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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물음표를 알아내는 일
민은 안다. 민의 인생이 단 한 번도 쉬운 순간이 없었다는 것을. 그 어떤 것도 쉽게 얻어지는 법이 없었다. 부모님 없이 절에서 외롭게 지낸 9년이라는 시간, 9년이라는 시간이 익숙해질 무렵, 세상 밖으로 던져져 세상이 무엇인지, 인간관계가 무엇인지, 사회생활이 무엇인지를 남보다 어렵게 배워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속에 묻어두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 두 가지를 버려야 했던 지난 세월이 그래도 허무하지 않았던 건, 좋은 부모님을 만나고, 평생지기 윤이를 만났으며 응어리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승아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씩 덜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먼 길일지도 모른다.
“자자, 주목!”
윤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작성한 내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음표가 쳐 있는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지금 우리가 알아내야 할 것은 두 가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리인이 누구고 대리인들끼리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와 목걸이. 목걸이를 누가 보냈는지. 이 두 가지를 알아내면 이 사건은 반드시 풀릴 거야.”
그때 시계소리가 들렸고, 시간은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윤은 시계소리에 소파에 앉았다. 민,윤, 정민아는 모두 지쳐 있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다시 맥주를 한 입 깊게 마셨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정민아가 자신이 입고 온 코트와 목도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윤은 오랜 시간 말을 했기에 에너지 고갈 상태라 땅콩으로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다.
“자고 가.”
민은 일어나는 정민아에게 말했다. 윤은 땅콩을 먹다가 민과 정민아를 번갈아 보았다.
“자고 가라는 게 무슨 의미야, 강 민?”
“뭐?”
윤은 땅콩을 먹다가 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진짜 나는 그 의미를 몰라서 묻는 건데. 그냥 늦어서 자고 가라는 거지?”
“아니에요. 가볼게요.”
현관문 쪽으로 가려는 정민아를 민이 잡아 세웠다. 정민아는 자신의 팔목을 잡은 민을 돌아보았다. 정민아는 회사에서만 보던 민의 모습이 아니라 얼굴이 붉어졌다. 민은 살짝 붉어진 정민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잔상이 보인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정민아의 모습. 정민아는 아주 서글프게 울고 있다.
“늦었어. 자고 가.”
민은 정민아를 계속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내려와 있다. 그녀의 갈색 머리가 제법 길어졌다.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사이 그녀의 머리는 길었고,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아름다운 눈이고, 예쁜 말을 하는 입이다.
“어디서 자고 가니? 여기서 자고 가니? 아니지, 아니지. 정민아 씨. 아까 그 초인종 누르려고 했던 집으로 가시는 게 맞는 듯. 모시고 가라, 민아. 민은 여기서 잘 거지?”
앞뒤 없는 윤의 말이 끼어들었다. 민은 집을 나서면서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윤에게 던졌다.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쿠션이었다. 민과 민아는 윤의 집을 나와 맞은편 민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민은 거실 불을 켰다.
“뭐든 편하게. 자기 집처럼. 그랬으면 좋겠는데.”
“익숙하고 편해요, 여긴 늘.”
“다행이네.”
민은 옷 방에서 지난번에 민아가 입었던 옷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샤워실은 거실 왼쪽 복도로 나가면 있는 거 알지? 저번에 썼던 방은…”
“알아요.”
“그래. 피곤하겠다. 쉬어.”
민은 자신의 방이 있는 오른쪽 복도로 돌아섰다.
“왜 자꾸… 멀리가요?”
“무슨 뜻이야?”
민아의 물음에 민은 복도 밖으로 나와 다시 거실로 나왔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민이 그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민아와 무슨 말이든 더 나누고 싶지만, 그냥 돌아서는 자신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 저런 감정에 얽혀 일을 그릇되게 할 수는 없었다. 민아는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그래서 가까이 두고 싶지만, 자신의 여자는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많이 아팠던 아이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더 아플 일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은 승아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해주고 싶은 여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어렵다.
“절 아직 잘 모르겠어서. 거리 두는 거예요?”
거실 공기가 가볍지가 않다. 남녀 사이의 문제는 두 사람만이 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을지언정 두 사람은 서로 오가는 눈빛과 말과 행동만으로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뭐에요?”
“아직 갈 길이 멀다.”
“늘 그랬어요, 당신은.”
민아의 말대로 늘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이 두렵다. 사람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힘들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까봐 겁이 난다. 조심해야 할 것이 많은 인생이고, 그 짐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지금은 어려운 일이다.
“제가 화재 사고 났을 때, 당신은 미국으로 갔어요. 제가 손목을 그었을 때 제 곁에 있었지만, 늘 거리를 두었죠. 제가… 겁나요?”
“내가 겁나.”
한 발자국 가면 한 발자국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두 발자국 물러나면 같이 두 발자국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 두 발자국 물러나 있던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다시 한 걸음 다가오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매순간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 거리 조절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친한 사람과는 더 가까운 거리를, 먼 사람과는 더 먼 거리를, 중간 조절이 필요한 사람과는 늘 이렇게 인력을 조정하며 살아가고 있다.
“좋아졌어요. 당신이. 아주 어렸을 땐 담장 곁에 앉아 있던 오빠의 뒷모습을 보며 느꼈던 막연한 감정이라 그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되는지 몰랐고, 시간이 흘렀어요. 언니를 생각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남자, 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애틋하고. 깊어서. 그래서 좋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당신은 멀어졌죠. 회사에서 만나도 못 본 척. 지금 이렇게 만나도 먼 사람처럼. 자살하는 저를 살리고, 제 곁을 지켜주는 당신을 보면서, 어렸을 때 봤던 뒷모습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오늘…오늘… 이렇게 멀어지는 당신 모습을 보니까… 제 마음이… 제 마음이 많이 아픈데… 이제 정확히 알겠어요. 제가 당신을 많이…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울고 있었다. 민은 울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혀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녀는 솔직하다. 그녀는 거침없다. 민이 지금까지 본 그녀의 여러 모습 중에 지금 이 모습이 가장 진솔하고 아름다웠다.
“지금은… 감정 낭비 하지 말자. 서로 불편해 하지 말자.”
“감정 낭비요? 이게 감정 낭비예요? 그… 용기는… 다 어디 갔어요? 면접 날, 제 집까지 절 쫓아와서 아무 것도 모르던 여자를 기다리던 그 용기. 저를 이 집에 데려다 놓고 안아주고, 키스…했던 그 용기. 그 용기는…그 마음은…다 가짜고 거짓이었나요?”
민은 가만히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잔상이 보인다. 휠체어에 앉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울기도 웃기도 한다.
“네가 처음 나를 만나고자 했을 때 어떤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고, 어떤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어. 그리고 순간순간 나를 원망했을 때도 있었을 거고, 나를 지켜봤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나를 오해 했을 때도 있었을 테지만. 그랬을 테지만 말이야. 난… 단 한 번도 널 대할 때 진심이 아니었던 적 없다. 그것만은 확실해. 그러니까 혼자 생각하고 상상하고 확신하지도 마.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하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그렇게만 믿어. 울지 말고. 편히 쉬게 하고 싶었는데, 잘 안 되네. 미안해.”
민아는 자신의 머리를 민의 어깨에 기댔다. 민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민아를 가만히 안아 등을 쓸어주었다.
* * *
윤은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탁상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8시 30분에 출근해서 뚫어지게 시계만 보고 있는 윤을 서 계장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검사님.”
“네.”
여전히 윤의 시선은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8시 36분.
“왜 그러십니까?”
“김정훈 선배, 아니 부장검사님 출근 하셨습니까?”
“네, 아까 출근하셨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그래요? 아,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서 시계 보고 있으셨던 겁니까?”
“9시 되면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기다리겠네요. 다녀올게요.”
윤은 사무실에서 나와 김정훈 부장검사실 앞으로 갔다. 이 사람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한다. 이럴 때는 머리가 맑은 아침 시간이 적격이다. 윤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김 선배. 아니 부장검사님.”
“응, 잘 왔어. 안 그래도 한 번 불러서 식사라도 할까 했는데.”
“앉겠습니다.”
윤은 김정훈 검사를 바라보았다. 배가 그 사이 많이 나왔다. 핸썸 했던 얼굴에도 제법 살이 올랐다. 머리를 2대 8로 보기 좋게 나누었다. 키는 원래부터 제법 큰 편이었다. 김정훈 선배는 학창시절 인기가 꽤 많았다. 지금은 40대 아저씨가 되었지만.
“왜요? 왜 저랑 식사를?”
“들었지? 그거 듣고 쪼르르 달려온 거 아니야?”
“들었습니다. 미제사건. 1988년, 1989년에 있었던. 그거 중지하라고 하셨다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일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다른 일에 신경을 좀 더 쓰란 얘기지. 일 하지 말란 얘기가 아니고.”
윤은 김정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김정훈도 윤을 쳐다보았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강 윤,보기에는 털털하고 한없이 여유로워 보여서 남들은 속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지만, 누구보다 치밀했고, 누구보다 영리한 구석이 있는 놈이다.
“왜 중지해야 하는 거죠?”
“너 할 일 많잖아.”
“할 일 안 하면서 하는 거 아닙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잠자는 시간 쪼개서 조사하던 중이었습니다. 알고 계셨을 텐데요.”
“그니까. 잠자는 시간 쪼개면서 일하지 말라고. 안 그래도 검사들 자기 할당량 많아서 매일 야근인데. 거기에 그 일까지 더하면 잠은 언제 자고, 여자는 언제 만나고, 네트워크 관리는 언제 하나?”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일 하면서 사건 해결 꼬박꼬박 잘 했고, 여자는 뭐. 알아서 잘 하는 거고. 네트워크는… 선배보다는 제가 더 넓고 높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윤은 김정훈에게 질 생각이 없었다. 김정훈 선배와 친해졌던 건 같은 대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같은 대학교라고 해도 자신보다 5살 이상 많은 사람과 같은 시기에 만나긴 어려웠을 법한데 김정훈 선배는 사법고시 준비기간이 길었다. 대학교 졸업 후 사법 고시 2년을 더 준비하다가 윤과 함께 로스쿨에서 공부했고, 김정훈이 로스쿨 3학년이었을 때 윤이 로스쿨 1학년으로 입학했다. 그때 토론을 하면서 의견 충돌도 많았지만, 남자들이 보통 그렇듯 술 먹고 다시 친해졌고, 주먹다짐하다 또 한 번 친해지고, 그렇게 뒹굴면서 같이 자다가 또 친해진 그런 사이였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너 어려워하잖아.”
“L그룹에서 뭔가 있었죠?”
김정훈은 말을 멈추고 팔 거치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내쉰다.
“뭐든 조심하는 게 좋다. 위험한 일이면 되도록 돌아가거나 피하고, 조심해야 하는 일이면 안하는 게 좋지. 그게 세상 이치고 사람 마음이야. 나 너 좋아해. 알지? 그래서 너 거기서 손 떼게 하고 싶은 거야. L그룹이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구린 게 있으니까 나도 손을 못 놓는 거예요. 나도 검사로서 이런 말하기 좀 그런데 나도 편하게 사는 거 좋아해요. 위험한 일이면 두 손 두 발 다 걷어 부치고 피하는 거 좋아하고, 조심해야 하는 일이면 아예 무시하잖아. 알잖아요. 근데, 부장검사님. 이 사건만은 안 돼요. 이 사건만은 위험해도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제 걱정 하지 마세요. 내 뒤에 CV그룹 있고, 솔직히 나 머리 좋은 놈인 건 인정하시잖아요. 그래서 세상 부러운 게 없는 놈이에요. 근데 딱 하나! 이 사건. 이 사건 탐나요. 해결하고 싶어요. 도와주십시오, 부장검사님.”
김정훈 선배는 승진이 빨랐다. 그도 그랬지만, 사람 자체가 법에 대한 애착이 심하고, 이 쪽 일을 굉장히 좋아했다. 와이프를 잘 만난 덕도 한 몫 했을는지 모른다. 윤은 김정훈 검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김정훈 검사도 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이 사건을 절대 놓지 않는다. 판단력, 순발력, 결단력이 아주 뛰어난 녀석이다. 거기에 고집도 어마어마한 녀석. 포기시키기 어렵다.
“막지는 않는다. 대신, 도와주지는 못해.”
“물음표만 알아내면 돼.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부장 검사님.”
첫댓글 민이 민아가 좀 더 편하게 서로 기댈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