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월 15일. 너희들 곁을 떠나온 지 꼭 세 달이 지났다.
지난 81년 처음 너희들과 함께 지낸 이후 학교에 있었던 시간은 8년이고 밖에서 해직교사로 지낸 시간이 15년인데 아직도 바깥이 더 어색하고 너희들이 그립다. 길을 가다 교복 입은 너희들 또래를 보면 마음이 설레고, 기차로 이동하다 창밖에 학교가 보이면 내려서 들르고 싶어진다. 산에 올라 붉게 핀 진달래를 보면 우리 교실에 너희들과 함께 꺾어 꽂아 두었던 지난 날의 진달래가 떠오르고 낮 시간에 무슨 사연인지 혼자 길을 걷는 학생이 보이면 더러 집 나가 애태우던 은경이가, 선라가, 인호가 세월을 건너뛰어 마구 겹쳐 다가오기도 한다. 너희들을 사랑하기에 잘못된 현실을 말 없이 받아들일 수 없고 그래서 너희들 곁을 떠나야 하는 처지에 놓인 수많은 선생님들이 오랜 세월 똑같이 겪은 그 증상이 나이 50이 넘고 세 차례나 그 일을 당한 내게도 다시 찾아온다. 그러고 보면 너희와 함께 숨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아.
10년전 오늘, 1993년 4월 15일, 정영상 선생님이란 분이 세상을 떠났단다. 1989년 전교조 활동을 하셨다는 이유로 경상북도 안동에서 해직되셨다가 가족이 있는 충북 단양에서 돌아가셨어, 미술선생님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셨고 노래부르기를 좋아하셨으며 어린 아이같이 맑은 마음과 옳지 않은 것을 향한 불같은 성깔을 함께 가지고 계섰던 정선생님이 쓴 시에 '환청'이란 제목의 시가 있단다. -해직 한 달-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는 이렇다.
체육시간이라 급한 김에 그만 누가 수도 꼭지 잠그는 걸
잊어버리고 뛰어 나갔을까 안동 복주여중에서 수돗물 떨어
지는 소리 죽령 너머 단양의 내 방에까지 들려온다
하루 종일 해직교사로서 학교도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선생님들을 만나고 회의도 하고 술도 마시고 피곤에 절어 잠들었다가 문득 무슨 소린가 들려 벌떡 일어나 앉았더니 귀에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멀리 산 넘고 물 건너 수백리 밖에 두고 온 내 아이들이 놀다가 급하게 뛰어가느라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가.
선생님이 얼마나 사무치게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얼마나 간절하게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지 절절하지 않니? 그런데 결국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0년 전 오늘 세상을 떠나신 거야. 그 날 전국에 계신 해직 교사들이 모여 무어라 말도 못하고 술만 마시고 눈물만 흘리면서 선생님 묻어드리고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든 상처 하나씩 껴안고 헤어졌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즈음 예산 보성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전교조가 사람 죽이는 못된 조직인 것처럼 떠드는 소리가 들려 속상하다고, 왜 그렇게 하셨느냐고 원망스럽게 편지를 보내준 친구들이 있었다. 돌아가신 분께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안되는 일이라서 일일이 답장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아. 전교조는 정선생님처럼 사무치게 너희들을 그리워하고 너희들과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선생님들이 모여서 일하는 모임이라는 것,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임이라서 여자 선생님께 차 배달시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또, 한 분의 죽음 앞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모두는 함께 슬퍼하고 그분의 명복을 빌어드리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과 그런 장례 절차가 끝난 뒤에 그런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자가 자기 잘못을 먼저 얘기하면서 대책을 만드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은 드는구나.
갑작스런 교장 선생님의 죽음으로 그 가족과 특히 그 학교 어린 제자들이 얼마나 큰 충격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니? 그렇다면 돌아가신 뒤에 함께 모여서 여선생님에게 처음 차 배달을 시킨 교감선생님은 '내가 별 생각없이 그런 일을 시켜서 벌어진 일이니 내 책임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여선생님은 '바빠도 그냥 해드리면서 두고두고 말씀드려 고칠 수 있게 할 것을 잘못했다'고 사과하시고, 교육청에서는 '학교 교장실에 커피 자판기라도 미리 설치해 드렸어야 했을 걸 못 챙겨서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전교조는 '조용히 말씀드리고 아무도 모르게 일을 해결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얘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뒤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규칙으로 정할 것은 정하고, 부족한 것은 채우고, 다함께 모두의 이름으로 그 학교 학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사과문을 정성스럽게 보내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친구들아.
내가 또 다시 보고 싶은 너희들 곁을 떠나 밖에서 지내는 까닭은 바로 이런 상식이 받아들여지는 정상적인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을 너희들과 함께 만들고 가꾸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록 몸은 떠나 있어도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떠나올 때 너희에게 한 인사말을 다시 다짐하며 그리움이나 외로움을 이겨내려 한다. 오늘 하루도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꾸미자꾸나.
2003년 4월 15일
-------------------------------------------------------------------------------------------------------
오래전에 쓴 글입니다.
그 때 쓴 글 일주일에 두 개씩 올리겠습니다.
심심할 때 그냥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참여와 실천의 삶에서 우러나온 글이 감동을 줍니다. 이런 좋은 글을 앞으로 계속 연재해주세요. 기대가 됩니다.
따뜻한 장로님의 마음도 읽혀집니다.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장로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로 돌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장로님 글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환청으로 들렸던 수도물소리.. 그 소리가 들리는것 같아 목이 메입니다. 저의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반성해 봅니다.
이런 설교 준비한다고 앉았다가 한편만 잃어야지 하나만 더!! 하다가 다 읽고 말았네요 ^^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