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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마태복음28장11~20절
제목 : 항상 함께 있으리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감추기 위해 장로들과 공모하여 돈으로 경비병들을 매수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1. 거짓 소문의 진원(11~15절)
“[11]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12]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13]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14]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15]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립니다(11절)
“[11]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여자들이 갈때 -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됩니다.
즉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 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 진 일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내리달렸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대비되어, 무덤을 지키던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요한일을 빌라도에게 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파수군들이 로마의 병사라기보다는 성전 소속의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27:65에 언급하였듯이 이들 파숫군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도록 유대인들에게 인계된 빌라도 휘하의 로마 군병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실로 그들은 산헤드린의 명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산헤드린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지금껏 경험한 사실을 대체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기 보다 지진, 천사, 빈무덤 등 능히 부활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숫군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 사건이 의미하는바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12:38; 26:67, 68),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 했어야 했습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냅니다.
2) 군이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12절)
“[12]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은폐하고 거짓 유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26:14,15)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많은 돈'으로 파숫군들을 매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총독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과 백성들의 여론에 있었던 것입니다.
3)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하십니다(13절)
“[13]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납니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 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 들었다 하더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기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겁 많고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무덤을 열어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습니다.
가이사의 나사렛 비문은 이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물론 이 비문과 예수님의 사망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무덤 보호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납니다.
4)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14절)
“[14]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총독에게 들리면 - 이는 군인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권하여 - 문자적으로`우리가 설득하여'가 됩니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이 일이 어렵게 되면 무덤 파수 임무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매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안다고 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거니와(27:64,65), 대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돈으로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입니다.
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습니다(15절)
“[15]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오늘날 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본문에서 `오늘날 까지'라 함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합니다.
그런데 A.D. 150년경에 초대 교부 저스틴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한 거짓말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 거짓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위 `도적설'이라는 부활 이설로 남아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한편 A.D.165년경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 -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갈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경배와 의심(16~17절)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 열한 제자가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습니다(16절)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열 한 제자 - 27:5에서 보도된 대로 열 둘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 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갈릴리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뿐입니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4:15),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된 사람들 즉, 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쨌든 마태는 갈릴리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명령(7,10절; 26:32)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님의 유대현현 등과 같은 다른 기사들을 모두 생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이 산은 예수님께서 이미 명하셨던 곳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과연 그 산이 어떤 곳인지(혹 다볼산 또는 팔복산이라고도 하나 확실치 않다)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 몇 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자들과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실로산은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하늘의 대 명령을 땅에 선포하신 지상 명령에 (the Great Commission)과 적절한 조화를 이룹니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가 바로 산이었기 때문입니다(5:1; 8:1; 17:1,9; 24:3; 26:30).
구약에서도 산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고(출3:2이하)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습니다(출 32:15).
여하튼 예수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 것은 예수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 주제와 함께 연결됩니다(10절).
한편 많은 권위 있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이 장면을 고전 15:6에 바울이 기술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이곳 소집에 대하여는 3회에 걸친 예고가 주어졌으며(7, 10절; 26:32) 그것은 지상 대명령을 (18-20절) 전달하신 회집이었고, 갈릴리는 로마 정부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간섭을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500여명의 군중이 일거(一擧)에 모이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2)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17절)
예수를 뵈옵고 - 물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여명의 형제 가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처음,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상태로 목도하였을 것입니다.
경배하나 -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9:18; 14:33; 15:25)
공동번역 에서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은 다른 곳(눅24:10,11; 요20:24-29)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절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첫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입니다.
여기서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프로스쮜네오'가 단순히`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경배하다'는 뜻 으로 사용되었다면 `11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배(예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을리 없겠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 본서의 독자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 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돼 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8절).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오히려...있더라'(호이데)의 읽기를`...자는 없더라'는 읽기로 고침으로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는 큰 무리가 있는 읽기입니다.
두번째 난제는 의심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제쳐 놓고라도,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에디스타산'(<더러는> 의심하였다)은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합니다(`비록 더러는 주저하였으나',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I.P. Ellis).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습니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부활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가 부활후의 현현에서 항상 즉시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생시와 변화 상태와의 너무 큰 차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과연 그가 예수인가?'하고 의심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비해 파르쿠르스트는 의심한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혹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를 경배함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18절의 말씀으로 그러한 주저하는 마음을 쫓아버렸다고 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건드리는 말하기를 17~20절은 오직 예수의 말씀만이 의심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심지어 부활 현현조차 의심을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마태의 근본 의도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18절은 17절이 아니라 19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18절이 17절의 의심을 쫓아버린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본문이 눅9장이나 요21장에서처럼, 모든 의심이 제거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하튼 마태의 기사가 간결하기 때문에 마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제자가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 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베드로는 적어도 3번, 도마는 1번) 11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시 경배할 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했습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마태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마태의 간결한 기사는 이 사실을 이미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복음서 기자도 그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을 간과 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의 주제적 관심들을 오직 주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집중시키고자 그 사건을 생략한 것입니다.
3. 대위임령(18~20절)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2)세례를 베풀고/ 헬, 또는 침례[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습니다(18절).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먼저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습니다(모든 권세, 모든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 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 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 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습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 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습니다(고전 15:27,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됩니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습니다.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것입니다.
2) 지상명령(19~20절)
“[19]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 너희는 가서
여기 “가서”는 제 1과거 분사형 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습니다.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봅니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합니다.
이는 이제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실 마태가 '족속'이라는 말을 관사 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됩니다.
한편 “제자를 삼아”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합니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입니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해집니다.
(3)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6:3; 고전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는 말하기를 디다케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삼위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삼위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 교부 터툴리안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 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례란 죄 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야의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라는 사실입니다.
(4)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4:23; 9:35).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한편 `가르쳐'(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 되어야할 것이었습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 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을 낳게 됩니다.
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습니다.
3)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하반절).
볼지어다(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 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1:23).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그분은 잠시 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입니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 날까지”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킵니다(24:3).
그리고`항상'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됩니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습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납니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 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습니다(3:1-26:5).
반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 났습니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의 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 받으셨습니다(18절).
예수님은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나라와 권세를 주겠노라고 유혹한 사탄의 제안(4장 8~9절)을 거절하시고, 죽기까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권세를 얻으셨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척박하고 불안해도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소유하고 계시며, 모든 것이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19,20절).
예수님은 모든 장벽(성, 인종, 사회, 신분 등)을 깨트리시고 모든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고 가르쳐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명령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이 명령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세와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답게 폐쇄성과 배타성을 넘어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약 150만의 외국인들과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도록, 전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과 흩어져 사는 700만 디아스포라 동포들을 통해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길 기도합시다. 3)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20절).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임마누엘’(1장 23절)로 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18장 20절),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종교 지도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경비병들을 매수해 거짓 소문을 퍼트립니다(11~15절).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자기들이 입게 될 불이익과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요?
부활의 진실과 영광을 선포합시다.
기도 열방-한국 SU에서 오늘부터 23일까지 ‘데이비드 잭맨 초청 강해설교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 세미나를 통해 목회자들이 깊이 있는 성경읽기와 묵상을 통한 설교 작성의 원리를 잘 배울 수 있도록공동체-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영광스러운 사명과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22년도 주신말씀