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6.25전쟁 (1)***
6. 25 전쟁이 이러난지 67주년을 맞이하여 6.25 한국전쟁의 바른
인식을 60대 미만 중장년 층과 청소년들이 바른 인식을 갖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이메일을 작성한다. 양.
어떤 유족들은 가족들의 사망일자를 몰라 여태 호적정리는 물론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는 동족상잔의 전쟁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동족을 죽고 죽이는 뼈아픈 역사를 겪어 왔다.
그 모습을 이곳 미국에서 다시 접하고서 저는 통곡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 사진들은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것 중에서 필자가 가려 뽑아
보낸다.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다.
시대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편집해서 보내지 못한 것은
상자에 담긴 사진이 뒤죽박죽돼 있고,
필자도 현재 가려 뽑는 가운데 그날그날 송고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사진들은 모두 미군과 미 종군기자들이 남긴 사진으로,
그들의 시각으로 앵글을 잡아서 촬영하였다는 점을 군더더기 말로
보낸다...
(원 제작자의 말 인용한 내용임) 양.
Ⅰ. 6.25 전쟁의 개요
★ 대한민국 건국초기의 처지
1.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에 일본의 침략행위로 고종황제의 부인
민비를 살해하고 국정을 간섭하다가 1910년 9월 28일 나라를
통채로 빼앗아 갔다.
이때부터 36년동안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사용하지 못하고 갖은
압박을 받아 오다가 1945년 8월 15일 국제 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 되었다.
2. 그리하여 위도 38도선을 중심으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국군인들이 들어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진주하였다.
3. 북한은 독제자 김일성이 소련 스타린의 도움을 받아 '조선민주
주의 인민공화국'란 국가를 만들어 남침 준비를 하였고.
4. 우리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UN임시한국위원단의
감시아래 1948년 5월 10일(5. 10선거)에 역사적으로 처음
민주선거를 실시하여 제헌 국회의월을 뽑고 이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헌법을 만들어 공포하고(제헌절 7월 17일) 초대 대통
령 이승만을 뽑아 정부를 수립하였다.(광복절 8월 15일)
5. 정부는 경찰을 뽑고 국방을 위해 군인을 모집하여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을 정하여 무기구입과 훈련을 시작한다.
6. 대한민국은 이제부터 나라안의 치안과 나라밖의 외침을 막기
위한 준비와 훈련을 시작한지 채 2년도 안되는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에 38선 전 경계에서 우리보다 훨씬 좋은
무기를 들고 훌련된 북한 인민군대들이 쳐들어왔다,
7. 우리나라는 바로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에 북한의 침략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며 일요일 휴가보낸 장병들을 긴급 귀대시
키고 대항했으나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Ⅱ. UN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즉시 15개 이사국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6월 25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북한군은 침략을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의 철수하라.’로 결의
하고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유엔군을 모집하고 모든 지
원을 제공하자”고 미국과 자유진영 32개국이 지지한다.
7월 중순에는 52개국으로 증가하였습니다.
2. 소련은 안보리에 불참하였고, 50년 7월 4일 미제 24사단 선두부대
가 평택 - 제천 - 울진을 잇는 한국군을 지원하였으나 적의 기습
작전에 힘을 못쓰고 8월 1일 낙동강 왜관 중심까지 밀려 대구. 부
산을 사수하려는 총력전이 펼쳐진다.
어린 학도병과 의용군이 대구에 집결되어 약식 훈련으로 전투에
가담하는 사이
3.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육작
전이 성공하고 이어서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어 중앙청 청사에
태국기가 꽂혔고 한많은 미아리 고개를 지나 마침내 한반도 허리를
관통하였다. 아직까지 북으로 도망가지 못한 괴뢰군들은 지리산속
으로 도망쳐 숭은 빨치산이 되고 무기와 식량보급을 받지못하는
독안의 쥐 신세가 되었다.
4.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지리산 빨치산은 경찰에 마끼고 10월 1일에
다시 38선을 넘어 북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이날을 기념하는 뜻에서 국군의 날을 10월 1일로 정하였다 한다)
★ 6, 25 참전 국가(16개국가)
유럽주(7):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아시아주(2):태국. 필리핀. 북아메리카주(2):미국. 캐나다.
남아메리카주(1):콜롬비아. 오세아니아주(2):뉴질랜드. 호주.
아프리카주(2):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티오피아.
★ 의료기구 및 의약품지원국 (5개국가)
아탈리아, 놀웨이. 스웨덴. 덴마크. 인도.
★ 물자 및 기타 지원국 = 25개국가>
출처: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참조
Ⅲ. 유엔군과 북한, 중공군간 정전협정 성립
1. 국군과 UN군은 내킨김에 압록강과 백두산 그리고 두만강까지 한반도
전 국토를 통일하려는 순간. 1950년 12월 중순경 개미떼 같은 중공
군들이 전선 여기저기서 인해전술로 깽과리를 치며 달려들고 있다.
북한을 돕는 중공군들이다.
총알이 모자랄 정도로 시체를 딛고 몰려든다.
2.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데 인명을 중시하는 유엔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후퇴를 한다. 1951년 1월 4일(1.4후퇴) 서울를 다시 뒤로하고 경기
도 평택까지 후퇴했다. UN군과 우리국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우세한 공군력과 애국심으로 뭉친 우리국군의 용맹은 하늘을 찌를 듯
하여 서울을 재 탈환하고(51년 3월 15일) 동부 전선은 38선을 훨씬
넘었을 때 중공군과 북한군 측이 유엔군 측에 정전회담을 요청한다.
3. 얄타회담에 의해 생긴 38선의 경계는 무너지고 승산이 없는 중국과
북한군의 요청에 UN군은 평화를 사랑하는 단체이므로 이를 찬성하고
우리국군의 반대를 물리치고 UN군. 중공군. 북한군 3자가 모여
51. 7. 10 ~ 53. 7. 27일까지 2년 17일동안 협의해서 생긴 철조망이
휴전선이다.
2년 17일동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자치하려는 전쟁은 치열
하게 계속되어 사망자와 부상자가 더욱 많아 졌다.
▲ 1953. 7. 27.유엔군과 북한, 중공군과 정전협정 조인
지금 휴전선이 이때의 경계선이이다.
처음으로 돌아와 국군과 북한군은 또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남북한과 미국. 중공군의 피해가 컸다.
1. ☞ 6.25 전쟁과 잔악한 학살모습
▲ 1950. 9. 27. 전주 황방산 기슭. 학살된 시신의 사진만 남아
있고 가해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구천을 헤매는 그들의 원혼에 묵념을 드린다.
▲ 1950. 9. 27. 전주.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 1950. 9. 29. 충주. 마을 주민들이
학살의 현장을 파서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 300여 명의 시신을 꺼내고 있다.
▲ 1950. 10. 10. 함흥. 가족을 찾아 헤매면서 울부짖는 아낙네들
▲ 1950. 10. 13. 함흥. 우물에서 학살된 시신을 건져 올리고 있다.
▲ 1950. 10. 19. 함흥. 시신더미에서 가족을 찾고 있다.
▲ 1950. 10. 19. 함흥. 지아비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 1950. 10. 19. 함흥. 학살에는 남녀가 없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2. ☞ 북한지도자. 안보리. 한미지도자. 정전협정. 기타
▲ 1949. 3. 제5차 소련 최고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오른쪽 끝)과
박헌영(김일성 바로옆 안경쓴 사람)
▲ 1945. 8. 평양 붉은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을
환호하고 있다.
▲ 1949. 9. 6. 미 군사고문단이 국방경비대에서 기관총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 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
고 있다.
▲ 1950. 8. 미군 포로들이 서울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1950. 11. 21. 압록강변의 혜산진까지 올라간 국군과 유엔군.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
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
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
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출처: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2017. 06. 22.
재구성 / 월 용 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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