7월2일,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시던 이 한림 장군의 전속부관이던 김중위는, 장군의 지휘 차에 동승해서, 무리하게 전투에 참전했던 육사생도대의 불투명한 상황을 파악하노라고 동분서주하시면서, 과천시 정부종합청사 부근 과천대로의 "찬우물"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던 중, 적의 매복한 저격병에 의해서, 장군을 노리고 조준하는 긴박했던 위기의 순간, 잽싸게 몸을 날려 장군을 감싸서 보호하고, 대신 장열하게 산화해 갔습니다.
지금 그 전사 현장, “찬우물” 버스정류장 바로 뒤에는, 이 한림 장군에 의해서, 그를 기리는 위령비가 엄숙히 붙박여 솟아있습니다.
나는 참을 수없는 감회가 복받쳐 올라서, 일지기 그의 위령 비에다 묘비명문(墓碑銘文)을 바쳤습니다.
김중위는, 나의 북한동향인데다, 중고등학교 동기, 육군사관학교 9기동기였던 그는, 본래 그 이름이 말하듯이 강철(鋼鐵)의 성깔을 계승하고, 타고났던 깡다구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남기고 간 거룩한 유지(遺旨)는, 오늘을 살아가는 후예들이, 면면이 섬기고 받들어야하는 거룩한 충절의 푯대입니다.
오늘도, 번영하는 조국을 열어가는 길손들에게, 이처럼 아픈 희생의 뜻을 되새겨 기리고자, 위령비의 검은 오석(烏石)에 새겨진 비명 문이 절규하고 있습니다.
서울 현충 원 위패번호; 48-1-208
비명문(碑銘文)
오가는 길손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위해
단 하나뿐인 내 청춘을
바로, 이 자리에서
불 살려 버렸노라.
마침내,
내 피와 살이
그러고, 또
충절의 얼이 거름이 되어
통일의 꽃을 피우는 그날,
그대들이
진정 행복에 겨워하는 날.
그날에도 나는,
이 언덕에 홀로 누어
조국의 하늘을 우러르며,
영원토록 겨레와 함께하리라.
비명문 증정; 동기생, 백 동 환
작자 설명;
성명; 백 동 환
생년월일; 1926년7월13일생(당년 92세)
주소; 우편 04052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 35길39. 404호 (서교동 서교빌라)
전화; 02-325-9025
핸드폰; 010-3251-3000(청각 장애자)
이 메일; hyoma3000@naver.com
생애 요약; 북에서 숙청 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해 와서, 6,25에서 피 흘렸던 5급 국가유공자로서 호국영웅칭호 보유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